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방송 드라마 제작진은 "여성 작가들의 저력이 살아났다"며 내심 즐거운 표정이다. 여기서 '저력'이란 SBS 수목드라마 '청춘의 덫'을 쓰고 있는 김수현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처음부터 방송가의 관심거리가 됐던 MBC 수목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과의 시청률 대결에서 정말 드라마틱하게 역전승을 올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의 작가 노희경씨는 '거짓말'로 '김수현 못지 않은 말발'이라는 평을 들으며 두각을 드러낸 신예 작가. 30대 작가로는 거의 유일하게 방송사로부터 기본고료 외에 회당 200만원씩의 특별고료(특고료)를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KBS 제출 국감자료). '청춘의 덫'은 시작할 때만 해도 김혜수, 배용준이라는 호화캐스팅을 내세운 '우리가 정말…'에 크게 밀렸지만, 3주만에 "역시 김수현!"이라는 말을 들으며 '우리가 정말…'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회당 특별고료 수백만원 ‘움직이는 금고’
SBS는 김수현씨 외에도 새 주말극 '파도'에 '그대 그리고 나'의 스타 작가 김정수씨를 모셨고, 김대중대통령도 좋아한다는 '은실이'의 이금림씨, 주간물 '카이스트'의 송지나씨 등이 포진해 드라마 작가의 경력과 시청률 면에서 3사 중 가장 화려한 진용을 갖추게 됐다. SBS드라마팀의 이종한CP는 시청률 경쟁을 자제해야 하는 최근 분위기를 의식하면서도 "솔직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MBC도 '신데렐라'의 정성주씨를 주말극 '장미와 콩나물'의 작가로 기용하는 한편, 일일극 '보고 또 보고' 후속으로 박정란씨('들국화'의 작가)의 '하나뿐인 당신'을 방송한다. 내놓고 시청률 싸움에 나서기 어려운 KBS 1TV도 8시30분 일일극에 인기드라마 '아들과 딸'의 작가 박진숙씨를 모셔왔다.
이렇게 보면 회당 200만원 이상의 특고료를 받는 1급 중견 작가들이 모두 3사의 드라마전쟁에 뛰어든 셈이며 그중 남자 작가는 사극 '왕과 비'의 정하연씨가 꼽힐 정도.
중견 작가들이 이처럼 '귀하신 몸'이 된 것은 작품이 성공할 경우 '비정상적인 시청률'(작가 송지나)을 기록하면서 전체 출연자들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고, 방송사의 '사기'가 달라지는 등 광기에 가까운 사회현상을 몰고오기 때문이다. MBC의 권이상CP는 "70, 80년대에는 남성-정치 드라마라는 것도 있었지만 요즘 드라마는 완전히 여성의 생활드라마가 됐다"고 말한다. 드라마 시청률을 움직이는 30대 여성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여성 작가들이다. 그런 이유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작가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기도 하다. 최근 드라마에 자아가 강한 여주인공과 맹목적으로 헌신적인 남성주인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30대 여성들의 '팬터지'이며 작가 꿈의 반영이다.
감각적 대사의 달인 …엉성한 구성 될 수도
여성작가들의 또다른 장점은 디테일한 묘사에 뛰어나고 감각적인 대사를 잘 써낸다는 것. 한 방송사 PD는 "남성 작가들이 딱히 선이 굵은 것도 아니고,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다. 여성 시청자들 맘에 들려고 노력은 무척 하지만, 기본적으로 안된다"고까지 말한다. '스포츠투데이'지의 최윤정기자는 "젊은 작가들의 1차 고지는 김수현식 말투인데 노희경씨나 정성주씨 등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세련된 대사를 내놓는다"고 했다. '해바라기'를 여성 작가와 공동집필한 최진원씨는 "오장육부를 쑤시는 대사들이 튀어나온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보고 또 보고'의 임성한씨는 여성작가의 장점을 최대한 발현한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이처럼 '별것 아닌 일들'을 화려한 수사로 엮어내다 보면 흔히 삼각관계나 불륜같은 비슷비슷한 소재에 발목이 잡히게 되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더 자극적인 대사와 비정상적 설정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한 여성작가는 "대사에 치중하다 보면 사실 전체 구성이 엉성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탄탄한 줄거리를 가진 외국의 드라마를 보면 표절 유혹을 받게 마련"이라고 털어놓았다.
여성작가든 남성작가든 경험의 폭은 한정되게 마련이고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공동집필 시스템이다. '달팽이' 이후 공동집필을 해오고 있는 송지나씨는 "소재의 확대나 취재로 얻은 리얼리티라는 면에서 훨씬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공동집필에 대해서는 김정수씨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작가들도 있다. 방송사에서도 번거롭고 위험한 공동집필보다는 확실한 작가에게 고액의 특고료를 몰아주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인기 여성 작가들이 총 출동한 올봄 드라마 경쟁은 정말 볼 만한 싸움이 될 듯싶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피 말리는' 싸움이 여성 작가 개개인에 대한 평가로 돌아가면서 또다시 '여성'작가들의 한계를 강조하는 쪽으로 귀결될 뿐, 제작 과정의 문제는 거의 개선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드라마 작가가 되는 세가지 길
최근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가 드라마와 교양작가다. 7인의 작가를 선발하는 올해 MBC베스트극장 극본 공모에는 무려 3000편이 넘는 작품이 몰렸다.
드라마 작가가 되는 길은 몇가지가 있는데, 기성 작가들과 PD들이 가장 권장하는 방법은 방송사의 극본 공모에 '계속' 글을 보내라는 것이다. 방송3사 모두 극본을 공모하는데 KBS가 역사물 문예물 성격이 강한 작품을, MBC는 현대적이고 경쾌한 작품을, SBS는 상대적으로 특이한 소재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응모작은 비록 당선이 되지 않아도 드라마 PD들이 일일이 챙겨보고 잠재력이 인정되면 개인적으로 연락해 발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다른 방법 중 하나는 방송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작가연수원(02-780-0003)이나 방송사 부설 아카데미, 신문사 작가반을 거치는 것. 전혀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들은 방송대본의 기본적 테크닉을 배울 수 있다.
빠르지만 험난한 코스로는 기성 작가의 '보조작가'로 현장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다. 작가로부터 글쓰는 방법을 배우고 직접 PD들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 상에서 운영되는 송지나 글방(http://www. netsgo.com/jinas/)에 들어가면 작가 송지나씨가 운영하는 공동집필 동인제에 참여할 수 있다. 재능만 있으면 비교적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게 방송작가 분야지만 어떤 경우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 한다.
송지나씨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방송작가가 되려 해선 안된다. 집안 살림은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충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