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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세계로부터 전쟁 허가를 받았다.” 지난 주, 600명 가까운 레바논 민간인들을 도륙한 시점에서 하임 라몬 이스라엘 법무장관은 로마에서 열린 특별중재회의가 즉각적인 휴전을 결의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며칠 후 CNN에서 인터뷰한 이스라엘의 한 청년은 이번 공격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두 번째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 급기야 어제 (7월30일) CNN은, 이번 사태가 성경에서 예언한 인류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미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스라엘을 끝까지 지원해야 한다는 논지의 종말론을 펴는, 만 오천 명의 성도를 거느리고 있다는 한 시오니스트 계열의 목사와의 생방송 인터뷰를,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 내보냈다.
시청자의 예상을 계속해서 뛰어 넘으면서 전개되는 이 흥미진진한 서사(narrative)는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멜 깁슨의 반유대주의적 실언에 대한 보도를 통해, 다소 코믹하게 마무리 된다 (아니 되기를 바랬다). 지난 금요일, 음주와 과속운전으로 LA 경찰에게 체포되는 과정에서 깁슨이 “X같은 유대인들은 전 세계의 모든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얘기했는데, 이러한 발언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논란이 일자, LA 경찰이 서류에서 그러한 기록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이제 깁슨의 헐리우드 수명은 끝난 것 아니냐는 관측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자의적으로 선택되었을,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사실에 부합하는 이 네 가지 에피소드의 연쇄는 중동 문제와 관한 자신들의 정책과 입장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데에 미국/이스라엘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소 즉자적이고 허술한 “허가 받은 전쟁”론에 비해 보다 스케일이 크고 신경증적인 “제2의 홀로코스트”론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공습을 말 그대로 조족지혈로 만들면서, 그것을 ‘정당방위’로 뒤바꾼다. “아마겟돈”론은 이를 우주론, 혹은 운명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면서 미국의 역할까지 명확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멜 깁슨은? 원래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한 전력도 있는, 이 배우의 우연한 실언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단순한 우연이나 연예가 단신으로 ‘썩히기에는’ 깁슨이라는 스타의 후광이 너무 밝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미 The Passion of Christ를 통해 반유대주의 논쟁을 겪은 바 있는 깁슨은 “홀로코스트”와 “아마겟돈”론이 만들어내는 유대인들의 음모론(conspiracy theory) 이미지를 비유대인들에게로 확산시켜 중화시키는 효과를 만드는데에 아주 쓸모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깁슨에 관한 뉴스를 유대계 종말론 목사 꼭지 바로 뒤에 이어 붙인 CNN의 편집 감각은 이런 면에서 충분히 정치적이면서 또 상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깝게는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주변의 아랍국가들의 음모와, 멀게는 헐리우드라는 전지구적 스케일의 프라퍼겐더 메이커와 이중의,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다윗/이스라엘’이라는 고전적인 이미지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전쟁과 정당화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가장 먼저 불려나올 사람을 꼽으라면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가 일순위일 것이다. 정당한, 혹은 정의로운 전쟁과 그렇지 못한 전쟁이 있다는, 모호하면서도 위험한 떼제를 (나름대로) 정교화한 “정당한 전쟁(Just War)”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대표적인 유태계 정치철학자인 그는 민족국가(nation-state)로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이스라엘의 '수비'적 입장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아예 몰아내려는 매파 이스라엘 정치가/종교인들의 '공격'적 입장을 구분하면서, 전자는 정당하고 후자는 부당하다는- 덕분에 자신을 때로 ‘비판적인’ 학자로 분류하게 해준- 입장을 피력해왔지만(예를 들어 <Arguing about War>(2004)), 후자가 아랍국가들의 분노와 비판을 “제2의 홀로코스트 음모”로 부풀리면서 쉽게 전자의 양태를 취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전혀 언급 하지 않는다.
