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월간축구>
“ ‘특급 소방수 조긍연, 자동차 돌진 저지.’
지난 5월 13일 포항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포철:대우전은 1:1무승부로 끝났다.
가랑비가 간헐적으로 내리는 가운데 벌어진 이날 경기에서 포철은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힘입어 5연승을 노렸으나 대우의 초반공략 작전에 밀려 선제골을 내주는 등 고전하다가 후반에 간신히 동점골을 빼내 패배의 위기를 넘겼다. 대우는 정해원, 김주성, 정용환 선수 등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초반밀어붙이기 작전으로 적극 공세를 전개, 전반7분에 페널티에리어 바깥 오른쪽 부근에서 얻은 프리킥을 박양하 선수가 킥, 골에리어 가까이 포진하고 있던 이태호 선수가 헤딩슛, 전광석화 같은 골을 터트렸다.” (출처 - 월간축구)
1988년 포항의 축구열기가 하늘에 울릴 만큼 커졌을 때 그 가운데는 포항종합운동장이 있었다. 그 열기는 수년전부터 이미 달궈져 왔고 영원히 뜨겁기를 모두가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녹색 그라운드를 땀으로 적시던 선수들과 그 운동장을 함성으로 메우던 축구열기가 어느덧 사라지고 고요한 지금. 그것은 마치 오후 한때의 선잠같이 달지만 아쉽기만한 추억이다.
포항스틸러스의 첫 홈구장이었던 ‘포항종합운동장’은 완공된 1985년부터, 포철의 전용구장으로 이전을 하는 1990년까지 포철 아톰즈(현재 포항스틸러스)의 첫 보금자리였다. 그 당시 에는 수퍼리그가 ‘홈앤어웨이’ 방식을 시행하지 않았고 각 구단소유의 경기장이 없었기 때문에 각 팀은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전국각지에 퍼져있는 공설운동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포항종합운동장 완공 후 첫 경기를 가졌던 1985년 6월 29일 토요일. 15시 포항-할렐루야, 16시 30분 유공-상무의 경기를 보기위해 아직 14,958명이 관중석에 처음 발자국을 찍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포항경기장에서의 축구열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했고 자연스레 더 많은 경기가 유치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포철이 1986년부터 전용구장으로 홈구장을 이전한 1990년 까지 동대문운동장 다음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치렀던 경기장은 다름 아닌 포항종합운동장이었다.
85년 - 울산:4 포항:4 전주:4 경주;4 구미:8 강릉:8 마산:4 청주:4 진주:4 인천:12 의정부:8 효창:4, 동대문:10 부산:6 86년 - 울산:3 포항:7 전주: 7 경주:5 구미:3 강릉:11 마산:4 청주:3 진주:3 광주:3 춘천:4 안동:3 대구:6 원주:5 의정부:4 충무:3 거창:3 삼척:3 진해:3 동대문:5 인천:5 대전:3 87년 - 수원:8 포항:2 강릉:10 마산:2 청주:6 대구:14 원주:2 인천:4 삼척:2 대전:6 부산:15 천안:3 잠실:1 안양:4 88년 - 수원:2 포항:11 강릉:5 마산:3 청주:8 춘천:3 원주:1 인천:2 충무:1 삼척:2 제주:2 안양:6 부산:4 동대문:7 89년 - 울산:1 성남:1 포항:20 전주:4 강릉:7 청주:10 광주:2 춘천:6 평택:2 인천:3 삼척:2 안성:1 동대문:17 잠실:15 울산:1 90년 - 수원:2 울산:10 성남:1 포항:12 경주:1 구미:1 강릉:2 마산:5 춘천:2 안동:1 대구:1 평택:4 인천:4 제주:3 동대문:22 부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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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경기유치 기록들은 당시 포항종합경기장이 프로축구 격전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열기를 바탕으로 포항스틸러스는 현재까지 뛰어난 국가대표선수며 훌륭한 지도자들을 배출해 오고 있는 명문구단이며 한국 축구 발전에 앞장 선 대표적인 팀으로 거듭났다. 그런 점에서 포항경기장은 당시 걸음마를 막 땐 포항의 축구 열기를 잘 키워내 포철전용구장으로 건네준 어머니 같은 존재는 아닐까.
