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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태극(太極) 종주기】
1.산행지 : 智異山(1,915m)
지리산 태극종주 지도
2.산행코스 :어천마을 →웅석봉 →밤머리재 →왕등이재(930m 1박) →새재 →1325봉 →쑥밭재(1,250m) → 독바위 →하봉(1,781m) →중봉(1,875m) →천왕봉(1,915m) →제석봉(1,806m) →장터목대피소(1,640m 2박) →연하봉(1,667m) →촛대봉(1,703.1m) →세석대피소 →영신봉(1,651.9m) →칠선봉(1,576m) →선비샘(덕평봉1,521.9m)→벽소령(1,320m) →형제봉(1,442m) →연하천대피소 →명선봉(1,586m) →총각샘 →토끼봉(1,534m) →삼도봉(1,550m) →임걸령(1,310m) →노고단(1,507m) →노고단 대피소(3박) →종석대(1,356m) →성삼재(1,100m) →고리봉(1,248m) →만복대(1,433.4m) →정령치(1,180m) →고리봉(1,304.5m) →세걸산 →부운치 →바래봉(1,165m) →덕두산(1,150m) →구인월
총산행거리 : 86.8Km(도상거리).총산행시간 : 3박4일 (48시간 35분 중삭 및 휴식시간포함)
※태극종주시 시간당 평균750kal 가 소모되며 86km가는동안 27750kal가 소모되므로 충분한 휴식과 섭생이 필요함.
3.산행일시 : 2003년 10월 6일(수) ~ 10월 9일 (날씨:6일/맑음.7일/맑음.8일/맑음.9일/맑음)
4.산행자 : 임천모(백두산악회 고문).이준복(B-TEAM장).유내석(B-TEAM총무).박강수
5.PROLOGUE : 국립공원(國立公園) 제1호인 지리산(智異山)은 운봉읍 산내면, 인월면, 주천면일원 동남쪽 지역(地域)에 위치하며 금강산(金剛山), 한라산(漢拏山)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 (方丈山)로 불린다.
전북·전남·경남 3도의 5개 시군이 연접(連接)해 있으며, 국립공원(國立公園)지정 면적은 총440.48㎢로 그중 24.5%인 107.78㎢가 남원 지역(地域)에 속해있고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3대 주봉(主峯)으로하여, 동서로 약 200여리에 100여개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로 장엄(莊嚴)한 산세(山勢)를 이루고 있다.
사계절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특히, 뱀사골, 구룡계곡, 피아골,화엄사 계곡 등은 10㎞가 넘도록 다양한 절경을 담고있다. 구룡폭포, 불일폭포,칠선폭포 등을 비롯한 沼(여울)와 潭(못)이 철쭉, 녹음, 단풍, 설화와 어우러져 어느곳이나 속세(俗世)의 번뇌(煩惱)를 씻어 주는 듯 하다.
실상사,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등 천년 고찰(古札)과 암자(庵子)도 많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澤里志)> 지리산조(智異山條)에 의하면
지리산(智異山)은 남해 가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리하여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금강산을 봉래(逢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하며, 한라산을영주(瀛州)라고 하는데, 이 3곳의 산을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지리산은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 내렸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데, 간혹 남해 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 해서 두유산(頭留山)으로 적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두류산(頭流山)이란 명칭(名稱)에 관해서는 지리산의 전체적인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고, 두리 뭉실하며 또 사방으로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기때문에 이를 뜻하는 '두루' '두리' '둘러'가 한자로 표기·정착되는 과정에서 두류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개국(開國)할 때전국의 명산(名山)에 기도(祈禱)를 올려 자신이 갖고 있는 창업의 뜻을 물었는데 유독 지리산 만이 반기(叛旗)를 들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리산은 반역산(叛逆山) 또는 불복산(不伏山)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리산을 전라도에 귀속시켰던 것은 역적들을 지리산록의 전라도 지역(地域)으로 귀양(歸養)을 보냈기 때문이라 전(傳)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설(傳說)에 의하여 지리산을 '지혜롭고 기이한 산'또는'지혜와 다른 산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산의 어원(語原)을 여기서 찾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장(誇張)이나 착오(錯誤)로 볼 수 밖에 없다.
지리산은 원래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普薩)이라는 말 가운데 지(智)와 이(利)자를 따서 불렀는데, 다만 여기서 문수보살이 중생(衆生)을 계도(啓導)하기 위하여 갖 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 이란 뜻으로 지리산으로 적었다고 한다.
그렇담 지리산은 왜 지리산(智異山)이라 했는가? 학술적으로 접근해보면..
지리산(智異山)을 글자대로 풀면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은 산(山)”이라고 한다.하지만 지리산(智異山)은 그 너른 품 만큼이나 이름도 많다.
지리산(智異山)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쌍계사 진공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에 신라때 최치원이 쓴 비문에 나오는 “智異山(지이산)”이고 백두산의 맥(脈)이흘러왔다고 해서“두류산(頭流山)”.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방장산(方丈山)”혹은 현재의 음만 같은 ‘地理山’등으로 불렀다.
또 불가에서는 문수보살의 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에서 유래한 地利山(지리산).그리고 이성계가 기도(祈禱) 드릴 때 지리산(智異山)에서만 소지가 타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불복산(不服山)”.근세기에 와서는 빨치산의 소굴이라 하여 ‘적구산(赤狗山)’으로도 불렀다.
요즘 쓰이는 이름은 한자음으로는’지이산’인데도 ‘지리산’으로 읽는다.
그 까닭은 ‘두루넓고 크다’는 순수 우리말 ‘둘러.두루.두리.가 ‘드리.다리’로 간이화(簡易化)되었고 다시 구개음화 현상에 의해 ‘지리’로 변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한자는 “智利.地利.智異”등이 혼용(混用)되다가 후에 불교의 영향(影響)을 받아 현재의 지리(智異)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리산으로 읽으면서도 한자로는 “智異山”이라 쓰게 되었다.
또한 지리산은 종교적인 신비로움과 신성함 그리고 영(靈)적인 기운이 넘치는 산이다.
신라 때부터 우리 나라 5악 가운데 하나인 남악(南嶽)으로 불려져 국가에서 제사(祭祀)를 지내 왔으며, 우리 조상들의 가슴 깊이 남아있는 무속신앙(巫俗信仰)의 발원지(發源地)로도 알려져 있다.
먼 옛날 천신(天神)의 딸 성모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딸 여덟 명을 낳아 모두무당(巫堂)으로 길러 8도(八道)에 보내 민속(民俗)을 다스리게 했다는 무조설(巫祖設)이 있고 영신봉 아래의 영신대나 백무동의 굴바위당, 칠선계곡 등에서 기도(祈禱)하거나 치성(致誠)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것도 신앙적(信仰的)인 산으로서의 지리산(智異山)의 기운(氣) 때문이다.
6.산행기
『산행기 요약』
지리산 태극종주란 지리산 천왕봉을 기점으로 중봉,하봉을 거쳐 왕등재,밤머리재를 통과한후 웅석봉까지를 동부능선이라 하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를 주릉(본릉)이라하며 노고단에서 만복대,고리봉,바래봉을 지나 덕두산까지를 서북부 능선이라 한다.
이중 동부능선과 서북부 능선은 산꾼들이 별로 많이 다니지를 않아 호젖한 산행을 좋아하는이들에겐 좋은 능선이지만 등산로가 소로길이라 나무에 베낭이 자주걸려 힘을 빠뜨리거나 길을 잘못들 우려가 많다.
참고로 동부능선 중 하봉에서 밤머리재 구간은 방사 및 야생곰의 서식지로 최근의 산행자중이들 곰이 출현하였다는 설이 제기되어 10월초부터 집중단속 기간이라 적발시 50만원 이하의 범칙금을 부과하는 곳이니 참고해야 할것이다.
태극종주의 시작과 끝점은 덕두산과 웅석봉이니 오르고 내리는 장소는 다소 다르더라도 문제될게 없고 몇일을 소요하여 종주를 하였던 시간과는 관계없이 이 두봉에서 시작하여 천왕봉을 지나 어느 한 봉으로 하산하는 태극종주는 산꾼들의 꿈이자 열망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열거하였듯이 이 태극종주를 하는데 엄청난 체력소모와 인내력이 필요하니사전에 충분한 체력훈련을 한다음 도전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번 필자가 실시한 태극종주의 시작점은 경호강을 가로질러 웅석봉 밑 조그맣고 한적한 어천마을에서 시작하여 남원의 구인월로 하산하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어천마을의 어천계곡을 따라 웅석봉을 오르는 산길은 해발 150m 에서 1099m 의 웅석봉까지70˚경사의 사면을 갈지(之)자로 계속해서 오르는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힘든 코스이다.
하지만 힘겹게 웅석봉에 오르고나면 지리산 동부능선 및 멀리 남덕유산을 비롯 가야산,황매산,왕산등 주변 조망이 뛰어나 오르는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고 남는다.
웅석봉을 하산하고 밤머리재에서 시작되는 동부능선은 900~1200m 정도의 지리산내에서는 명함을 내밀수있는 봉들은 아니지만 오르 내림이 크고 급사면이 많아 종주시 산꾼들의 힘을 빼앗는 마의 코스이다.
식수또한 갈수기에는 공급받기가 어려워 식수보충시는 계곡을 찾아 한참을 내려갔다 올라오는 수고를 더해야 한다.
또한 이 코스는 방사 및 야생 반달가슴 곰 출현이 잦고 야생 동,식물들이 많이 살고있으며 왕등이 습지등 보호구역이 많아 출입금지 구역이니 참고하시길…
지리산의 주 능선은 많은이들이 지리산 종주산행의 묘미를 느끼는 곳이니 생략하고 노고단에서부터 시작되는 서북부 능선은 노고단에서 만복대를 거쳐 정령치 까지는 등산로도 잘 정리 되어있고 산행객들도 많아 산행이 무난하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을 거쳐 바래봉까지는 서북능 종주산행을 하는 산꾼이 아니면 다니질 않은곳이라 등산로도 정비되어 있지않고 희미한 구간이 많아 길을 잘못 찿아들 수 가 있는곳이니독도에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다.
특히나 가을과 같이 나뭇잎이 떨어져 수북히 쌓여있는 철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서북능 종주시 식수공급은 동부 능선과는 달리 노고단이나 성삼재에서 보충한다음 정령치 휴게소에서 바래봉까지 갈수있도록 충분한량을 보충하고 나면 바래봉 정상 바로 하단에 많은량의 식수가 나오니 식수 걱정은 없는 곳이다.
『앞글』
필자(筆者)가 지금까지 산행(山行)을 해오면서 백두대간(白頭大幹) 구간종주를 비롯 한반도남쪽의 산들을 거의 다 올라 보았지만 인내력(忍耐力)이 부족한 탓인지 아님 기회(機會)가 부여(附與)되지 않아서 인지 아직까지 지리산(智異山) 태극종주 를 해보질 못해 언젠가 부터인간한계의 시험장인 지리산태극종주의 꿈을 그리고 있던중 우리 백두산악회 A-TEAM 및 D-TEAM 에서 여러 사람이 태극종주를 완료하여 필자(筆者)를 비롯한 B-TEAM도 급한 마음에 이번에 시도를 하게 되었다.
우리 B-TEAM 에서는 선임 TEAM 과는 달리 태극종주의 묘미(妙味)를 느껴보기위해 이들보다 1박을 더 길게 기획(企劃)하여 충분한 시간과 주변(周邊)의 볼거리를 직접 확인해보고 지금까지 지리산 주능종주 및 일반산행을 하며 써왔던 산행기들을 재 정리도 해볼 겸 지리산 주릉의 모든 것들을 기록(記錄)으로 남겨 보고자 방대한 내용(內容)의 종주기를 작성해본다.
태극종주 1개월 전부터 필요장비나 준비물은 무엇인가 재 검토해보고 식단등 모든 준비물들을 사전에 기획 및 확인해 보지만 차량 이동 방법에서부터 난관에 부딛치고 종주 참여인원 선정에도 문제가 야기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지금까지 산행해오며 느껴왔던 체력이나 인내력에서 뛰어난 4명이 1차로 선정되었고 모든 것을 이들 4명이서 해결하기로 준비해본다.
