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X-선에 대한 개인 연구소를 유지했던 형의 죽음 이후 드 브로이는 프랑스 공작과 왕자가 동시에 되었다.
광양자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컴프턴 효과(Compton effect)가 설명되기 1년전인 1922년에 드 브로이는 전자기 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빈(Wilhelm Carl Werner Otto Fritz Franz Wien, 1864-1928)의 복사 법칙을 유도해 낸 논문을 썼다.
그 논문에서 그는 '빛의 양자 가설을 채택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광자를 질량 , 운동량 를 가지는 입자 혹은 '빛의 원자'로 취급했다. 광자에 관한 이런 관심은 드 브로이를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 물질 입자 특히 전자까지도 포함하는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을 일반화시키는 생각이 1923년 여름 갑자기 떠올랐다고 드 브로이는 말했다. 이 생각을 『Comptes Rendus』지에 짧은 두 개의 논설(article)과 『Nature』지에 한 개의 짧은 편지(note)로 발표했다. 1924년 소르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이 시기에는 여전히 그 이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해서 전자가 왜 입자와 파동 모두로 행동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그 이론이 맞다고 믿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회의적이었지만, 침착히 행동했다. 드 브로이의 논문 지도 교수인 폴 랑게방(Paul Langevin, 1872-1946)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놀랍게도 아인슈타인은 단번에 그 결과에 매료되었다. 드 브로이는 이 학위 논문을 1925년 『Annales de Physique』에 100페이지가 넘는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 해에 미국의 데이비슨은 그 아이디어가 옳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그 논문이 통과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거니와 결국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학위논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사례이다.
드 브로이는 예를 들어 전자와 같은 입자는 조금씩 다른 전파 속도를 가지는 '물질파(matter waves)'들과 연과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전파 경로를 따라 규칙적인 간격에서 파동들이 결합하여 파동군(wave-crest)을 형성한다. 이 군은 한 점에서 사라졌다가는 바로 다음 순간에 다른 지점에서 다시 나타난다. 군의 속도, 즉 군속도(group velocity)는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개개의 파동의 속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드 브로이는 군속도와 전자의 속도를 동일시했다. 이웃하는 군 사이의 거리가 '물질파'의 드 브로이 파장이다.
드 브로이는 파리 대학교와 앙리 푸앵카레 연구소에서 가르쳤다. 1945년에는 프랑스 원자 에너지 위원회의 고문이었다. 그는 원자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과 과학과 산업 사회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 과학 아카데미의 종신 회원으로 드 브로이는 신체에 원자폭탄의 악 효과를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의 많은 연구 논문 이외에도 1937년에 『물질과 빛』, 1953년에 『물리학 혁명(The Revolution in Physics)』, 1964년에 『파동 역학의 현대적 해석』, 말년에 『양자, 공간과 시간』 등 20권이 넘는 책의 저자였다. 그는 1987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