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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의 마지막 장거리 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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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의 마지막 장거리 산행 떨어진 낙엽을 찾아서 가는 해 정유년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못다 한 일이 없나 생각하는 도중에 지난 11월20일-21일 이틀간 즐겼던 장거리 산행기를 기록하지 못한 아쉬움이 솟구쳐 기억 되살리면서 즐거웠던 일정을 정리해 본다. 정녕 가을은 모두의 마음을 서글프게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분명한가보다. 몇 차례나 대장한테 장거리 산행 스케쥴을 잡아보라고 했거늘 도무지 먹혀들지 않아 아쉬움이 가득한 찰라 낯익은 목소리가 핸디폰을 울렸다. 11월19일 날 오후에 “박교수 나야. 20-21일 이틀간 시간 낼 수 있나?”라고 다그쳤다. 깨끗하지 못한 수신 상태였으나 내용만 파악하고는 “그래 시간내마.....”하고는 모이는 장소를 확인한 다음 바쁘게 귀가하여 산행 배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단풍맞이라고 했는데 이미 단풍은 어디에도 없어진 계절인 데 좌우간 따질 것 없이 장거리 여행한다는 들뜬 기분으로 하나 둘을 챙기기 시작했다. 거의 매주 일요일 날 산행을 다니고 있었던 관계로 별도의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1박2일간이니까 세면도구를 추가하고 간식꺼리와 비상 옷을 챙겨 넣은 뒤 주당들이 모이니까 술은 뺄 수가 없어서 캘리포니아산 와인과 복분자 그리고 매실과 소주에 믹싱해 넣은 뒤 맛을 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최고의 칵테일이 될 수도 있으련만 판정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혼잣말로 “아주 훌륭하구나”를 되 뇌이면서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는 가는 곳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파악키 위하여 인터넷을 뒤지면서 내장산과 백양사 근처를 검색했다.
내장사 전경
11월20일(화) 아침 7시 전철역에서의 만남 항상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 되었으나 행여 실수할까봐 괘종시계를 확인한 다음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아 TV와 시름하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다. 새벽5시30분에 기상한 뒤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추가로 냉장고에서 물과 과일을 꺼내어 미리 준비해 둔 배낭에 넣고는 새로 받은 <잼버레인> 등산화를 신었다. 자그마치 원가가 34만원이라니 믿기지 않았으나 좌우간 신고 있는 등산화였기에 새삼 긍지를 느끼면서 전철역으로 나갔다. 아직은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같았으나 일터로 나가는 상당한 분들이 벌써 전철역으로 모여 들었고 탑승한 다음 모두 바쁘게 일터로 가는데 오로지 혼자만이 등산복을 걸쳐 입고 있었던 것이 약간은 미안스런움을 느끼게 되었다. 전철을 두 번이나 바꿔 타면서 약속한 전철역을 찾아갔으나 공사관계로 출구가 엉망이 되어 몇 차례 시행착오를 그쳐 반갑게 일행들을 만났다. 정확하게 오전7시, 놀러간다는데 모두들 극성에 가까울 정도로 이른 새벽을 마다 않고 약속시간에 도착했으니...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바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천안까지 내려가서 천안-논산간 민간고속도로 진입하기 무섭게 어디서 아침 식사를 할 것인가에 대해 설왕설래할 때 본인이 한번 들렸던 <정안휴게소>를 추천하여 합의를 보게 되었다. 8시30분에 <정안휴게소>에 정차한 뒤 각자의 식성에 맞춰 주문했는 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문한 찌게가 제대로 익지 않아 먹다말고 다시 더 익혀 달라고 주방으로 국거리를 들고 간 일행들의 모습하고는.... 게다가 미니 소주병을 꺼내어 기분을 돋구려는 비스마르크 임시대장,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엄청난 예산을 집행하는 총무, 영원한 호남방향 지리의 달인이며 최고의 드라이브인 당신, 키가 크면 산행에 지장을 받을까봐 적당한 신장에 땅이 넓어 옆으로 퍼진 배꼽 나온 장비 그리고 본인까지 5명의 일행은 두 번 다시는 <정안휴게소>에서 식사를 하지말자고 결사를 한 뒤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다. 첫날의 내장산 산행기 거의 11시10분경 내장산 IC를 지나 내장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1인당 2,000원이란 입장료를 지불하게 되었으나 참전유공자 신분증으로 2명 무료, 노인으로 위장한 2명을 제외한 뒤 한명 입장료 2,000원만 지불하고 입장한 뒤 산행에 나섰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현지에서 안내지도를 얻어 산행계획을 세우는 것이 기본인지라 탐방안내소에서 자세한 안내지도를 받아 합의 아래 산행에 나셨다. 주위에는 온통 떨어진 낙엽이 도랑에 여기저기 쳐 박혀 있었고 더러는 낙엽 속에 엉키어 바람부는 대로 굴러 다녔으며 고개를 들어 낙엽을 찾다보니 잎은 어디로 가고 오로지 붉은 감만 달려 있는 땡감나무가 가을 정취의 멋을 한결 돋보이게 하였다.
