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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배려의 미덕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친절’과 ‘배려’라고 한다. 친절과 배려가 바로 그 기업의 이미지인 동시에 마케팅 브랜드였다.
-본문 ‘여직원의 친절“ 중에서-
리더와 보스
남북전쟁이 한창일 무렵 맥클란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하루는 그를 격려해 주려고 링컨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그의 야전사령부를 방문했다.
때마침 장군은 전투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링컨은 몇 시간 동안을 사령관실에서 맥클란 장군을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장군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에 있는 대통령과 장관을 보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체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링컨과 장관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장군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후에야 부관이 내려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죄송합니다만 장군께서는 너무 피곤해서 잠자리에 드셨다고 대통령께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더 놀란 것은 국방장관이었다. 일개 장군이 직속 상관인 자기는 고사하고 대통령마저도 감히 그렇게 무시하다니…….
“각하, 저렇게 무례한 녀석은 제 생전에 처음 봅니다. 각하께서는 저 장군을 당장에 직위해제 시키셔야 합니다.”
링컨은 잠시 침묵하고 나서는 조용히 장관에게 말했다.
“아닐세. 저 장군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데, 절대 필요 한 사람이네. 저 장군 때문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이 유혈의 전투가단축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말고삐를 잡아주고 그의군화도 닦아줄 것이네.”
유머 있는 리더
IBM의 창립자인 토머스 왓슨(1874~1954)은 따뜻함이 배어나는유머를 구사하는 리더로 유명하였다. 그가 IBM의 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한 간부가 위험 부담이 큰 사업을 벌이다가 1,000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손실을 내고 말았다.
왓슨은 즉시 간부를 불렀다. 회장실로 불려온 간부는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회장님! 정말 면목 없습니다.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사표를 내겠습니다.”
이에 왓슨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 무슨 말을 하는가? IBM은 자네의 교육비로 무려 1,000만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그만둔다니,설마 자네 지금 농담하는 것이아니겠지?”
분명히 간부는 회사에 1,0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혔지만, 왓슨 회장은 그를 질책하지 않고 대신 그 손해를 교육비라는 유머를 발휘해 간부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한 것이었다. 왓슨의 따뜻한 배려에 용기를 얻은 간부는 훗날 수십 배가 넘는 이익을 얻었다고한다.
왓슨 회장은 평소에 친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하였다.
“유머를 아는 사람은 분명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더구나 곤경에 빠진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유머는 가히 위력적이다. 그래서리더는 유머를 적절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의 비밀
깊은 산 속에 혼자 사는 노인이 있었다. 세상의 온갖 지혜를 알고 있는 노인은 어느 날 동네 사람들에게 행복의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단 한 사람에게만 말해주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동네 사람들은 심사숙고 끝에 아름다움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그것으로 생각하여동네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를 골라 보냈다. 그러나 노인은 말없이 아가씨를 돌려보냈다. 다시 여러 번 논의 끝에 이번에는 가장 부유한 사람이 자격이 있을 것으로 의견을 모여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자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노인은 이런 사람들만 보내는 동네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던 노인은 작은 새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울고 있는 소녀를 만났다. 노인은 다가가서 소녀에게 우는 이유를 물었다.
“할아버지, 다친 새가 불쌍해요”
그 소리를 들은 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말했다.
“얘야, 지금 흘리고 있는 너의 눈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란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 이는 결코 이 세상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란다.”
이제야 동네 사람들은 노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마음 한구석이라도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 프란체스코의 배려
이탈리아의 ‘아씨시의 성자(聖者)’ 성 프란체스코(1181~1226)가 제자들과 함께 몇 주 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침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이 시장가를 지나다 죽을 파는 노점 앞에 이르렀다. 제자 한 명이 그만 허기를 참지 못하고 손님에게 달려가 죽그릇을 뺏어 들었다. 그리곤 체면 차릴 것도 없이 허겁지겁 죽 한 그릇을 순식간에 다 먹어치웠다. 제자의 이런 행동에 프란체스코는 적잖이 당황했고, 다른 제자들도 그의 돌출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배가 어느 정도 차자 제자의 마음에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그동안의 수행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스승과 동문의 얼굴에 먹칠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 이제 난 파문당하겠구나! 이제 난 끝장이야!’
죽그릇을 든 제자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얼굴도 잿빛이었다. 그때였다. 프란체스코가 제자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제자의 손에 든 죽그릇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남은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다른 제자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실은 나도 배가 몹시 고픈 참이었는데 금식 기도는 오늘로 끝내자꾸나.”
이것을 본 제자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환히 웃었다.
‘훌륭한 지도자는 부족한 자의 모자람을 채울 줄 안다. 남의 허물을사랑과 배려로 포용하려는 스승의 넓은 마음과 위대함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등불을 치켜든 장님
달도 별도 뜨지 않은 깜깜한 밤!
금방이라도 무엇이 나올 것 같은 무서움이 엄습한 깊은 밤! 어딘가 부스럭 소리만 나도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호젓한 산길을 선비가 지나고 있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등불을 치켜든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이 더구나 깜깜한 밤에 등불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선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도 궁금하여 인기척을 하며 장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물었다.
“여보시오. 나그네 양반, 당신은 앞을 못 보는 분 같으신 데 등불은 왜 들고 다니시오?”
장님은 태연히 말하였다.
“눈 뜬 사람을 위해서지요. 행여 그 사람이 나를 보지 못하고 부딪혀낭패를 보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선비는 장님의 그 말에 자신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앞 못 보는 장님조차 이렇게 남을 위해 배려하는데 두 눈이 멀쩡한 나는 남에게 어떤 배려를 하였는지…….’
오지 않아도 될 사람
어느 나라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일 조회 때,여섯 대신이 모두 모인 가운데 나라의 중요한문제를 논의하기로 하겠소. 모두 그렇게 아시고 한 분도빠짐없이 모여 주시기 바라오.”
그런데 이튿날 아침이 되자 여섯의 신하가 아니라 일곱 명의 신하가 모였다. 그중 한 사람은 분명히 오지 않아도 될 사람이 끼어있었던 것이었다.
