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부처님이 설하신
6백부 반야부 법문을 요약해서 편집된 경전입니다.
이 경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존자가
부처님께 법문을 청하여 설해진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45년간 법을 설하셨는데,
그 가운데 반야부 법문을 21년간이나 설하셨습니다.
그러니 법을 청한 수보리 존자는 어느 제자보다도
큰 제자였습니다. <금강경>을 독송하다보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 나옵니다.
급고독 장자가 건립한 기원정사로 부처님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무시며 반야부 법문을 설하십니다.
수보리는 바로 급고독 장자의 동생인 수마나의 아들로
사위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수보리는 급고독 장자가 건립한 기원정사에서
첫 법회를 여는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합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에는 성격이 모질고
포악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뭐든지 눈에 부딪히면 싸움을 했습니다.
기울어진 나무가 있으면 '왜 이 나무는 반듯하지 않느냐'며
화를 내곤했습니다.
이런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자애 선정' 공부를 시킵니다.
수보리는 자비심을 닦아 아라한과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서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해공제일(解空第一) 제자가 됩니다.
수보리는 자애선정을 닦아서 시비가 뚝 끊어진 이후부터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남방 팔리어 경전에 보면
'공양을 받는 데는 수보리가 제일이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십대제자들이 공양을 얻지 못할 때도 수보리 존자가 가면
시주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자애선정을 닦아 성취하고 나니
모든 사람들이 수보리 존자에게 서로 공양을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수보리 존자가 젊었을 때 일이고,
<증일 아함경>에서는 중년기 이후에 들어선 수보리 존자를 '
무쟁삼매 제일(無諍三昧第一)'이라고 했습니다.
<금강경> 제9장에서도 '무쟁삼매 제일'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쟁은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이 수보리에 대해 입증하시기를
'해공제일'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
'자애선정 제일'이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무쟁삼매 제일'이라고 하고
또 <아함경>에서는 '해공제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질이 못된 이가 부처님으로부터 자애선정 가르침을 받아
선정에 들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자애선정 제일이라고 했고,
자애선정이 이뤄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시주를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수보리에게만
시주를 하려고 하여 공양제일이라고 했고,
그 뒤로부터 수보리에게는 마음속 에 다툼 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무쟁삼매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툼이 없어진 근원을 찾아보니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글자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금강경>만 보면 공의 도리를
설명한 경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수보리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선현(善現) 선업(善業) 선길(善吉)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하고 위대하게 사신 분이며,
가장 청정한 업을 가지신 분이고,
이 분을 만나기만 하면 좋은 일만 쏟아지는 분이란 뜻입니다.
오늘 <금강경> 설주이신 수보리 존자에 대
해 공부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이후부터
좋은 일이 선근이 되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런 수보리가 <금강경> 첫 장에서 부처님께 청합니다.
"이세상은 어떻게 살아야 되며,
마음은 어떻게 써야 됩니까(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첫째 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둘째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간단하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수보리의 물음에 부처님은 32장에 걸쳐서 설법을 해주십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사는 법과
마음 쓰는 법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사는 법에 대해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하라' 합니다.
마음을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하라.
베풀면서 살아라, 복을 지으면서 살아라는 뜻입니다.
잘 살고 싶으면 복을 지어야 됩니다.
복은 지으면 잘 살게 됩니다.
이 세상 누구를 막론하고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복을 짓지는 않고 잘 살겠다고만 합니다.
다음으로 마음을 어떻게 쓰고 살아야 될 것인가.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하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주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공 도리가 뭐냐?
'먹은 마음 없이 마음 쓰는 것' 이것이 공 도리입니다.
<금강경>에서 '먹은 마음 없이 베풀고,
먹은 마음 없이 상대와 더불어 사는
이 사상이 다름 아니라 공 사상'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아상(我想)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네 가지 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상이 없으면 보살이고,
가지면 중생입니다. 행자시절 공양주하던 때였습니다.
설거지를 하는데 자기 밥그릇은 한 번 더 행궈요.
자기하고 남과의 차이가 이렇게 나더군요.
그래서 행자 때 그것을 느끼고 나서는 똑같이 했습니다.
