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베리아[Siberia]
러)Sibir.
우랄 산맥(서쪽)과 태평양(동쪽) 사이에 있는 북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
[개요]
북극해로부터 남쪽으로 중앙 카자흐스탄 산지와 중국·몽골과의 러시아 연방 국경까지를 이른다.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연방에 속하며, 첼리노그라드 주, 세미팔라틴스크 주, 동(東)카자흐스탄 주 등 남서부 일부는 카자흐스탄에 속한다. 시베리아는 예니세이 강을 경계로 크게 동·서 시베리아로 구분된다. 서시베리아는 알타이 지구와 케메로보·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톰스크 주를, 동시베리아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와 이르쿠츠크·치타 주 및 부랴티야·투바 공화국 등을 포함하고 있다. 면적은 13,488,500 ㎢고, 아시아 대륙의 1/4을 넘는다. 그러나 인구는 전체적으로 희박하며, 주로 서쪽과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민족구성은 러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반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시베리아 지도에 관해러시아' 항목 참조).
[자연환경]
• 서시베리아 평원
서시베리아 평원은 서쪽의 우랄 산맥과 동쪽 예니세이 강 사이에 있는 시베리아 분지의 일부로 현재 세계적으로 개발이 기대되는 지역이다. 평원의 북부는 습지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툰드라에서 타이가, 스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생경관이 펼쳐진다. 기후는 대륙성기후로 겨울이 길다. 1월평균기온이 북부에서 -28℃, 남부에서 -16℃를 기록하는 등 전체적으로 매서운 겨울 날씨를 보이나, 7월평균기온은 북부에서는 3℃, 남부에서는 23℃까지 올라간다. 연평균강수량은 타이가 지대에서는 450㎜이나, 툰드라와 스텝에서는 그 절반밖에 안 된다. 하천은 모두 오브 강과 예니세이 강 수계에 속한다. 오브 강과 예니세이 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평원을 횡단하여 북극해의 카라 해로 들어간다. 그밖에도 평원에는 많은 호수가 있다. 툰드라 지대인 서시베리아 평원의 북부는 토탄 습지로 덮여 있으나 그 밑에는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중앙 시베리아는 서쪽으로 예니세이 강과 동쪽으로 시베리아 북동부의 산맥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북쪽 끝의 비랑가 산맥과 세베르나야젬랴 산맥이 포함되며, 남쪽으로는 북시베리아 평원과 중앙 시베리아 고원이 포함된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은 높이가 1,700m에 달한다. 동쪽으로는 레나 강과 빌류이 강을 따라 중앙 야쿠트 저지가 펼쳐져 있다.
기후는 혹독한 대륙성기후로 1월평균기온이 -44℃까지 내려가는 반면, 여름철 남부에서는 기온이 20℃까지 올라가는 따뜻한 날씨를 보인다. 연평균강수량은 200~500㎜에 불과하며 동쪽으로 갈수록 더 줄어들고 대륙성기후가 심해진다. 식생은 중앙부의 타이가 삼림이 전체의 60%를 차지하며, 그 북쪽으로 북극사막, 산지 및 고원 툰드라가 나타난다. 남쪽으로는 아친스크·크라스노야르스크·이르쿠츠크·칸스크 주변에 작은 규모의 삼림 스텝과 스텝이 있다. 이 지역 하천수계의 밀도는 매우 높다. 가장 큰 강인 레나 강과 그 지류 빌류이 강이 있고, 예니세이 강의 지류인 앙가라 강, 포트카멘나야퉁구스카 강, 니주나야퉁구스카 강이 있다. 하천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급류를 이루며 흐르기 때문에 풍부한 에너지원을 제공한다.
