
사충(四忠)서원은 원래 노량진 사육신묘로 올라가는 길 부근에 창건되었다.
사육신 묘 입구에는 그 곳이 옛 서원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서원 부지가 철도용지로 편입되면서 1927년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
(현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건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
이후 피난민들이 서원 터를 차지하였다. 그 자리에 서원을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사충서원은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100-2번지로 옮겼다.
1968년 보광동에서 퇴락한 서원 건물의 부재를 옮겨 건립한 것이다.
매년 음력 11월 1일을 기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사충서원은 ‘네 명의 충신을 모신’서원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의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하는 곳이다.
이들은 경종 즉위 후 임금에게 후사가 없자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섰다.
이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연잉군의 대리청정은 실패한다.
이를 주장했던 노론세력은 대거 축출되게 되었다.
이 때 노론 4대신은 거제도, 남해, 진도, 흥양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김일경 목호룡 등이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명이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무고함으로써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1725년(영조 1)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은 신원되었다.
이듬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 건립되어 그 해 사액을 받았다.
이때 영조는 서원의 현판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고 제관을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4대신은 다시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서원도 철폐되었다.
1740년(영조 16)에 4대신이 충신으로 인정되었으나, 서원은 1756년(영조 23)에야 복설되었다.
사충서원의 위상은 노론이 득세하던 시기에 비교적 높았다.
1852년(철종 3) 봄에 임금이 수원으로 능행(陵行)할 때 사충서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1868년(고종 5)과 1909년(순종 3)에도 임금이 행차하여 친해 제사지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