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노래]
죽은 시인의 사회
존 키팅- 선생님, 나머지 학생들
(존 키팅)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이여. 이게 누구 시에 나오는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나?
전혀 모르겠나? 이것은 에이브라함 링컨을 찬양한 월트 휘트먼의 시다.
자 이 수업에서는 나를 키팅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아니면 대담하게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이라고 불러도 좋다."
"詩 - 시간을 버는 소녀에게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시간은 흘러 오늘 핀 꽃은 내일이면 질 것이니."
(존 키팅)
"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이걸 라틴어로 표현하면 '카르페 디엠' 이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믹스)
" '카르페 디엠', 그것은 현재를 즐기라는 말입니다."
(존 키팅)
"'현재를 즐겨라',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왜 시인이 이런 말을 썼지?"
(찰리)
"그건 시인이 성질이 급해서요."
(존 키팅)
"아니, 땡, 대답에 응해준건 고맙네. 왜냐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여기 있는 우리 각자 모두 언젠가는 숨이 멎고 차가워져서 죽게 되지."
(역대 선배들의 사진을 쳐다보며)
(존 키팅)
"이쪽으로 와서 과거의 얼굴들을 지켜봐라. 여러번 이 방을 왔어도 유심히 본 적은 없었을 거다. 너희와 별로 다르지 않을거야. 그렇지? 머리모양도 같고, 너희처럼 세상을 그들 손에 넣어 위대한 일을 할거라 믿고, 그들의 눈도 너희들처럼 희망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시기를 놓친 것일까?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는지 오래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잘 들어보면 그들의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자, 귀를 기울여 봐, 들리나? 카르페, 들리나? 카르페,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존 키팅)
"쓰레기! 그게 J. 에반스 프릿차드에 대한 나의 견해이다. 재는 것이 아니다. 시를 어떻게 아메리칸 탑 텐처럼 평가할 수 있겠나? '오, 난 바이런 시는 42점짜리라 안 좋아해' 자, 이제 그 장을 찢어 버려라. 어서, 몽땅 찢어 버려.
(달튼이 책을 찢자)
(존 키팅)
"고맙네. 달튼군. 여러분. 그 페이지 말고도 서문 전체를 찢어 버려라. 서문은 오늘로 끝이니 완전히 찢어 내 버려라, 찢어 내버려! 프리챠드 박사님을 없애거라. 찢어 내버려. 프리챠드 박사님을 쫓아내는 소리가 듣고 싶다. 찢어 내서 화장지로 써야겠다. 이건 성경이 아니야이런다고 지옥에 안 가. 어서 찢어, 깨끗이 찢어 버려라. 하나도 남김 없이."
(존 키팅)
"이제 여러분은 이 수업에서 생각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말과 언어의 맛을 배우게 될 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과 언어는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다."
(존 키팅)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다.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자면..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닐)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속에 왔다.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기 위해 사려 깊게 살고 싶다."
(찰리)
"동의합니다."
(닐)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
나는, 우리는 시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나는, 우리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우리는 시인으로 죽을 수 있을까요?
나는, 우리는 시인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스피커 볼륨을 높이세요. 노래가 나옵니다.
곡명: 죽은 시인 노래: 연영석 음반: '숨' 음반이 판매 중입니다. 많이 사세요!
|
▶▷ [낯선 영화? 살 같은 영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swallow tail butterfly)
감독: 이와이 슌지 (岩井 俊二)
우울한 빈곤
마치 매일 비가 내리는 것같은 차가운 거리에 슬픔에 얼어버린 아게하가 서 있다.
우울이 넘치는 텅빈 거리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게하가
"나는 몸(마음)이 아파."
하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보호하던 울타리가 사라진 엔타운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낯선 여자를 따라가다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뺨을 맞지만 얼어버린 아게하의 눈에서 흘러내릴 눈물은 없다.
하지만 얼음 피아노 위에 선 듯한 아게하의 고통을 맨처음 알아본 사람은 형제를 잃어버린, 그녀를 팔아버리고자 나섰던, 창녀 그리꼬다.
그리꼬는 여린 팔뚝을 내밀고 헤시시(마약)를 맞는 어린 창녀들을 보고 그녀를 처분하려던 마음을 바꿔 아게하를 구출해낸다.