산행 이틀전(10/04일) 4명이 광영동 언양숯불갈비집에서 만나 만찬겸 MEETING 을 실시하여 기획된 준비물등을 재 검토해보고 차량을 밤머리재에 1대를 두고 이 차량에 베낭등 무거운짐을 놓아둔채로 어천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자는 이준복 팀장의 제안이 있었지만 산행 처음부터 모든짐을 둘러맨체 산행해 보자는 필자의 제안으로 결정하고 차량은 유내석씨의 소나타 차량으로 주택단지 폭포수앞에서10월6일06:30에 모두 모인후 출발하자는 의견으로 결정하고 산행날짜를 기다리는데 산행전일부터 날씨가 왠지 시원찮은 느낌이다.
갑자기 대기온도도 떨어지고 그 맑던 하늘이 하루종일 잔뜩 찌푸린채로 울상이다.
와이프가 걱정이 되는지 비가내리는데도 산엘 가느냐고 몇번이고 묻는다.
하지만 산행준비를 위해 베낭을 꾸리고 4일동안 먹고 마실 식량과 식수등을 챙겨넣고 보니베낭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지만 산행준비를 완료해놓고 보니 마음은 벌써 지리산에 가 있다.
당일아침 잘 다녀오라는 와이프의 배웅을 받고 약속장소인 폭포앞에 나가니 순천에서 출발한 박강수씨가 도착하고 난뒤 한참을 기다려도 유내석씨의 차량이 오질 않더니약 5분정도 지난후 유내석씨가 나타난다.
약속장소가 백운 아트홀인줄 알고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질않아 필자의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단다.
모두 차량에 탑승하고 남해고속 도로를 따라 진주를 거쳐 단성 IC를 빠져나와 경호강을 따라 산청방향으로 가다보니 길옆에 어천리란 표지판이 나타나 이곳으로 빠져나오니 곧바로 경호강 으로 내려선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에 파손된 조그만 다리를 건너 웅석봉 계곡하단에 붙어있는 조그만 마을 어천리에 접어들어 이 마을의 가장자리에 있는 어천상회란 민박용 가게집의 앞마당에 도착하니 주차료 \3,000원 이렇게 빨간 글씨로 써있다.
가게집에 찿아가 주차료로 \5,000원을 지급하고 유내석씨가 준비해온 식량과 부식등 공용 물품을 나누어 베낭에 꾸리고 나니 이 베낭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필자의 65ℓ베낭이 꽉차고 이준복 팀장의 80ℓ베낭이 꽉찬다.
하지만 박강수씨의 45ℓ베낭에는 무거운 짐만 넣어서인지 필자는 들수가 없을 정도다.
- 07:50 :어천마을 어천상회 앞마당 도착(해발:130m. 현재온도:13℃)
웅석봉 자락의 어천마을은 자생풍수(自生風水) 사상(思想)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맞추어 터를 잡은 자연발생(自然發生) 마을이다.
이 마을의 가장자리에 있는 어천상회(0596-72-6911) 앞마당에 차량을 주차하고 가게집에 들어가 주차료 \5,000 원을 지급하고 유내석씨가 준비해온 짐을 나눈후 출발하기에 앞서 기념 사진을 찍는다.
- 08:20 :어천마을 출발
어천상회 주인에게 진입로를 묻는다음 콘크리트로 포장된 진입로에 들어서자 할아버지 한분이 검정 비닐봉투에 버섯을 담아가지고 내려온다.
이 할아버지께 웅석봉을 오를려고 하는데 진입로를 알려 달라하자 이길이 맞다고 하시며 자기가 가져온 버섯을 가르키며 웅석봉을 오를 때 이 버섯을 따가라 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버섯을 잘몰라 독버섯을 채취하면 큰일이라 그냥 가려고 하는데 박강수씨가 견본으로 사용한다고 버섯하나를 달라하자 선뜻 하나를 준다.
이 견본 버섯을 비닐에 담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 08:32 :계곡 안부 1차 휴식
마을내 산쪽으로 나있는 콘크리트 도로를 조금 따라 오르자 계곡 양옆으로 멋들어 지게 잘 지은 전원 주택들이 즐비하다.
필자도 노후엔 저런곳에서 살고 싶을만큼 집 앞마당엔 잔디를 깔고 웅석봉에서 흘러내린 옥수 및 비경계곡을 옆에 둔 신선의 집이다.
이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자 계곡 옆에 원두막형식의 정자가 있고 이 정자를 지나 계속해서 오르자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타난다.
어천계곡의 비경에 취해 몰랐지만 양 어깨를 찍어 누르듯 하는 베낭의 무게가 장난이 아닌지 벌써 온몸에 땀이 비오듯이 한다.
앞선 이준복 팀장도 힘이 들었던지 출발한지 10여분 밖에 안되었는데 계곡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내 도착한 필자보고 산행 시작 초입이니 조금 쉬었다가 가자고 한다.
잘되었다 싶어 필자의 베낭에 담겨있는 배와 사과봉투를 꺼내어 놓으며 먹으라고 하였더니 무거운데 이런걸 가져왔느냐며 사양하지 않고 먹어댄다.
속 없는 와이프가 산행중 무거울까봐 사과와 배를 깍아서 소금물에 일차 담근후 다시 설탕물에 담가 두었다가 비닐봉투에 종류별로 싸준 과일이다.
필자는 산행시 이렇게 만든 과일을 가지고 다니면 무게도 적게 나가고 쓰레기도 줄일 수가 있어 항상 이렇게 만들어 다닌다.(여러분도 참고하시길)
가져온 배는 다먹고 사과봉투는 박강수씨가 정상에서 먹는다며 자기 베낭에 담는다. 평소에도 알고 있었지만 대단한 체력이다.
필자는 무거워 꺼내놓은 과일을 더 무거운 베낭을 맨 박강수씨는 주워 담는다.
- 09:05 :능선 안부 2차 휴식
1차 휴식후 어천계곡을 2번 건너고 나니 길옆에 묘 1기가 있고 이 묘를 지나자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필자가 쓰고있는 모자의 채양에서는 어천계곡의 옥수 흐르는 량과 맞먹을정도의 육수가 떨어지고 내품는 숨소리는 계곡을 스쳐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같은 정도다.
필자의 고통을 아는지 앞선 이준복 팀장이 쉬었다 가자며 길옆에 베낭을 벗고 주저 앉는다.
필자도 얼씨구나 하고 적당한 장소를 찿아 자리를 잡으니 이준복 팀장이 가져온 술을 꺼내 한잔 하자며 권한다.
필자는 본래 술을 먹지않기 때문에 사양하였지만 뒷 따르던 박강수씨는 이게 무슨 자다가 떡이냐 하며 반긴다.
이 모습을 본 필자가 술이나 한잔씩 하며 집에서 좋게 휴식이나 하지 웬 고생을사서 하느냐 하니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단다.(5분 휴식)
- 09:28 :능이버섯 발견
2번째 휴식장소를 출발하여 가파른 급사면을 아무 생각없이 땀을 쏟으며 오르는데 등산로 옆 갈참나무 하단에 어천마을에서 할아버지가 보여준 능이버섯 4송이가 필자의눈에 보인다.
버섯을따서 박강수씨가 견본으로 가져온 버섯과 대조를 해보니 영락없이 똑같다.
고리마냥 가운데가 뚫린것도,버섯의 외피에 점들이 박혀 있는것도 똑같다.
이 버섯을 채취하여 비닐봉투에 넣은후 다시 출발 하는데 앞섰던 유내석씨가 또 버섯을 찿아낸다.
『능이버섯』
능이버섯은 가을에 활엽수림 내 땅 위에 군생 또는 단생하는 버섯이다.
분포는 한국과 일본에서 자란다.
이 버섯은 독특한 향기가 있는 식용버섯이나 생식하면 가벼운 중독 증상이 나타나며, 위장에 염증과 궤양이 있을 때는 금기이다.
성분은 유리 아미노산이 23종 들어있으며, 지방산 10종과 미량 금속 원소가 13종이 들있고 그밖에 유리당, 균당이 들어있다.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주는 효능이 있다.민간에서는 쇠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 이 버섯을 달인 물을 소화제로 이용해왔다. 생약명은 능이(能珥)이며, 일본에서는 '고우다케'라고 부른다.
민주름 버섯목 굴뚝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으로 높이 10∼20cm로 나팔꽃처럼 핀 깔때기 모양이고, 균모는 지름 10∼20cm이며 중심부는 줄기의 기부까지 깊숙이 뚫려 있다. 갓 표면에는 거칠고 큰 인편이 있다.
초기에는 담홍갈색~담갈흑색이나 차차 홍갈색~흑갈색이 되고, 조직은 담홍색이다.
자실층은 길이 1센티미터 이상 되는 많은침이 돋아나 있고,초기에는 회백갈색이나 후에 담흑갈색이 된다.
자루는 길이 3∼6센티미터로 비교적 짧고 뭉뚝하며, 대 기부까지 침이 돋아나 있고 담홍갈색~담흑갈색이다. 포자는 구형~유구형이고, 표면에 불규칙한 돌기가 있고, 포자문은 담갈색이다.
건조시키면 매우 강한 향기가 있어"향이"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자연산 능이버섯은 암예방과 기관지 천식 감기에 효능이 있으며 그 맛은 시원하면서도 담백하고 뒷맛이 깨끗하다.
능이 버섯을 쇠고기와 함께 요리해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 09:30 :버섯 채취차 휴식
주변에 버섯이 널려 있는 것 같아 잠시 휴식하며 버섯을 채취하기로 하고 무거운베낭을 벗어놓고 등산로 주변을 둘러보자 여기 저기에 능이 버섯이 많이 있다.
여러 송이를 채취 하였지만 너무 큰 버섯은 버리고 작고 갓이 작게 핀 좋은것만 골라 비닐 봉투에 담은후 09:40 출발
- 09:57 :헬기장 도착(해발:740m)
버섯 채취후 20여분간 급사면의 갈지(之)자 등산로를 땀을 쏟으며 오르니 능선마루가 나타나고 이 능선 마루에 헬기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 헬기장 옆으로는 임도가 나있고 이 임도는 청계리로 이어진다.
헬기장 옆에있는 길안내 게시판에는 정상 1.3Km 라 되어있다.
헬기장에서 잠시 휴식하며 유내석씨가 가져온 떡과 음료수로 허기를 달랜다음 10:10 경에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웅석봉 ⇒ 밤머리재】
- 10:53 :웅석봉 정상(1,099m)
헬기장 임도를 벗어나 정 북방향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자 이내 또 임도다.
이 임도를 벗어나자 본격적인 마루금 을 오르는 등산로다.
어찌나 가파르고 험로이던지 대형 배낭을 메고 오르는게 엄청 힘이든다.
주변의 나무를 붙잡거나 바위벽 사면을 오르느라 네발로 기어 오르듯이 하며 힘을 쏟으니 이내 감시초소가 보이고 그옆에 웅석봉 정상이다.
웅석봉 정상에서 우리가 올라온 어천리를 내려다보니 바로 코밑이다.
이것은 이 등산로가 바로 직벽에 가까운 사면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날씨가 쾌청해서인지 웅석봉 정상에서 본 지리산 동부능선과 주변의 산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260˚ 방향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바로지척이고 300˚방향에는 하봉이 보이며340˚방향에는 왕산이 350˚방향에는 남덕유산과 서봉이 보이고 20˚방향에는 가야산이 보인다.
이곳 정상에서 어천리까지는 4.2Km .내리 4.3Km. 청계리 7.1Km. 우물 350m 이다.
『웅석봉』
위치 : 경남 산청군 산청읍·삼장면·단성면
높이 : 1,099m
유산(楡山)·웅석산이라고도 하며, 1983년 11월 23일 군립공원(郡立公園)으로 지정(指定)되었다.
산정상의 형태가 곰(熊)같이 생겼다 하여 웅석봉(熊石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說)과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傳說)이 전할 정도로 산세(山勢)가 험하다.
지리산 천왕봉(1,915m)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중봉,하봉,새재,깃대봉을 지나 점차 낮아지다가 밤머리재에 이르러 다시 우뚝 솟은 산인데 옛선조들이 이곳 웅석봉 정상에서 가뭄이 든 해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던곳이다.
산 아래로는 경호강(鏡湖江)이 남동쪽으로 흘러 남강에 이르고, 남쪽 골짜기에는 밀양손씨(密陽孫氏) 3형제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손장굴(孫將窟)이 있다.
