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10 고산골 산행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
.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그의 군사들이 크게 패했다는 파군재,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 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있어 불로동, 겨우 위험을 피해 이곳에서 한숨을 돌리고 찌푸린 얼굴을 활짝 폈다는 해안, 도주 중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 있어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 이 지역에 도달하여 안심했다는 안심 등의 유래가 있다.
.
그런데 고산골에 대한 근거 있는 유래가 없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산골이라는 지명이
.
1. 산에 나무하러 가면 고생이나 한다는 유래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2. 왕건이가 전투에 패해 이 골짜기에서 고생을 했다는 말에서 유래 한 것이 아닌가.
3. 높은 산의 골짜기라는 말도 이유도 되겠지만 주변 다른 골짜기 지명을 봤을 때 근거가 희박하다.
4.고사리가 많이 난다는 의미에서 고산골이라는 말이 생겨날까. 그렇다면 고사리골이라고 하겠지.
5. 이런 저런 이유에서 가장 근거 있는 말이 고생골 → 고산골로 변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
그런데 왕건이가 팔공산에서 앞산까지 오려면 금호강을 건너야하는데 당시에 금호강 강물이 없었는지, 아무리 적은 군사라도 금호강을 도하 하기란 쉽지 않을 터인데, 이것도 달밤에, 그러나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을 수밖에...
.
팔공산에서 탈출하니 갈 곳은 앞산밖에 더 있겠나.
왕건의 탈출로가 이렇게 되었을까.
파군제→ 왕산 →불로동→ 해안→ 반야월(경산)→ 안심(경산)→ 고산(경산)→ 고산골(대구)
고산지역이 금호강 수위가 비교적 낮다.
현재 불로동, 해안, 반야월 쪽은 말이 강을 건너기가 수심이 깊다. 당시 수위를 알 수 없지만, 달밤에 패한 군사가 도하하기는 안전지대를 찾을 수밖에 없다.
..
그러니 팔공산에서 나와 강따라(상류) 동으로 피신하면서, 현재 고산지역으로 도하해서 고산골까지 피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고산골이나 고산이나 지명이 비슷하므로 뭔가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
위 고산(경산)은 현재 대구 수성구로 편입되어 있다.
왕건이가 고산에 까지 탈출해 왔다면 현 대구 고산지역은 왕건이가 숨을 만한 은신처가 되지 못한다. 고산지역은 큰 산이 없고 모두가 얕은 구렁지다. 현재 2군 사령부 있는 일대와 지금 없어진 고모역 일대를 고산이라 한다. 지금은 수성구 고산동 지명이 있다.
.
대구 앞산 고산골에 대한 여러 유래가 있으니 필자 생각으론 앞에서 유래한 지명을 토대로 고산골은 완건이가 피신하여 고생한 골짜기로 해석 하고 싶다.
.
전국에 고산골이라는 지명은 많이 있다.
고산이 고사리가 많이 난다거나, 고산(高山)으로 명명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고사리는 고지대에서 많이 자생을 하고, 경산 일대 주민이 말하는 고산지역은 고산(高山)아니고 구렁지 야트막한 야산이다. 그리고 고산사 절이 있었다는 것을 유래설로 하나, 절이 있었다고 고산골이라고 명명하기는 부적합하다.
.
그러므로 고산을 고산(高山)으로 생각하지 말고 고산(孤産)이나 고산(苦山) 고산(孤山)으로 생각하면 관계 지명을 유래를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현 행정지명은 대구시 수성구 고산동(孤山洞)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왕건은 신숭겸 등 명장을 잃어버리고 팔공산이 보이는 고산골에서 애통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
왕건이가 고산골에서 팔공산을 바라모며 전사한 심복 장군들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애통해 했겠나.
.
.
고산골 산행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
.
2014. 2. 14. 정월 보름날
청도 kimsunbee 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