중앙 시베리아의 남부에는 알타이·쿠즈네츠알라타우·사얀·스타노보이 등의 높은 산맥들이 있으며, 3,5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산간호수들이 있다. 1,000개가 넘는 봉우리에는 연중 눈과 얼음이 덮여 있다. 그중 알타이 산맥의 벨루하 봉이 4,506m로 아시아권 러시아에서 가장 높다. 기후는 매우 추운 대륙성기후로 여름에는 따뜻하지만 1월평균기온은 -25℃로 떨어진다. 산간 분지에는 연간 100㎜ 남짓한 매우 적은 비가 내리는 반면에 바람맞이인 서사면에는 연간 1,500~2,000㎜의 많은 비가 내려, 내륙호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이칼 호와 함께 오브 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의 수원이 된다. 식생은 산지 타이가가 우세한 가운데 고도에 따라 달라져 높은 산의 산지 타이가로부터 고산 스텝, 아(亞)고산 스텝, 산지 툰드라 및 산간 골짜기 혹은 산록의 스텝과 남쪽 반사막지대의 스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동부 시베리아는 레나 강의 동쪽에서 콜리마 산맥의 서쪽에 이르는 지대를 말한다. 약간 높은 산지와 알라제야·유카기르와 같은 넓은 대지(臺地), 야나인디기르카, 콜리마와 같은 습지성 저지가 북쪽으로 차례로 발달해 있고, 그곳을 흐르는 야나 강, 인디기르카 강, 콜리마 강이 북극해로 흘러든다. 또한 베르호얀스크·체르스키·사리체프·순다르하야타 등 해발 3,000m가 넘는 높은 산맥들이 둘러싸고 있다. 기후는 한층 혹독한 대륙성기후로서 1월기온이 때때로 -70℃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남쪽의 7월평균기온은 17℃까지 올라간다. 따라서 추운 북쪽에는 지의류 툰드라, 삼림 툰드라가 우세하지만, 그보다 온화한 남쪽에는 산지 타이가인 낙엽송 수림이 띄엄띄엄 발달해 있다. 호수가 발달한 습지성의 동시베리아 저지는 동시베리아 해와 랍테프 해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베링 해로 가는 길목에 해발 200m 미만의 아나디리 평원이 있고, 그 동쪽 끝에 산지 툰드라와 히말라야 삼목으로 뒤덮인 추크치 고원이 있다.
[원주민]
17세기 중엽 러시아인이 대규모로 유입해 들어오기 전 시베리아에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문화는 자연과 기후조건에의 적응형태에 따라 남부의 건조·반건조 스텝 지역, 중부의 넓은 삼림지역, 북부의 많은 하천과 호수를 포함한 영구동토지역 등 세 지역권으로 나눌 수 있다. 남부의 스텝 지역에서는 말과 양을 기르는 유목문화가, 중부의 삼림지대에서는 순록을 기르는 유목과 수렵·채취 문화가 발달했고, 그로부터 더 북쪽인 북극해와 오호츠크 해 연안에는 고래·해마·물개 등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어로문화가 발달했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다양한 민족구성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원주민 언어는 크게 야쿠트족과 시베리아타타르족을 비롯하여 남부 시베리아의 여러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투르크어족, 에벤크족·라무트족 등이 사용하는 만주퉁구스어족, 오스탸크족·보굴족 등이 사용하는 핀우고르어족, 부랴트족이 사용하는 몽골어족, 코랴크족·유카기르족·길랴크족 등이 사용하는 고(古)시베리아어족 등이 있다(→ 투르크제족). 시베리아 원주민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단위는 지연 관계에 의한 부족집단이 아니라 혈연 관계에 의한 씨족집단이다. 같은 씨족의 구성원들이 2~3개의 서로 다른 부족에 속하는 예가 있으며, 그들은 혈연관계를 통해 일정한 의무를 갖는 씨족을 형성한다. 시베리아에서 농업이란 17세기 중엽 대규모 러시아인의 유입과 식민화가 있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서시베리아 평원(옴스크·톰스크·케메로보·노보시비르스크 주)과 비교적 입지조건이 좋은 하바로프스키·프리모르스키 지구 같은 곳에서만 사슴사육·육우·낙농 등이 행해지고 있다.
