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견해는 조선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실로 왜군의 승세를 유지하였던 것은 선조(宣祖) 25년 4월에 난(亂)이 발발하여 이듬해 2월에 우리가 평양성을 탈환하기까지 열 달밖에 되지 않는 기간이었다. 그들의 보급로가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으로 차단되었고, 각지의 의병 활동으
로 더 이상 진군이 어렵게 되자 그들은 우리의 의병과 군량의 무한한 공급처가 되었던 호남지방을 공략하려 하였으나 이와 같은 왜의 의도를 무산시켜버린 웅치(熊峙)와 이치전(梨峙
戰)은 임란사(壬亂史)에서 실로 막중한 비중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상주전(尙州戰)에서 용전분투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으며,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성장(巡城將)으로서 최후까지 직임을 다한 황진(黃進)에 대해서 임란전사(壬亂戰史)에서 뿐만 아니라 출생지역인 우리고장에서도 소홀히 다루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황진의 생애
황진(黃進)의 자(字)는 명보(明甫)이고 호(號)는 아술당(蛾述堂)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그는 영의정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5대손이자 좌의정을 증직받은 윤공(允恭)의 아들로 명종(明宗) 5年(1550年)에 남원부(南原府)의 주포방 산내촌(周浦坊 山內村)(지금 주생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길어서 용모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기개(氣愾)와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효우(孝友)가 돈독하였고 무예가 남다르게 뛰어났다.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데 그가 어릴 때 갖고싶은 활을 얻기 위해 요천수를 건너다녔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마을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있다. 선조(宣祖) 9년(1576) 그의 나이 27세 때 별시(別試)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그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하여 사신 황림(黃琳)을 수행하고 군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선조(宣祖) 13년(1580)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자 그에게 거산도 찰방(居山道 察訪)이 제수되었다. 선조(宣祖) 16年(1583年) 함경도 북방에 살고 있던 야인의 추장 니탕개(尼蕩介)가 무리를 거느리고 침략해오자 그는 야인 정벌에 참여하여 많은 적군을 참획하는 전공을 세워 포상을 받았다. 아울러 그의 친구로 군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군역까지 면제받게 해주었는데 북병사(北兵使) 이일(李溢)은 이러한 그의 의기를 칭찬하였다. 선조(宣祖) 18년(1585)에는 경원군(慶源郡) 안원보(安源堡)의 권관(權官)이 되어 낙후된 진보(鎭堡)의 시설을 개축하여 그 방위시설을 일신하였다.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선조(宣祖) 23年(1590年) 그는 그의 종부(從夫) 윤길(允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데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따라갔다. 이 때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이미 난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그는 귀국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 곳에서 팔아 칼 두 자루를 산 뒤에 말하기를 "적은 반드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올 것이니 그때에 이것을 써야겠다."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왜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미리 각 도에 명을 내려 무기를 수리케 하였다. 사신 일행이 귀국하여 알리기를 "일본이 반드시 조선을 침입하여 올 것이다."라 하였으나,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만은 선조에게 "왜(倭)를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아뢰니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말을 믿고 그 때까지 수리하던 무기와 방어준비 하던 일을 중지해 버렸다. 선조 23년(1590) 그는 전에 종계변무의 일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던 공적으로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주부(主簿)에 제수 되었다가 곧이어 동복현감(同腹縣監)으로 옮겨졌다. 그는 동복현감에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장차 일어날 싸움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금짐을 싣고 다니는 말 한 필을 사 가지고 매일 관아가 파하면 갑옷을 입고 말 타는 연습을 하였다.
