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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06.6.24일
팀 명 : 큰뫼사랑 종주대
참가대원 : 최성우(대장), 유승철(대원),김승만(대원),신희선(대원)
종주구간 : 제5구간(유치삼거리 - 복성이재)
종주거리 : 총 8 km
2006.6.24(토)
06: 30분<분당출발)
왜 토끼눈이 항상 빨갖게 충혈되어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산토끼 동요에 보면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라고 되어 있다. 즉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잠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얘기인데 오늘 내 모습이 토끼와 똑같다. 전날 10시부터 독일 월드컵 일본과 크로아티아전을 보고, 1시에 호주 히딩크 사단과 브라질과의 경기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4시에 일어나 다시 한국과 스위스전을 보느라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두번째 골이 업사이드냐 아니냐를 가지고 말도 많고 주심에게 서운한 점도 물론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다시 원칙,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축구경기에서 주심의 권한은 막강하여 필요시 선심까지 교체할 수 있으므로 우리팀이 선심의 기를 보고 경기를 중단했던 점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즉 주심의 신호가 있을 때까지는 경기를 계속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심의 편파 판정도 잘못이지만 이런 문제가 살면서 흔히 있는 일 아닌가? 결과에 승복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막강한 공격력으로 실력으로 이기는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우리는 주위 환경을 탓 하게 되고 매일 서운함을 경험 해야 한다. 비가 올 경우, 운동장 돔을 닫을 경우, 주심이 우리에게 불리한 판정을 할 경우, 우리 응원 없는 완전 적지에서 싸우는 경우 등등… 모든 경우를 고려한 진정한 실력 향상만이 다음 월드컵 우승을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분당을 출발하면서 월드컵 때문에 한미 FTA, 북한 미사일 발사, 서해교전 4주년... 등 정말 중요한 나라 일들이 국민들 관심밖으로 밀려나 문제라며 일찍 잘 끝났다는 의견도 있었다. 멕시코가 미국과의 불리한 FTA 결과로 망했다는 내용과 그로 인하여 국민들이 먹을것과 일자리를 찾아서 미국과의 국경을 넘다 잡히고 도망가다 사막에서 죽게 되는 많은 멕시코인의 슬픈 스토리와 샹송이 생각난다. 국경을 넘다 잡히면 다시 멕시코로 보내지지만 사막으로 도망가면 혼자 죽게 되므로 사막으로 절대 도망가지 말라는 멕시코 정부의 주의사항이 공식적으로 홍보된다고 한다. 현명한 사람은 사람은 남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며, 바보는 어떤 경험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시는 나랏님들이여, 부디 결정하는 순간에 하늘을 보고 부끄럼이 없도록 소신껏 원칙과 기본에 의거 행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런 샹송을 부르지 않도록…. “Donde Voy(어디로 갈까)-티시히노호사-”
“소리바다’에서 들어 보세요, 꼭 가사와 함께요.
운전하는 대원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눈감고 생각에 빠져 있으셔서 나도 이만…..
09: 35분<지리산 IC 통과>
승용차 뒷자리 가운데는 잠자기에 썩 편안하지 않다. 우선 가장 중요한 머리를 받쳐주는 부분이 없고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서 셋팅해야 하며, 팔은 좌우 사람들과 대여 있어 조금만 움직이며 양쪽 사람들을 건드리게 된다. 그래도 대장님이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실 때 나는 괜찮다고 했다. 7:50분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진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4km 전방의 인삼랜드 휴게소 이정표가 보여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앞 자리 김대원은 말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아니라고 좌우로 흔들기를 반복한다. 누가 물어 봤나고요 ~
8:12분이 지나면서 잠자는데 깨워서 미안하지만 밥을 먹여야 산행을 할 거라는 생각에 인삼랜드 휴게소로 들어간다. 계절 비빔밥과 설렁탕을 주문했는데 계절 비빔밥은 맛이 다시 먹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식당 뒤쪽의 전망도 다른 휴게소와는 다른 독특한 멋이 있다.
축구를 보느라 출발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휴게소에는 예전처럼 등산객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9:22분 함양JC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타고 2차선의 낭만적인 도로를 달린다. 이 도로에는 전조등을 키라는 표시도 있고, 장마로 걱정했던 날씨는 누가 그랬느냐는 듯이 멀리 도로에 신기루가 보일 정도로 맑다. 함양JC에서 13분을 달려 9:35분에 지리산IC를 통과한다.