- 10:12 :헬기장 도착
웅석봉 정상에서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주변 산군들을 둘러본다음 갈길이 멀어 서둘러 내려오니 헬기장이다.
이곳 헬기장에서 50m 만 내려가면 샘이 있다.
헬기장의 이정표에는 웅석봉 0.3Km. 내리 5Km. 밤머리재 5.9Km. 청계리 6.8Km 라 기재되어 있고 우물 50m 라 되어있다.
- 11:46 :왕재 도착(해발 925m. 현재온도:13℃)
웅석봉을 출발하여 오르 내림이 거의 없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2Km 의 거리를 내려오니 왕재다.
이곳 왕재는 지곡사에서 올라오는 삼거리다.
이 웅석봉 능선은 홍계리쪽으로는 사면이나 지곡사 쪽은 절벽으로 경호강에서 바로 올라치는 바람이 무척이나 서늘하고 경호강측 직벽 하면의 덜 농익은 단풍의 비경이 직벽과 어우러져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 왕재의 이정표에는 웅석봉 2Km. 선녀탕 2Km. 밤머리재 3.3Km 라 되어있다.
이곳에서 좀 이른 중식을 하고 가기로 결정하고 집에서 가져온 김밥과 도시락으로 중식을 나누어 먹은후 12:15분 밤머리재를 향해 출발한다.
『왕재 주변 이야기』
웅석봉의 주계곡인 지곡 아래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創建)된것으로 추정(推定)되는 지곡사가 있는데 이 사찰(寺刹)은 산청의 옛 지명인 산음현의 대표적인 사찰(寺刹)이었으나 현세에 이르러 소실되어 버리고 절터에 옛 고찰(古札)이었음을 알려주려는 듯 구부2기가 있는데 1기는 6각구갑문이며 나머지 1기는 구갑문 뒷부분의 꼬리 부분을 파상형조로 처리 우수한 조각법으로 보여지며 일설(一說)에의하면 고려시대 예부상서인 손몽주가 지은 혜월스님의 비(碑)와 한림 왕륭이 지은 진관선사의 비(碑)가 서있었다고 한다.
이 외도 주초석, 석조우물, 돌 계단, 팔판연화문대,석축재 등이 있는것으로 보아대사찰(大寺刹)이었음을 알 수 있고 구설(口說)에 의하면 번창기에는 승려(僧侶)가 30여명이 있어 방앗간만 12개가 있었다고 하며 절터 입구에는 홍교터가 있는데지곡사의 주지승이 축조(築造)하여 사용하다 물 난리에 파괴되고 지금은 세진교의암석비만 남아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불심(佛心)이 강한 강덕이 보살이 1958년 절터 근처에 지곡사를중건하여 대웅전,산신각, 요사채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지곡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허물어진 지곡산성을 지나 주차장이 있으며 왼쪽 길은 웅석봉가는 길이고 오른쪽 가파른 언덕길은 심적사가는 길인데 심적사는신라 경순왕3년(929년)에 창건하였으나 6,25동란때 소실되어 동봉화상이 삼봉산으로 옮겼으나 1997년 옛터에 복원되었다.
절옆에는 조선 헌종2년 (1842년)에 세운 추파당대사탑비와 헌종 5년에 세운한암대사지비가 있는 이 비는 옛 심적사고승의 높은 뜻을 기려세운것이다.
절뒷편에는 나한암터가 있는데 이 터 에는 신기한 전설(傳說)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강원도 어느 절에서 한 중이 잦은 난리을 피해 22구의 나한불을 멱서리에 담아가지고 산음(산청)에 들어서서 지곡의 어느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밥때가 되어서 마을에 들렸다가 다시 쉬고있든 나무밑에 와보니 나한불이 모두 없어져 버렸 다. 사방을 헤맨끝에 심적사 뒤 풀속으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가보았더니산등성이 넘어 절벽 바위 밑에 나한불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중이 그곳을 나한암으로 생각하고 안치 하였는데 한해 겨울에 폭설이 와서 나한암에 식량과 불씨가없는채로 겨울을 맞게 되었는데 중한사람이 나한암을외로이 지키면서 동지가 되어 도 팥죽은 생각도 못했는데 동짓날 아침에 부엌에 가보니 부뚜막에 팥죽이 한그릇있고 아궁이에는 불씨도 피고 있지 않은가? 이상하게 생각한 중은 팥죽을 들고 불전에 들어가니 부처의 잎술에 팥 죽이 묻어있었다.
상상치 못한일이 있고난 후 봄이되어 탁발차 산넘어 홍계마을로 갔는데 한집에 가니 주인이 묻기 를 지난 겨울 동짓날 새벽에 나한암 상좌가 왔기에 팥죽을 먹인뒤스님 한분이 있다고 하기에 팥죽 한그릇과 불씨를 보낸적이 있다고 하지않는가?
그래서 이 모든일이 부처님이 한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주인에게 극진한 인사를하고 더욱 불도에 증진하여 승불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웅석봉의 근대 수난사는 1952년 7월 웅석봉일대의 게릴라 소탕을 위해 1개중 대 규모의 전투경찰대를 투입 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자 권영도 경위등 5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적의 요새를 공격 섬멸하고 권영도 경위는 26세의 젊은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에 정부는 큰공을 세우고 순직한 권영도의 공적 을 기려 일약 순경에서 경위로 추서 었며 생전에는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밤머리재 ⇒ 왕등이 능선 비박지】
- 13:23 :밤머리재 도착(해발 560m. 현재온도:23℃)
왕재를 출발하여 마루금을 오르 내리며 1시간정도 내려오자 이내 밤머리재로 내리는 사면의 통나무계단이 나온다.
평소 무릎이 시원찮은 필자는 이런 통나무계단을 만나면 고역이다.
일행들을 앞세워 보내고 후미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니 베낭의 하중에 짓누른 무릎이무척이나 아프다.
어렵사리 밤머리재에 도착하니 먼저온 일행들이 쉬고 있더니 유내석씨와 박강수씨가 식수를 떠온다고 필자의 물통을 달란다.
물통을 꺼내어 이들에게 보내고 밤머리재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가 오르는 동부능선진입로 초입에 흰 비닐로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둘러놓고 각종 경고판을 게시하여 놓았다.
경고판의 내용은
이 지역은 멸종위기에 처한 반달가슴곰등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공간입니다.
본 지역을 무단 출입시는 자연공원법 제86조 규정에 의하여 과태료 50만원 이하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상기와 같은 내용의 게시물이 있는데도 들어간다는게 산꾼으로서 양심과 자존심이허락하질 않아 식수를 보충하로간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도착하자 본 경고문을 보라하고 어떻게 하였으면 하느냐고 상의를 해보니 유내석씨가 우리 보다 조금 앞서 종주를 하였던 오수환씨에세 전화를 하여 물어보니 오수환씨가9월하순에 종주할때는 이런 금줄이 없었고 10월초 웅석봉을 가기위해 와 봤더니 금줄이 처져 있더란다.
4명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협의후 종주를 하기위해 회사에 휴가까지 내었는데 이대로 뒤돌아서기에는 너무 서운하니 산행시 최대한 정숙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각자가 노력하고 만약 적발되더라도 법칙금을 분산하여 내자고 합의한다음 금줄을 넘어 왕등이 재로 오른다.(13:55분)
※ 해발 570m 의 밤머리재는 산청군 시천면에서 지리산 왕등이재와 웅석봉 사이를가르며 넘어가는 지방도로가있는 고개의 이름이며 주변에 밤나무가 하두 많아밤머리재 부른다.
- 14:41 :왕봉 헬기장 도착(해발 895m)
밤머리재 금줄을 넘어 6~70˚정도의 급사면을 오르는길은 쉽지만은 않다.
밤머리재에서 약 300m 를 곧바로 치고 올라야 하는 급사면 지역이다.
한참을 오르다 마루금 상에서 잠시 휴식후 곧바로 다시 오르자 이내 왕봉 정상이고바로 하단에 헬기장이 있다.
이곳 헬기장에서 본 240˚방향에 있는 천왕봉은 까마득히 보인다.
헬기장 나뭇그늘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며 가져온 연양갱과 사탕등으로 에너지를보충한다음 왕등이재를 향해 출발한다.
- 15:40 :능선 안부 휴식(해발 720m)
왕봉에서 낙엽이 수북히 쌓여 미끄러운 급사면을 한참을 내려온 다음 다시 오르 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능선 안부에서 잠시 휴식한다.
이제부턴 휴식시간에 사탕이나 초코렛등 당도가 높은 고 칼로리식품을 쉴세없이 먹어 대기 시작한다.
체력보강을 위한 필수 사항인것이다.
이곳 마루금 상 곳곳에는 멧돼지들이 풀뿌리나 칡뿌리등을 찿아 먹느라 이곳 저곳헤집어놔 꼭 시골의 농부들이 밭갈이를 해놓은 것 같을 정도다.
이곳에서 10여분 휴식후 다시 출발한다.
- 16:34 :동 왕등이 정상 도착
안부를 출발하여 마루금을 한참 오르내리다 보니 우리 앞에 커다란 봉우리가 지처 있는 우리들앞을 당당하게 가로 막고있다.
동 왕등이 인것이다.
이 동왕등이를 오르는 마루금은 암릉길로 험로중에 험로이다.
젖먹던 힘까지 쏟아가며 죽을 힘을 다해 오르다보니 잘생긴 바위로 구성된 봉이다.
이 동왕등이 정상은 주변 산군을 관찰하기엔
아주 적합한 장소로 사통팔달이다.
필자가 둘러본 바로는 120˚방향에는 우리들이 지나온 웅석봉이 보이고 220˚방향에는대원사가 손바닥 들여보듯이 보이며 280˚방향에는 윗 새재 마을이, 220˚방향에는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써래봉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멀리로는 0˚방향에 남덕유산이 보이고 20˚방향에는 금원산과 기백산 황석산이 보이고 350˚방향에는 함양 백운산도 훤히 보인다.
이곳 정상에서 사진을 한컷한다음 16:45 분 출발한다.
- 17:50 :995봉 정상 도착
동 왕등이봉을 출발하여 가파른 능선 마루금을 한참을 내려온후 등산로 주변에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는 산죽(조릿대)밭을 헤치며 계속해서 오르 내리다보니 또우리들 앞을 가로 막고있는 커다란 봉우리가 보인다.
이젠 이런 봉루리를 만날때마다 ‘아이고 죽겟네”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날은 어두어지기 시작하여 갈길은 바쁜데 앞에 시커멓게 버티고있는 봉을 바라보니 욕지기가 않나올수가 없지않은가?
비지땀만 쏟아가지고는 알될 것 같아 소리까지 “끙끙”거리며 어렵사리 오르고 나 니 그저 아무곳에서나 볼수있는 평범한 산봉우리다.
시간이 없어 이곳 정상에서 10분 휴식후 곧바로 마루금 사면을 내려오는데 이젠 무릎 관절이 힘이 없어 자꾸 꺽여 내려가기가 무척이나 힘이든다.
- 18:00 : 안부 비박준비
힘겹게 안부에 들어서자 이곳에서 비박을 하자고 이준복 팀장이 제안한다.
모두들 힘에 겨워 한발이라도 덜 이동하고 쉬자하니 모두들 좋다한다.
적당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고 노숙 준비를 마친후 등에 불을 밝히고 그동안 무 겁게 가져온 돼지 두루치기를 꺼내놓고 구워먹는데 박강수씨가 커다란 양주병을 꺼내 든다.
저러니 그렇게 베낭이 무거울수밖에…
긴긴밤 지새우기가 어려웠던지 이준복씨와 박강수씨 두사람이서 커다란 양주 한병을 다 비우고서도 모자라는지 또 소주까지 꺼내 마시기 시작한다.
준비해온 도시락과 구워진 두루치기로 훌륭한 만찬을 즐긴다음 포만감과 산행으로지쳐있는 육신을 달래기 위해 모두들 잠자리에 든다.(19:25분)
지나온 산들과 앞으로의 산행 일정을 생각하며 잠을 들지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이게 웬 이상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온산을 포호하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니 000 의 코고는 소리다.
