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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화요논평 (2006년 8월 1일) 유대인들의 정의
ahjabie 추천 0 조회 424 06.08.01 19:54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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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8.02 07:14

    첫댓글 강한 주장을 실으셨군요. 이 더운 여름 그것도 새로 태어난 아이와 정신없으실 터인데 대단하십니다.^^ 뉴욕은 오늘따라 무지 덥습니다. 아자비님께서 레비나스의 이웃과 타자성의 철학과 현 레바논/이스라엘 대립국면을 동시에 생각하라 떠미는 것이 저로서는 다소 유감입니다만, 님의 강한 논의 전개과정의 일환이니 어쩔 수 없는 거죠? 조금있다 시간되면 간략히 레비나스와 상관있는 후반부를 중심으로 몇 말씀드리고 싶군요. 윗 글에서 레비나스의 '얼굴'은 시각적이 아니라 “듣기와 말하기” 즉 청각적이라는 지적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런데 지난번 레비나스 공부를 접게했다는 대목이 바로 <The Levinas Reader>, 294쪽 이던가요?

  • 작성자 06.08.02 15:18

    더운 데 정신없이 쓴 티가 나지요?^^ 이곳 아이오와도 지난 한 주간 정말 "무지" 더웠습니다. 체감 온도가 40도(화씨104도)를 넘은 게 부지기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산후조리 덕분에 에어컨도 제대로 틀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 쓴 글이니 정신없이 쓰여진 건 분명합니다.^^ '철학도'로서 아이온님께서 느끼셨을 "유감"은 충분히 이해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강한 것은 제 주장이 아니고, 등을 떠민 것 역시 유감스럽게도 제가 아닙니다. 레비나스의 사유가 홀로코스트에 등을 떠밀려 만들어진 게 아니고, 로셀리니의 <Paisa>가 2차대전에 등을 떠밀려 만들어진 게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 작성자 06.08.02 15:28

    물론 아이온님의 의견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꼬리말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레비나스의 책을 더 이상 (제(대로) 돈주고) 사읽지 않겠다고 했지, 그를 안 읽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제 서가에 꽂혀있는 레비나스의 저작만 10권 가까이 되니까요. 또, 인터넷 헌책방에서 5불대의 대박이 터진다면 안살 이유도 없죠.^^/ 한가지 더. 제목을 붙여 놓고 읽어 보니 멜 깁슨처럼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반유대주의로 환원시키는 것 역시 현 이스라엘 정부의 오랜 전략이라는 것쯤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비판은 그 '사이'의 긴장 그 자체입니다.

  • 06.08.02 18:09

    "타자 the other"와 "적 the enemy" 사이의 경계는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규정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누군가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적"인지, 아니면 생존의 같은 편에 속하는 '우리 편'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이겠지요. 그가 우리의 생존에 그리 위협적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우리 편이지도 않은, 그런 점에서 그에대한 일정 정도의 무관심적 거리가 생겨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를 '타자'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우리의 생존의 위협이 제거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생겨나는, 위압적인 대상들에 대한 '숭고'의 감정처럼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보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을 '타자'가 아닌 '적

  • 06.08.02 18:16

    enemy'로 규정하는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에 일관적인 셈이지요. '타자의 철학'을 통해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천적 윤리란, '네 이웃이 네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 그가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라'는 자유주의적 이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타자의 철학'이 마치 '네 원수마져도 사랑하라'는, 지금까지 인류사에서 한번도 구현된 적이 없던 추상적, 관념적 cosmo-humanism의 철학적 구현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있겠지요.

  • 06.08.02 18:30

    나찌 시절 독일 Eisenach에 설치되었던 '탈 유대 연구소' Entjudungs-Institut 에서, 독일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유대교적 연관들을 깔끔하게 제거한 새로운 '성서' "신의 전령" Botschaft des Gottes 를 발행했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약 25만부가 발행되어 배포된 이 '탈유대화된 성서'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아리아족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이미 신약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대립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유대인들의 죄로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현재의 이스라엘 정권 (유대인 일반이 아니라!) 에 있어서 '홀로코스트'는, 나찌독일에게서의 '예수의 죽음'과 유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 06.08.02 18:38

    효과를 창출해내는 하나의 거대 서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란의 대통령이 바로 그 '홀로코스트'의 진리성을 정면으로 문제삼고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나찌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예수의 고통과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홀로코스트 (이데올로기)는 '유대인들의 죽음'의 무게를 자신의 무기로 삼고 있지요. 그 죽음의 무게가 그러나, 오늘날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엔, 과거의 죽음을 현재의 죽임으로 보상받으려는 끔찍한 보복론이 깔려있는 듯 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 06.08.04 00:21

    아자비님/ 화요논평에 별도로 답글을 다는 모양새가 않좋을 듯 싶어서 인문학 게시판에 저의 즉흥적인 단상을 담은 글을 올렸습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김남시님/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군요.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레비나스의 정치철학적 입장과 매우 가까이 있다 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06.08.15 21:39

    아~ 좀 글이 쉬웠으면 활자도 좀 보기 좋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문제와는 상관없지만, 저 뉴스를 간혹 들을때마다 이스라엘 X같은 넘들 하는 말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음 음 음 여튼 팔레스타인쪽에 심정적으로 치우친 계기가 가싼 가나파니의 <불볕 속의 사람들>(창비)라는 단편집을 읽고 나서였다라는 사족을 달고 갑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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