10: 26분<유치 삼거리 도착(420m), 산행시작>
오늘 산행구간은 유치삼거리에서 복성이재까지의 약 8Km 단구간으로서 산행후 편리를 고려하여 우리차를 복성이재에 주차시키고 인월택시(
승용차를 주차 후 택시를 타고 성리마을을 지나면서 도로 왼쪽에 흥부와 흥부 부인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박을 타고 있는 조형물을 지나게 되는데(10:08분) 이곳이 바로 고대소설 ”흥부전”의 배경 마을로서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제비가 물어준 박씨로 부자가 됐다는 바로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상성마을이다. 때문에 최근 이 지역에서는 흥부전을 모태로 한 테마파크 개발이 한창인데 마을의 길목마다 흥부를 연상케 하는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갔다는 화초장 바위거리나 흥부가 배를 곯다가 쓰러졌다는 허기재 등은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라고 참고자료는 설명하지만 갈길이 바빠서 나중으로 미룬다.
다시 지리산IC를 지나 택시기사가 선택한 농로를 달려 지난 6/4일 산행 종료지점인 유치삼거리에 도착한다. 이번 택시기사는 지난 벌재-저수재 구간 기사보다는 훨씬 친절했고 요금도 23,000원으로 합리적인것 같다. 다음 구간에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11: 24분<사치재 도착: 해발 500m>
유치삼거리 길 옆에 쌓인 벌목들은 그대로 있지만 그새 밭의 감자꽃은 사라졌고 알찬 감자를 땅속에서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유치삼거리는 해발 420m 지점이며 결코 물길을 건너는 법이 없는 백두대간이 매요마을을 통과하고 이 삼거리에서 다시 야산으로 진입하는 곳이다. 오랜만의 산행이고 또 늦은 출발 탓에 완만한 오르막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힘들고 땀이 가슴사이로 줄줄 흐른다. 안쓰던 썬그라스를 쓰려니 답답하기는 했지만 유대원이 마구자비로 찍는 사진속에 내가 눈을 감고 나오므로 하는수 없이 썬그라스를 쓰기로 했다. 사진을 찍을 때 보통사람들은 하나,둘, 셋을 하건만 유대원은 그냥 마음대로 찍고 왜 찍는 순간에 눈을 감았냐고 오히려 야단이다. 세상에…… 나 스스로 대책을 세울 수 밖에… 스위스전 심판 같애
오른쪽으로 인월면 가산리 마을과 도로를 끼고 나즈막하고 순한 소나무숲 뒷동산 길을 가면 왼쪽으로 88고속도로와 그 너머 697봉,시리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되며 누가 왜 쌓았는지 모르는 작은 돌탑(작은 돌들을 쌓아 올림)과 묘 주변의 아름다운 보라색 엉겅퀴 군락을 지나게 된다. 시골에서 자랄 때 매일 보고 먹기도 하던 꽃인데 한참 동안을 보고 느끼지 못하고 잊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이 얼마만인가 계산을 해보려다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계산을 중지했다. 계산결과가 슬픈 무엇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치삼거리을 떠나 35분 후 618봉에 도착하는데 봉이라기 보다는 능선중 가장 높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이 봉우리가 별볼일 없게 보일지라도 1시간 뒤에 뒤돌아 보면 아마도 주변에서는 큰 봉우리일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못 느끼지만….
나도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지금의 내 모습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도록 현재 나의 위치와 모습을 냉정하게 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88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점점 가까히 들리면서 도로를 향해 내려가면 사치재 이정표에 도착하게 되고(유치삼거리에서 1시간) 곧 88고속도로에 내려서게 되며 길을 건너서 대간길이 이어진다..
건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쉽게 가려면 주민들이 다니는 지하의 우회로를 이용하면 되고, 점잖게 걸으려면 2km를 돌아서 고가도로를 지나면 된다. 문제는 세 번째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단체 등산객들이 이 방법을 쓰는데, 다짜고짜 고속도로를 막고 무단횡단하는 것이다. 88고속도로가 상대적으로 교통량이 적은 길이라지만 더없이 무모한 행동이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산행기를 보면 2차선 도로를 얕보고 무단횡단한 사례가 있는데 우리는 함양쪽으로 30여m를 이동, 지하 통로를 이용하여 도로를 횡단한다. 지하통로 내부는 엄청 시원했다.