임금도 그중의 한 명이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이 왔을 것 같으니 그 사람은 돌아가도 좋소.”
그러자 그중에서 누가 보아도 그럴 이유가 없는 가장 명망이 높은 신하가 자리에서 조용히 나갔다. 얼마 후, 한 대신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부름을 받지 않았으나 어떤 착오로 인해 거기 나온 대신 이 얼마나 난감하시겠소? 그래서 내가 대신 나온 거지요.”
산이 높을수록 골은 깊다고 했다. 덕망이 높으면 높을수록 겸허함도 깊은 법이다. 강물이 골짜기의 모든 물을 포용할 수 있음도 강이 넓고 깊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겸허한 사람은 남을 감동하게 하는 힘 또한 있는 법인가 보다.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
미국 석유왕이요, 자선 사업가 록펠러(1839~1937)는 어렸을 때부터 십일조를 헌금하였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소년 시절에 어머니를 도우려고 일을 시작했다. 첫 주급은 1달러 50센트였는데, 이 돈을 어머니에게 드리자 어머니가 네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참으로 기쁘겠다고 하셨다. 나는그때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빼놓은 적이 없었다. 내가 그때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처음으로 많이 번 100만 달러의 십일조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돈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봤다. 이런믿음을 먼저 사랑하는 아들에게 실천하게 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울 수 있게 한 어머니의 믿음이 그를 전 세계 제일가는 부자, 사업가, 교육가, 자선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 잉태하게 하였다.
록펠러에 이어 그의 외아들 존 Ⅱ세도 회사를 운영하며, 세계적인 교육기관을 세웠고, 자선 사업 등으로 사회에 돌린 금액이 25억 달러나 되었다. 뉴욕지사 4선, 제41대 부통령까지 지낸 그의 손자 넬슨도 또한 유명한 자선 사업가였다.
록펠러는 십의 일조만이 아니라 십의 삼조까지 했는데도 그의 재산은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서 들어내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아니하나 보라”
진정한 미소
미국의 유명한 프로 야구 선수였던 윌리엄 왈라는 마흔 살이 되자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은퇴를 결심했다. 미래를 고민하던 그는 보험 회사의 세일즈맨을 자신의 두 번째 직업으로 택했다. 제2의 인생도 기존에 누리던 인기와 그를 따르던 수많은 팬이 그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인사 담당자는 그에게 말하였다.
“보험 회사 판매원에게는 상대방을 매료시킬 수 있는 미소가 있어야합니다. 당신은 그게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인사 담당자의 충고에 윌리엄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운동선수로 고된 훈련을 받다 보니 진짜 미소를 잃은 걸까? 그날부터 윌리엄은 거울을 보며 매일 웃는 연습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직장도 얻지 못해 이상해졌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연습을 계속하였다.
누가 멋지게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을 발견하면 방에 붙여두고 따라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그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곤 그가 다시 보험 회사 인사 담당자를 찾아가니 그 자리에서 채용하여 주었다.
그 후, 연봉 백만 달러 이상을 받는 최고의 보험 세일즈맨으로 다시 태어난 윌리엄 왈라는 이렇게 할 하였다.
“나의 성공의 비법은 단 한 가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 는 진정한 미소에 있었다.”
사람됨의 시험
원래 대대로 한나라의 명문 귀족이었던 장량(?~BC 168)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시황을 암살하려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수배령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어느 날 다리 위를 걷고 있는데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신발 한 짝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려 놓고는 장량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젊은 양반, 내 신발 좀 주워 주오.”
장량이 신발을 주워 주자, 이번에는 노인이 신발을 신겨 달라고 우겼다. 어이가 없지만, 장량은 아무 말 없이 신발을 신겨 주었다. 그랬더니 노인은 장량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닷새 뒤에 이곳으로 나오면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좋은 방도를 알려 주겠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장량인지라 닷새가 지나 다리 위로 나갔다. 하지만 노인은 늦었다고 화를 내며 닷새 뒤에 다시 여기서 보자고 했다. 이렇게 하기를 두 차례, 장량은 다음에는 하루 전부터 아예 다리 밑에서 밤을 새웠다.
새벽에 나타난 노인은 크게 웃으며 그에게 《태공병법서》라는 병서를 내주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이 책으로 열심히 공부한다면 적어도 왕의 스승은 될 수있을 것이네.”
노인의 말대로 훗날 장량은 한나라의 유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장량이 천하를 도모케 하도록 도와준 황석공이다.
따뜻한 마음의 힘
미국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리(1931~)는 어느 날 점심거리를 사러 패스트푸드점에 들렀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차를 몰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창구로 갔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도 같은 창구로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그는 반대편에서 들어온 상대편 차 앞으로 새치기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뒤차의 운전자는 빵빵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데이비드 리는 순간 놀랐지만 잠시 생각을 한 뒤에 주문한 음식을 건네받으며 점원에게 말했다.
“뒤차의 음식값은 얼마입니까? 제가 함께 계산할게요.”
잠시 뒤 데이비드 리는 창구를 빠져나와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백미러로 뒤차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뒤차의 운전자는 데이비드 리가 자기가 산 물건값까지 계산한 사실을 알고는 충격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큰 분노라고 하여도 역시 따뜻한 마음의 힘에는 녹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비드 리는 저온 물리학 연구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1996년에 오셔로프, 리처드슨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세계 각국의 학술 세미나에 초청되어 특강을 할 때마다 이렇게 주장하곤 하였다.
“모든 연구는 자기 자신의 입신을 위한 연구이기 이전에 남을 위하고 남을 배려하기 위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의 아량
어느 날, 포드 사내 기술연구소의 연구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자동차의 내열 기관에 ‘냉수 방식’과 ‘냉기 방식’의 채택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사장인 포드가 ‘냉기 방식’을 지지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서 개최된 자동차 경주 대회에 포드사의 ‘냉기 방식’의 자동차는 빠른 속도에 제 기능을 잃고 전복되어 폭발하고 말았다. ‘냉기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안 연구원들은 ‘냉수 방식’을 건의했지만, 포드는 매번 거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포드사의 부사장이 사태의 심각성을 포드에게 전했다. 그러나 포드는 뜻밖의 질문을 하였다.