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산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지명도 내장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란다. 정읍시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내장산은 순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00∼700m급의 기암괴석이 말발굽의 능선을 그리고 있다.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내장산은 예로부터 조선8경의 하나로 이름나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남원 지리산,·영암 월출산,·장흥 천관산,· 부안 능가산(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고 했다. 백두대간이니 호남정맥이니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산맥관은 하천의 수계를 나누는 분수계를 기본개념으로 하며 노령산맥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호남정맥에 해당한다. 호남정맥에 있는 내장산은 이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령(蘆嶺)이란 이름이 유래된 갈재의 서쪽에 있는 고창 방장산(해발 710m), 동쪽에 있는 입암산· 백양사의 뒷산인 백암산을 연결한 능선은 곧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이기도 하다. 내장산은 1971년11월17일 인근 백양사 지구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이 81.715㎢에 달하는 내장산국립공원은 전북에 속해있는 면적이 47.504㎢, 전남쪽이 34.211㎢로서 정읍시와 순창군, 전남 장성군에 걸쳐있다.
불타는 단풍의 절정시기 때의 전경 내장사 바로 옆에 위치한 깨달음을 향한 일념으로 올라가라는 의미의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보니 지리산 못지않은 낮으막하게 자란 山竹들이 양쪽에 도열하고 있었으며 350-500년 되었다는 비자나무 숲 또한 장관을 이루었다. 오늘 산행은 <불출봉:622m>에 올라가서 <서래약수>를 거쳐 <서래봉:624m>에서 하산하기 시작하여 <백련암>쪽으로 하산하는 약5시간 산행코스였기에 여유있는 마음으로 더러는 엄살을 부리면서 가파른 길을 따라 불출봉을 향했다.