12: 15분<697봉 도착>
88고속도로를 건넌 후 일행은 그늘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준비한 참외와 귤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를 모르는 동물들이 횡단시 사고를 면할수 없는 상황이고 보니 동물들 이동통로가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TV에서 보면 동물 이동통로에 올가미를 설치하는 인간들도 있다하니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닌 것 같고….
휴식을 끝내고 697봉을 향해 산으로 진입하면 본격적인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고, 나를 속상하게 하는 광경들이 펼져지는데 1994년과 1995년 연이어 산불이 난 탓에 나무들이 모두 타죽은 것이다. 숯덩이로 변한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죽은 나무 밑에서는 잡목들이 힘겹게 새 생명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써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가까스레 자라나는 수풀들 속에 홀로 피어난 원추리꽃과 녹색 명감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추풍령에서 작점고개 구간에 빨간 명감을 본적이 있는데 우리가 설악산구간을 산행시 쯤이면 이 명감도 빨갖게 무르익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멀리 오른쪽 아래쪽으로 지리산휴게소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에 우뚝 선 88고속도로 준공탑은 멋있게 보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리산의 산세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시멘트 조형물에 불과했다.
고도를 높이면 우측으로 불탄 나무조차 보이지 않는 능선에 이르게 되고 곧 697봉 가는 도중의 공터(헬기장)에 도착한다. 뒤쪽으로 오늘 지나온 618봉이 역시나 웅장하게 보이고 전 구간 고남산 통신탑과 유치재, 매요마을이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진행방향으로는 몇 개의 낮은 굴곡을 지나 697봉과 더 멀리 시리봉이 맑은 날씨 덕분에 선명하게 보인다. 697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산불로 인해 나무들이 전소되고 이제 작은 나무들과 억새만이 어깨 높이까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360도 시야가 100% 확보되어 마음이 후련하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오늘 산행을 110% 만족하기에 충분하다.
김대원이 어제 저녁을 잘 먹은 탓에 가끔 뒤에서 혼자 무엇을 했지만 대체적으로 빠른 속도로 산행하여 휴식후 45분만에 697봉에 도착한다. 697 정상에는 몇 조각의 바위가 있는데 경치가 너무 좋아 너도나도 작업사진 촬영에 바쁘다.이렇게 좋은 날씨에는 신기자가 바쁘고 대원들간에 대화도 많고,보고 들은것도 많아 산행기 쓰기가 식은 죽 먹는것보다 쉽다.
13: 21분<새맥이재 통과>
이곳 697봉을 내려가면 새맥이재이고 거기서 시리봉까지 약 200m를 올라가야 하므로 697봉을 내려가면서 간식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안다. 식후 오르막이 주는 “등이 휠것 같은 삶(배낭)의 무게를 ….”
오늘 등산객을 1명도 만나지 못했으므로 등산로 넓고 시원한 등산로를 전세내여 잡고 내가 준비한 구운계란,절편,약밥,참외 그리고 유대원이 준비한 족발과 알코올,김대원이 준비한 얼린 맥주 등을 펼쳤다(12:56분).
등산을 하는 것인지 소풍을 나온 것인지 얼른 보면 구분이 안간다. 우선 시원한 맥주로 체내 온도를 낮추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다. 점심때 먹은 술에 얼굴이 빨개져서 오후 사진이 엉망이고 다리가 풀려서 항상 안먹겠다고 다짐하지만 오늘도 역시 실패다. 벌써 맥주와 양주를 각 2잔씩 마셨다. 다음부터는 먹지 말아야지.
식사중에 백두대간 단체 종주대원들이 지나가고 있는데 서울에서 전날 밤 10시에 출발하여 여원재에서 6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한다. 여원재에 일찍 도착해 차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스위스와 축구 중계방송도 다 보았다 한다. 선두로 건장한 남자들이 지나더니 중간에 여성대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산행할 수 있는 아주머니 대원들의 체력과 정신력, 의지가 정말 존경스럽다. 김대원은 어제 잘 먹은 턱에 속이 안좋아 점심내내 음식 구경만 했고 그래서 나머지 음식을 처리하느라 조금 양적으로 과했다.