“부사장님은 회사에서 사장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냥 연 구원이 되고 싶습니까?”
부사장은 잠시 주저하다 당연히 사장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연구원들의 뜻을 따라 주십시오.”
그제야 포드도 부사장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었다. 수석 연구원들은 새로운 방식의 차를 개발해 포드사는 크게 신장하였다. 얼마 후 부사장이 포드에게 이렇게 제안하였다.
“이제 경영 실적도 크게 향상되었는데 후임자를 육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포드에게 은퇴하라는 뜻이었다. 포드는 대답은 간단했다.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깜빡 잊을 뻔했군. 맞아요. 저도 퇴임할 때가 되었지. 그럼 오늘 바로 은퇴를 준비해 주세요.”
사공과 철학자
어느 철학자가 강을 건너며 뱃사공에게 물었다.
“당신은 철학을 아는가?”
뱃사공은 대답하였다.
“저 같은 무식쟁이가 어떻게 철학을 알겠습니까?”
그러자 학자는 말했다.
“당신은 인생의 3분의 1을 잃었구려.”
잠시 후, 철학자는 다시 뱃사공에게 물었다.
“그럼, 예술은 아는가?”
“철학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예술을 알겠습니까?”
그랬더니 학자는 사공에게 다시 말하였다.
“당신은 인생의 3분의 2를 잃었구려.”
그런데 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 타고 있는 배에 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사공이 철학자에게 물었다.
“철학자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철학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내가 어찌 헤엄 같은 것을 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사공은 이렇게 말했다.
“안됐군요.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하임 G. 기너트(Haim G. Ginott)의 《교사와 학생 사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로 그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모든 사람은 각기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내가 알고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하여 그것이 곧 자신의 장점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 할 때 그것이 진정한 배려인 것이다.”
임금의 진심
우리나라 역대 왕 중에는 어진 임금이 많았다. 그중에도 조선 시대의 영조 대왕이 더욱 그러했다. 영조가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 무신년(1728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빗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대왕은 이렇게 탄식하고는 스스로 반성하고 몸소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아! 내가 덕이 부족하여 4년 동안 홍수와 가뭄, 기근이 들었고, 올해는 이인좌의 난까지 겪었으니, 가엾은 백성들이 어찌 견딘단 말인가!”
그래서 비가 가을 농사를 망쳐 백성이 굶주릴까 봐 영조는 공물을 감면해 주고, 심지어는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는 반찬 수도 감선(減膳)하라 명했다. 감선은 굶주리는 백성들을 생각하여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는 조치였다.
종전의 임금들도 태풍과 홍수로 피해가 발생하면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며 세금 또한 감면하였다. 이런 행위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다분히 형식적인 관례이기도 하지만 영조의 경우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역력하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 날 영조는 새벽에 계속하여 비가 내리자 지난 무신년의 감선이 떠올랐다. 영조는 이렇게 탄식하며 다시 감선을 명하였다.
“아! 홍수와 가뭄은 내가 덕이 없으므로 생기는 것이다. 내 비록그때보다 나이 들어 늙었다마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과 정사를 돌보는 마음이야 어찌 줄어들었으랴?”
감동의 편지
1930년에 대규모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의 일이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해리슨 방적 회사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화재까지 발생해 회사가 전소되고 말았다. 3,000명의 직원은 졸지에 직장을 잃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경영자는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었다.
직원 모두가 생계를 걱정하며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해리슨의 신임 CEO 앨런 보스는 직원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한 달분의 급여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파산을 예상했던 직원들은 매우 놀라면서도그의 배려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한 달은 금세 지나갔고,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이제 직원들은 다음 달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다. 이때 앨런 보스는 직원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썼다. 한 달 치 월급을 더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해 눈물을 흘렸고, 신임 사장인 앨런 보스에게 감동해 하나둘씩 일어나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소를 하고 기계를 닦고 팀을 꾸려 고객을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앨런 보스가 파산을 눈앞에 두고 직원들에게 감동 어린 편지를 썼을 때 그의 친구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말라며 여러 번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의 감동의 편지로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고, 파산 직전의 회사를 극적으로 구해 마침내 미국 최대의 방적 회사로자리잡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딴 과일 열매
모스크바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글쓰기를 좋아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급 장교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소년 시절부터 막노동하면서 모진 고생을 두루 경험하였다.
그가 어느 날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한 젊은 농부가 길을 막아서서 말했다.
“선생님, 과일 좀 사세요.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면 이 광주리에 있는 과일이 좀 시어요. 과일을 재배해서 처음 딴 거이거든요.”
그는 진실한 젊은 농부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과일 몇 개를 사면서 말했다.
“젊은이, 걱정하지 말게. 이후에 따는 과일은 차츰 달게 될 걸세. 내가 맨 처음 심은 과일도 시었거든.”
젊은 농부는 의아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럼 선생님도 과일 농사를 해 보셨나요?”
“내 첫 번째 열매는 《커피점을 여는 여자》였다네. 그런 데 이 극본을 상영하길 원하는 극장은 한 군데도 없었지.”
그가 바로 세계적인 우화 작가로 명성을 떨친 러시아의 크릴로프(1769~1844)이다. 그는 주로 사회악이나 국가 권력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중의 아픈 가슴을 달래 주는 몫은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의 몫이다.”
전설적인 탐험가
에베레스트산을 최초로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 경(卿)이 추앙을 받는 것은 그의 겸손함 때문이었다. 영국 여왕으로부터 「경」이라는 최고의 작위를 받았으면서도 스스로 늘 평범한 사람이라고 낮추며 행동했다.