- 불출봉 전경- 예상외로 까다로운 오르막길, 가파른 사다리층계를 지나면 다시 기암괴석이 도열해 있었고 바쁘게 앞질러 가려면 단체로 산행에 나선 극성스런 아낙네들의 조잘거림에 잠시 걸음을 멈추며 주춤하다가 올라가곤 했다. <일주문>에서 약 한시간만에 첫 번째 목적지인 해발622미터인 <불출봉>에 도착했다. 좌측 아래에는 <정읍>시가와 길게 늘어선<내장저수지>가 위치하고 있었고 우측에는 <임해봉>과 <연지봉> 그리고 <까치봉>과 <신선봉>으로 연결된 말발굽형태가 뚜렷이 보였다. 자그마한 <불출봉>에는 어렵게 먼저 올라온 산행자들이 터를 잡고 있었으나 뒤늦게 도착한 일행들에게 떼밀려 자리를 비워 주었다. 이미 산행에 일가견을 가진 우리 일행들은 카메라도 준비 없이 그냥 오르다보니 그냥 지나가기엔 아쉬운 장면은 핸디폰으로 간단히 촬영을 하곤 했다. 막 <불출봉>에서 일행들이 기념촬영을 마친 뒤 내려올 무렵 안내판에 “이곳에 구름이나 안개가 가려지면 오는 여름철에는 가믐에 든다”라고 쓰여진 글귀가 눈을 번쩍이게 했다. 사실 일행들이 올라갔을 때 많지는 않았으나 구름이 약간 덮혀 있었으니 행여 올 여름철이 가믐에 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마저 느끼게 되었다. 시계는 12시를 지났고 배에서는 허기진 소리가 들렸으나 <서래약수>터까지 가서 점심을 하기로 하고 약간의 강행군으로 여러 차례의 칼바위를 오르내리면서 능선으로 걸었다. <불출봉.에서 <서래봉>까지 거리는 1.4km였으나 계속된 칼바위와 능선좌우의 가파른 낭떨어지는 때로는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기다리던 런치 타임 눈 앞에 나타난 <서래봉>을 바라보면서 배낭을 풀었다. 준비했던 김밥은 도시락 한쪽구석으로 몰려 있었고, 전날 마장동 시장에 들려 준비했던 돼지족발을 안주 삼아 먼저 술잔을 돌렸다. 일단 과일은 제처 놓고 허기를 채우면서 무사산행과 남은 스케쥴을 이야기 하면서 디저트타임도 없이 바쁘게 바삐<서래봉>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허기야 산행을 하다보면 오르내리기가 다반사이지만 이건 아니였다. 한참동안 하산 길로 해발약 300미터 정도 내려가다가 아무래도 이상한 듯 하여 반대방향에서 오는 산행자에게 <서래봉>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너무 많이 내려왔엇지만 바로 그곳에서 우측으로 거의 50도 각도의 가파른 깔딱고개로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기암괴석 사이에 놓여진 사다리는 손잡이를 잡지 않고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까다로워 올라가면서 아래를 쳐다 보았다가는 고소공포증이 유발되어 산행을 포기해야할 정도로 험악했다.
-서래봉 올라가는 철계단- 험난한 코스에 설치된 쇠사다리는 간격이 좁아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길을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山竹과 사다리병창을 지나 길이 없어 만들어 놓은 여러개의 가파른 쇠사다리를 오르는 사이에 그래도 마지막 목적지였던 해발 624m인 <서래봉>에 도착했다. <서래봉>이란 명칭은 울퉁불퉁한 논밭을 평평하게 다룰 때 쓰는 서래에서 따온 이름이라니 더욱 흥미로웠고 주위가 여인의 치마를 두른 듯 둥그스레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좌우간 험난한 산속에서마저 붙여진 재미난 명칭에 다시 둘러 보았다.
<서래봉>에서 잠시 호흡을 정리한 다음 하산길로 접어 들었다. 늘 그러하듯 힘들게 올라갔던 길을 하산할 때는 허무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약4시간 30분만인 오후3시에 <백련암>에 도착했다. 그냥 지나칠까하다가 여유가 있어 잠깐 구경하고 가자면서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느낀 점은 <백련사>란 이름은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하얀 뱀 백사(白蛇) 이야기가 떠 올라 섬찍함이 느껴져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왔다.
-백련암에서 바라본 서래봉 전경- <백련암>에서 내려오는 길은 차량도로로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얼마를 더 내려왔을 때 숲속에 자리한 주막집 뜰에 앉아 산상의 막걸리 한잔을 하기로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 갈소냐. 오늘가다 날이 저물면 발 닿는 곳에서 머리를 눕히면 되는 것이지....하는 심사로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했다. 안주는 감자전에 주막집의 특유한 막걸리에는 꽃잎과 약초가 들어 있어 약술이라고 자랑까지 하였다. 다음은 <백양사>로 <내장산>산행을 마친 다음 다시 차를 몰아 <백양사>를 향했다. 굽이 길을 돌고 돌아 정상에 올랐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려가는 길이 없고 평지로 연결되었다. 그러니까 <내장사>와 <백양사>의 고도가 많이 차이가 났던 것이었다. 한참 지나 <백양사>주차장에 이르렀다. 약10여년 전 백양사 단풍구경 왔다가 차량에 밀려 주차장에 자리를 깔고 단풍잎을 소주잔에 띄워 마셨던 추억이 새롬새롬 돋아났다. 약30도에 이른 소주잔에 넣었던 단풍잎의 붉은 빛이 녹아내려 분홍빛 소주를 마실 수 있었다.