유럽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전에 야쿠트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형성한 사회조직은 친족과 캠프 집단을 중심으로 한 원시적인 형태였다. 친족은 부계가 중심이 되었으나 친족용어와 무당의 양성적 성격 등에서 과거의 모계적 유형을 보여주는 여러 현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서구적 의미에서의 사유재산 개념은 미약했으며, 각각의 캠프 집단이 관례에 의해 중요한 경제적 자원을 통제하면서 경제활동에 서로 협력했다. 경제적 측면과 육아에 있어서도 가족은 보다 큰 친족집단과 기능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연장자로부터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다. 기술은 특별한 경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습득되었으며, 그러한 경기들은 성년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러시아인이 진출하기 전에 시베리아 원주민의 사회계층 분화는 미약했으나 러시아 정부가 행정적 편의를 위해 그들의 집단을 대표하는 특정인을 지정함으로써 이들이 상류층으로 성장하는 사회계층 분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와 별도로 야쿠트족과 같은 집단에서는 큰 순록 떼를 소유한 일부 계층이 상류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원주민에게 전문적으로 분업화된 직업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당과 대장장이이다. 이들은 특별한 소질을 가진 자들로서 기술자 밑에서 도제교육을 통해 양성되었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소뿔, 매머드와 해마의 상아, 나무, 새의 깃털, 포유류 및 어류의 가죽 등을 주재료로 하여 여러 생활용품들을 만들었다. 총이 도입되기 전에 이들의 주무기였던 가시 돋친 창이나 활 등은 매머드나 해마의 상아와 나무로 만들었으며, 가죽으로는 옷, 보트, 옷가지나 물건을 담아 두는 가방을 만들었다. 보트는 천연염료를 이용하여 복잡한 모양의 색깔을 칠한 자작나무의 껍질로 만들기도 했다. 옷은 주로 들개의 가죽을 이용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물고기 가죽으로 어깨 망토와 방수처리된 장화를 만들었다. 철은 남부의 철산지 근처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러시아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공급받았다. 철광석으로부터 직접 철을 제련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집단에는 총신·장신구·마구(馬具) 등을 생산하기 위한 작은 휴대용 철로(鐵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은 활송곳 방법, 즉 단단히 묶은 끈으로 구멍에 박힌 화살대를 돌림으로써 마찰에 의해 부싯깃에 불이 붙도록 하는 방법으로 얻었다. 요리용 그릇은 자신들이 금속으로 만들거나 러시아인들로부터 구입했으며, 밀가루 팬케이크 요리에는 철판을 이용했다.
순록 사냥은 생가죽 끈으로 만든 그물을 이용해서 순록을 잡은 다음 창으로 죽이거나, 스키를 탄 사냥꾼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돌진해서 잡는 원시적인 방법이 이용되었다. 마찬가지로 물고기를 잡는 데에도 생가죽이나 끈으로 만든 그물과 낚시를 이용했다. 교통수단으로는 툰드라 혹은 삼림환경에 맞는 해마의 상아나 금속활차를 단 개썰매 혹은 순록썰매, 스키, 눈신발 등이 이용되었으며, 여름철에는 가죽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보트가 많이 이용되었다. 주거는 일반적으로 이동식이었는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죽을 덮어 만들었다. 남부 시베리아 일부 집단은 솔과 떼를 덮은 반움집 형태의 집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해안가의 해양포유류 사냥꾼들은 고래의 갈비뼈로 지탱되는 반영구적인 집을 짓기도 했다.
시베리아 원주민의 종교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당은 자연세계와 초자연세계 간의 중개자로서 종교생활의 중심이며 또한 공동체의 의사, 상담역, 그리고 다른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주술적 수단으로 공동체를 보호하는 방어자이기도 했다. 무당은 보통 사춘기 때 '내림'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서 되는데, 내림은 무당의 역할을 받아들여 수행하겠다는 동의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는 일종의 병이다. 이런 무당들은 양성(兩性)이라든지 보통 사람들보다 내장이 더 많다는 등의 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무당이 수행하는 제례나 의식 이외에도 사냥이나 어로활동 혹은 사적인 생활에서 중대한 사건들에 관해 일반인이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사적인 의식도 있다.
시베리아 원주민은 기원신화·무속가요·속담·서사시 등 풍부한 민속문화와 함께 다양한 도형예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무당이 사용하거나 춤출 때 박자를 맞추는 데 이용하는 작은 북(정확히 표현하면 탬버린의 일종) 이외에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구금(口琴), 뼈나 갈대로 만든 피리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극동의 일부 원주민들에게는 중국에서 전래된 양식의 현악기도 있다.