이는 이번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역시 위에서 본 것처럼 적의 공격을 미리 ‘방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선제공격전략(preemptive strike strategy)’으로 이해/선전/교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무시하는 효과를 낳는데(이스라엘군의 공식 명칭은 ‘이스라엘 방위군(Israel Defense Force)’이다), 실지로 어제(7월31일) 현 중동사태에 대해 왈저 자신이 The New Republic에 기고한 글(http://www.tnr.com/doc.mhtml?i=20060731&s=walzer073106)은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논평과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헤즈볼라가 2명의 이스라엘 군인을 납치한 것이 이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2004년 샤론 정부가 헤즈볼라에게 약속했던 3명의 정치범들의 석방을 마지막 순간에 거부한 것에 대해 당시 헤즈볼라가 보복을 천명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듯 공격과 방어, 원인과 결과의 순서는 끊임없이 혼동되고 뒤섞이는데, 이는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Multitude>(2004)에서 통찰력 있게 지적했던 것처럼 전쟁과 정치, 궁극적으로는 전쟁과 평화의 정의가 무너져 내리고, 급기야는 동일시되는 전지구적 상황과 맥을 같이 한다. (부시는 세계 평화를 위한 “테러와의 전쟁”이 수 십 년, 혹은 몇 세대에 걸쳐 계속될 것이라고 분명히 얘기/경고했다.) 최초의 ‘911’이 2001년이 아니라, 1973년, 칠레에서, ‘두 번째’ 911을 통해 21세기 ‘최강의 희생자’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당사자인 미국이,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해 수많은 칠레 국민들을 학살하고 아옌데 정부를 뒤엎은 날인 것처럼 말이다…(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데에는 켄 로치가 만든 911관련 단편이 큰 역할을 했다)
3. 이집트와 카타르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세워지고, -미국의 끊임없는 술책으로 저지되고 있는- 유럽 연합에 상응하는 아랍연합 논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동 문제의 근본적인 핵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지혜(sophia)의 사랑(philo)’으로 정의 되어온 철학을 ‘사랑의 지혜’로, 인식론과 존재론 대신에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복권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타자(Autrui/the Other)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타자의 철학자인 당신에게…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타자란 팔레스타인사람들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귀가 솔깃해지는 일일수 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타자(the other)에 대한 저의 정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타자란 꼭 친족(kin)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친족이 될 수 있는 이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위한다는 것은 이웃을 위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만약 당신의 이웃이 다른 이웃을 공격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 타자성(alterity)은 다른 성격을 띄는데, 거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적(enemy)입니다. 혹은 최소한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가 의롭고 누가 의롭지 않은 지를 구분해야 하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세상엔 나쁜(wrong) 사람들이 있습니다.” (<The Levinas Reader>, 294)
이 질문과 인터뷰는 1982년,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이스라엘 군이 망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2000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참혹한 학살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레비나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순간적인 실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타자 개념을 “정의(definition)”하고 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레비나스의 타자론은 ‘얼굴(Visage/Face)’론과 등치된다. 예를 들어 그의 철학을 일찍부터 한국에 소개하고, 나아가 자생적인 수용에 힘써온
그런데 정말 "그가 누구든 상관없"는 것일까? 레비나스의 철학적 논리 혹은 선언에 맞는 구절만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온 레비나스주의자들은 그렇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의 많은 책들을 뒤적이다 보면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의 시대가 “유대-그리스도교의 정수를 이루는 성스러운 역사에 무지한, 아프리카-아시아의 무지랭이들(those underdeveloped Afro-Asiatic masses)”이 역사에 등장한” 시기이고 (<Difficult Freedom>, 160),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살기를 원하는 이 무수한 떼거리의 탐욕스런 눈(the greedy eyes of these countless hordes)에 우리와 같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은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으로 보일 것”이며, (<Difficult Freedom>, 165) 천 년도 넘게 유럽의 일원으로 살아온 러시아가 중국이라는, 역시 “유럽사에 완전히 이방인인 아시아”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물론 레비나스는 2차 대전 후의 중국과 러시아 관계에 대해 쓰고 있다-이 “무계급 사회에게도 거북한(disturbing even to a society without classes)” 일이지 않겠느냐 (<The Unforeseen History>, 171)고 반문하는 레비나스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하는 의미에서의 얼굴/타인이 아니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예들은 생각보다 많은데 (예를 들어 하워드 케이길Howard Caygill의 <Levinas and the Political>(2002) 5장을 읽어보라),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제가 되는 사람들, 즉 팔레스타인, 비유대계 아랍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사람들을 타자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설명들을 고스란히 유지시켜준다는 이점을 갖는다. (우리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다른 하나는, “에이, 레비나스도 사람인데…”라고 얘기하는 것인데, 이 역시 레비나스의 철학적 구축물을 온전히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즉, 그가 얘기하는 의미에서의 주체(sujet), 즉 절대적으로 약한, 내가 결코 죽일 수 없는 “과부, 고아, 이방인”으로서의 타자에게 볼모(hostage)로서 호출됨으로써 그들의 비참함에 책임을 지는 존재으로서의 주체란 실은 일생에 몇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존재라고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탈무드와 구약에 나오는 참조체계로서의 ‘이스라엘’과 인류의 역사 속에 드러나는 민족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그의 논리에도 적용된다)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게 있지 않겠어?” “사람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후자는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아니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레비나스라면 이 질문이 잘못 제기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윤리적 주체란 근본적으로 의식적/의도적으로 배워 모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윤리학은 레비나스에게 미적지근한 칸트주의에 다름 아니다). 윤리적 주체란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되어) 가는 게 아니라, (그 분이!) 오(시)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의 결심”이라는 데리다의 언명은 이를 잘 기술해준다) 그런데 언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음을 곱게 쓰고, 평소에 탈무드나 성경을 열심히 읽어 묵상하면 ‘오시려’나? 언제쯤? 그럼 ‘오실’ 때까지 평소에 나는 뭘 하고, 어떻게 살면 되지? 아니, 당장 저 육시랄 팔레스타인 놈들을 어떻게 찢어 죽이나?라는 질문들 앞에서 그는 속수무책인 것이다.