-백양사 전경- 가는 곳마다 사찰이 있었으며 문화재보호라는 이름으로 입장료를 지불해야 되었으나 오전에 내장산에서 했던 대로 참전유공자증을 보여주어 2명은 무료입장 나머지 2명은 연노자라 하여 1명의 입장료만 내고 차를 몰고 <백양사>앞까지 올라갔다. 백양사의 유래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려졌다한다.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산골짜기여서 그런지 어느덧 서서히 땅거미가 스며들기 시작하였고 <백양사>를 뒤돌아보면서 친절하게 백양사를 둘러싼 뒷편 산 모양이 마치 산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모법기사의 모범안내가 더욱 그럴샤 하게 느껴졌다.
첫날 스케쥴은 끝났는데.... <내장산> 산행과 <백양사>사찰까지 관람을 마쳤으니 이제는 휴식처를 찾아가서 짐을 푼 뒤 저녁만찬을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1박2일 일정에 회비를 10만원씩 갹출했으니 풍부한 예산에 총무는 신이 난 듯 미소를 띄었고, 모범기사는 장승호를 끼고 달려와 고속도로 밑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서 고창(高敞)군으로 들어갔다. 30만평의 대지 위에 핀 300만송이 국화꽃의 향연을 찾아서 고갯마루를 막 지날 무렵 넓은 벌판에 도열한 국화 밭은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약 1개월가량의 국화전시회가 막 끝난 다음 일부 철수하는 과정이라 입장료도 없이 30만평에 300만송이가 진열된 국화 전시회를 구경하게 되었다. 한 송이 국화로 폭 2미터나 되도록 키운 놀라운 재배법에 감탄을 하면서 고창 읍으로 차길을 돌리는 순간 모범 드라이브의 전화가 울렸다.
-고창의 국화 전시장에서- 숙소를 정하기 위하여 고창읍으로 방향을 돌려 넓은 모텔 방 한 칸에 함께 배낭을 던진 다음 바로 옆에 위치한 아구탕 음식점에 들어가 조용한 방을 차지 한 다음 모범기사는 처제와 광주에 사는 친구한테 전화하여 찾아오도록 하였다. 푸짐하게 시킨 아구탕과 첫잔부터 돌리는 소주와 맥주를 혼합한 <소맥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친구 분은 자그마치 지리산을 약50번이라 완주했다면서 재미난 코스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금년에도 꼭 지리산산행을 하고 싶었으나 스케쥴을 잡는 리더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더욱 아쉬웠다. 뒤늦게 합석한 처제분과 여동생까지 합하여 전체 9명이 한자리에 앉아 떠드는 사이에 더러는 취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헤어지기로 하고 모델로 돌아 왔다. 간단하게 세면을 마친 다음 또 다시 주안상을 차려 먹다 남은 독한 버섯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일행들의 주량을 따라갈 수 없었던 관계로 나는 잠자리에 들어 가면서도 잼버레인 등산화를 신주 모시듯 비닐봉투에 넣어 방안으로 갖고 들어갔다. 값비싼 그것도 자그마치 34만원인지라 산행준비물 중 제 1호에 속하는 재산이니까 낯선 사람들은 견물생심을 느낄수 있었다. 한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4명의 일행들은 그때까지 <고스톱>을 즐기고 있었다. 다음날 일정을 원만히 소화하기 위해서 뒤늦게 일행들도 함께 잠자리를 마련했다. 21일 아침, 늦게까지 <고스톱>과 술로 즐겼으니 마땅히 아침식사는 해장국을 찾게 마련이었고 여러 곳을 물어 다닌 끝에 찾은 <전주콩나물국밥>을 제대로 찾았다. 콩나물 해장국밥, 정말 맛있었다. 일행들은 마치 한이라도 푼 듯 흐뭇해 하면서 차에 올르던 중 어이쿠 이를 어쩌나 . 일행들을 태우고 왔던 차량의 옆구리에 다른 차량이 박아 쑥 들어가 있었으니 일행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약간의 분위기가 어색해 있을 무렵 어제 만났던 모범기사의 처제분이 직접 담근 <복분자>술을 가져가라고 했던 관계로 국화전시장에 위치한 가게로 가면서 길가의 복분자 밭을 구경하게 되었다. 