러시아인들에 의한 탐험과 영토정복은 시베리아 원주민 경제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원주민들은 러시아인들과 모피교역을 하게 되었고, 총과 강철 덫, 기타 금속제 용구의 도입으로 사냥과 어로기술이 많이 발전했다. 또한 사냥도구 이외에도 담배·옷·소금·밀가루·보드카 등의 물품이 교역망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공급되었다. 그러나 이무렵 유럽인의 영향은 제한적이었으므로 원주민의 자급자족경제의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러시아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유럽의 교역상품을 단순히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측면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러시아 문화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문화생활 전반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알타이 고지와 바이칼 호 주변지역 등 일부 남부 시베리아에는 상당히 오래전에 형성된 러시아 농민사회가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추방된 종교적 이단자들의 후손으로서 '시비랴크'라고 불렸으며, 원주민과의 신체적·문화적 혼혈로 유럽러시아인과는 다른 문화와 외모를 가지고 원주민과 러시아인 사이의 중간 집단을 형성했다. 원주민은 이들로부터 농업기술을 배웠으며, 야쿠트족과 같은 일부 집단은 표면상으로는 그리스도교화되었고, 더러는 러시아 정교회가 후원하는 학교 교육을 받기도 했다. 시베리아에 끼친 러시아인의 영향에서 특히 고려해야 할 것은 원지에 정치범을 유형보내는 차르 정권의 정책이다. 이 정책은 러시아인이 원주민과 접촉하는 유형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종합적인 시베리아 사회경제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15년간은 주로 조사와 계획수립이 이루어졌으며, 실질적인 개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기간중에 교육 및 보건 등에서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나 유목 생활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0~30년대에는 많은 시베리아 원주민의 언어가 러시아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국민학교 교과서가 이들 언어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말까지 시베리아 주민의 생활양식에 큰 변화는 없었다. 1930년대초 소련의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농업의 집단화가 이루어졌으나 시베리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말까지, 좀더 깊이 들어간 먼 지역에서는 1950년대초까지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1979년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북부지방과 시베리아, 극동의 원주민 인구는 모두 26개 소수 민족집단에 15만 8,000명이었다(1970년에는 15만 1,000명). 그중 61.7%의 인구가 그들의 고유어를 사용하고 있으며(1970년에는 67.4%), 54%가 러시아어에 익숙하고, 5.2%는 그밖의 외국어를 쓸 줄 아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이들 소수 민족집단이 소멸해가고 있었으나 현재는 그 수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소비에트가 들어선 이후 스탈린에 의해 만들어진 '형식은 민족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슬로건 아래 시베리아 주민들의 민족의식을 북돋우려는 노력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야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대전 후 전례없는 공업화가 이루어졌으며, 유럽권 러시아로부터 노동력의 대거 유입이 이루어졌다. 유럽권 러시아인들의 대규모 유입과 공업화, 도시화는 시베리아 주민의 생활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근대적 교육을 받은 원주민들은 그들 선친의 직업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전통기술을 배우지도 못했다. 도시에서 교육받은 원주민들은 대개 그곳에서 의사·교사·관리가 되었다. 또한 순록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는 기술수단은 좋아졌지만, 장비를 조작하는 숙련기술은 과거와 같이 가족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습득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원주민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원주민의 옷은 합성섬유보다 따뜻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민족과의 결혼으로 친족체계의 전통적 유형에는 변화가 왔으나, 그 자체의 중요성은 유지되고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 시베리아 주민들의 독특한 문화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문화에 섞여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의 역사]
시베리아의 역사는 중앙 아시아와 동아시아로부터 사람들이 이동해오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많은 후기 구석기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알타이 지방과 예니세이 강 상류, 바이칼 호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유물은 주로 바이칼 호 주변지역(예니세이 강으로부터 아무르 강 중류에 이르는 지역으로 당시 수렵문화의 중심지)과 아무르 강 하류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지역(만주·중국·한국으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당시 어로문화의 중심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문화는 BC 2000년경 알타이-미누신스크 지방의 주민들이 구리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문화를 가진 주민은 유럽계 인종이었으나, 곧 유카기르족의 선조인 바이칼-레나 지방의 고아시아계 주민들이 중국의 영향으로 청동과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 생계수단은 여전히 수렵이었다. 이들은 후에 아무르 지방에서 온 순록유목문화를 가진 퉁구스족에게 밀려나거나 동화되었다.