이건 코를 고는게 아니라 확성기를 틀어놓고 코를 고는 것 같아 오늘 밤은 걱정이없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것이 언젠가 필자가 산행중 비박을 하는데 오소리란 놈이 필자의 비박장소 주변을 돌아다니며 얻어먹고 갈것이 없나 기웃거리더니 밖에 놓아둔 필자의 장비들을 기어이 엎지르고 만 사건이 있었는데 오늘 밤은 000 씨의 코고는 소리땜에아무리 간큰 오소리나 동부능선에 서식하고 있는 곰이라도 질겁을하고 근처에는 얼씬도 않을 테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필자의 귀만 막으면 그 아니 금상첨화 구나 생각하며 편안히 잠자리에 든다.
잠깐 잠이 들었나 했는데 그동안 신나게 잘자던 박강수씨가 일어나 청아하게 뜬 달을 보느라 수선거리니 이내 이준복팀장도 일어나 함께 수선거린다.
이들이 수선거린틈을 이용하여 필자는 잠깐 잠이 들었나 했는데 시계를보니 익일 05:00 시다.
곤히 자고있는 동료들을 기상시키는데 유내석씨가 잠이 부족하였는지 잘 일어나질 않으려 뭉그적 거린다.
【왕등이 능선 비박지 ⇒ 장터목 산장】
- 05:00 :기상
피곤하였던지 생각보다는 잠을 잘잤다는 생각이 들고 전날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것 같은 기분좋은 새벽이다.
아마 오염되지않은 청정지역의 지리산 마루금에서 기(氣)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덕분 이리라.
하늘엔 별들이 초롱초롱 보석을 뿌려놓은듯 반짝이고 있지만 아직은 사방이 깜깜하여 헤드랜턴을 밝히고 풀어 헤쳐놓은 짐들을 정리한후 온도를 보니 7℃ 다.
짐정리가 완료되어 다시한번 주변에 흔적이 남지않았나 확인후 05:40 출발한다.
- 05:55 :왕등이재 도착
비박지를 출발하자마자 앞을 가로막고있는 봉우리를 힘겹게 오르자 우측하단 지척에 함양군 금서면 민가들의 불빛이 보인다.
마루금을따라 바쁘게 이동하다보니 동녁이 훤이 밝아오고 밤새 등산로 이곳 저곳에거미줄을 쳐놓았는지 앞서가는 필자의 몸을 거미줄이 휘감긴다.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봉우리를 오른다음 완만한 내리막길을 신나게 가다보니 왕등이 재가 나온다.
우리팀이 원래는 이곳 왕등이재에서 비박을 하려하였는데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이 조그만 봉우리하나를 넘지 못하고 왕등이재 바로 전단에서 1박을 하고 말았다.
이 왕등이재는 대원사 계곡에서 함양 삼장면을 넘나드는 재이다.
『왕등이재』
지리산 동쪽 끝자락에 왕(王)이 올랐다는 왕등재가있다.한자말로는 왕등치(王登峙)라고 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왕봉·중봉·하봉에서 웅석봉 사이의 정남향으로 자리한 보기드문 명당(明堂)으로 일컬어진다.
해발 1000m급에 불과하지만 천혜의 경관(景觀)을 자랑하는 왕등재는 지리산 주변의산청 과 함양의 전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가 하면 영욕(榮辱)의 역사(歷史)를안고 도도히 흐르는 경호강의 물굽이를 발아래 두고 있다. 가히 선경(仙境)이 따로없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왕등재는 천혜의 지리적 여건과 함께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한맺힌 구국(救國)정신이 깃들인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해 깊어가는 이 가을에 한번쯤 답사(踏査)해 봄직한 명소(名所)이다.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특히 이 마지막 임금에 얽힌 사연이 깃들인 곳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이곳 왕등재가 가장 극적(劇的)인 지점으로 인근의 왕산 기슭 구형왕릉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갖고 있다.
왕등재에 얽힌 구형왕 설화(說話)는 지리산에 들어온 구형왕이 왕등재에서 토성(土城)을 쌓고 항전(抗戰)하다 끝내는 왕산으로 쫓겨가 최후를 맞게 됐다는 구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흔적들로 외곡마을에서 왕등재로 곧장 오르다 보면 왕등재와 오른쪽 1030m 고지를 원형(圓形)으로 둘러싼 토성(土城)이다.
토성(土城)은 외성(外城), 내성(內城)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3m 정도였을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성(城)을 따라 남문·서문.북문이 적당한 간격(間隔)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성문이있던 곳만 석축(石築)을 쌓은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러한 토성(土城)과 성문의 석축(石築) 흔적은 아직도 왕등재 일원에 남아 있다.
구형왕의 축성(築城)에 관한 구전(口傳)은 왕등재와 함께 앞서 "국골"편에서 언급한 추성산성터 에서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추성산성을 축조(築造)하고 국골에서 병마(兵馬)를 훈련(訓練)했다는 구전(口傳)을뒷받침하는 것들로는 얼음터·두지터 등이다.
반면 왕등재의 사연은 왕등재 일원의 토성과 성문 흔적 이외에 왕등재 남쪽의 935m고지의 깃대봉(군대의 깃발을 걸었다는 의미),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다.
결국 왕등재에 얽힌 구형왕의 사연을 살피면 왕등재를 궁(宮)으로 삼고 유평계곡
일원을 마지막 요새(要塞)로 삼았다는 것으로 추정(推定)할 수 있다. 이에서 볼 수있듯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두 곳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구형왕이 강력한 요새(要塞)를 구축(構築)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지리산 사람들은 이 두 가지의축성(築城)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며 남다른 애착(愛着)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구형왕이 신라에 쫓겨 국골 일원에서 항전(抗戰)하다 다시 왕등재 일원을요새(要塞)로 삼았으나 결국은 쫓겨 왕산으로 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가설(假設)을세워 볼 수 있지만 이는 구전(口傳)을 통한 가능성일 뿐 정확한 고증(考證)이 되지못한다. 또한 구형왕의 후손인 김유신장군 등이 신라통일의 중추역할을 했다는 역
사적 사실을 비추어 볼 때 구형왕의 지리산 축성(築城)과 항전(抗戰)에 관한 구전 (口傳)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러나 깊고 깊은 지리산 골짜기에 성터가 존재(存在)하고 그에 얽힌 구형왕의 사연(事緣)이 구전(口傳)으로 전(傳)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런 규명(糾明)을 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문(疑問)을 낳고 있다.
어떻든 지리산 사람들의 구형왕에 대한 애착(愛着)과 역사적(歷史的) 사실이 상존 (常存)한 왕등재와 국골, 왕산의 갖가지 유적(遺蹟)들에 대한 신비감은 갈수록 깊 어만 가고 있어 이에 따른 학계의 정확한 고증(考證)작업을 기대해 보지 않을 수없다.
왕등재의 역사적(歷史的) 의의(意義)와 함께 해발 1000m 지점에 대규모 늪지대가
있다는 사실도 왕등재의 신비함을 더한다. 너비 70m 가량에 2백여m 가량 길게 펼쳐 진 왕등재의 늪,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한 그루도 자라지 못 하고 풀밭만 펼쳐져 있다.
물과 진흙 위에 펼쳐진 풀밭은 발목까지 질퍽거리게 하는 고산지대의 늪지대인 것이다. 왕등재 일원은 이 늪지대를 중심으로 또한 광활(廣闊)한 분지(盆地)형 지대
(地帶)를 이뤄 마치 세석평전과도 흡사하다.
광활(廣闊)한 산상(山上)과 평원(平原)은 억새와 싸리나무로 뒤덮여 가을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는가 하면 평원(平原) 저 멀리로는 천왕봉과 중봉이 우뚝 솟아 있어 색다른 운치를 자아 낸다. 뿐만 아니라 평원(平原) 주변으로는 1030m 고지와 크고작은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가 하면 북쪽으로는 왕산과 이어지는 지능선을 두고 있어 한층 더 신비감을 갖게 만드는 천연요새(天然要塞)처럼 보인다.
- 06:30 :왕등이 습지 도착(960m. 현재온도:7℃)
왕등이재를 지나 또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름모를 봉을 오른다음 이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왔던길을 뒤돌아보니 멀리 웅석봉이 보이고 천왕봉이 바로 지척 이다.
다시 일어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기분좋게 내려가는데 앞섰던 이준복씨 가 습지에 도착했다고 소리친다.
습지 한켠에 출입금지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2003.01.01 ~ 2005.12.31까지 출입금지로 되어있고 고산습지 면적은 30,000㎡이다.
『왕등이 습지』
왕등재 습지는 지리산능선 동쪽 해발 960m 의 고갯마루에 위치한 길이 120m 폭 50m정도의 장타원형 습지로 희귀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탄층을 통한 식물의 역사및 습지생성 요인을 밝힐수 있는 중요한 자원입니다.
주요 식물은 동의나물,꽃창포, 사초류,난초류 등이며 습지식물은 층별로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자리,메뚜기,나비,벌류 등의 비상 가능한 곤충과 게아제비,소금쟁이,물방개등의 수서곤충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등이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등산로는 습지의 하단에 20m 정도의 예쁜 나무다리 를 놓아 이곳으로 통행하여 습지를 보호하도록 해놓았다.
이 다리 밑으로 습지에서 고여있던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어 물을 확인해보니 그런대로 먹을수 있을만하여 이곳 습지에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하고 베낭을 벗고 조식 준비에 들어간다.
습지내에 고여있는 물들은 도저히 먹을수 없을 정도로 약간의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지저분하게 보이지만 다리밑으로 흐르는 물을 박강수씨가 먹어보더니 괜찮단다.
컵을 이용하여 고여있는 물을 조심조심 떠올려 대충 부은후 밥을 끓이고 김치를 이용하여 찌개를 끓이는데 박강수씨가 그동안 가져왔던 능이 버섯을 찌개에 넣은다.
필자는 요즈음 독 버섯이 너무 많아 넣지 말았으면 하는데 굳이 넣은걸 말릴수도 없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많이도 넣은다.
찌개는 다 끓었는데 밥을보니 밥이 뜸이 들지않아 거의 생쌀 수준이다.
그래 끓여진 찌개코펠을 밥 코펠위에 놓으니 밥이 잘되는 것 같아 찌개코펠을 올려놀고 뒤돌아 서는데 그만 찌개코펠이 넘어지며 밥코펠도 넘어져 다리위에 쏟아버린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해놓은 밥과 찌개인데…
엎어진 밥은 숟가락으로 다시 떠서 코펠에 주워담고 쏟아진 찌개의 건더기는 그런대로 주워서 먹었다..
바닥에 떨어진 찌개용 김치건더기가 이렇게 맛있는줄 미처 몰랐다.
아까운 능이 버섯을 박강수씨가 주어먹으며 맛있다고 필자에게 자꾸 주어 권한다.
조그만 것을 주어 먹어보니 졸깃한 것이 정말 맛이 좋다.
다시 찌개를 끓이기 위해 김치와 참치,능이버섯을 넣고 끓인후 설된 밥과함께 아침을 먹는데 꿀맛이다.
필자도 이젠 기왕에 먹은 능이버섯인데 하며 찌개에서 버섯을 낚시질하며 건져먹으니 맛만 좋다.
밥을 먹고나서 커피까지 끓여 먹은 다음 08:07분 출발한다.
- 08:30 :외고개 도착(825m)
왕등이 습지를 떠나 완만한 구릉지대의 싸리숲을 헤치며 조금 지나다 보니 4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북쪽 방향의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무명봉을 올랐다 함양군 금서로 빠지는 길이고 직진하여 곧장 내려서면 방곡리 오봉으로 가는길이다.
우리들은 서쪽으로 곧바로 좌회하여 둔덕을 오른면 주변이 옛날 성터다.
지금은 보수를 하지않아 모든게 허물어져 지나는 일들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이 성터를 지나 조금 내려서자 외고개가 나온다.
이 외고개 정상 부근까지 유평마을 윗쪽 에서부터 습지 같은 평원을 조성해 놓아 황량하게 보인다.
필자는 왕등이재에서 바라볼 때 이곳이 왕등이 습지인줄 착각했을 정도다.
외고개 정상에는 헬기장을 조성해 놓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질 않아 억새와 싸리만 무성하다.
이곳 외고개 정상부에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좋아 사진 한컷후 출발한다.
- 09:06 :새재 도착(935m)
외고개를 지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봉우리를 힘겹게 오르니 봉우리 정상직전의 마루금 주변이 밭을 갈아놓은듯이 온통 헤집어져 있다.
