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 2학기에 풍납토성 내의 실습을 위한 시굴조사 경험 후 4학년 졸업 해가 다가왔다. 우선 졸업논문을 작성해야 했다. 스승께서 졸업반 학생들을 고고학 전공팀과 인류학 전공팀으로 나누어 공동 논문과제를 내주셨다. 나는 고고학팀의 일원으로 지금의 부천시 소사읍 범박리에 있었던 소위 신앙촌의 쓰레기장을 발굴하게 되었다.
쓰레기장을 발굴하게 된 것은 오늘날을 선사시대로 가정하고 현대 생활에서 나온 쓰레기를 발견했을 때 대응방식을 강구하는 가상의 실습이었다. 말하자면 현재의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 주민들의 오물 처리장을 발굴조사하고 이를 해석해 내리는 결론을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또 신뢰도는 얼마나 될 것인지 등을 거꾸로 풀어보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연습 효과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은 주민의 이동이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 장기간 일정한 장소에서 쓰레기를 버린 곳이어야 했다. 시간과 경비상 제약을 감안한 차선책으로 우리는 소사 제1 신앙촌을 택했다.
이곳은 신앙인들만의 집단 정착촌으로 1957년 형성된 이래 1965년 우리들이 조사할 당시에도 번창하고 있었다. 물론 1957년에 만든 쓰레기장이 우리가 조사를 나갔을 무렵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신앙촌이 있는 마을은 사방이 구릉으로 둘러싸인 말발굽형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분지 중앙에는 수원지(水源池)와 공장이 들어서 있고 이를 중심으로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주택과 크고 작은 건물들은 구릉 중턱에 마치 원형 경기장의 객석 같은 모양새로 들어서 있었다. 소위 노고산이라고 불리는 산 정상에는 오만제단(五萬祭壇)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곳 신앙촌의 특수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대학시절 얘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겠다. 한.일협정 반대, 군사 독재정권 타도 데모 등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대학졸업 후 군 복무를 걱정해서 졸업 후 장교로 복무할 수 있는 학도 군사훈련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3학년 1학기부터 학교에서 간단한 군사훈련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964년 한.일협정 반대 데모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하루는 학군단 생도들이 군사교육을 마치고 모여 군가를 부르면서 행진을 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학군단장인 현역 대령이 따라오면서 나는 처자가 있는 몸이니 나를 살려주는 셈치고 해산해 달라고 하소연하던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학군단 생도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이다. 학군단은 준군인의 신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행진은 청와대까지 가는 데모로 이어졌다. 동숭동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 네거리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대열에서 나는 당시 경기도 청사(지금의 문화관광부 건물 바로 곁에 있는 소시민 공원 터에 위치)앞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료가 바로 청사의 응급실로 나를 옮겼고 포도당 주사를 한 대 맞고 깨어났다.
데모가 있은 후 급기야 위수령이 발동되고 학교가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1964년에 일어난 소위 6.3사태다. 학군단 4기생인 우리는 위수령 발동으로 생긴 교육시간 공백을 야영 훈련으로 보충해야 했다. 우리가 속한 101학군단이 들어간 곳은 수색에 있는 모 예비사단이었다.
난생 처음 심한 훈련을 받으며 모두들 보복성이라고 믿었다. 체력단련을 명분으로 한 구보는 다반사였고 형언하기 어려운 별별 기합을 다 받았다. 그때 모기에 복부 왼쪽을 물려 심하게 곪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에 위생실로 가서 치료하면 되었을 것을 참다 결국 터졌고, 그것을 손으로 짜내고 소독도 덜된 솜뭉치를 쑤셔 넣고 하면서 억지로 견딘 게 화근이었다.
그때의 상처가 지금도 3㎝ 넘는 흉터로 남아있다. 어쨌든 내가 3주간의 야영훈련을 끝내고 나왔을 때는 완전히 진이 빠졌다. 몇몇 동료들과 간 곳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앞의 쌍과부가 운영하는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식당이었다. 음식점의 작은 물 컵에 막걸리 3잔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했다. 그런 세월을 흘려보내고 졸업 학년이 되었으니 내 감회는 남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