난 생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 복분자 나무, 차에서 내려 가시가 돋힌 복분자 나무를 신기롭다는 듯 어루만져 보았다. 자그마한 나무에 가시까지 돋힌 나무에서 일급의 복분자 열매를 맺어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전날 들렸던 국화꽃전시장에 위치한 가게에 들여 <복분자>술을 받아들고 다음 목적지로 가려고 했으나 모범드라이브가 지난밤에 마셨던 술이 덜 깼는지 자동차 키를 꽂아 놓은 채 문을 닫고 말았으니..... 주위에 있던 다른 기사분들의 도움으로 열려고 애를 써보았으나 허탕, 뒤늦게 보험사로 연락하였더니 약20분 후에 나타난 전문가 역시 갖가지 방법으로 차량문을 열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허탕했고 일행이 도구를 인수받아 몇 번 노력하더니 쉽게 차량문이 열렸다. 오늘 일정은 특별한 것이 없었던 관계로 내가 가 보지 않은 <선운사>사찰로 향했다. 가는 길에 풍천냇가를 지나면서 오늘날 풍천장어가 유명하게 된 내력까지 들려주었다.
- 선운사 - 풍천장어 이름의 유래 바닷물과 강물이 어우러지는 "풍천(바람 風, 내 川)자를 쓰는 데 보통 바다에 물이 들어 올 때 육지로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란다. 선운사 입구의 풍천장어가 맛있고 유명한 이유? 하나, 고창 선운사 입구의 인천 강에서 잡히는 뱀장어는 예로부터 풍천장어라 하여 뛰어난 영양식품으로 각광을 받아 왔다. 인천 강은 긴 거리에 걸쳐 바닷물의 영향이 미치기 때문에 뱀장어의 이동 통로로 적지이다. 인천 강 기수역의 감조 구간이 10km 이상의 긴 거리에 걸쳐 있어 뱀장어의 체질 변화 훈련장으로 아주 적당하기 때문이다. 둘, 가까이에 있는 염전으로 이곳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뱀장어의 맛이 더욱 좋으며, 풍부한 갯벌의 영양과 담수의 교차로 뱀장어 서식지로 최적이다. 셋, 흔히들 선운사 풍천장어가 최고라고 하는데 그 유명세가 있게 된 정확한 이유는 선운산 계곡에서 성장한 숙련된 뱀장어가 겨울철 동면을 하려고 또는 산란을 위해 바다로 나가기 전 선운사입구 인천강서 머물다 잡히기 때문이란다. 넷, 선운산 풍천장어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맛이 담백하고 구수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운산에서 일찍부터 작설차, 복분자술과 함께 풍천장어가 3대 특산물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왔다. 다섯. 풍천장어는 비타민A가 쇠고기보다 20배나 함유되어 있고,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할 뿐 아니라 불포화지방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로부터 보양식품으로 이용되어 왔다. 풍천장어의 맛과 영양이 최고일 때는 산란기를 맞은 뱀장어에게는 아름다운 채 색이 나타난다고 한다. 몸은 짙은 흙색으로 변하고 측면에 엷은 황금색 광택이 나타나며 배는 어두운 색,가슴지느러미의 기부는 황금색으로 변한단다. 이와 같은 혼인색이 나타나면 뱀장어는 생식기관이 성숙되는 반면, 소화기관이 퇴화되어 절식을 하며 바다로 들어간다. 뱀장어는 알을 낳기 위해 장장 6,400km에 이르는 긴 여행을 하다가 마침내 수심 400m가 넘는 심해에 이르러 산란한다고 한다. 이때 뱀장어는 강에서 곧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염분의 영향이 강 한 기수역에서 고된 적응 훈련을 거듭하여 체질을 변화시킨 다음 심해를 찾아간다. 도중에 추운 겨울을 맞으면 하구의 진흙바닥 속에서 월동을 한다고. 늦가을 강 하구 기수역의 뻘 속에 잡히는 뱀장어는 맛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장어는 약재로도 쓰이며, 가격 또한 1마리에 10만원을 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전북 고창지역의 풍천장어와 전남 고흥지방의 뻘두적은 매우 유명하다고 전한다. 도솔산 기슭의 동백꽃 군락지아래 위치한 <선운사>를 찾아서 1707년 쓰여진 '도솔산 선운사 창수승적기(創修勝蹟記)'에 다음과 같은 선운사의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 밤에 좌변굴( 진흥굴)에서 잠을 잤다. 