점심 후 약 10분을 내려가면 예전에 우마차가 다녔다는 새맥이재에 도착하게 되는데 아직도 아영면 당동마을에서 올라와 서쪽 번암면 논곡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우마차 바퀴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13: 59분<시리봉 우회>
새맥이재를 지나면 여기서부터 200m의 본격적인 오르막이 다시 시작된다.
등산로 옆 철쭉과 억새가 어찌나 무성한지 이곳을 통과하려는 내 배낭을 마구 잡아당기며 갈길을 막는다. 배낭에 먹을것도 없건만…. 긴 팔 상의를 입고와서 망정이지 반팔을 입고 왔다면 철쭉과 잡목 등의 나뭇가지 때문에 팔뚝이 상처 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종주 후에 안 내용이지만 유대원은 이번구간에서 풀독이 올라 고생을 했다고 한다.
등산로 양쪽에 산불로 인해 황폐한 구간을 30여분 올라가다 보면 중간중간 예쁜 원추리가 그나마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시리봉(776.8m)를 오른쪽에 두고 우회하는 지점을 통과하게 된다.
14: 26분<781봉 도착>
시리봉을 우회하여 북쪽으로 진행하면 바로 공터(헬기장)이 나오고 다시 781봉을 향한 나즈막한 오르막이 10여분 이어지며 곧 시야가 확 트인 능선에 이른다. 우리들 식사시간에 앞서 갔던 타팀 대원들을 몇 명 제치고 가다보니 어느새 우리팀 대열에 낮선 여성대원이 계속 합류해서 같이 가고 있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우리와 같은 속도로 대열 중간에 끼어서 한참을 가고 있다. 왼쪽으로는 복성이재 정상과 천문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아영면 청계리과 성리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진행방향 멀리는 복성이재 건너 다음구간의 능선이 보이는데 거리나 방향으로 볼 때 아마도 앞산은 봉화산이고 제일 멀리있는 산은 덕유산 능선 이라고 예상된다. 시리봉을 우회한 지점에서 약20분 후 781봉에 도착하는데 오늘구간은 아무 이정표가 없어 지금까지 익힌 독도법으로 우선 현 위치를 가정하고 나중에 뒤돌아 본 결과를 토대로 위치를 확정한다.
14: 53분<아막성터 >
781봉을 지나 키를 넘는 수풀속을 헤치면서 선명하게 보이는 복성이재로 향하는 길에는 많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다. 이름모를(아마 싸리꽃이 아닐까?) 보라색 꽃속에 얼굴을 파묻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뱀머리처럼 생긴 식물과 뱀딸기가 등산로 주변에 널려 있다. 따먹고 싶었지만 혹시 뱀에 물린다든지 뱀이 독을 뿌려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침만 삼키고 말았다. 아막성터 직전부터 머리위로 뽕나무 열매 오디(OD?)가 탐스럽게 달려있어 기린처럼 입으로 직접 따 먹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뱀딸기 못먹은 서운함을 오디에 풀듯이 정신없이 한참을 따먹으면서 내려오다 보면 아막성터에 이르는데 손과 입 주변은 보라색 으로 물들여져 있다.
이곳 아막성터(산성)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격전지다. 역사서를 보면 이곳을 백제에서는 아막성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 내린 돌덩이들이 등산로의 계단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을 뿐이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성의 규모는 둘레 632.8m에 북쪽에 수구와 북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에서는 기와조각과 백제 토기편들이 나온다. 현재 북문지와 수구지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곳 동쪽에는 직경 1.5m의 원형 석축으로 된 정호지가 있고 이 아막성터는 전북지방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 백제 무왕은 성왕의 관산성(管山城)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즉위초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것이 무왕 3년(602)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의 전투이다. 백제가 평상시에 유지하는 병력은 약 6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2/3에 달하는 4만명의 병력을 상실하는 대패배를 당하였다.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3만명의 병력을 잃은 전투보다 더 많은 병력을 상실한 이 전투는 백제 내부에 또 한 번 커다란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고 한다.