필시 멧돼지들의 먹이 사냥 흔적이다.
땀을 흔뻑 흘리며 정상에 올랐다 곧바로 내려오니 새재다.
필자가 산행출발전 우리 백두산악회 강성호 부회장이 써놓은 산행기를 보니 이곳 새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목욕을 할수있을 정도의 물이 있다하여 이곳에서 충분한 식수를 보충하여 장터목까지 가야겠다 계획하였던 관계로 주변을 둘러보니 북쪽 사 면 계곡에 물이 있을성 싶어 유내석 대원이 한참을 내려갔는데도 물이 없다 하며그냥 올라오고 만다.
그러자 이번엔 이준복 팀장과 박강수씨가 남쪽계곡(윗새재마을) 인공조림지역으로 물통들을 가지고 내려가는데 한참을 내려간다.
이들이 물을 구하러 내려간 틈에 자리름잡고 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새재마을 방향으로는 벌채를 한후 이곳에 잦나무와 주목나무를 식재해 놓았고 아직 크게 자라지 못 한 이들 나무사이로 미국쑥부쟁이 들이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뜨려 눈을 즐겁게한다.
이 새재에서 본 전경은 250˚방향에는 중봉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고 220˚방향에는 서래봉의 바위암봉들이 서로 다투며 얼굴을 내밀고 있다.또한 180˚하단 가까이는 윗새재마을과 세개골이 훤히 보인다.
한참을 기다리니 식수를 구하러갔던 두사람이 헐떡이며 올라온다.
왜그리 늦었느냐고 묻는 필자에게 한참을 내려가니 계곡에 물이 있는데 낙엽을 이 용하여 물길을 잡은후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물을 병에 담아오느라고 늦었단다.
아마도 이곳 새재는 갈수기에는 물을 구하기가 어려울것 같아 참고해야 할것 같다.
이들이 도착하고 숨을 돌린후 다시 출발하기 위해 베낭을 둘러맨후 앞을 보니 엄청 큰 봉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오르기 전부터 힘이 빠지는게 걱정이 앞선다.
걱정을 하는 필자에게 박강수씨가 정상에서 만나자며 먼저 출발한다.(09:47분출발)
- 10:33 :헬기장 도착(1,120m)
새재를 출발하여 미끄러운 70˚경사면을 길옆에 자생하는 산죽과 싸리나무등을 붙 잡고 힘겹게 오르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몇걸음 오르지도 않았는데 입에서는 쉰내가 나고 저절로 욕지기가 나온다.
왜? 뭣 때문에? 이 고생을 사서하는지? 하는 하두가 꼬리를 물고 뇌리를 지나가는데 답이 없다.
나무를 붙잡고 조금씩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헬기장이 나타난다.(10분휴식)
- 10:55 :1,258봉 정상 도착
헬기장을 출발하여 전면에있는 멋있는 바위벽을 우회하여 1258봉을 오르는길은 거의 암벽타기 다름아니다.
큰 베낭을 메고 이렇게 험한 암벽을 오르는 길은 젖먹던 힘까지 쏟아야 오를 수가 있을 정도다.
바위벽에 메달려 있는 로프등을 붙잡고 어렵사리 오르고 나니 이내 정상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음 1,323봉을 향해 출발한다.(11:10)
- 11:30 :1,323봉 정상
1,258봉을 지나 완만한 마루금을 타고 오르다보니 또다시 암릉이다.
돌출된 바위벽을 붙잡거나 메달린 동아줄을 붙잡고 힘겹게 오르고나니 이내 넓다
란 바위마당이 있는 정상이다.
이 바위 마당위에 서서 사진을 한컷 한다
음 땀으로 손실된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준복씨가 가져온 죽염을 나누어먹고 손
실된 체력을 보강하기위해 건포도와 연양갱등을 허겁지겁 먹어댄다.
적당히 먹고 마신후 숨을돌린다음 이 바위마당에서 지나온 하부를 배경으로 사진한컷을 하고 있는데 쑥밭재 방향에 있는 독바위 정상에 3~4명의 산꾼들이 올라있는게 보인다.
이곳 바위마당에서 본 조망은 200˚방향에 중봉이 가깝게 보이고 220˚방향에는 하봉이 보이며 웅석봉을 비롯 지나온 산군들이 에스(S)자 형으로 뻗어 있음이 보인고 하부로는 조개골이 손바닥 보듯이 보인다.(11:45분 출발)
- 12:10 :독바위 도착
1,323봉을 출발하여 독바위 까지는 계속해서 완만한 내리막 길이고 등산로 양측으로는 사람 키보다 더자란 산죽들이 우거져 있어 가는길을 더디게 한다.
산죽을 젖히며 한참을 내려오니 독바위에서 출발한 산행객들을 만난다.
광주에서 왔다는 년로한 산행객들이 우리들을 만나자 반갑다는 듯이 쑥밭재가 어디냐고길을 묻는다.
어디에서 올라와 어디로 가느길이냐고 물어보니 국골에서 올라와 쑥밭재에서 대원사 계곡으로 하산계획이라 하기에 당신들은 이미 쑥밭재를 지났다고 애길 해줘도 이해가 되질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동부능선에는 산행금지 구역이다보니 이정표가 거의없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지나온 능선 안부에 있는 쑥밭재를 그냥 통과하고 말았던 것 이다.
계속해서 마주치는 이들 산행객들을 지나치며 조금 내려오니 잘생긴 서구 미녀의 유방같이 생긴 독바위다.
이 독바위 정상의 협소한 공간에 광주에서온 산행객들이 많이 올라가 있어 우리까지 올라가 수선거릴 장소도 없어 보이고 이들이 쉽게 자리를 내줄 것 같지도 않아 우리는 그냥 독바위 하단에서만 바라보고 지나치고 만다.
- 12:30 :중식
독바위 하단을 지나 산죽을 젖히며 조금 내려오는데 곳곳에 지난 태풍 매미때 쓰러진 거목들이 즐비하다.
등산로를 가로막고 쓰러져있는 거목을 우회하거나 밑으로 기어 통과하며 가는데 등산로상에 중식하기졸은 바위마당이 있다.
이곳에서 라면을 끓여 중식을 하고 가자고 하니 모두들 좋아한다.
베낭을 벗어던지고 신발끈을 푼다음 양말을 벗어 제끼니 라면도 끓지 않았는데 고기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하지만 어쩌랴 피곤해진 발과 피멍이 생긴 발바닥을 건조해야 앞으로의 산행이 부드럽게 진행될 것이기에 코를 막고 참는수 밖에..
이내 라면을 끓여 김치와 겯드려 먹는데 박강수씨가 중식하는데 이것이 빠질 수 없지 하며 아껴둔 소주를 꺼낸다.
가장 반겨하는이는 두말할것도 없이 이준복 팀장이고..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하며 4홉들이 1병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운다.
중식을 완료하고 13:25분 출발.
- 13:40 :쑥밭재 도착
중식을 마치고 완만한 능선길을 기분좋게 가다보니 쑥밭재다.
고개마루에 넘나드는 이들이 별로 없어 길이 희미하게 나있어 조금만 세심하세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재다.
국골 사거리 확대도(장터목-밤머리재 역종주시 국골 5거리로 빠지니 주의)
- 14:37 :국골 사거리 도착
쑥밭재를 지나고부터는 계속해서 된비알의 연속이다.경사각은 그리 크지 않지만
지친몸이 오르는데는 엄청 힘이드는 그런 오름이다. 한참을 오르는데 중식으로 먹었던 라면이 다시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오르는데 이젠 다리의 힘까지 완전히 빠졌는지 도무지 힘이 들어 올라 갈수가 없다.
욕지기가 계속해서 나오지만 한발한발 죽을힘을 다해 오르다보니 국골 사거리다.
이곳 국골사거리에 있는 이정표에는 국골방향 4Hr 소요.새재방향 4Hr소요 이렇게 기재된 이정표가 있고출입금지 경고문이 게시되어 있다.
게시문에는 이 지역은 출입통제 지역으로 적발시 과태료(100만원)이하가 부과 됩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
방향은 국골 220˚.새재 20˚.하봉
120˚방향이다.
국골 갈림길에서 잠시 휴식하며 사진 한컷을 한후 14:45 분 출발한다.
- 15:37 :하봉정상
국골 사거리를 출발하여 마루금을 쉬엄쉬엄 오르는데도 무척이나 힘이든다.
15분정도 오르다보니 전망이 좋은봉이 나타난다.
이 봉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180˚에하봉이 보이고 280˚에는 반야봉
이 290˚에는 만복대가 보이며320˚방향에는 태극종주의 끝지점인 덕두산이 보인다.
그외에도 지리산 서북능이 파노라마같이 한눈에 전개되어 조망이 일품이고 하봉하부 사면의 단풍이 절경이다.
이 전망좋은봉을 지나 가파른 암릉구간인 하봉능선을 힘겹게 오르니 하봉 정상이다.
하봉 능선에 도착하니 젊은 산꾼이 국골 하부를 바라보고 있다.
고상한 취미가 있는 친구구나 생각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반가워한다.
식수가 떨어져 고생하는 필자에게 물좀 나누워 줄수있느냐고 물으니 조그만 PT병에 조금 남은 물을 필자에게 건넨다.
미안하여 못 얻어 먹겠다고 하자 하봉 바로 하단에 두고온 베낭에 충분한 물이 있으니 먹으라며 권한다.
혼자 산행을 왔느냐고 물어보니 혼자 왔으며 어제는 장터목에서 밤을 보내고 국골 주변을 산행한다음 오늘 저녁엔 중봉에서 보낸단다.
얘기중 이 친구 하는 말이 자기는 몇일 동안 지리산에서 비박을 하다보니 쌀이 떨어져 산행하는 이를 붙잡고 소지하고 있는 술과 쌀을 맡바꿔 저녁을 해먹을 것이란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했더니 술은 없어도 살수 있지만 쌀은 없으면 굶어야 되니 굶지 않으려 바꾸었단다.
우리들도 쌀과 부식이 빠듯하고 술은 부족하여 나누어줄 수가 없어 미안한 마음만 전하니 고맙단다.(15:50분 하봉출발)
하봉 정상(무심코 진행하면 엉뚱한곳으로 빠지니 조심해야한다)
GPS를 휴대한 본인도 30m정도 진행하여 되돌아온것이 지형도에 나타남(하봉 직후)
『하봉』
지리산(智異山)은 상봉인 천왕봉을 위시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봉준령(高峰埈嶺)을 품고 있는데 상봉인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하봉이 나란히 줄을 이어산릉을 이루고 있다.
지리 산의 하봉은 낮은 봉우리란 의미(意味)로 불리고 있으나 결코 지리산에서 낮은 봉우리가 아니다. 해발 1781m의 준봉(埈峰)인데도 하봉으로 불리는 까닭은 상봉인 천왕봉 바로 근처에 위치한 탓이라 여겨진다.
늘 천왕봉과 바로 앞의 중봉(1875m)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잊고는게 하봉이다.
그러나 하봉은 그 산세(山勢)와 빼어난 경관(景觀)만은 지리산(智異山) 수많은 봉 우리 가운 데 으뜸이랄수 있다.
지리산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험준한 산세(山勢)를 하고 있으며 그러한 탓에 아직도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의 산세(山勢) 를 이어 두류봉으로 연결시켜 산 아래 추성동마을 뒷산인 추성산성터에 이르기까 지 용 (龍)틀임 하듯 능선(稜線)을 이루고 있다.
이 하봉 능선의 웅장(雄壯)함은 직접 하봉 능선을 등반하는 것 이외에도 남원시 산내면 삼거리(인월에서 뱀사골로 가다 실상사와 마천방면으로 나누어지는 삼거리)에 서 천왕봉쪽을 올려다보면 한눈에 볼 수있다. 마치 큰 산의 정기가 꿈틀거리 는 듯한 형세(形勢)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천왕봉∼중봉∼하봉으로 이어지는 장쾌(壯快)한 능선(稜線)은 지리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 는 암릉(岩陵)과 험준한 산세(山勢)에 탄복(歎服)할 정도다.