꿈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는데, 이것이 <선운사>의 시초라고 한다. 한창 때는 암자 89개, 당우 189채, 수행처 24개소 그리고 승려 3천여 명을 거느린 대찰이었다 한다. 선운사는 주변의 동백나무숲으로도 유명하다. 5천여 평에 이르는 선운사 동백 숲은 수령이 약 500년으로 천연기념물 184호이다. 매년 3~4월이면 붉고 탐스러운 동백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선운사를 찾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곳 선운사 인근에는 동백꽃 못지않게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바로 상사화이다. 상사화는 석산 또는 꽃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는 수선화과의 꽃으로 그 붉기가 동백꽃에 뒤지지 않는다. 8~9월이면 선운사 일대와 마애불이 있는 도솔암까지 3km에 이르는 골짜기 주변에서 피어 장관을 이루는 선운산의 또 하나의 명물이다. 이 상사화에는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옛날 한 여인이 선운사에 며칠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스님 한 분에게 연모의 정을 느껴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시름시름 앓던 그 여인은 결국 죽고 말았고, 그 죽은 여인이 상사화로 다시 피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송 악- 정육점 상가가 늘어선 한외마을 쇠고기집에서 1시가 지났는데 양쪽 길가에 위치한 정육점에서는 마치 장날인 듯 많은 고객들이 줄을 서서 고기를 사느라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시장한 찰나에 고기 굽는 냄새에 위액이 솟구쳤다. 차를 주차하기 무섭게 고기 집에 들려 총무가 고기를 구입하기로 하고 다른 일행은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7만5천원에 <등심>과 <차돌박이>를 두 접시에 가득 담아와서는 연방 굽었다. 등심은 약간 익혀 먹는 것이 제맛이라면서 비스마르크 임시대장이 일갈을 펼쳤으며 복분자술은 연방 빈잔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기 값이 75,000원에 부속양념과 채소비용이 1인당5,000원씩이었으니 결코 헐한 것은 아니었으나 풍부한 예산이 있어 실컷 먹도록 권했으나 더는 못 먹었다. 식사 도중에 더러는 부인한테 전화하여 무슨 고기를 사갈까 하고 의견을 묻는 애처가 또는 졸장부가 더러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매장에 나와 각자 맛잇는 고기를 구입하여 진공포장을 한 다음 출발 준비를 하기 이르렀을 때 옆에 세워진 관광버스를 타고 온 아주머니들이 비밀봉지에 생강을 한 보따리씩 들고 타자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본 뒤 겨울에 생강차를 마시면 감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길래 사러갈려고 할 때 일행이 자기 것까지 사다달라고 부탁하였다. 생강가게로 가든 중 고기 집에 들려서 커피 한잔을 들고 나갔더니 기다리던 나머지 일행들이 먼저 와서 구입하고 있었으며 다섯 봉지를 샀는데 덤으로 더 달라고 하자 남의 물건을 대신 팔아준다면서 한사코 거절하는 노파의 연극은 뒤늦게 밝혀졌다. 든든하게 고기로 배를 채웠고 시간도 여유로워 상경 길에 <태인IC>로 빠져 모악제 <금산사>를 관람키 위해 또 다시 방향을 돌렸다.