충청도 병마사가 되어
선조 25년(1592) 과연 그가 예상했던 대로 왜적이 바다를 건너서 대거 침입해 오자 그 해 5월 그는 동복현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이끌고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광(李洸)의 군사를 따라 최위(崔違)와 함께 용인(龍仁)에 이르렀다. 그는 먼저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사교(沙橋)에 병사를 매복시켰는데, 왜적이 추격해 옴에 우리의 대군이 이미 무너졌음을 깨닫고 비로소 군사를 거두었다. 이 때 진안(鎭安)과 금산(錦山)은 왜적의 손에 들어가 그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 웅치(熊峙)로 달려가 그곳을 지키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왜적을 만나 힘껏 싸워 승리를 거둔 뒤 군진(軍陳)을 남원으로 옮겼다. 남원에서 그는 왜적이 전주성 가까운 안덕원(安德院)까지 쳐들어 와 있었다. 그 때 우리 군사는 왜적의 드높은 사기를 보고 왜적과 싸우기를 피하였으나 그는 홀로 왜적의 정면으로 나아가서 맞싸워 왜적의 장수를 사살하였고, 그 공적으로 그는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으로 승진되었다. 진안 웅치와 전주 안덕원에서 패배한 왜적이 금산으로 집결하여 다시 전주성을 총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동지 공시억(孔時億), 위대기(魏大器), 황박(黃樸) 등 30여명과 약속하고 이현(梨峴)으로 달려가서 그 곳을 지켰다. 그는 이 싸움을 승리고 이끈 뒤 동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그의 공적을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의 공적을 찾아 물어서 조정에 나가 바르게 보고 하도록하여 당시 익산군수(益山郡守) 겸 조방장(助防將)
권차(權差)가 그의 공적을 사실대로 행재소(行在所)에 보고 하였다. 그 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그는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으로 특진되었다. 선조 26년(1593) 그는 다시 충청병사(忠淸兵使)로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이 때 그는 진안으로 옮겨가서 죽산(竹山)을 점거하고 있는 왜적과 싸웠다. 왜적은 마침내 그를 당할 수 없으므로 상주(尙州)의 적암(赤巖)으로 도망하였으나, 그는 상주의 적암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전라도의 관문 진주성을 사수하라
6월이 되자 왜적이 다시 기세를 들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당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표의장(彪義將) 심우심(沈友信), 경상 우병사(慶尙 右兵
使) 최경회(崔慶會), 김해 부사(金海府史) 이종인(李宗仁), 당진현감(唐津縣監) 송제(宋悌)등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창의사 김천일과 성(城)의 안과 밖
에서 서로 지원할 만전의 계책을 세우고 7백명의 군사를 거느려 6월 14일 진주성으로 들어가 성을 지켰다. 23일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낮 동안 세 차례, 밤에는 무려 네 차례나 공격해 왔다. 그는 왜적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군사를 적절하게 배치, 왜적을 물리쳤다. 이처럼 그에게 완전 참패를 당한 왜적은 다음날 구원병을 요청, 몇 천명이 되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해왔다. 다시 물러갔던 왜적은 28일 병력을 총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해 왔으며, 그가 이끄는 아군은 죽을 각오를 다하여 왜적에게 대항 힘껏 싸웠다. 마침내 많은 왜적의 시체가 구덩이마다 가득히 차 있었고 이 날의 싸움은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승리의 기쁨을 채 나누기도 전 왜적의 시체에 묻혀 있던 적병이 발사한 총탄에 이마의 왼쪽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순절하자 이종인(李宗仁)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마전 속에 장사 지냈다가 그 해 7월에 그의 아들 정직(廷稷)과 정열(廷說)이 남원의 주생면 정송리로 모셔다 장사 지냈다. 그의 비보를 들은 선조는 탄식을 하면서 그에게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 시호(詩號)를 무민(武愍)이라 하였으며, 치제(致祭)를 한 뒤 정려(旌閭)를 내렸다. 그 뒤 진주에는 창렬사(彰烈祠)가, 남원에는 정충사(旌忠祠)가 각각 세워져 그를 제향하게 되었다. 이들 사당은 모두 사액(賜額)의 은전을 받았다. 그 뒤 고종 때에 이르러 고종의 특명으로 부조묘(不 廟)의 은전이 내려졌다. 그의 묘비명(墓碑銘)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었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시장(諡狀)을 지었다. 송시열은 그의 시장에서 말하기를 "많은 왜적을 죽이고 나라를 방어한 공이 이와 같이 높고 높은데 추전(追典)은 증관(贈官)에 그치고 대려지행(帶礪之行)을 같이 하지 못한 것이 가히 한탄스럽구나."라 하였다. 그는 문장에도 능통하였으며, 그에 관한 문헌으로 <무민공실기(武愍公實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이석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