15: 19분<복성이재 도착>
아막성터를 지나 아래로 내려서면 복성이재 뒷재를 지나게 되고 작은 봉우리를 다시 넘으면 복성이재가 나타난다. 백두대간 등산로를 기준으로 왼쪽이 전북 장수 땅이고,오른쪽이 남원 땅이다.오른쪽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흥부가 제비가 물고 온 박을 타서 큰 복을 받아 잘 살았다는 남원 아영면 성리의 복덕촌(복성) 이다.
흥부가의 발상지로 흥부마을로 알려진 이곳은 그것을 증명라도 하듯 큰부자였다가 망한 “박첨지설화”가 전하고,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초사흘 자시에 당산제를 지내고 난 뒤, 후덕한 부자를 기리는 “춘보제”도 지내고 있다. 또 마을에는 흥부와 관련있는 고유지명이 수십개나 된다. 즉, 제비가 하늘을 나는 형상의 연산등,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골,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가다 쉬었다는 화초장바위거리, 사실은 흥부가 여기서 순금을 주워 부자가 됐을거라는 생금모퉁이, 놀부가 지고가던 화초장의 이름을 잊어 버리고 오래 생각했다는 장구목, 흥부가 어렵게 살 때 허기져 쓰러졌다는 허기재 등 웬만한 지명은 모두 흥부와 연관이 있다.
한편 판소리 '흥보가' 중에,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인데, 운봉 함양 두 얼품에 박씨 형제가 사는지라, 형 이름은 놀보요, 아우 이름은 흥보라" "흥보가 어디에 살았는고 하니 팔량치 재 밑에 살았것다" "연재를 넘어 비전을 지나 흥보집에 당도하니”로 등장하는 흥부네 집은 남원 인월면 성산리를 가르킨다.
흥부네 동네를 지나면서 어찌 흥부전의 줄거리를 공부하지 않을 수 있나요…
충청 ·전라 ·경상도 접경에 살던 연생원은 놀부와 흥부 두 형제를 두고 죽었는데,
형인 놀부는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동생인 흥부를 내쫓는다.
흥부는 아내와 여러 자식을 거느리고 움집에서 헐벗고 굶주린 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묵묵히 살아간다.
그리고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여도 흥부의 살림은 여전히 가난하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날 흥부는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새끼제비를 주워다가
정성껏 돌본 끝에 날려 보낸다.
이듬해에 그 제비는 흥부에게 보은(報恩)하고자 박씨 한 개를 물어다가 주었는데,
가을이 되자 잘 여문 박을 거두어 켜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 속에서는 온갖 눈부신 보물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와
흥부는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것을 안 놀부가 흥부에게 달려와 벼락부자가 된 자초지종을 듣고는
자기도 새끼제비 한 마리를 잡아다가 다리를 부러뜨린 뒤 실로 동여매어 날려 보낸다.
그 제비 또한 이듬해 봄에 박씨를 물어다 주었다.
그러나 놀부가 심어서 거둔 박 속에서는 온갖 괴물이 나타나
그의 재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없어지고 그의 집은 수라장이 되었다.
마음씨 고운 흥부는 그래도 놀부를 지성으로 섬겨서
함께 행복을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즉, 흥부전의 대부분의 판본은 흥부와 놀부의 부친을 연생원으로 적고 있다.
그러면 흥부는 과연 연씨일까?
흥부전은 작자와 집필 연대 미상의 소설로,
설화와 판소리 등의 과정을 거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또, 흥부전은 이본도 많고 제목도 다양하다.
'연의 각', '흥부가', '흥보전', '박흥부전', '박타령' 등이 그것이다.
즉, <박흥부전>이라는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흥부의 성이 꼭 연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씨로 전해지는 이본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겨레 21 기사에 의하면 전북 남원시 동면 성산리 주민들은
흥부의 성은 연씨가 아니라 박씨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옛날 이곳에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박 첨지가
흥부전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
성산리 주민들이 전해주는 ‘박 첨지 설화’는 이렇다.
“옛날 박 첨지라는 부자가 살았다. 그는 원래 가난해 품팔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그네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가난한 박 첨지는 식량을 꾸어 나그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수수와 박을 많이 심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박 첨지는 부지런히 수수와 박을 심었다.
수수는 양식으로 쓰고 박은 바가지로 만들어 내다 팔면서
박 첨지의 생활이 피기 시작했고 점점 논밭을 늘리고 가축도 길러 큰 부자가 됐다.