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 모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라북도 제일을 자랑하는 대가람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아주 작은 규모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경덕왕 21년(762년) 진표율사께서 크게 고쳐 짓고 쇠로 만든 33척의 미륵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미륵신앙의 근본도장, 그리고 법상종(法相宗)의 본산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후백제 견훤 왕의 믿음으로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그러다가 고려 문종 33년(1079년) 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세운 뜻과 전통을 발전시키고자 전체를 대사구(大寺區), 광교원구, 봉천원구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합리적인 체제를 확립하여 절은 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절들이 왜적들에 의해 불탔지만, 금산사는 뇌묵,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모인 1500여 승병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아무런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6년 뒤인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임진년의 승병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왜적들에 의해 80여 동의 건물과 40여 암자가 전부 불타버리는 재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선조 34년에 이르러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여러 큰 스님들과 함께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여 33년만인 인조 13년(1635년)에 오여래(五如來), 육보살을 모신 대적광전 등 대사구역만 옛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역사를 밑거름으로 금산사는 오늘에 이르렀는데, 최근 주지로 부임한 송월주(宋月珠) 스님도 앞서 말한 큰스님들의 뒤를 이어 절의 규모를 늘리거나 고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86년 12월 대적광전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전부 타 버렸다. 그러나 1989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92년 12월 현재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세워졌으며,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국보 62호 미륵전도 1993년 봄에 완전 복원되어 대가람 금산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3층 목조건물을 건립하기 전에는 연못이었으며 용이 살고 있었는데 신라<혜공왕>이 연못을 숲으로 메워 용이 승천토록 한 다음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사찰 뒤로 한바퀴 둘러 본 다음 소복히 쌓여있는 단풍을 밟으면서 걸어 나오던중 <산비탈에 길게 늘어선 <송악>이라는 나무를 보게 되었다. 높이가 15미터에 둘레가 80센티나 되는 <송악>은 소밥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여 입시철이면 많은 학부모들이 탐을 낸다고 하였다. 이곳 금산사는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면서 나주지역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어온 방수군(防戍軍)인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속하게 되고, 북쪽에서는 궁예가 고려(후고구려, 태봉, 마진)를 세워 후삼국으로 다시 정립된다. 나주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해 전쟁비용 마련에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느슨해진 통제를 틈타 바다를 통해 들어온 <송악>의 <왕건>과 손을 잡게 도었다.
