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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신태인 원문보기 글쓴이: 조성환(83년졸업)
화호, 정읍의 타임머신 | ||||||||||||||||||||||||||||||||||||||||||||||||||||||||||||||||||||||||
일제 강점기 흔적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곳, 신태인읍 화호리를 찾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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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호(禾湖)라는 지명은 주변 김제시 부량면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삼한시대 저수지인 벽골제(‘벼고을’의 의미)와 관련된 지명으로, 본래 태인군 용산면 구역이며 속칭 숙구지(宿驅地 또는 宿狗地)라 불렀다. 기착역으로 역학관계가 역전된 화호와 신태인
화호리는 위치상 신태인읍의 서쪽 중심지이며, 낮은 구릉지가 광활한 평야를 만나며 마지막 점을 찍는 듯한 지형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가장 큰 번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정읍-김제-부안이 수륙으로 만나 번성했던 화호
특히 이곳은 옛날에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고, 인근 고잔(‘곶안’으로 해안지역의 지명임)까지 젓배가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하여 군산으로 쌀이 반출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호남선 철도개설로 신태인역이 이용되면서 더욱 편리한 교통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동진강의 직선화 작업(일명 직강공사)과 서해안의 간척공사로 인한 농경지 확보이다. 대규모 농장 경영과 이에 필요한 부대시설과 서비스를 위해 함께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화호’의 경관을 크게 변화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외적 변화를 두고 일본의 극우파나 한국의 친일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들은 ‘일제에 의한 근대화’라고 주장하며 역사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들이 우리 땅에 남겨준 산업시설, 학교, 발전소, 철도, 신작로 등 근대적 시설은 결코 우리 민족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일제가 우리 땅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도 일제시대 유산이 숨쉬고 있는 화호의 저자거리 지금도 화호리를 둘러보면 농업과 관련된 정미소, 양조장, 농장 전용병원, 우체국, 신작로, 일본식 가옥 등이 아직까지 곳곳에 남아있어 그 시대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화호리를 동서로 관통하는 신작로에 서있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꾸로 날아온 느낌을 갖는다. 그럼 여기서 화호리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 중 가장 대표적인 구마모토 농장의 유적을 살펴보자. 이곳은 화호리 서쪽의 당산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는 10m 높이의 구릉지 남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곳이 마치 개가 자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숙구지(宿狗地)라 하였다고 한다. 당시 구마모토(熊本利平)라는 만석꾼이 이곳에 와서 지형을 살펴보고 풍수지리로 ‘개가 입을 웅크리고 있는 지점에 창고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화호리 당산 심장부에 지어진 구마모토 농장 구마모토 농장의 농장주와 그 주변인들이 가옥과 농장의 부속건물을 짓고 살았던 장소는 당산의 남쪽 사면으로 너른 평야보다 높은 지대이기에 풍수재해를 예방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더구나 농장주의 가옥은 당산나무 바로 아래 즉 가장 안쪽의 높은 곳에 배치되어 있어 나름대로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며, 농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농사일을 하는 소작인들의 동태까지도 파악하기 좋은 곳에 의도적으로 가옥을 배치한 것 같다.
구마모토 농장은 부속 병원까지 구비
한편 화호지역에는 일찍부터 일본 사람이 많이 살아서 그들의 ‘소학교’(1909년 용문학교로 시작)가 이곳에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그 자리에 화호 용산 국민학교가 개교되었다. 그리고 광복이후 도로 건너편에 화호여자중학교(1952년)가 생겨나 배구운동으로 전국을 석권하기도 하였는데 이 학교가 지금의 인상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봉지터진 숙구지 감자나 먹어라"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 감자가 생산되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는 구전이 있어 지금도 남을 비방하거나 욕지거리를 할 때 “봉지 터진 숙구지 감자나 먹어라”라는 말이 있다. 한때 이북에서도 정읍은 몰라도 숙구지라고 하면 알 정도로 감자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흔적이라도 보호하고 기억하자 일제강점기의 흔적인 이런 외형적 경관은 지금까지 행정기관의 특별한 보호대책이나 주민들의 관심도 없이 사실상 방치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유적은 시간적으로 오래되지 않았고 그 희귀성도 높지 않아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유적들이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 같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제 강점기 수탈의 역사이며 그 유적이기에 차라리 없어져도 좋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 영광과 치욕의 기록 모두, 우리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후손들에게 일제 강점기 같은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라도 일제가 남긴 흔적들을 이제는 보호하고 알리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