성품이 훌륭한 박 첨지는 가 난한 사람들을 위해 적선을 아끼지 않았고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도 친절히 대했다.
그러나 몇해 뒤 마을에 괴질이 돌아 박 첨지네 가족이 모두 죽었다.
세월이 흘러 마을을 지나던 나그네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박 첨지 가족의 묘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나그네들의 정성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도 제사 비용을 댈 제답을 마련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삼짓날이면 박 첨지 가족 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성산리 주민들은 요즘도 삼월삼짇날이 되면 마을 건너편 야산에 있는
박 첨지 가족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박 첨지 설화가 발전하여 흥부전으로 정착했고,
그것이 흥부전의 근원 설화라는 것이다.
즉, 흥부와 놀부의 성은 연씨와 박씨 두 가지인 셈이다.
박씨는 우리 나라에서 김씨, 이씨와 함께 3대 성씨에 해당된다.
따라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거론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연씨는 현존 성씨 중 75위에 해당되는 소수 성씨이다.
조선 시대에도 역시 미미했을 것이다.
그런 작은 성씨가 어떤연유로 흥부전의 성씨로 거론되었을까?
하필이면 연씨와 박씨가 흥부의 성씨로 거론되는 이유는
흥부전과 박 첨지 설화의 공통점을 살피면 답이 나올 듯하다.
두 이야기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소재가 제비와 박이다.
제비는 한자로 연(燕)이며, 박은 박(朴)씨와 독음이 같다.
즉, 흥부전의 주인공의 성씨인 연이나 박은
제비와 박을 뜻하는 한자 연과 박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복성이재에는 단체 종주대원들 중 선발대가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고 버스기사 아저씨는 우리에서 시원한 생수를 한 병 주셨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술의 밥을, 목마른 사람에게는 한 모금의 물을,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에게는 한 마디의 용기와 사랑을….
기념사진 촬영을 끝으로 4시간 50분간의 오늘 산행을 종료한다.
16: 46분<남원 식당,추어탕,분당으로 출발>
다음 구간에는 남원땅을 훌쩍 넘어 버리므로 이고장의 별미인 추어탕을 먹으러 집과는 반대 방향인 남원으로 달린다. 복성이재를 넘어 번암면 노단리에서 19번 도로를 따라 남원,광한루에 도착한 일행은 일단 목욕탕에서 온몸의 염분을 제거하고 대장님이 소개하신 이곳 유명한 현식당에서 추어탕을 한그릇씩 단숨에 해치웠다. 정말 도시에서 먹어본 것과는 한참 다른 맛이였다. 식사를 마치고 17:10분에 남원을 출발하여 20:30분에 분당에 도착하였다.
토요일이라 올라오는 경부고속도로는 걱정과는 반대로 원활히 소통되었다
오늘도 고생하셨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진부령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안전을 빌며…. 우리 종주대원 파이팅~
온세통신 종주내역
2004년 종주팀(여원재-복성이재): 부산지사(배남용,김문기,전정식,김민경,박철민)
2005년 역종주(복성이재-여원재) : 황욱하,서재영,이상권,허갑회
첫댓글 전날 갑작스런 술자리로 1차 소주, 2차 맥주, 3차 양주까지.... 밤이 새도록 마시다가 새벽에 축구보고 토끼눈 해가지고 채 술이 깨기도 전에 종주길에 나섰으니 얼마나 힘들던지요.... 그 맛난 음식들 앞에 놓고 젓가락질 제대로 한번 못해본 안타까움, 아실런지.....
다행히 장마비 피해서 맑은 날씨 속에 산행 마쳤으니 이 또한 우리 종주대에 내려지는 축복이 아닐런지요......^^
남원 광한루 옆 현식당 추어탕은 두고두고 잊지못할 고향의 맛이더이다, 또 먹구싶네, 꾸울꺽~~
근데 신기자님, 왜 중간중간에 글씨 크기가 달라진다요? 글씨크기가 달라지니까 아주 쬐끔 읽는데 불편함이 있어서유~~ ^^
이너넷에서 옮겨오다 보면 내 인내력을 시험하는 문제들이 자주 발생, 원인불명, 자체 해결 불가(또 나중에...)
리필되는 추어탕집은 아마 드물 것 같습니다. 역시 아직 시골은 사람살만한 곳입니다. 그 넉넉한 정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