견훤은 왕위 계승문제로 아들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 맏아들 <신검>에 의해 김제 금산사로 유폐되었고, 결국 금산사를 빠져나와 나주로 탈출하여 송악의 <왕건>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로써 후삼국은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하게 옛 삼한의 땅에서 일어난 힘, 우리 민족에 의해 통일되었다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자 이제는 서울로 간다 호남고속도로의 태인IC를 거쳐 달리면서 내친김에 온천까지 하고 가자면서 분위기를 띄운다. 그 사이 실컷 마시고 고기까지 먹고 했으니 예산이 부족할 것 같다면서 추가로 회비 2만원씩을 더 갹출했으나 천안 가까이 왔을 때는 벌써 체증현상이 나타나 온천을 포기하고 바로 상경하기로 하였다. 그대로 잘 사람은 자고 운전하는 사람은 운전하면 되는데 모범운전수가 뒤늦게 생강에 대해 일갈을 펼쳤다. “생강 정말 헐하게 샀지? 중국산이 아닐까? 그런데 집 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산 생강은 흙이 묻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하여 뒷자리에 앉은 본인이 그냥 지날칠 리가 없었다. 손을 뒤로 하여 트렁크 쪽에 놓아 둔 생강 한 덩어리를 꺼내어 살펴보았더니 영락없는 중국산이었다. 흙이 없었을 뿐더러 쪼개어 혀 바닥에 대 보았으나 탁 쏘는 맛이 없이 그냥 약간의 냄새만 풍겨 각자에게 확인시킨 결과 100% 중국산으로 판정을 내린 뒤 제일 먼저 생강을 구입하자고 바람을 불어 넣은 비스마르크 대장한테 질타하기 시작했다. 5,000원에 샀는데 4,000원에 사라는 것에서부터 2,000원까지 흥정가격이 나왔다가 그냥 가져가라고까지 야단을 부리는 사이에 최종목적지인 과천에 도착하였다. 지금까지 지루하지 않게 떠들면서 왔던 생강문제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음식점 요리사한테 물어 보면 해결날 것 같아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어 확인을 부탁했더니 첫마디에 “중국산이네요”라는 답변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 버릴 곳도 없고 일단 집에 갔고 가서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서 배낭 뒤에 묶은 뒤 전철에 올랐다. 흙 속에 묻어도 봤으나 중국산은 역시 중국산이었다. 5,000원짜리 중국산 생강을 어떻게든 제 맛을 나게 만들기 위하여 스티로폼에 담긴 흙 속에 묻어 놓고 물까지 주면서 며칠을 지켜보았으나 생강 본래의 맛은 커녕 일부가 썩기 시작하여 잘게 썰어 쪼갠 뒤 물을 약간 붓고 삶아 보았으나 가스비용도 나오지 않을 듯 싶었다. 아깝다기 보다 노력의 댓가를 찾아보겠다는 의미로 생강 물에 꿀을 썪어 마셔 보았으나 한잔 더는 마실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세월은 흘러가나보다. 아쉬움만 가득해지는 이틀간의 장거리산행은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채 향수를 일으키게 할 것이며 세월의 나이테를 더욱 굵게 만들고 있는도 모른다. 억겁의 세월마저 까마득히 잊은 채 현실에 안주하려는 평이한 인간과는 달리 난 과거라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내일을 기약하고 그 위에 미래라는 아름다운 반석을 깔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좌우를 돌아보아도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보다 슬퍼게 만드는 현상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난 생 처음 들어보는 병마와 시달리면서 갖가지 처방으로 치유에 몰두하는 인간의 나약함은 모두에게 분발을 독려하고 더러는 나눔의 사랑을 깨우치게 만드는 것 같다. 이제 우리라는 카테고리 속에 억메이지말고 더불어라는 단어에 힘을 실은 채 내일을 위한 힘을 비축하고 즐거운 마음을 얻기 의하여 바쁜 걸음을 옮기면서 에너지를 비축하여 든든한 기초를 마련해야 할 거이다. 하루 아침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거늘 1박2일 코스속에서 서로를 위한 배려와 노력으로 즐거움이 얼마나 비축되었는지 모른다. 호남방향에 길이 어두운 본인을 위하여 <선운사>,<금산사>까지 기꺼이 안내해 준 일행들에게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감사와 더불어 송구영신의 뜻을 듬뿍 담아 전달한다. 마음뿐일 수 있을 미래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여 건강을 다지고 열심히 새로운 모습과 향수를 담으면서 내일을 소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야 할 것이다. 4계절이 있어 세월의 변천을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으며, 꽃이 지고 푸른 잎이 붉은 단풍이 되고 마지막 남은 잎새는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지 못한 채 앙상한 가지에 메달려 삭풍에 흔들리고 있다. 우리 인생도 이제는 끝없는 나래를 펴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어디가 종착역이며 어디가 안식처인지도 모른채...... 한정된 생명에 활력을 불어넣어 더 넓은 세상 도 높은 하늘 위로 비상할 수 있도록 더불어 밀고 당기면서 더 멋진 삶을 구가해 나가자구....... 2007년 12월 25일 2008년 戊子年을 기다리는 순 웅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