그가 쓴 자서전 《모험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를 보면 그의 꾸밈없는 평범함이 진정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한번 겪고 나면 다음엔 그 두려움을 겪고 싶지 않은 것도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두려움 뒤엔 분명 우리 자신을 성숙시키는 그 무엇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강조하며 그는 이웃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힐러리 경의 박애 정신은 그의 인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에베레스트산의 정상을 밟고 난 뒤 그와 동행했던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로부터 네팔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듣고 평생을 교육과 의료, 문화 사업에 봉사했다. 네팔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한 것도 순전히 그의 공이였다고한다.
영국의 5달러짜리 화폐에 그의 초상이 들어있는 힐러리 경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의 제임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렇게 애도했다.
“그는 전설적인 탐험가였고 진정한 관용과 결단력을 가진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사막의 예의범절
롤프 브레드니히의 《위트 백과사전》에는 형식주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미난 예화가 있다. 심한 갈증에 허덕이던 어느 아랍인이 물을 찾아 사막 언덕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나무 그늘 밑에서 넥타이를 팔고 있는 한 유대인이눈에 띄었다. 아랍인은 지친 몸을 끌고 그곳에 이르러 유대인에게부탁했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니 물 한 잔 마실 수 없겠소?”
“나에겐 물이 없소. 대신 넥타이를 하나 사 주시죠? 마침 지금 입고있는 옷에 잘 어울리는 것이 있소.”
아랍인은 숨이 목까지 차며 대답하였다.
“아니, 넥타이는 필요 없소. 물이 더 급하단 말이오.”
그러자 유대인은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넥타이는 그만둬요. 그럼 물을 마실 수 있는 그곳을 알여 드리죠. 이 언덕을 넘어 3km쯤 가면 근사한 식당이 하, 나 있을 것이오. 내 동생이 운영하는 곳이오. 거기 가서 양껏 물을 마시도록 해요.”
아랍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식당을 향해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얼마나 지나서 아랍인이 기진맥진하여 기다시피 하며 넥타이 장수에게로 되돌아왔다.
“당신 몰골을 보니 물을 못 마셨군요. 내가 가르쳐 준 식당을 못 찾은 건가요?”
아랍인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식당은 찾았소. 그런데 당신 동생이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식당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겠다지 뭐요!”
나라를 위한 당대의 라이벌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서로 겨루는 맞수를 라이벌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전적 의미이다. 굳이 그 정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라이벌이라는 개념은 무한 경쟁이라는 틀 속에 갇혀있다. 종전에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전형적인 ‘루즈-윈(Lose-Win)’ 구도 속에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윈-윈(Win-Win)'의 시대이다.
이순신과 원균. 이 두 장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조선의 대표적인 장수였다. 둘은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이 방법은 서로 달랐다. 이순신은 상황 판단과 지략이 뛰어났고, 원균은 장수로서의 용맹성이 앞섰다.
그러나 역사는 원균에 대해 다소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든두 장군에 대해 역사적 논란이 많으나 모두가 난국을 이끈 걸출한 장수임이 분명하였다.
임진왜란 초에 합동작전을 벌렸던 이순신과 원균은 조정에 전장을 보고하는 문제로 반목하게 된다. 삼도수군통제사를 번갈아 맡아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결국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임진왜란 전사에는 두 사람 모두가 다 같이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추대되고 일등공신으로 추서 받았다. 그러나 두 장군이 끝까지 서로를 인정하며 윈-윈 전략을 폈다면 임진왜란의 피해를 극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직원의 친절
도쿄에 있는 무역 회사에 어느 독일 기업의 바이어가 와서 거래 상담을 하는 중이었다. 계약에 앞서 각자 회사의 이익을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중에도 바이어 한 사람이 다른 일 때문에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야 했다.
일본 물정에 어두운 바이어를 위해 무역 회사의 여직원이 기차표 예매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얼마 뒤 바이어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사카로 향하는 길에는 언제나 오른쪽 창가의 자리,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는 반대로 늘 왼쪽 창가의 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바이어가 다시 무역 회사를 방문했을 때 여직원에게 그렇게 예매한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 대답했다.
“후지산이 오사카로 갈 때는 오른쪽에 있고 도쿄로 올 때는 왼쪽에 있거든요. 후지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시라고 일부러 그렇게 좌석을 예매한 겁니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크게 감동한 독일인 바이어는 이 회사에서 최대한 납품할 수 있는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그리고 애초무역 거래액을 4만 마르크에서 1,200만 마르크로 늘려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정도의 직원들로 구성된 회사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친절’과 ‘배려’라고 한다. 친절과 배려가 바로 그 기업의 이미지인 동시에 마케팅 브랜드였다.
파티에서 생긴 일
유럽에 늘 검소하게 지내는 한 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이 학자에게 초청장이 날아왔다. 어느 고관대작이 베푸는 매우 큰 파티에 초대된 것이었다.
파티가 열리는 날 학자는 검소한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파티장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파티는 매우 화려하였다. 오색의 불빛이 찬란하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과 값비싼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학자가 파티장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입구를 지키는 안내원이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아래위를 쳐다보았다. 문제는 그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겨우 아는 사람을 만나 파티장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이 허름한 복장의 학자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으며 술이나 음식을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학자는 그만 파티장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가서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파티장으로 갔다. 이번에는 안내원이 경례까지 하였다. 파티장의 손님들도 인사를 건네주었으며, 심부름하는 이들도 맛있는 음식을 날라주었다.
그 순간 학자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술과 음식에 대고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옷아, 이것들을 네가 먹어라. 사람을 보고 주는 것이 아니라 너를보고 주는 음식이란다.”
좋은 의도와 나쁜 의도
왕이 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신하 두 사람이 죄인을 감옥으로 호송했다. 절망감에 빠진 죄수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못된 왕아!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평생 허우적거려라!”
이때 한 신하가 그의 말을 막았다.
“이보시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소!”
신하들이 들어오자 왕이 물었다.
“그래,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던가?”
그때 죄수의 말을 가로막던 어진 신하가 대답하였다.
“예, 게다가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폐하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까지 하였습니다.”