특히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중봉의 위용(偉容)과 중봉∼하봉 사이의 깎아지른
듯한 산세(山勢)는 일품(一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개 산봉우리의 정상은 꼭대기 같은 여유와 충만감이 들게 마련인데 하봉은 정상 부근이 숲속터널과 아슬아슬한 바위벼랑뿐이며 더 높은 중봉 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낮은 봉우리가 아닌데도 낮다는 뜻의 하봉으로 이름 지어져야 했는 지를 정상에 올라 보아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하봉에서는 상봉인 천왕봉 은 중봉의 그늘에 가려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풍기며 더
높은 봉우리 아래의 봉우리에서도 정상 못지않는 여유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 16:15 :헬기장 도착(1,700m)
하봉 정상을 바로 돌아서자 커다란 암벽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이 하봉을 내려가는 이 직벽에는 동아줄이 메달려 있으나 바위벽이 매우 미끄럽다.
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자 하봉에서 만났던 친구의 커다란 베낭이 절벽옆에 있다.
아마도 이 베낭을 메고 줄을타고 오르기가 쉽지않아 이곳에 베낭을 벗어놓고 하봉에 올랐나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칼날 같은 하봉능선을 오르내리자 하봉측편에 있는 또다른 가짜 하봉이다.
이봉의 정상부는 10여평정도의 넓이에 마사토 봉이다.
이봉을 다시 빠져나와 조금 내려오니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에 도착하자 부족한 식수를 보충하기 위해 유내석씨가 수통을 거두어 조개골 로 내려가고 필자 일행은 헬기장 바닥에 두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박강수씨 가 피곤했던지 금새 잠이들어 코고는 소리가 중봉 주변을 울린다.
한참을 기다려도 식수를 보충 하러간 유내석씨가 나타나질 않아 조개골을 향해 소리쳐보지만 대답이 없어 찾으려 내려갈려고 하는데 힘겹게 올라온다.
왜 그리 늦었느냐고 물어보니 수량이 적어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받아 담아오느라 늦었단다.
곤히 자고있는 박강수씨를 깨워 출발하자고 하니 잘잤다고 자찬이다.
필자가 코고는 소리가 중봉까지 들렸다고 하자 이 내용은 산행기에서 빼달란다.
다시 베낭을 둘러메고 중봉을 향해 출발한다.(16:50분)
- 17:22 :중봉도착(1,874m)
헬기장을 출발하여 몇 미터 가지 않으니 등산로 가장자리에 이정표가 서있다.
이정표에는 치밭목 1.8Km. 천왕봉 1.7Km 라 되어있다.
이정표를 지나 중봉을 오르는 중봉 사면은 무척 힘이 든다.
땀을 한참 쏟고 나자 체력이 한계에 왔는지 도무지 다리에 힘을 실을 수가
없다.
양 어깨는 베낭의 짓누르는 무게에 견디지 못해 아파 죽을 맛이지 다리는 한걸음 한걸음이 힘에 버겁지 갈길은 멀지 어찌되었던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이렇게 악을쓰며 오르다 보니 중봉 직전의 치밭목 갈림길이 나타나고 이 갈림길 전단에 와이어 로프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울타리를 넘어 숨도 돌릴 겸 안내판을 보니 치밭목 3.0Km 라 되어있고 울타리 앞에 출입통제 경고장을 게시해 놓았다.
이 경고장에는 이 지역은 멸종위기에 처한 반달가슴곰등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는 공간입니다.
야생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된 등산로 외에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보호지역을 허가 없이 통행시는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습니다.
치밭목 갈림길을 조금 더가니 중봉 정상이다.
중봉 정상에 서니 일몰전의 천왕봉 산그림자가 웅석봉 산모양과 거의 일치하게 각을 세우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모습이 재미있다.
중봉 정상의 이정표에는 치밭목 3.1Km. 대원사 10.8Km. 천왕봉 0.9Km 라 되어있다.
하봉에서부터 함께 왔던 부산에서온 젊은 산친구를 떼어놓고 천왕봉을 향해 출발한다.
『중봉』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과 마주하며서 있는 중봉(中峰 1,875m) 이다.
중봉은 수려(수려)한 산세(산세)와 울창한 원시림(원시림)을 자랑하며 지리(지리)의 제일(제일)에 해당하는 절경(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천왕봉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려 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써리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형성한다.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다시 국수봉으로 연결되어 구곡산까지 이어지며 흔히이 능선을 ‘황금능선”이라 불릴정도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능선은 산세(山勢)가 험난한데다 원시림(原始林)과 울창한 산죽(山竹)들로 인해 등산로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아 일반 등산객들은 잘 찾지 않는다
- 18:05 :천왕봉 도착(1,915m)
중봉을 출발하여 가파른 내리막을 한참 내려오는데 중봉에서 비박하려는 친구는 중봉과 천왕봉의 가장하단에서 식수를 담아오느라 안간힘을 쓰며 올라오고 있다.
좋은밤 되시라고 전한 다음 철계단을 지나 천왕봉을 향해 오르는데 죽을힘을 다해 오른다.
천왕봉 정상 직전에는 나무 울타리와 함께 등산로를 잘 정리해놓아 다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갑자기 힘이솓는다.
정상에 도달하니 정상 동측 바위밑에 추위를 피해 한사람이 쪼그려 앉아있고 서쪽 바위밑에 년노한 부부가 추위를 피해 웅크리고 있다.
천왕봉 정상에 도착하자 반야봉 넘어로 넘어가는 일몰(落照)가 장관이고
천왕봉 정상만 태양이 빛추지 나머지지리산의 넓은품은 서서히 어둠에 묻히기 시작한다.
정상에 도착하자 이준복 팀장과 박강수씨는 정상주를 나눈다며 준비해온 양주를 꺼내들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땀을 많이 흘린 필자와 유내석씨는 추위에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천왕봉에서의 태양은 정확히 18:16붕에 반야봉과 만복대 사이로 떨어지고 필자의 온몸은 근육이 경직되는듯 하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솓구치는 것 같아 안주로 꺼내놓은 육포 한조각을 입에 물고 장터목산장을 향에 유내석씨와 먼저 출발한다.
『천왕봉 의 성모신상 이야기』
지리산(智異山)의 제왕(帝王)은 천왕봉(天王峰)이고 이곳에는 신비스럽고 사연도많은 성모(聖母)라는 여신상(女神像)이 있었다.
경주산 옥석(玉石)으로 다듬어진 이 여신상(女神像)은 높이가 1.2m쯤,너비가 50Cm쯤 된다.
천여년을 지리산(智異山) 수호신으로 지내온 이 여신상(女神像)이 지금은 하산해중산리 천왕사(天王寺)라는 조그만 암자(庵子)에 머물고 있는데 여신상(女神像)이상처를 입고 중생(衆生)들이 사는 세계로 내려선 내력(來歷)이 기구하다.
때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올라간다.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黃山大捷)에서 패한 일본인들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때 분풀이로 여신상(女神像)을 두쪽 내면서 여신상(女神像)은 최초로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여신상(女神像)은 계속 천왕봉에 남아 있었는데 일제치하시 임진왜란 (壬辰倭亂)때의 화가 풀리지 않은 일제가 사당(祠堂)을 철거하고 여신상(女神像)을아래로 굴려버렸다.
이후 산청에사는 한 처녀가 여신상(女神像)을 다시 올렸지만 해방 되던해 11월에 누군가에게 보쌈당했다가 얼마후에 다시 올라왔다.
이후 60년대 초까지만해도 사당(祠堂)안에 모셔져 기도객(祈禱客)들의 염원(念願)을듣고 있던 여신상은 72년 봄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모 교인들이 이 여신상 (女神像)을 훼손시켜버렸다.
이렇게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었던 것을 86년 1월 천왕사 혜법스님이 몸통과 머리 부분을 발견해 정성스럽게 봉합(封合)한후 천왕봉 남쪽 산자락 천왕사에 모셔놓았다.하지만 천왕사측과 주민들은 그간 이민족과 이교도, 그리고 철없는 사람들에 의해 수난당한 여신상(女神像)이 또다시 훼손당할까 두려워 다시 천왕봉에 올려놓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여신상(女神像)이 천왕봉에 떳떳히 올라 모든 중생(衆生)들을 아우르는 날이 오기를기대해 본다.
- 18:21 :통천문 통과
천왕봉을 출발하여 가파른 암릉을 조심조심 내려오니 통천문이다.
통천문에 도달하니 이제 추위는 사라지고 다시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곳 통천문에 있는 길안내 표시판도 재 측정을 하였는지 옛날은 1,890m 에서 현재 1,811m 로 수정해놓았고 천왕봉 0.5Km. 장터목 1.2Km 로 기재해 놓았다.
- 18:42 :제석봉 정상(1,808m)
통천문을 지나자 어둠이 온누리를 감싼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내리기도 전에 보름 직전의 밝은달이 천왕봉을 주변을 밝혀주어 제석봉 직전의 거친 암반길도 해드랜턴을 켜지 않고도 이동할 수가 있는 조도다.
조심해서 제석봉에 오르니 맨먼저 우리를 반기는 불빛은 광양제철소의 휘황찬란한 조명들이다.
이제 집을 나온지 이틀밖에 안되었는데도 몸이 피곤해서인지 몇 달 된 느낌이다.
제석봉 정상에는 장터목 0.6Km.천왕봉 1.1Km 라 되있다.
『제석봉』
제석봉은 높이가 1,806m로 지리산에서 중봉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山神)의 제단(祭壇)인 제석단(祭席壇)이 있어 더한층 유명 하다. 이제단(祭壇)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솟아 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明堂)임을 알 수가 있다.
제단(祭壇) 주변은 평편한 공지여서 현재는 등산객들의 야영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이다.
10만여평에 걸쳐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경관(景觀)이 되고 있다.'이곳 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의 고사목 군락지로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自然景觀)이다. 고사목의 훼손금지는 물론 이곳 에서 야영과 취사행위를 금지한다.
등산로 이외 지역의 출입도 금지한다.
그러나 이곳의 고사목들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누구의 소행 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방화로 한번 죽었던 나무들이 또 다시 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의 고사목들은 해발 1,700m 이상의 높은 곳에서도 재질이 뛰어난 나무들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50년대의 지리산의 아픔을 40 년째 침묵의 증언(證言)을 하고 있는 것에도 많은 뜻이 있다. 고사목들도 '살아있는 자연경관' 으로 잘 보전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제석봉 고사목이야기』
흔히들 지리산의 표상(表象)을 이야기 하라면 제석봉 고사목(枯死木)을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제석봉 고사목(枯死木)의 처연함, 그리고 노을이 질 때의 낭만(浪漫)은 지리산의 상징(象徵)처럼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석봉 고사목(枯死木)의 사연(事緣)을 알고나면 역사(歷史)의식(意識)의 변환(變換)을 경험(經驗)하게 될 것이다.
제석봉 고사목(枯死木)은 늙어죽은 고사목(枯死木)이 아니라 비명횡사(非命橫死)한 횡사목(橫死木)의 잔해(殘骸)이다.
6.25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잣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되는 자가 권력(權力)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巨木)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受難)을 당한다.
그러다가 이 도벌(盜伐)사건(事件)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證據)를 없앨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橫死)시켜 버렸다.
불법적 도벌(盜伐)과 이를 은폐(隱蔽)하기 위한 인위적인 방화(放火)로 지금의 제석봉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멀리서 제석봉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천왕봉 턱밑에 흉칙한 마른 버짐자국이 생긴 것처럼 볼상사납기 그지없다.
자연 스스로의 노쇄과정(老衰課程 속에서 운치나 있을 고사목(枯死木)이 아니라 횡사목(橫死木)이라는 데서 그 어떤 미적(美的) 세계도 발견할 수 없는 지리산 임상(臨床) 수난사(受難史)의 처절한 기념물인 셈이다. 그나마 몇 그루씩 남아 있던 횡사목(橫死木)들마저 점차 쓰러져가고 있어 결국 얼마 안 가 제석봉 일대는 황무지(荒蕪地)로 변할 듯하다. 또 비만 오면 물을 머금지 못하고 그대로 흙탕물을 토해내는데 이점 때문인지 장터목샘과 제석단샘도 갈수기에는 종종 물이 고갈(枯渴)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지리산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이윤추구(利潤追求)에 혈안(血眼)이 되었던 일부 고위층 때문에 오늘날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후손(後孫)들이 더욱 목말라하고 있어그 화를 톡톡히 입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 초반 제석봉에 어린 구상나무들을 심는 운동이 벌어졌었고, 그 나무들이 일부 자라고 있어 다행스럽다.