1973년 4월. 동해바다의 한 항구도시, 포항에서 포항제철 실업축구단의 이름으로 현재의 ‘포항스틸러스’는 창단되었다. 당시 박정희 전(前)대통령과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은 1971년 첫 국제축구대회인 ‘박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를 유치할 뿐만 아니라 국내 축구에도 발전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포항제철 실업축구단은 ‘실업팀’으로써 1974년 ‘제22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 1982년 ‘코리안리그’에서 우승을 하는 등 한국축구의 중세시대를 닦아왔다.
1983년 5월 8일. 유공코끼리축구단(1982년 12월 17일 창단), 할렐루야(1980년 12월 창단 )의 두 프로축구단 그리고 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 등의 실업팀들로 유지되어오던 한국축구가 ‘수퍼리그’라는 이름의 ‘과도기적 프로축구’로 재탄생하게 된다. 당시 기존 두 개의 프로팀이던 유공과 할렐루야. 그리고 아마추어 3강으로 유명했던 대우, 포철, 국민은행. 이렇게 5개의 팀이 수퍼리그를 조직하였고 국내 프로리그의 출발을 알렸다.(‘이야기 한국체육사-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에서 인용)
‘과도기적 프로축구’라는 함은 유럽리그의 형태와는 달리 프로와 아마추어가 혼합된 한국프로축구의 시작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도기적 프로축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프로축구리그의 모습을 갖추어져 갔다.
프로축구로의 진입 이전부터 축구리그에서 뚜렷한 두각을 드러냈던 포항제철은 1984년 실업팀에서 돌핀스란 이름의 프로팀으로 전환을 하면서 현재 K-리그의 전신인 수퍼리그에 입성하게 된다. 1984년 기존 5개 팀과 현대, 한일은행, 럭키금성이 추가로 참가하여 총 8개 팀이 각 팀과 4번씩 총 28번의 경기를 치룬 ‘84 수퍼리그 (우승팀 - 대우, 28전 17승 6무 5패)’에서 포항제철은 8개팀 중 5위. 프로구단으로써 아마추어 팀에 밀린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포철은 이듬해 1985년, 집이 생겨서 일까. ‘85 골든슈의 최상국, 브론즈 슈의 이흥실의 활약에 힘입어 2위로 껑충 뛰어오르는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1984년, 1985년. 2년동안 8팀으로 행해지던 프로리그가 1986년 부터는 팀의 수가 다시 차츰 줄어들어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한국프로축구는 럭키금성, 포철, 유공, 대우, 현대, 일화의 6파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포철은 포항종합운동장을 배경으로 1995년부터 1990년까지 두 번의 우승과 두 번의 준우승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어 내고 박경훈, 이흥실, 조긍연, 박성화, 최상국, 최순호 등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해냈고 또 그들은 현재 한국축구를 훌륭히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 포항종합운동장에서의 추억을 박경훈 감독(현 U-17 대표팀 감독, 1984년~1992년 포항스틸러스 DF)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제가 프로구단으로 처음 입단한곳은 포항제철이었어요. 그 당시 포항의 홈구장은 포항종합운동장이었죠. 콘크리트로 지어져있고 잔디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처음 프로로 경기를 뛴다는 것이 저에게는 자부심이었죠. 많은 홈관중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좋은 모습 보이려고 노력도 많이 했었어요. 이회택, 조광래, 박창선, 이영무 등 당시 대부분의 국가대표선수가 포철 실업팀 출신이었어요. 그 사실 만으로도 제가 그팀에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죠.