신하의 말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죄수를 살려 주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때 다른 신하가 말했다.
“폐하, 아닙니다. 그 죄수는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폐하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신하를 나무랐다.
“네가 한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저 사람의 말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폐하, 어찌 진실을 마다하고 거짓을 취하려 하십니까?”
왕은 죄수를 살려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그 죄수를 살리려고 좋게 말했고 너의 말은 사실이나 남에 대한 배려가 적구나. 때론 선의의 거짓말이 악의 진실보다 나은 법이니라.”
작품형 인간
우리 인간을 상품형 인간과 작품형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 상품형 인간은 순간에 민감하고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기 쉽다. 한때 제법 성과를 내고 박수의 환호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다. 순간이 지나면 유행 지난 상품은 재고 처리되고 나중에는 용도 폐기되기에 십상이다.
반면 작품형 인간은 현재의 구체적 성과보다는원칙을 중시하고 신념과 긍지를 지닌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를 인정받는 삶을 산다.
이의 대표적 인물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이다. 그는 17세의 꿈 많던 시절, 형들에 의해 노예 상인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끌려간다.
그는 고위 관료 집에서 노예로 일하면서 주인마님의 유혹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30세가 되기까지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모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통쾌한 복수나 명쾌한 변명도 없었다. 오로지 침묵과 인내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훗날 이집트에 몰아닥친 국가적 재난을 해결하는 총리가 되어 주변과의 관계도 평화롭게 유지하였다. 그 후, 긴 세월을 권력의정상에 머물렀지만, 누구와도 갈등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유혈의 역사를 만들지 않았다.⌟
참된 용기
옛 중국 유방(BC 247~BC 195)과 함께 천하를 통일한 한신(?~BC 196)은 남다른 지략과 남을 포용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그를 대성하게 했다고 후세 사학자들이 평가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매우 가난해 푸줏간에서 일했다.
어느 날, 동네 건달들이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중 하나가 길을 가던 그를 막으며 모욕에 찬 말을 하였다.
“야! 푸줏간 칼을 찬 모양이 그럴듯한데 나에게 덤벼 봐. 만약 싸울 용기가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
한신은 순간 분노가 끓어올라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건달을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큰일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그는 그 순간을 꾹 참았다. 건달이 다시 소리쳤다.
“어서 덤벼 봐!”
건달을 한참 바라보던 한신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가랑이 밑을 기어갔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모두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알아주는 진정한 제왕이 나타날 때까지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지냈다.
한신은 한 고조인 유방을 받들어 큰 공을 세우고 영주가 되어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한신은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했던 건달들을 찾아 벼슬을 주고 자신의 휘하에서 일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너무나 감격하여 죽을 때까지 한신을 충심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한신은 그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자네들에게 받은 굴욕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네.”
피루스의 승리
기원전 3세기에 에피루스라는 나라에 피루스라는 왕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육촌이기도 한 그는 천부적인 군사 전략가였다. 그때 당시 코끼리라는 신무기를 도입해 탱크처럼 잘 운용했다는 얘기도 유명하다. 한번은 ‘아스쿨럼’에서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전쟁을 한번 더하면 나는 망할 것이다.”
이 말이 뛰어난 장군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나중에 로마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는 승리를 일컫는 말로 「피루스의 승리」라고 한다. 실은 무척 불명예스러운 말인 셈이다.
인간에게는 공격 본능이 있다.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전투를 수도 없이 치른다. 사람들은 이따금 목청을 돋워 논쟁을 벌이거나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얻는 것은 감정의 손실이요 잃는 것은 애정과 선의이다.
상대방을 굴복시켰다면 십중팔구는 상대방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경매장에서 어떤 물건을 꼭 사고 싶어 그 가치보다 훨씬 많은 금액으로 낙찰받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때로는 애초예상보다 막대한 대가를 지급하는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현명한 리더는 이렇게 말한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
미터법을 탄생시킨 두 남자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2년 6월 두 남자가 북극과 적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에는 도시마다 다른 저울과 자를 사용했다. 프랑스의 혁명 정부가 도량형의 무질서를 바로 잡기로 하던 차에 과학아카데미는 ‘1m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자오선 길이의 1000만분의 1로 한다.’라고 발표했다.
시대적 사명을 띠고 천문학자 들랑브르(1749~1822)와 메솅(1744~1804)은 파리 북쪽에서 북극까지, 파리 남쪽에서 적도까지 정확한 자오선 측정을 위해 원정대를 조직하여 떠났다. 그 원정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측량 장비를 고성능 무기로 오인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다,
목숨을 건 측량 원정을 마친 들랑브르가 파리로 돌아온 후에도 메솅은 혼자서 이탈리아에 남아 7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과학아카데미는 두 사람의 데이터를 합산하여 ‘만물의 척도’ 1m를 공포하였다. 이로써무게(kg, g)와 부피(kl, l)의 단위가 탄생한것이었다.
그런데 미터법이 하필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으로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논란은 있었으나, 정작 문제는 메솅의 데이터였다. 메솅은 혼자서 1803년에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다시 자오선 측정 원정을 떠났지만, 이듬해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그 뒤, 들랑브르는 메솅의 노트를 검토하다 데이터가 조작되었음을 발견했다. 정확성을 생명으로 삼는 들랑브르는 힘을 다해 메솅의 오류를 수정하여 마침내 미터법을 완성했다.
노벨상의 에피소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건설과 파괴의 기술 발전에 모두 공헌한 사람은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다. 그는 다이너마이트 발명과 유전 개발로 떼돈을 벌었지만,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이 홀로 살았다.
그의 유언으로 마련된 노벨상은 전 세계인들이 받기를 염원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유언장이 공개되자 스웨덴 언론이 자국의 재산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비애국적 행위라며 강력히 반대하기도 하였다.
평화, 문학, 물리, 화학, 생리, 의학 등 6개 시상 분야에 얽힌 얘기도 있다. 바로 수학상이 없는 이유이다. 노벨이 사모한 여인이 노벨 대신 수학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또 문학상은 노벨이 취미로 글쓰기를 즐겼기 때문에 생겼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노벨만이 알 뿐이다.