【장터목대피소 ⇒ 노고단대피소】
- 19:00 :장터목 대피소(1,640m)
밝은 달빛에 의지하며 제석봉의 거치른 등산로를 조심해서 내려오니 장터목의 전등불빛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다.
이내 예약상태를 확인하고 산장안으로 들어가니 서울에서 온것 같은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많은 인원이 북적인다.
신발장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집어 넣은후 실내로 들어가니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하고 따뜻할 수가 없다.
자리를 배정 받고 베낭을 풀어헤친 다음 옷을 갈아 입으니 살 것 같다.
서둘러 쌀과 부식등을 챙긴 다음 취사장에 내려가 석식을 준비한다.
석식을 준비하는 동안 옆 식탁에서는 여선생님 2분이서 주먹밥을 수도없이 마련하여 비닐봉투에 담고 있는데 정말 맛있게 보이기에 맛있겠다고 하였더니 한덩어리를 주는데 먹어보니 주먹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둘러놓아 정말 구수하고 감칠맛이 난다.
이내 저녁이 완료되어 해결한후 식기등을 정리하고 자리에 들어와 곧바로 피곤한 몸을 눕히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장터목대피소(1,640m)
위치: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208
사용료:5000원
관리:국립공원관리공단(직영)
담요:1000원
- 03:15 :기상(10월8일. 현재온도:7℃)
오늘도 갈길이 많이 남아있어 새벽부터 서두른다.
다른 이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짐을 정리하고 취사장으로 내려오니 천왕봉 일출을 보기위한 팀인지 우리보다 먼저 아침을 준비하는 이가 있다.
서둘러 잣죽으로 간단한 요기를 한후 장터목 앞마당에 나오자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280˚방향 만복대 상부에 덜된 보름달이 걸려있고 190˚방향의 산아래엔 제철소의 조명들이 낭낭하다.
장터목산장 앞에 있는 우체통에 우리들의 마음을 담아 가족과 동료들에게 마음의 안부를 전한뒤 덜풀린 지친 다리에 힘을 실으며 장터목을 출발한다.(04:15분)
- 05:25 :촛대봉 도착(1,703m. 현재온도:6℃)
장터목을 출발하여 연하봉(1,730m)을 오르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연하봉 정상에는 세석산장에서 1박하고 천왕일출을 보기위해 숨가프게 오고있는 부부 산행객이 다가오더니 장터목산장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는다.
『연하봉』
세석평전과 장터목 사이의 연하봉은 기암괴석(奇岩怪石)과 층암절벽(層岩絶壁)사이로 고사목과 어우러진 운무(雲舞)가 홀연히 흘러가곤하여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신선(神仙)이 된듯 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천왕봉을 향해 힘차게 뻗은 지리산의 크고 작은 산줄기 사이사이에는 온갖 이름모를 기화(奇花) 요초(姚草)가 철따라 피어 지나는 이의 마음을 향기롭게 한다.
이끼낀 기암괴석(奇岩怪石) 사이에 피어 있는 갖가지 꽃과 이름 모를 풀들은 한폭의 그림처럼 지리산과 어우러져 마치 신선(神仙)의 세계에 온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연하봉을 넘어서면 평탄한 초지 능선안부를 거쳐 넓고 평탄한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올라서는데 도장골이 길게 패여진 모습이 환하게 남쪽방향으로 지능선이 하나 뻗어 내려간다. 소위 일출봉이라 부르는 곳이다.
장터목산장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다소 멀기도 하고 더구나 날씨마저 장담할 수없는 날이면 괜한 헛걸음이 일쑤여서 아예포기하기 십상인데 이럴때 이곳 일출봉을 찾는다면 좋을듯 하다.
다시 출발하여 삼신봉을 올라 잠시 휴식하며 천왕봉을보니 천왕일출을 보기위해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들의 불빛이 꼬리를 이어 오르고 있다.
삼신봉을 출발하여 촟대봉 근처에 다가서니 촛대봉 정상에서 어떤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다.
촛대봉 직전의 힘든 계단을 올라서자 이내 마루금이다.
이제 동녘의 여명은 서서히 밝아오니 어둠이 가시기 시작하는데 촛대봉 정상에 있는 사람은 찬송가를 온산이 울리도록 부르고있다.
이곳 촛대봉에서 좀 기다리다 일출을 보고갈까 망설이다 영신봉에 가서 일출을 보자 합의한 후 바로 촛대봉을 출발한다.
천왕봉4.4Km. 장터목 2.7Km. 세석대피소 0.7Km 라 기재되어 있다.
- 05:25 :세석 대피소
촛대봉을 출발하여 등산로상에 깔아놓은 완만한 돌길을 조심해서 내려오는데 촛대봉에서 일출을 맞이하며 일출사진을 촬영하려는지 많은이들이 커다란 카메라와 삼각대를 무겁게 안고 오르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들을 지나 조금더 내려오니 이내 세석대피소 전단의 갈림길이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거림 6.0Km. 벽소령 6.3Km. 백무동 6.5Km. 장터목 3.4Km 다.
『세석평전』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하여 세석평전이란 이름이 붙은 세석고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원으로서 그 주위가 12km에 달한다.
최고봉인 촛대봉에서 서남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세석평전은 상,중, 하로 식물군락이 나뉘어지는데 상층은 황량한 초원지대로서 지보초, 좁살풀, 산새풀 등 여러 종류의 초생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중간층은 철쭉이 집단서식하는 관목지대이며 하층은 구상나무와 굴참나무 등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루고
있어 등고선별 식물생태 분포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세석대피소
위치: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산 325
사용료:5000원
관리:국립공원관리공단(직영)
담요:1000원
- 06:05 :영신봉 도착(1,651m)
세석산장 갈림길을 출발하여 완만한 오름길을 40여분 쉬지 않고 오르니 이내 영신봉이다.
필자보다 앞선 우리 일행들이 등산로 측편에 베낭을 놔둔체로 영신봉에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연하천 9.3Km. 벽소령 3.7Km 라 되어 있다.
필자도 베낭을 길 가장자리에 놓아두고 영신봉 정상을 오른다.
- 06:10 :연신봉 정상도착
영신봉에 올랐으나 촛대봉이 앞을 가려 보이질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출직전의 붉은 여명이 촛대봉 정상부근에 걸쳐있는 걸로 보아 일출을 못볼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산들 바람에도 추위가 온몸을 엄습해와 내려가자고 하였으나 이준복 팀장이 일출이 된다고 기다리자고 하여 할 수 없이 기다리는데 또 다른 산행객들 2명이 일출을 보기 위해 올라온다.
정상의 바위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350˚방향에 덕두산이 보이고 340˚에 반야봉이 보이며 60˚에 천왕봉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로는 200˚에 광양의 명산 백운산이 장중하게 보이고 백운산과 왕시리봉 사이에는 섬진강의 물안개가 낮게 깔려있음이 보인다
추위를 피해 바위밑에 쪼그리고 있으니 촛대봉과 좌측의 이름모를 봉사이 등산로중앙에서 일출이 시작된다.(일출시각 06:30분)
『낙남정맥이 갈리는 영신봉』
지리산(智異山)세석평전을 굽어보며 솟아있는 영신봉(迎神峰1,652m)은 낙남정맥의 분기점(分岐點)이되는 봉우리다.
이 영신봉에서 시작해 김해 낙동강 전단의 신어산(神漁山 630m)까지 뻗어 내린 낙남정맥은 남녘의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을 갈라 기후(氣候)와 문화(文化)등을 구분(區分)해 놓은 산줄기다.
영신봉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내려간 낙남정맥의 힘찬 맥동을 바라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필자가 세석산장 바로밑 낙남정맥 마루금에 있는 음양수를 찾으려고 대성골에서 두번이나 올랐다가 그냥 지나치고 세번째 남부능선 종주시 찾아 마셔본 물맛이왜 그리 맛이 있던지..
그래 음양수의 전래설을 실어본다.
『음양수』
남부능선과 주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음양수(陰陽水) 샘터가 있다.
세석산장이 확장 건립된 이후로 수량이 줄고 마르는 날이 많아졌지만 음양수(陰陽水) 샘은 그 신비함에 옛부터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물로 인식되어져 왔던 샘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음양(陰陽) 의 조화(調和)로 흘러내리는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양샘 주위에 몰려들어 기도(祈禱)를 드리곤했다고 한다.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陰陽水) 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祈禱)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陰陽水) 샘의 신비(神秘)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刑罰)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贖罪)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山神靈)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러운 모습처럼 애련(哀憐)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
진 모습이라고 한다.
- 07:00 :영신대 도착
영신봉을 출발하여 지겹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한참 내려와 영신봉 하단의 암봉을 돌아서자 영신대 들입(入)이다.
그냥 선비샘까지 가고 싶다는 박강수씨의 제안에도 이준복씨가 영신대에서 아침을 하자며 보채는 바람에 주 등산로 옆에 등산로 아님이란 게시판을 들추고 약 10여분험로를 따라 들어가자 이내 영신대다.
이곳 영신대란 지리산 10대(산행기 말미에 기술함)중 최고의 성지다.
『영신대 靈神臺』
지리산의 넓고넓은 골짜기에는 도를 닦거나,기도를 하거나,푸닥거리를 벌이는 곳이 지기수로많다.
백무동 입구의 굴바위를 비롯한 곳곳에 무속신앙 신봉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치겠다며 소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지세나 경관이 절묘한 명당 자리를 찾아내 은밀히 기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기도처는 일반 등산객들의 눈에는 쉽게 목격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지리산에서 자신이 공부를 하고 있는 곳이 어디이든, 지리산 최고의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곧 영신대이다.
지난날 영신사란 사찰이 자리했던 이곳은 영신봉(1,651m) 바로 남쪽 사면의,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영신대 주변은 설악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이 계곡 양쪽에 암벽이 내리꽂히면서 협곡을 이룬 형상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곳이야말로진정한 무릉도원이 아닌가 생각되고 일대의 정경이 별 세계를 빚어 놓고 있다.
마당 오른쪽에 샘터가 있고, 샘터 옆에 돌더미를 쌓은 작은 제단이 있다.
초막을 세우고 하던 자리에서 바위틈으로 이어진 석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또 하나 의 샘터가있다.용왕당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학소대와 같은 독립암봉의 바로 앞이 된다 암봉 정면 앞에 좀 더 큰돌을 쌓 아올려 모신 크기의 제단이 있다.
마당에도 중간크기의 제단이 있다. 마당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서면 미륵불, 칠성당이라 불리는곳이 나란히 있지만, 모두 노천으로 별도의 시설물은 없다.
영신대 일원은 바위마다 촛농이 쌓여있고, 타다 남은 향, 제기나 생활용구 들을 바위 밑에놓아둔 것이 많이 눈에띈다.
이곳에 많은 기도객들이 몰려들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모습들 이다. 이곳에선'천왕성모의 생일' 이라면서 많은 음식을 마련해놓고 특별한 제를 올릴때도 있다.
"영신대는 지리산 최고의 자리인데, 어찌된 심판인지 철학관 하는 사람, 점바치들이 치성객 을 이끌고 몰려드는 바람에 망쳐놓았는지..?
실제 영신대의 오늘의 모습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영신사의 옛 사찰이 있던곳 이 오늘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마저 크게 훼손 되고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1472년 김종직이 지리산을 기행 하면서 이곳에 있던 영신사에 들렀다.
그가 영신사에서 지켜본 것을 기록한 글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큰 감명을 안겨준다. 영신사에 들어갔는데, 절에는 스님이 한 사람 뿐이었다. 절의 벼랑 아래에돌부처 1좌가있었다. 세조대왕 때 매양 사람을 보내어 향화를 받든 곳이다.
돌부처의 머리 한쪽이 일그러졌는데, 이것 역시 왜구가 찍은 것이라 한다
천왕봉의 성모석상과 이곳의 돌부처도 똑똑하게 흔적을 남겼으니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돌부처는 오른팔에도 반점같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은 불에 태운 흉터였다.