요즘에는 각 구단의 서포터즈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서포터즈 같이 조직화된 응원은 없었죠. 그 대신에 포항제철 직원분들이 단체로 오셔서 삼삼칠 박수 치고 동네 주민들 운동장 찾아와서 여기저기서 술 드시면서 박수쳐주시고 그랬죠. 모르죠. 그때 서포터즈나 오빠부대가 있었더라면 제가 프로생활 한 5년은 더 했을 것 같은데요.(웃음)”
박경훈 감독은 1984년에 포철 아톰즈에 입단하여 프로데뷔 3년 만에 포철이 우승을 두 번이나 거머쥐게 한 포철의 명장 중의 한명이다. 그가 거쳐 간 곳은 항상 우승이나 그에 맞먹는 성과가 항상 있어왔다. 그는 포항종합운동장에서의 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명승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88년도 극적인 역전우승의 감격을 꼽았다.
“제가 포항에 있는 동안 세 번 우승했었어요. 1986년에 내가 결승골 넣어서 우승하고 1988년에 내가 MVP를 받았고 또 우승했고 마지막으로 제가 은퇴할 즈음해서 1992년에 주장하면서 우승했었어요. 그중에 88년도에 우승할 때였던 가... 포항대 현대전이었는데 우리(포항)이 그때 1위를 달리고 있던 현대를 이기면 우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현대를 1대0으로 누르고 우승했었죠. 그 경기가 참 기억에 남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제가 축구인생을 살아오며 참 많은 것들을 얻었네요.”
포항종합운동장에 울려 퍼지던 승리의 함성은 박경환 감독의 추억담들을 통해 마치 소라껍데기속의 바다소리 같은 청량함을 주는 듯했다.
1989년과 1990년 한 번씩의 시즌을 치르면서 포철은 그동안 푸근한 안방역할을 해주었던 포항종합운동장과의 작별을 준비했다. 1990년 11월 10일 포항제철에 의해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포항시 괴동동 1번지, 총대지 12,916평 그라운드 2,907평 좌석수 18,960석)이 준공되었던 것이다. 포철은 전용구장으로 홈구장 이동을 하게 되었고 당일 고려대를 새집 첫손님으로 맞이하여 기념 경기를 펼쳤다.
포철 아톰즈는 1997년, 아톰즈에서 스틸러스로 팀명칭을 바꾸었고 1997년, 1998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쉽에서 2연패를 달성하는 등 현재의 홈구장을 배경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써오고 있다. 하지만 포항스틸러스가 지금까지 명문구단으로 남을 수 있었던 그 배경의 중심에 포항종합운동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월간축구>
아들,딸 손잡고 ‘털보아저씨 보러가자’며 아침부터 싼 김밥을 도시락에 넣어 들고 나서던 젊은 부부들과 북적거리는 관중들 사이로 오징어 땅콩을 외치던 아저씨와 동네잔치 났노라며 삼삼오오 경기장을 찾던 어르신들. 그곳에 관한 추억이 각기 다를지언정 포항종합경기장에 모인 모두가 축구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
지금 포항종합경기장은 새 꿈을 꾸고 있다. 찬란했던, 축구가 축제가 될 수 있었던 그리고 현재의 포항 스틸러스가 존재할 수 있게 했던 ‘한국프로축구’ 역사의 한 부분을 포항경기장은 품고 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날 미래를 향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현재 포항시의 경기장 사용 계획을 감안하면 포항경기장이 프로축구관련 경기장으로의 재탄생은 힘들듯 하다. 하지만 오래전 이 경기장이 포항 지역주민들의 생활과 그들의 축제를 감싸안았던 그때처럼 새 모습으로 포항시민의 쉼터와 놀이터가 되어 주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다.
화려했던 프로축구가 지나간 포항종합경기장은 다소 황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새 전광판을 활용하여 월드컵 응원전을 펼칠것이라는 경기장관리소장(1부기사)의 말처럼 월드컵 열기로 다시 가득 채워질 경기장이 과거 영광의 다른 모습이 기대됨과 동시에 이 경기장이 포항 시민들에게 있어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서 스포츠와 건강을 일궈가는 미래의 ‘꿈의 구장’이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