수상자의 자격을 두고도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분야가 평화상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모두 평화상 후보였다. 나치의 유대인학살의 이론적 토대였던 인종 청소 이론을 발전시킨 독일 우생학자 알프레드 플뢰츠도 평화상을 받아 입방아에 올랐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수상 자격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나 수상자에 대해 축하와 존경을 함께 나누는 것이 세계인의 진정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거인의 마음
어느 늦가을 나이가 지긋한 선비가 하인이 끄는 노새를 타고 길을 가다 날이 저물어 주막집을 찾았다. 선비의 차림은 몹시 검소했고, 먼 길을 온 듯 퍽 피곤해 보였다. 선비는 주막집에서 가장 깨끗한 방을 하나 빌려 피곤한 몸을 뉘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 무렵 주막 앞이 떠들썩해지더니, “충청수사(忠淸水使) 행차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청수사는 충청도 지방의 바다를 지키는 해군 대장을 말한다.
주막집 주인은 허둥지둥 달려나가 일행을 맞이하였다. 한 관리가 주인에게 이 집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수사를 모시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더듬거리며 그 방에는 벌써 다른 손님이 들어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관리는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수사님의 행차이신데 손님은 무슨 손님이냐? 잔말 말고 어서 그 방을 비워라.”
결국, 선비가 들었던 방에는 충청수사가 들었고, 나머지 방들은 모두 관리들이 차지했다. 선비는 수없이 관리들이 든 어느 방의 구석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그러나 선비의 얼굴에서는 노여운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선비가 효종 임금의 부름을 받고 이조판서에 부임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고 있었던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이었다. 우암 유고집에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선생이 끝까지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그날 밤을 보냈던 것은 아래 사람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길
석가모니가 수행할 때에 있었던 일이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비둘기가 찾아와 석가모니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저는 독수리의 공격을 받고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석가모니는 파르르 떠는 비둘기를 가엾게 여기며 품속에 숨겨주었다. 잠시 후, 굶주린 독수리가 나타나서 물었다.
“혹시 여기에 비둘기가 오지 않았나요?”
“비둘기라면 지금 내 품에 있지.”
그제야 독수리는 안심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굶어 죽지 않아도 되겠군요. 비둘기를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굶어 죽기직전에 발견한 비둘기입니다.”
독수리를 구하려면 비둘기를 죽여야 하고 비둘기를 구하려면 독수리가 굶어 죽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을지 곤경에 빠진 석가모니는 일대 결단을 내렸다.
“네 굶주림은 비둘기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둘기 정도의 고기만 먹으면 저는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꾸나. 내가 비둘기만큼의 고기를 줄 테니 비둘기를 살려주어라.”
독수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석가모니는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 살점을 잘라 독수리에게 주었다. 결국, 독수리는 배고픔을 채워서 기뻐했고 비둘기는 죽음을 피해서 기뻐했다.
석가모니는 두 생명을 모두 살리는 가장 힘들고 괴로운 길을 선택하고 나서 혼자서 말했다.
“때로는 독수리에게 자비심을 가르쳐야 하는 일도 하고 비둘기에게는 체념을 가르쳐야 하는 일도 해야 하느니라.”
도배지에 남긴 사례
“여보시오. 주인, 후지산이 잘 보이는 방으로 부탁하오.”
때마침 손님이 없는 철이라 주인은 후지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 층 방으로 노인을 안내했다. 잠시 후에 노인은 벨을 눌러 주인에게 종이를 달라고 했다.
“갑자기 종이로 뭘 하시게요?”
주인이 퉁명스럽게 묻자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방의 경치가 너무 좋아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러오.”
귀찮아진 주인은 마침 방을 바르다 남은 도배지를 노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잠시 후 노인이 또 주인을 불렀다. 주인이 투덜거리며 가니 노인은 완성된 그림에 낙관해서 주었다.
“자, 이것은 내게 좋은 경치를 보게 해준 사례요.”
대수롭지 않게 그림을 받아본 주인은 깜짝 놀랐다. 그림의 낙관에는 ‘데사이’라고 씌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당신이 그 유명한 도미오카 데사이시군요. 제가 몰라뵙고 그만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은 급히 사과한 후 다시 최고급 종이를 가지고 왔다.
“여기에 한 장만 더 그려 주십시오.”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청하자 노인은 한 마디를 건지며 붓을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
“그림을 더 그리고 싶은 마음은 이미 사라졌소. 처음 이 방에 들어설 때는 여러 장을 그리려 했으나, 이곳 경치와는 다른 당신의 마음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소. 이 그림 한 장으로 경치에 관한 사례는충분하다고 생각하오.”
말조심
어떤 친구가 생일을 맞아 네 명의 절친한 친구를 초대했다. 그런데 세 친구는 제시간에 도착했으나 나머지 한 친구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자 초대한 주인 친구가 말하였다.
“꼭 와야 할 사람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이 말을 들은 한 친구가 화를 냈다.
“꼭 와야 할 사람이 안 오다니? 그럼, 우리는 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 친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가버렸다. 한 친구는 가버렸고, 다른 한 친구는 아직도 오지 않자 주인은 초조한 나머지 또 말하였다.
“어휴,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이 가버렸군.”
이 말을 듣고 있던 남은 두 친구 중 하나가 발끈하였다.
“이 친구 봐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럼, 가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란 말인가?”
그 친구 역시 문을 박차고 나갔다. 마지막 남은 친구가 초대한 친구에게 우정 어린 충고를 하였다.
“이 사람아, 말을 좀 조심해서 하시게.”
그러자 초대한 친구가 어색해하면서 말했다.
“내 말은 그 친구들보고 한 말이 아닌데”…….
그러자 마지막 남은 친구마저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고는 이렇게 화내며 나가버렸다.
“뭐야? 그럼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나 원, 기가 막혀서…….”