엔의 천국
일본의 엔이 달러의 가치를 넘어섰을 때 전 세계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엔을 목적으로 한 지역에 몰려들었다.
엔을 목적으로 온 3세계 이방인들을 멸시한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엔타운이라는 거친 이름을 붙여주었다.
버블이 한창인 때 일본에 ?! 돠幣? 아메리카의 흑인, 혼혈아, 시인, 중국 농민, 한국의 밀항자, 열대의 동남아 도시에서 몰려온 노동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창녀, 마약 밀매상, 자동차 도둑, 갱으로 발전(?)해간다.
하지만 시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자연처럼 그렇게 소멸하고 커 나간다.
차가운 유치장에서 마이웨이를 부르면 죽어가는 페이홍처럼, 가슴에 그려진 애벌레 하나를 키워 나비를 만든 아게하처럼.
영화는 몇 개의 장면을 지나 천진한 미소를 짓는 그리꼬의 흑인 친구가 아게하에게 첫 일을 맡기면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는 엔타운 수호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어져간다.
아게하는 한 걸음, 두 걸음, 불안한 발을 내딛으며 망가진 우산을 모아서 페이홍의 자연적인 신호(언제 생겼는지 모를 관절염)에 맞춰 그것을 팔러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엔타운의 수호신이 한 예언처럼 야쿠자의 죽음을 통해 중국 인구 수 만큼 불어나는, 돈을 찍어내는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하고 돈의 홍수에 묻혀 꿈에 그리던 홀을 인수하고, 엔타운의 마돈나 그리꼬를 가수로 데뷔시킨다.
아게하의 나비
갱들에게 ! 구역은 때로 죽음과 삶 사이에 놓여있는 운명의 강이 된다.
갱들이 나눈 구 역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아게하의 마약 상 엄마는 경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역광이 가득 들어오는 창가 침대에 나비 문신을 원하는 창백한 표정의 아게하는 외국의 이방인으로 살다 사라져간 엄마를 회상하고 있다.
회상의 중심엔 두려움과 절망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꼭 다문 그녀의 입술엔 생을 향한 끈을 놓지 않겠다는 어린 소녀의 염원이 묻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에 대한 두려운 시선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던 아게하는 페이홍이 찍어낸 지폐 중 남아 있는 몇 장을 헤시시(마약) 골목의 의사에게 쥐어준다.
"돈은 이거 밖에 없어요."
의사는 그녀의 불안을 알아채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신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일 뿐이라며 그녀가 건넨 세 장의 지폐 중 두 장을 그녀의 흰 셔츠 주머니에 차례로 넣어주며
"이건 오른 쪽 날개, 이건 왼쪽 날개 몫! 몸통은 내 몫이다. 어차피 난 더 이상 날지 못하니까."
하고 말하면서 그녀의 우울까지 달래준다.
아게하가 의사에게
"문신 새기는 것도 의사가 하는 일인가요?"
하고 묻자 그는
"아니! 다른 재능이 필요하지. 우선은 그림을 그리는 ?! 榮?, 그리고 점쟁이의 재능이."
하고 말하면서 그녀가 "섬세하게 세공하기 좋"은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해준다.
그리고 역광이 비추는 창가에서 흐르는 땀을 닦는다.
아게하의 작은 가슴 사이에 스왈로우테일이 새겨지는 동안 열기 속에서 똑 떨어진 땅 방울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노트의 글자 두 개를 지웠고, 그녀의 얼굴과 눈에 흐른 물방울은 헤시시 골목의 의사가 닦아주었다.
하지만 경찰서 유치장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페이홍이 복수를 다짐하며 죽어갈 때 그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를 화장할 때 그의 애인 그리꼬의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페이홍의 마이웨이가 쏟아져 내리던 다음날 아게하는 경찰에 출두해 차가운 표정으로 엔타운으로서는 처음 죽은 그가 누구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가난을 자연으로 받아들여 자유로울 수 있었던 페이홍이 떠나는 날 그를 배웅한 것은 그리꼬를 상징하는 커다란 나비였고, 아게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고통스런 지폐를 모두 불태워 페이홍을 위로한다.
영화가 끝날 즈음 일상의 흐름도 ! 놓치지 않는 감독 이와이 순지는 아게하로 하여금 쇼핑을 다녀오게 하고 그 리꼬의 오빠를 만나는 자리에서 중국 인구 수 만큼 불어날 수 있는 테이프(돈을 찍어낼 수 있는)를 건네준다.
