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구원의 서정
1.예정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인 예정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예정의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엡 1:5), 예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다(출 33:19). 이 예정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영생이 예정되었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었다.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으신 자비와 선하심을 나타낸다. 인간의 가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깨닫기까지 우리의 구원이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결코 충분히 또한 분명히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사실을 성령께서 확증해 주신다. 그로써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구원의 완성까지 이끌어주신다.
2. 소명 일반적으로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원을 받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정의한다. 이 소명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 외적인 부르심이란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는 일방적인 권고로서 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시하는 복음의 선포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초청과 용서와 구원의 약속이다. 이 외적인 부르심은 택한 자 뿐만 아니라 유기된 자까지 복음을 듣는 모든 이에게 미치는 우주적인 것이다. 반면 내적인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외적 부르심을 효과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르심을 가리켜 유효적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고도 부른다. 이 내적 부르심은 항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이르며 구원을 유효 있게 만드는 능력 있는 부르심으로, 거기에는 후회나 변경이나 취소가 없다(요 6:40,44,45).
3. 중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소명 뒤에 바로 칭의를 다룬다. 하지만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이에 소명과 관련된 구원의 서정을 언급한다. 내적 소명 곧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과 믿음을 가져온다.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 과정을 묘사한다. 진정한 중생은 죄인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시초가 되며, 성령으로 심령이 새로워지는 재창조를 가리킨다. 즉 중생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따라서 회개와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완성을 향해 발전해 나가야 한다. 칼빈은 중생이후에 나타나는 구원의 서정에 관해 중생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도 은밀하게 이루시는 사건으로 과거적인데 반해, 회개와 성화는 평생토록 지속되는 현재적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한편 로마교회는 중생은 칭의와 사죄를 포함하는 것으로 성례(특히 세례)시에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는 수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중생을 효력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4. 믿음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믿음이 있어야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이는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알고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아는 놀라운 지식이며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구원론적 믿음을 가리킨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앎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 확실하고 효력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신뢰이다. 믿음의 근거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택한 자의 눈을 열어 주신다. 즉 성령은 선택함을 받은 사람의마음 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실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우신다. 믿음은 우리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위해 무상으로 제공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신다는 사실조차 깨달을 수 없다(히 11:6). 믿음은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5. 칭의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이다. 칭의라는 말 속에는 죄의 면제(remission of sins)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이라는 개념이 동반되어진다. 피고인은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고소됨을 면하게 된 것은 인간이 실제로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여져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는 회개를 통한 성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이 성취한 그 어떤 의를 조건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다(롬 3:24).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노력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롬 3:28; 갈 2:16). 우리는 이러한 칭의의 의미를 믿음으로서만 알게 된다. 따라서 믿음은 칭의를 효과적으로 알게 하는 도구이며, 칭의는 성령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인 동시에 고리가 된다.
6. 회개 회개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이전의 죄악 된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뜻이다. 곧 회개는 하나님께로 향한 참된 삶의 전향이다. 진정한 회개는 현상적으로만 파악될 수 없다. 마음의 변화를 받지 않고도 일시적인 회심에 이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마 13:20,21; 행 8:9). 진정한 회개는 먼저 자신의 육적 본성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회개가 요청되는 이유는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죄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을 경험하여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였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는 원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 안에 잔존해 있는 죄악의 본성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생 싸워야 한다. 회개는 평생토록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중요한 방편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회개는 성도의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할 신앙고백이다.
7. 양자됨 양자는 그 용어가 말하듯이 외부의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가족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양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영적 특권을 누리게 된다. 먼저 죄악의 종된 상태로부터 해방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성령의 내주함으로서 긍휼히 여김과 보호를 받으며,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며, 결코 버림 받지 않는다. 나아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아 영원한 구원의 상속사로서 자격을 누린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장). 양자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특전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임을 증거한다. 하지만 양자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법정적 행위이다. 신분과 지위의 수여이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성향이나 특성이 아니다. 또한 중생하지 않은 자는 결코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중생은 양자됨의 선행 요건이며, 양자됨은 중생의 결과이다.
8. 성화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양자로 택정함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하게 된다. 칭의와 양자됨이 단번에 일어난 법정적 행위라면 성화는 점진적으로 심령과 삶에서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고 하나님께 헌신되어 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하여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칭의)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 죽이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 성화는 칭의와 여러 점에서 비교된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법적으로 사면한 것이라면 성화는 도덕적으로 죄적 요소를 없게 하는 것이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완성되었지만, 성화는 성령의 계속적 사역에 의하여 평생 동안 진행된다.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9. 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견인 역시 심령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성도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열매이다. 견인 교리는 성도의 구원의 근거와 목적이 누구의 손에 의해 주도되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안주의는 오직 성령에 의해 완성되는 견인을 부정하였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기에 그들은 구원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절대적인 노력이 요청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행위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철저한 성도의 견인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견인에 대한 보증이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인한 성령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0. 영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 주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여타의 곳에서 이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영화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성령의 적용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보다는 예정과 소명으로 시작한 전 구속과정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하나님의 선택이 성부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 예정된 바 그 목적 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보장된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존 머레이,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p. 231). 이생의 삶은 죽음으로서 중대한 일단락을 맺게 된다. 육신의 죽음은 성도의 싸움의 종국을 의미한다. 한편 영화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소망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완전한 심판을 고대하게 한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영화를 경험한다.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화로움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완전히 만족할만한 완성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영화를 소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직 주의 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날에 성도는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어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출처 :총회신학.신대원(기독신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청지기 |
출처: 영적 분별력 원문보기 글쓴이: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