명콤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혼다가 처음 창업할 때 하드와 소프트의 두 전문가가 만나 의기투합을 했다. 기술 전문가인 혼다 소이치로가 말했다.
“나는 본래 기술자라 경리나 영업 분야는 전혀 모르네. 돈에 관한 한 전부 자네에게 맡기네. 잘 부탁하네.”
나중에 전무가 된 후지사와가 말했다.
“나는 기술에 관한 것이라면 장님일세. 그러나 영업 관계라면 경험이있지. 사장에게 자금 걱정은 시키지 않을게. 소신껏 세계제일의 오토바이를 만들어 주시게. “
“좋네. 결정됐네.”
“좋네. 해 보세.”
두 사람은 힘찬 악수했다. 그 후 혼다는 공장에서 기술 개발에만 몰두하고. 후지사와는 자금 조달과 판매에 전력하였다. 혼다 사장은 사장실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도장을 후지사와 전무에게 맡긴 채 의심 없이 자기 일만 몰두했다.
한편 후지사와도 혼다에게 자금 걱정은 시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명콤비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풀어나갔다.그래서 세계 제일의 오토바이 메이커가 탄생했던 것이었다.
혼다가 사장을 그만두었을 때 후지사와도 부사장직을 물러나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박수를 보냈다.
“혼다는 회장으로 후지사와는 사장이 되는 것이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가 물러날 때를 아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진짜 죄인
나폴리에서 총독이라는 막강한 지위에 있는 오수나(1746~1828) 공작이 한번은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죄수들이 노를 젓는 배를 시찰하고 있었다.
오수나 총독은 죄수를 한 사람씩 불러서 어떤 죄를 짓고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죄수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곳에 잡혀 왔습니다.”
“저는 함께 죄를 지은 자가 저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워 이렇게 혼자잡혀 와 고생하고 있습니다.”
어느 죄수는 이렇게 항변하였다.
“전 무슨 죄를 지은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죄수만은 이렇게 말했다.
“총독님, 저는 돈이 탐나서 남의 지갑을 훔친 죄인입니다. 그 벌을지금 달게 받고 있습니다.”
그 죄수의 말에 감동한 총독이 부관에게 명령하였다.
“오, 이 사람은 진짜 죄인이군! 그러니 그를 여기서 끌어내서 배 밖으로 데려가게. 여기에는 이 사람 말고는 죄인이 하나도 없는데 그냥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이 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죄를 솔직히 시인한 죄수만이 오수나 총독의 선처를 받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밝은 미소의 세상
백화점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존 워너메이커(1838~1922)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직원 채용 광고를 보고 한 청년이 회사를 찾아왔다.
워너메이커는 직원을 채용할 때 직접 면접을 보는데, 청년은 그의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Yes” 또는 “No”라고 적절하게 대답했다. 학력도 좋고 용모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임원들도 누구나 청년의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워너메이커는 청년에게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좋은 인재인 것 같은데 어디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워너메이커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청년은 내 질문에 ‘Yes, No’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을 뿐, ‘Yes Sir, No Sir’라고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틀림없이 고객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을 걸세. 그런 사람을 어떻게 친절을 신조로 삼는 우리 회사에 고용하겠나?”
말은 천 냥 빚을 갚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하더니 워너메이커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월요일에 사장이 기분 좋게 ‘안녕!’ 하고 인사하면 직원들은 일주일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사장의 밝은 모습이 전염되어 직원들은 모두 즐겁게 일하고 회사는 번창에 번 창을 거듭하는 것이지.”
숨겨 둔 선물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요하네스 브람스의 아버지는 호른과 더블베이스를 연주하는 유랑 악사였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며 훌륭한 작곡가가 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아버지는 브람스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에도 자신이 직접 연주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생활했다. 브람스는 몇 번이나 용돈을 드리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받지 않았다.
연주를 위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던 브람스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브람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못했던 대화를 나누던 끝에 브람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급한 일이 생기시면 저기 책장에 꽂혀 있는 헨델의‘사울’이란 옛 악보를 펼쳐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필요로하시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후, 브람스의 아버지는 혼자서 끙끙 앓다가 예전에 아들의 말이 생각나서 책장에서 낡은 악보를 찾아 펼쳐 보았다. 과연 악보 속에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가득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책장을 넘기며 아들의 이런 세심한 배려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브람스는 아버지를 위해 책갈피마다 지폐를 정성스럽게 끼워 놓았던 것이었다.
아들의 초상화
매우 값진 예술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굉장한 부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평범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은 청년기를 지나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빠져 앓다 누웠고 몇 주 후에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아버지의 유언은 모든 재산을 경매로 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예술품 중에서 유화로 된 아들의 초상화를 첫 번째 경매로 붙이라는 단서를 걸어 놓은 것이었다.
소문난 수집품을 사기 위해 널리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유언에 따라 소년의 초상화가 제일 먼저 경매에 올려졌다. 그러나 죽은 소년의 초상화에는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소년을 무척 사랑했던 늙은 흑인 하인이 75센트에 소년의 초상화를 샀다. 다른 경매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은 그 흑인 하인에게 단번에 팔렸다.
바로 이때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모든 경매는 중단되었다.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곧이어 유언이 공포되었다. 유언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내 아들의 초상화를 살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재산을 다 주어라.”
얼룩으로 만든 벽화
19세기 중엽 북스코틀랜드에 멋진 사냥터를 가지고 있던 한 부자가 친구들을 초청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성과 사냥터도 자랑할 겸 사냥 대회를 열어 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성대한 만찬으로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흥겨운 음악과 떠들썩한 분위기에 취한 한 친구가 소다수 병을 열다가 그만 실수를 하여 새로 칠한 벽과 천장에 소다수가 모두 튀어 버렸다. 몹시 화가 난 주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분위기가 썰렁해 모두 제 방으로 흩어졌다.
소다수는 보기 싫은 누런 반점들을 남기고 말았다. 특히 사건의 장본인은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친구들은 모두 성을 떠났지만 단 한 사람만이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에 남았다. 그는 한동안 보기 싫은 벽을 쳐다보더니 유화 물감을 가지고 흉한 얼룩들을 하나씩 멋지게 솟아 있는 바위로 만들기 시작했다.