그리고 서로 닮은 운명과 이름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깽을 향해
"내 이름은 그리꼬가 지어줬어요. 알죠? 창녀, 그리꼬."
라면서 다리를 건너간다.
혜어지는 공간이 다리인 것은 그곳이 그들의 운명을 가르는 장소로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분노하는 이와이 순지의 열정과 사랑의 시선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페이홍을 위해 꽃을 준비하는 그리꼬와 아게하의 씬인 것같다.
안녕 페이홍!
...
글을 쓰고 난 후 이 여름 동안 좋아하는 팥빙수를 한번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여름 동안 매일 빙수를 먹기로 했다.
어젯밤 꿈에 두 번이나 아이스크림가게에 가는 꿈을 꿨다. 글쓴이.. 도도네~~~
|
▶▷ [함께 사는 세상] "후원금
"
언젠가는 후원금에 대해서 한번 얘기하고 싶었다.
후원금이라 하면, 여러 사람이 정성을 모아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얻도록 지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는 도움 받을 대상과 깊은 관심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보람 있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어려웠던 그때의 씁쓰레한 기억이 떠오른다. 지하 월세방으로 5~6개월 마다 전전긍긍 했을 때였다. 야학에서 나의 딱한 처지를 알고 도움의 손길을 뻗쳐왔다. 사실 급한 돈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엄마가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병원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급한 마음에 “그 돈을 나에게 지금 주시면 안 되겠냐?”고 여쭤보니, “학생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결국 주시지 않았다. 어차피 날 위해 주실 돈이라면 내가 정말 급하고 필요할 때 주셔야 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한참 후,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나에게 지원해주는 차원으로 대학 입시 교과서를 한보따리 갖다 주었다. 그 책 보따리 무게가 대단해서 이사할 때 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버리지도 못하고, 초등학교도 못 다닌 애가 대입 교과서를 볼 수도 없고... 눈물을 머금고 결국은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으로 돕고 싶었다면, 조금의 성의가 있었다면. 대화가 있었다면, 관심이 있었다면 여러 사람이 정성을 모아 전해준 마음이 쓰레기로 둔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고두고 감사받아 마땅하며 기억되어야 하는 후원금.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칭찬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용기와 뼈와 살이 되어야하는 기부금. 결코 받는 사람에게 부담으로 느껴지거나 쓰레기로 버려지는 일이 없어야하는 후원금이 되었으면...
오늘도 누가 누구에게로 기부금을 전달하고, 또 받고 있을 것이다. 찬란한 빛이 그들 모두에게 맴돌기를 바란다.
*복자씨는 인권센터 회원입니다.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에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매달 풀어 놓습니다.
|
▶▷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디푸의 한국 생활"
1994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할까 고민 중에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신문을 보고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한국에 이주노동자 필요 있다고 해서 한국에 오고 싶었다.
‘한국에 오면 돈 많이 벌 수 있다!’
3년(산업연수생, D-3비자)동안 돈 많이 벌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서 조금마한 사업하고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한국 땅에 온 것이다.
그래서 3년 동안 기다렸다가 처음의 약속한 돈(200만원)보다 더 많이 주고(여행사에 600만원) 한국 땅에 97년에 왔다. 3년 동안 지연된 것은 브로커가 때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오기 전에 생각하는 거, 드림(꿈)을 생각했던 거 다 거짓말이다.
산업연수생으로 17만원을 받고 2년 4개월 동안 일했다.
밤 10시 늦게까지 일하다가 오른팔을 다치고 산재처리도 받지 못했다.
한국식당에서 한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힘들었다.
산업연수생제도 만료 8개월 전에 어쩔 수 없이...
그래서 내가 스스로 해방했다.
한국에 오기위해 쓴 돈을 값기 위해서였다.
여러 공장을 비자없이 일하고 돌아다녔다.
이 공장 저 공장에서 1년 6개월 일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얘기하다보면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너무 많다. 이 지면에 모든 것을 쓸 수 는 없다.