"아, 인간이 이렇게 생겼구나"
그러나 아상 없애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그 중 하얼빈 731부대에서 생체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 안고 있는 엄마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모성애가 얼마나 강한지 보려고요.
총을 쏘니 자기가 총을 맞고 아기를 보호하는
엄마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성애는 의식이 작동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불난 집에 자기 아들이 있으면
그것을 보고 의식이 작동합니다. 그
러니 불난 집 속으로 어머니가 뛰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날아오는 총알에는
의식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에서는 자식도 못 도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밖에 없어요. 이렇게 무서운 것이 아상입니다.
나는 고집도 없고, 양보도 잘하고,
그런 것 같이 생각되지요.
그렇지만 무의식 속에 그 무서운 아상,
이것이 없어야 보살입니다.
단순한 데서부터 마지막 무의식에까지 아상을 없애야
진짜 아상이 없는 것이 됩니다.
태교가 중요하다는 것은 입증되었습니다. 그
러나 태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죽음입니다.
잘 죽어야 합니다.
수복강녕(壽福康寧)은 지금이나 삼천년 전이나 똑같아요.
오래살고, 복 있고, 건강하고.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다 갖췄어도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복이겠습니까?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복입니다.
우리가 좋아해야할 복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수보리 존자에 대해 살펴봤으니
수보리 존자가 일으킨 <금강경>을 하루에
한번 읽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삼으세요.
이 좋아하는 놈이 우리 업을 바꿔줍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내 건강상태가 달라지듯이
무엇을 좋아했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바꿔집니다.
<금강경> 좋아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업이 바꿔지고
운명이 바꿔집니다.
그다음에 잘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임종 직전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다가
임종하면 최상입니다.
서울에 있는 보현사라는 절을 지은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평생 '지장보살'을 염하다가 입적했습니다.
그런데 숨이 멈춘 뒤에도 손에서 단주가 그냥 돌아갔어요.
'딸각 딸각.....' 실제로요.
그런 정도로 염불삼매에 빠져야 됩니다.
이보다 더 잘하는 임종이 뭐냐 하면 앉아서
'이뭣고' 화두 들고 있다가 삼매상태에서 임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조사열반으로 최고의 임종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앉아죽고 서서 죽느냐' 하는데
방법은 삼매에 있습니다.
삼매 속에서 임종하기 때문에 앉아서
이 몸뚱이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삼매가 아니면 죽는 순간 앉은 채로 몸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삼매라야 앉은 채로 몸이 지탱 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죽을 때는 '삼매 속에서 죽어야지'
이렇게 기억을 해두면 죽을 때 최선의 힘을 발휘해서
삼매에 들려고 온갖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삼매에 들어서 임종을 하게 되면
최상의 임종이 되겠지요. 아상이 없어지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지고 수명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사람입니다.
진짜 사람이 되면 한사람 공덕으로 동네가 평안해지고
나라와 인류가 행복해집니다. 그러니 다 함께 발심합시다.
<문> 생활 속에서 '마음 비우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수행법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답> 일전에 틱냑한 스님이 오셔서 한걸음 발을 들면서
화를 내리고, 한걸음 발을 들면서 평화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화를 내리고, 항상 평화를 생각하고,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마땅히 불자로서 일과가 있어야 합니다.
'일일일경 수지독송(一日一經 受持讀誦)'.
경전을 읽으세요. 더불어 참선을 한 시간씩 하기를 권합니다.
생활 속에서 불자가 꼭 해야될 일로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루에 한 가지 선을 실천하자.
무슨 일이라도 하루에 하나의 선을 실천하는
이런 좌우명을 설정해 놓으면 생활 속에서
좋은 수행이 됩니다.
그리고 삼매 속에서 임종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러려면 살아있을 적에 빠지지 않고
하루에 한시간씩 참선을 하는 습관이 들어야 합니다.
평소에 하지 않다가 그때 가서 앉으려하면 앉지 못합니다.
그러니 참선이 되든 안되든 이것은 상관하지 마세요.
언제 되느냐하면 진짜 발심이 되면 참선은 그냥 됩니다.
발심이 안됐을 때는 억지로 하는 참선이라도
한 시간씩 꼭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