바위에 물거품을 튀기며 흐르는 냇물을 그렸고 가장 심한 얼룩이 있는 곳에는 달리는 수사슴을 그려 넣었다. 벽화가 완성되었을 때 보기 흉한 얼룩이 멋진 그림으로 변한 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는 주인에게 그는 넌지시 말했다.
“그 친구는 아직도 매우 상심하고 있을 걸세,”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의 친구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아름다운 성으로 다시 몰려든 친구들은 흉한 얼룩이 멋있는 그림으로 변한 것을 보고 하나같이 감탄하였다. 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유명한 동물화가 애드윈 헨리 랜지어 경이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2004년 일본 니가타에 리히터 6.8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65명, 부상자가 4,8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유타라는 두 살배기와 어머니가 바위에 깔려 있다는 소식에 일본 열도가 가슴 졸이며 모자(母子)의 생환을 기원했다.
그때 유타의 할머니가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명랑하게 집을 나갔던 유타가 엄마와 함께 건강하게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여러분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라크 테러 조직에 납치됐던 일본인 고다 씨가 많은 사람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해됐을 때 가족들이 내놓은 성명이 이러하였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2009년 11월에 부산 사격장 화재로 7명의 목숨을 잃은 일본인 유족들이 슬픔을 절제하는 모습도 보도되었다. 즐겁게 해외여행에 나섰다가 졸지에 타국에서 죽음을 맞았으니 얼마나 기막히고 분통 터질 일인가. 그러나 일본인 유족들은 침통하게 무릎을 꿇은 채 생각에 빠지거나 가족끼리 둘러앉아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소학교 사회생활 교육의 1장 1절에 이런 교육을 받고 생활화한다고 한다.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태도에는 이런 뜻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작은 친절로 얻은 선물
비가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고급 리무진 한 대가 미국의 뉴저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리무진은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더는 갈수가 없게 되었다.
리무진의 운전사가 무척 당황해하고 있을 때 이쪽으로 트럭 한 대가 오고 있었다. 트럭 운전사는 차에서 내려 리무진을 찬찬히 돌아보더니 마침 준비해 다니던 공기펌프로 타이어에 바람을 넣어주었다.
이때, 리무진의 유리창이 스르르 열렸다. 트럭 운전사는 깜짝 놀랐다. 리무진 안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도날드 트럼프(1945~)였기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부동산개발업자로 호텔과 카지노 등 2만 5천 채가 넘는 임대 아파트 등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억만장자였다.
트럼프는 트럭 운전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트럭 운전사는 아내에게 장미꽃 열두 송이를 보내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이튿날,트럭 운전사의 집에 아름다운 장미꽃 스물네 송이와 예쁘게 포장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 당신 남편의 친구 도널드 트럼프로부터.」
그리고 뒷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당신이 사는 집값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더군요.도 와주셔서 고맙다는 뜻으로 제가 오늘 모두 갚았습니다.」
세계적 육상 선수
미국의 앨라배마주 버밍햄 도심지를 매일 달려서 등하교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이 사는 도시는 교통 사정이 너무나 좋지 않아 교통지옥이라고 불리만큼 몹시 불편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도둑이 들어 그만 그의 교통수단인 모터사이클을 훔쳐 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뒤, 그는 다시 자전거를 샀으나 그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화가 난 소년은 다시는 오토바이를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12㎢나 되는 먼 길을 매일 뛰어다녔다. 그러니까 하루에 왕복 24㎢나 되는 길을 달린 셈이었다.
그는 청년이 되어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세계 올림픽 경기에서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여 4관왕의 위엄을 달성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4차례 연속 세계 올림픽 대회에 출전하였으며, 그가 혼자서 딴 금메달 수만도 무려 9개나 되며, 1개의 은메달을 추가하면 모두 10개의 메달을 따는 등 어느 육상 선수도 흉내 낼 수 없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육상 선수 칼 루이스(1961∼)이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도둑도 달리기만은 훔쳐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발사요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사관학교 2학년이었을 때 일이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상급생들이 신입생들을 붙잡고 기합을 넣고 호통을 치며 군기를 잡곤 했다.
하루는 신입생 한 명이 뛰어가다가 아이젠하워를 들이받았다. 아이젠하워는 그를 세워놓고 소리 질렀다.
“너는 명예로운 사관생도라기보다는 시시한 이발장이 같은 녀석이로군!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자 그 신입생은 어깨를 탁 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선배님! 저는 이발사였습니다. 저는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발사로서 가족들을 부양해 왔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설마 이발사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었다. 자신은 지금 남의 생계를 모욕하고 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 숙소로 돌아와 자기 방에 홀로 앉아 다시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언행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교만에는 후회가 찾아오고 겸손에는 지도력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그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을 깨닫게 하는 큰 교훈이 되었다.」
코코아 잔을 나르는 전직 대통령
세계 2차 대전(1939년) 때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희생되었다. 전쟁은 참혹했고 병력은 부족했다. 지방의 많은 젊은이는 영장을 통고받고 큰 도시로 집결하여 기차 편으로 훈련소에 집결하였다.
당시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젊은이들은 태운 기차는 주로 밤늦게 출발하였다. 그래서 밤이면 워싱턴 유니언기차 정거장에는 수많은 사람으로몰려들었고, 시민들은 이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다리를 절며 뜨거운 코코아 잔을 쟁반에 담아 매일 밤늦도록 이들에게 봉사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임시로 마련된 주방에서 직접 코코아를 끓이기도 하였다.
노인을 자세히 쳐다보던 한 젊은이가 그가 보통 노인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각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닙니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서른아홉 살 때 두 다리가 마비되어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편한 몸으로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훈련소로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들고 다니며 봉사하였다.
대통령이 친히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따라주는 코코아를 마신 젊은이들은 감격하였고 사기는 충전하여이렇게 외쳤다. “이 전쟁에서 미합중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