시베리아는 BC 10세기경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해 BC 7~2세기경에는 미누신스크 분지에 중국인이 개발한 복잡한 관개시설을 이용하는 정주문화가 상당히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당시 남부 시베리아의 다른 지역에는 유목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흑해 북쪽의 스텝에서부터 몽골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독특한 동물문양의 장식품을 특징으로 하는, 스키타이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BC 3세기 이후 남부 시베리아는 투르크몽골계의 훈족과 몽골에 중심을 둔 여러 투르크계 국가들에 의해 차례로 점유되었다. 남부 시베리아에서 이후 투르크족은 인종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웃한 사모예드족을 동화시키거나 북쪽으로 밀어냈다. 그무렵 극동 바이칼 호 주변에는 야쿠트족의 선조로 추정되는 쿠리칸족이, 카자흐스탄의 스텝 지대에는 유목민족인 킵차크족이 살고 있었다. AD 10세기부터 투르크족의 지배권은 점차 몽골족으로 넘어가,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시베리아 전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북부 시베리아의 주민들은 사실상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시베리아가 러시아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1세기이며, 12세기 이후부터는 노브고로트의 상인들이 오브 강 하류의 부족들과 모피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1581년 일단의 카자크인이 서시베리아 탐험에 나서 시베리아 칸국을 정복했다. 그뒤 오브 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의 하계를 이용하여 카자크인은 북부 시베리아 전역은 물론 남부 시베리아 일부까지 들어가 곳곳의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를 세웠고(1585 튜멘, 1587 토볼스크, 1604 톰스크, 1617 쿠즈네츠크, 1628 크라스노야르스크, 1632 야쿠츠크, 1649 태평양 연안의 오호츠크, 1651 아무르 강 연안의 알바지노, 1652 이르쿠츠크), 그와 함께 러시아인에 의한 시베리아의 개척과 병합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출은 아무르 강 연안에서 중국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이 일대는 1689년 중국과의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중국령으로 선언되었다. 그뒤에도 러시아는 계속 동진하여 1699년에는 캄차카 반도를 병합하고, 1858년 아이군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아무르 강 하구와 한국 사이의 태평양 연안을 획득하게 되었다.
합병된 시베리아의 통치는 모스크바에 있는 시베리아 관할 관청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다. 1822년 행정개혁으로 이르쿠츠크에 동시베리아 총독, 토볼스크에 서시베리아 총독을 두었다. 그러나 서시베리아의 토볼스크와 톰스크가 1822년 총독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후, 서시베리아 총독은 카자흐스탄 스텝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차르는 1884년 극동의 새로 편입된 지역과 태평양 연안의 기존 영토를 포함한 지역에 새로운 총독을 파견했다.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들의 활동은 시베리아 모피가 서유럽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피를 중심으로 한 공물의 수집에 한정되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서 농업 식민화가 소규모로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군사적 점령과 더불어 일차적으로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식민화는 농업개발보다는 주로 광산개발의 측면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이미 광산과 이에 의한 공업개발은 17세기말부터 소규모로 은의 채광과 제련을 통해 이루어지다가 18세기 알타이 지방과 네르친스크 지방에서 은·구리·납 등의 대규모 광산이 개발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점차 모피교역이 쇠퇴하면서 광산개발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이 되었다. 그러나 이당시의 광산은 대부분 황실과 국가의 소유로, 주로 죄수들의 강제노동에 의해 개발되다가 1830년대에 들어와서야 자유노동력을 고용한 개인사업가들에 의해 광산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토착산업자본가의 형성과 혁명적 지식인들의 시베리아 유형은 시베리아의 지식인계급의 형성과 아울러 식민지적 지위에서 비롯되는 모든 차별수단들의 폐지와 지방자치정부의 설립을 요구하는 지역주의의 성장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 저항은 부랴트족과 추크치족을 제외하면 그리 크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전통 경제가 근대 경제로 전환함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은 시베리아 황단철도의 건설이다. 이 철도는 1891년 동·서의 양 종착역인 첼랴빈스크·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시에 건설되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공되었다. 철도의 건설과정에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유입되었으며, 또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로 특화된 농업은 급속히 발달했고 노선을 따라 많은 석탄광이 개발되었다.
혁명과 내전 기간 중 시베리아는 극적인 과정을 겪었다. 먼저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면서 1918년초 시베리아 자치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곧 백군인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장군의 정부가 들어섰다. 콜차크의 패배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와 내전 간섭국 일본과의 완충국으로 바이칼 호 동안에 극동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이 공화국은 1922년 일본의 철군 이후 소비에트에 곧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시베리아의 산업개발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당시 독일과의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시베리아는 우랄 지방과 함께 소비에트 전쟁수행을 위한 공업의 중추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는 더 많은 공업지역이 개발되었다. 서시베리아에서는 수르구트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이 발견되었고 앙가라 강의 브라츠크, 예니세이 강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오브 강의 노보시비르스크 등에는 거대한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바이칼 호 동쪽까지 전철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