내 문제 생길 때마다 이런 느낌을 받았다.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이주동지의 여러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이주노조활동에 대해 내 마음을 준비하였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8개월 동안 일하지 않고 계속 한국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주노동자의 권리와 전면합법화를 위해서 싸우고 그 다음에 공장으로 돌아갔다.
5개월 일하다가 3개월 월급 받고, 2달치 월급 못 받고, 지금은 월급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고 사장은 월급 안주고 공장을 팔아버렸다.
‘왜 월급주지 않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다.
‘가난한 나라에서 왜 태어났을까? 안 그랬으면 이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일할 필요가 없을 텐데’
정말로 억울하다.
한국은 너무 힘들다.
어렵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아파도 돌아다니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일하지도 못하고... 이 모든 건 비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주노조 활동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주노동자가 한국 땅에서 이렇게 차별받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월급 받지 못하고 살고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한다.
이번에 비회원이 썼습니다.
|
▶▷ [회원의 일기장] "난 잔차만 타면 넘 행복해"
어린 시절 길거리에 버려진 타이어도 없는 잔차(자전거)를 타고 수없이 넘어지며 잔차를 배웠고, 잔차를 어느 정도 탈 수 있을 때 아버지를 졸라 잔차를 가질 수 있었다.
초등학생의 걸음으로 조금은 힘들고 멀었던 등굣길이 그때부터 가볍고 좋았던 것 같다.
지금도 난 잔차를 타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자주 잔차를 타진 못하지만 조건(?)이 허락하면 난 어김없이 잔차를 타고 어디든 간다.
일상이 자유롭던 때에는 거리와 시간을 상관하지 않고 늘 잔차를 타고 움직였던 것 같다.
청주에 있는 후배를 만나러 갈 때도, 대학로에서 진행했던 노동절 집회 때도, 매향리, 평화캠프, 여름휴가, 토론회, 모임, 데이트, 출퇴근 길 그 어디든 갈 곳이 있으면 항상 잔차를 타고 그곳을 향했다.
가고 싶었던 곳이든, 즐거운 장소든, 어려운 곳이든, 가기 싫은 자리든, 비가오든, 눈이 오든 잔차를 타고 갈 때는 아무리 멀고, 힘이 들어도, 즐겁고 신나게 잔차를 타고 그곳을 향했다.
잔차만 타고 집을 나서면 언제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여유를 가졌고, 환경걱정, 교통걱정, 주변걱정, 기름걱정, 주차걱정, 사고걱정 등 자동차를 운전하며 겪는 많은 신경쓰임에 대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그 무엇을 잔차는 나에게 주었다.
현재 난 잔차를 자주 타지 못하고 있다.
하는 일의 특성상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고 있고, 함께 사는 사람이 자동차를 좋아해서 함께 이동 할 때 자주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다.
한때는 사무실 출퇴근만은 잔차로 해 볼 생각도 했지만 매일 출근하는 곳이 일정치 않아 그것도 쉽지 않다.
또한 자주 잔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만큼 잔차에 대한 습관과 욕구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난 3년 전의 나로 돌아가 화석연료 차 대신에 잔차로 도심 한복판의 도로를 맘껏 누리고 싶은 이들이 모여 차에게 빼앗긴 도로를 잔차가 되찾는 축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일명 두발과 두바퀴로 다니는 떼거리(일명‘발바리’ - bike.jinbo.net)들이 매달 모여 서울과 수원 등의 도심에서 벌이는 떼거리 잔차질에 참여하는 것이다. 잔차를 타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잔차를 타고 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도심 한복판에 모여 각자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으로 잔차와 자신을 치장하고 도로를 내달리고 있다. 자동차로 꽉 막힌 토요일 도심 한복판에서 차선 하나를 잡아먹고(?) 떼거리로 잔차 타는 기분은 혼자 잔차를 탈 때 자동차에게 위협당하며 도로에서 항상 약자인 잔차가 항상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나는 떼거리 잔차질을 통해 예전의 잃어버렸던 잔차질에 대한 소중함을 되찾아 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삶의 활력소와 에너지를 충전하고, 활동에 대한 다양한 모색과 실천을 고민하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잔차만 타면 넘 행복해”
*이번 달 <회원의 일기장>은
김재욱 회원(=사시미 혹은 사심 혹은 사슴)의 글입니다. 경기서부지역건설노동조합 조직가입니다. 그런데 '잔차'가 뭔지 아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