그저, 더 많은 아이와 여성들이- 온전하게-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아멘)
첫댓글 강한 주장을 실으셨군요. 이 더운 여름 그것도 새로 태어난 아이와 정신없으실 터인데 대단하십니다.^^ 뉴욕은 오늘따라 무지 덥습니다. 아자비님께서 레비나스의 이웃과 타자성의 철학과 현 레바논/이스라엘 대립국면을 동시에 생각하라 떠미는 것이 저로서는 다소 유감입니다만, 님의 강한 논의 전개과정의 일환이니 어쩔 수 없는 거죠? 조금있다 시간되면 간략히 레비나스와 상관있는 후반부를 중심으로 몇 말씀드리고 싶군요. 윗 글에서 레비나스의 '얼굴'은 시각적이 아니라 “듣기와 말하기” 즉 청각적이라는 지적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런데 지난번 레비나스 공부를 접게했다는 대목이 바로 <The Levinas Reader>, 294쪽 이던가요?
더운 데 정신없이 쓴 티가 나지요?^^ 이곳 아이오와도 지난 한 주간 정말 "무지" 더웠습니다. 체감 온도가 40도(화씨104도)를 넘은 게 부지기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산후조리 덕분에 에어컨도 제대로 틀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 쓴 글이니 정신없이 쓰여진 건 분명합니다.^^ '철학도'로서 아이온님께서 느끼셨을 "유감"은 충분히 이해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강한 것은 제 주장이 아니고, 등을 떠민 것 역시 유감스럽게도 제가 아닙니다. 레비나스의 사유가 홀로코스트에 등을 떠밀려 만들어진 게 아니고, 로셀리니의 <Paisa>가 2차대전에 등을 떠밀려 만들어진 게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아이온님의 의견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꼬리말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레비나스의 책을 더 이상 (제(대로) 돈주고) 사읽지 않겠다고 했지, 그를 안 읽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제 서가에 꽂혀있는 레비나스의 저작만 10권 가까이 되니까요. 또, 인터넷 헌책방에서 5불대의 대박이 터진다면 안살 이유도 없죠.^^/ 한가지 더. 제목을 붙여 놓고 읽어 보니 멜 깁슨처럼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반유대주의로 환원시키는 것 역시 현 이스라엘 정부의 오랜 전략이라는 것쯤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비판은 그 '사이'의 긴장 그 자체입니다.
"타자 the other"와 "적 the enemy" 사이의 경계는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규정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누군가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적"인지, 아니면 생존의 같은 편에 속하는 '우리 편'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이겠지요. 그가 우리의 생존에 그리 위협적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우리 편이지도 않은, 그런 점에서 그에대한 일정 정도의 무관심적 거리가 생겨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를 '타자'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우리의 생존의 위협이 제거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생겨나는, 위압적인 대상들에 대한 '숭고'의 감정처럼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보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을 '타자'가 아닌 '적
enemy'로 규정하는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에 일관적인 셈이지요. '타자의 철학'을 통해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천적 윤리란, '네 이웃이 네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 그가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라'는 자유주의적 이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타자의 철학'이 마치 '네 원수마져도 사랑하라'는, 지금까지 인류사에서 한번도 구현된 적이 없던 추상적, 관념적 cosmo-humanism의 철학적 구현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있겠지요.
나찌 시절 독일 Eisenach에 설치되었던 '탈 유대 연구소' Entjudungs-Institut 에서, 독일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유대교적 연관들을 깔끔하게 제거한 새로운 '성서' "신의 전령" Botschaft des Gottes 를 발행했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약 25만부가 발행되어 배포된 이 '탈유대화된 성서'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아리아족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이미 신약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대립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유대인들의 죄로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현재의 이스라엘 정권 (유대인 일반이 아니라!) 에 있어서 '홀로코스트'는, 나찌독일에게서의 '예수의 죽음'과 유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창출해내는 하나의 거대 서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란의 대통령이 바로 그 '홀로코스트'의 진리성을 정면으로 문제삼고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나찌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예수의 고통과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홀로코스트 (이데올로기)는 '유대인들의 죽음'의 무게를 자신의 무기로 삼고 있지요. 그 죽음의 무게가 그러나, 오늘날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엔, 과거의 죽음을 현재의 죽임으로 보상받으려는 끔찍한 보복론이 깔려있는 듯 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아자비님/ 화요논평에 별도로 답글을 다는 모양새가 않좋을 듯 싶어서 인문학 게시판에 저의 즉흥적인 단상을 담은 글을 올렸습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김남시님/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군요.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레비나스의 정치철학적 입장과 매우 가까이 있다 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 좀 글이 쉬웠으면 활자도 좀 보기 좋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문제와는 상관없지만, 저 뉴스를 간혹 들을때마다 이스라엘 X같은 넘들 하는 말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음 음 음 여튼 팔레스타인쪽에 심정적으로 치우친 계기가 가싼 가나파니의 <불볕 속의 사람들>(창비)라는 단편집을 읽고 나서였다라는 사족을 달고 갑니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