돌부처의 한 부분 을 조금씩 태우면 미륵세상을 만날 것이라고 하여 이렇게 상처를 남겼다고하니, 황당무계함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내세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다투어 돈과 포목을 바치고 있으니 그 정성이 차라리 가증스러울 뿐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이런 비판적인 견해와 함께 영신사 주변 자연경관을 소상하게 적고있다. 돌부처의 북쪽에는 두 바위가 높이 솟았는데, 소위 창불대다.
한쪽 바위의 아랫 부분은 패이고 튀어나 매우 울퉁불퉁한데, 위는 날카롭고 쭈뼛했다. 그 위에는 네모꼴의 평평한 돌을 얹어 넓이 가 겨우 한자쯤 된다.
동쪽 바위틈에는 샘이 솟는데, 이를 옥천이라 불렀다. 샘의 물이 매우 달고 달인 차맛과 같으면서 차다고 하는샘이다.
여기에서 세석산장은 10분 거리이다.
영신대 앞마당에 자리를 깔고 아침을 준비한후 조식을 마치고 영신대 주변 바위굴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 저기 모든 바위하단은 전부 기도터이고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영신대 앞으로는 큰 세개골이 끝없이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칠선봉의 잘생긴 암봉들이 늘어서있고 후단에는 영신봉의 우뚝솟은 바위벼랑들이 병풍을 쳐놓은 듯 둘러있다.
영신봉에서 남부능선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이 우측로 힘차게 내리 뻗어 그야말로 절경이다.
식수또한 풍부하여 영신봉 바위벼랑 이곳 저곳에서 물이 흘러내리거나 솟구친다.
영신대 주변을 둘러본다음 08:20분 영신대를 출발한다.
- 08:52 :칠선봉 도착(1,558m)
영신대를 빠져나와 완만한 능선길을 바쁘게 걷다보니 어느새 칠선봉이다.
칠선봉 길옆에 있는 이정표에는 벽소령 4.3Km. 세석산장 2.0Km. 장터목산장 5.5Km천왕봉 7.2Km 라 되어있다.
『칠선봉』
해발 1,576m의 칠선봉은 작은 7개의 암봉(岩峰)이 높은 능선(稜線) 위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일곱선녀(仙女)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이루어진 비경(秘境)의 암봉(岩峰)들은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더욱 아름답고 고요한 운치를 더 해준다.
- 07:37 :선비샘도착(1,491m)
칠선봉을 출발하여 오는길은 지리산 일반 종주를 하는 이들로 북적인다.
많은 이들이 지리산의 정기를 느껴보고자 땀을 흘리며 힘차게 지나치는게 보기에도 즐겁다.
이들을 지나칠때마다 좋은 산행 되시라고 인사를 하다보니 남은 힘마저 더 빠지는것 같아 간단히 목례만 하며 지나치는데 앞에서 오던 부부 산행객이 광양사람을 만났다며 반가워한다.
POSCO 직원이며 우리 백두산악회 안내 산행시 몇번 참여했었다는데 필자는 알아보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즐거운 산행을 하시라 인사한다음 다시 힘차게 산을 오르다 보니 이내 선비샘이다.
이곳 선비샘에는 아주머니 산행객 2명이 샘물을 보자 양치질을 하고 있고 학생들이 몇 명 쉬고 있어 이 선비샘이 왜 선비샘이라 하는지 유래를 알려주니 고맙단다.
이정표에는 벽소령 2.4Km. 세석대피소 3.9Km 라 되어있다.
『선비샘 의 전설』
덕평봉 남쪽 상덕평 능선 해발 1,500m에 있는 샘터를 선비샘이라 한다.
수량(水量)은 적으나 마르는 적이 없고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 (野營) 하기에도 좋다.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 데는 한 화전민(火田民)의 서글픈 사연(事緣) 이 있다. 옛날 덕평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화전민(火田民)의 자식으로 가난에 쪼들리며 평생(平生)을 살았다.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 몹시 추하게 생겨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賤待)를 받으며 노인은 한번이라도 남에게서 사람다운 대접, 선비대접을 받으며 살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 생전 소원(所願)을 이루지 못한 그는 마지막 유언(遺言)으로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고 효성(孝誠)이 지극한 두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샘터 위에 매장(埋葬) 했다.
그로부터 매년(每年) 지리산(智異山)을 찾는 등산객들은 샘에서 물을 마실 때면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인사를 하게 되니 생전에 그렇게 받고 싶었던 선비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되었다.후일 동네사람들은 생전에 불우했던 이씨 노인을위로하기 위해 이 샘을 선비샘으로 부르게 됐다.
잠시 휴식하며 고칼로리 식품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벽소령을 향해 출발한다.(10:00출발)
- 10:43 :벽소령 대피소(1,320m)
선비샘을 출발하여 덕평봉을 오르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다.
완만한 오르막이고 등산로 또한 잘나있어 빠른 걸음으로 진행하며 주변의 잘익은 단풍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별로 힘이든 줄 몰랐나 보다.
필자를 뒤따르던 유내석씨가 필자를 부르더니 잠시 잘익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포즈를 잡으란다.
농익은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한컷 한다
음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이 덕평봉 오르막을 올라오 이들은 무척이나 힘이 들어한다.
조금만 힘을 내면 완만한 길이라며 격려하며 이들을 지나가니 구 벽소령의 큰길이 나타난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벽소령 대피소 1.1Km. 세석산장 5.2Km. 음정(마천)8.4Km 다.
구 벽소령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거의 평길이다.
기록할려고 주춤하는 사이 앞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따라잡으려고 바쁜 걸음을 걸었지만 앞선 이들은 더빨리 가는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따라 잡는걸 포기하고 좌측 하부에 전개되는 대성골의 깊은 계곡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벽소령 대피소다.
필자가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니 먼저와 있던 박강수씨와 유내석씨가 산장앞에 설치해 놓은 야외 통나무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고 탁자의 의자에 드러누워 있다.
마침 필자도 발바닥과 무릎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프지만 참고 있는데 이곳에는 사람들도 없어 양발을 벗더라도 그리 꼬불견은 아닐터 잽싸게 양말을 벗으니 양말과 발에서 고랑내가 진동한다.
그도 그럴것이 3일동안 발을 한번도 못씻고 땀만 흘렸으니 냄새가 진동하는게 당연할 것이다.
벗은 양말을 햇볕이 잘 드는곳에 널어놓고 탁자의 의자에 드러누우니 바로 천국이따로 없다.
카메라의 필름이 떨어져 유내석씨가 필름 24방짜리를 4000원에 산다.
벽소령의 이정표에는 140˚방향에 이현상 아지트 0.3Km. 샘터 60m 라 되어있고 연하천 3.6Km. 세석 6.3Km. 음정,마천 6.7Km. 노고단 14.1Km. 천왕봉 11.4Km 라되어 있다.
이곳 벽소령에서 20여분 휴식후 11:05분 연하천을 향해 출발한다.
『벽소령대피소』
위치: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산4
사용료:5000원
관리:국립공원관리공단(직영)
담요:1000원
- 11:53 :형제봉 도착(1,452m)
벽소령을 출발하여 오르내림이 완만한 너덜길을 조금 지나니 형제봉이 우리들이 가는 길을 방해 하려는 듯 형제바위 를 대동하고 엄포를 주고있다.
언제 지나도 이곳은 좀 힘이드는 그런곳이다.
형제봉을 오를 힘을 비축하기 위해 형제봉 전단의 전망좋은 너럭바위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진도 한컷 한뒤 다시 형제봉을 향해 힘찬 발검음을 내 걷는다.
형제봉을 오르는 가파른 등산로를 한걸음 한걸음 헤아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형제바위 앞에 도달하였고 이 바위를 우회하여 바위 하단에 도착하니 앞섰던 박강수,유내석씨가 쉬고있다.
이곳 형제바위 하단에 설치된 이정표에는 노고단 12.6Km. 벽소령 1.5Km. 세석 7.8Km. 장터목 11.2Km 라 기재되어 있다.
- 12:51 :연하천 산장도착 (1,440m)
형제바위를 출발하며 박강수씨와 유내석씨에게 먼저 출발하여 연하천산장에서 중식인 라면을 끓이라고 보내고 혼자 뒤처져 형제바위 뒷편의 가파른 형제봉을 오르는데 온몸에서 땀이 쉴새없이 쏟아진다.
땀을 훔치며 오르다보니 큰 베낭을 맨 이준복팀장이 몇발 오르다 숨을 들이쉬기를 반복하며 오르고 있다.
어렵사리 형제봉을 오른다음 골이 깊은 오르내림를 2회 반복하고 다음 능선을 오르자 라면을 준비한다고 앞섰던 유내석씨와 박강수씨가 등산로에서 쉬고있다.
잘되었다 싶어 필자도 길 가장자리에 베낭을 벗어놓고 깊은 숨을 드리마시니 이제 살것같다.
잠시 휴식을 하는데 지나다니는 등산객들이 있어 안되겠다 싶어 다시 베낭을 둘러메고 연하천을 향해 출발한다.
한참을 가다보니 연하천 진입 전방의 완만한 평전이 나오고 이내 철제울타리가 나타나더니 연하천 산장이다.
이곳 연하천 산장에는 발 붙일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여기저기에 몰려있다.
입구의 화장실 측편에 자리를 잡고 중식준비를 한다음 주변의 인파를 둘러보니 모두학생들이다.
지도 교사의 인솔하에 주능종주를 하고 있는가 보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노고단 10.5Km. 뱀사골 4.4Km. 천왕봉 15.0Km 라 되어있다.
중식을 먹은후 이 까지 닦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 13:55분 출발한다.
연하천대피소(국립공원관리공단 운영이 아니고 사설운영임)
위치: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
사용료:3000원
관리:국립공원관리공단(임대)
침낭 2000원
- 14:15 :명선봉 도착 (1,586.3m)
연하천 산장을 출발하여 명선봉으로 오르는 완만한 나무계단을 오르는데 연하천에서 중식으로 먹었던 라면이 다시 넘어올려고 안간힘을 쓴다.
넘어올려는 라면을 진정 시키느라 천천히 오르고 있는데 이 나무계단을 내려오던 산행객들이 명선봉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는다.방금 지나 왔을거라고 알려주었더니 이정표도 없었다고 불평한다.
이들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니 이내 명선봉 이다.
『명선봉』
전북의 지붕 가운데 하나로 해발 1,586m인 명선봉(山內面 浮雲里)은 남원군산내면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境界)지점(地点)으로 삼정리와 영원사로 가는 북부 능선길이 왼쪽으로 나 있고, 여기에 올라서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명선봉 정상에 이른다. 옛 6.25 당시의 벙커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곳에서 빗점골이 내려다 보이는데, 바로 이곳을 피의 능선(稜線)이라 부르기도
한다.
- 14:24 :총각샘 도착
명선봉을 지나 예쁘게 설치해놓은 나무계단을 내려선 다음 큼직한 너덜들이 흩어져 있는 너덜길을 조금 내려오니 이내 총각샘 이다.
이 총각샘은 지리산 주능을 여러 번 종주한 이들도 이곳이 총각샘인지 잘 모르는 곳이다.
등산로 좌측에 있는 등성이를 넘어가야 하고 이곳에 이정표도 없어 모르는게 당연하다 할것이다.
우리 일행들에게 총각샘의 가는길을 알려주고 총각샘 등산로 주위를 잘 살펴보면 예전에 이곳 총각샘 주위에 텐트를치고 야영했던 자리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 다음 출발한다.
『총각샘』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아나는데 지난 1970년 7월경 지리산악회 사람들이 수소문 끝에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서 이용하던 샘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재차 발견한 샘이다.
재차 발견한 사람이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었기 때문에 혹은 심마니 노총각에서 각기 유래돼 총각샘이라 이름 지었지만 명명할 때는 장터목의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킨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 버리는 것이 흠이다
- 15:15 :토끼봉 정상(1,533m)
총각샘을 지나 한참을 오르내리며 걷다보니 무릎과 발바닥의 통증이 무척이나 심하여 토끼봉 전단의 내리막 전단 바위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후 다시 토끼봉을향해 출발한다.
이 바위마루를 내려서는것도 무릎 관절이 아파 무척 힘이든다.
어렵사리 내려서니 이제는 마의 토끼봉을 200m 나 오르는 코스가 나타난다.
필자의 숏다리로는 한걸음에 오르기엔 너무 폭이큰 나무계단을 이리 저리 우회해가며 한발 한발 땀을 쏟다보니 어느새 토끼봉 정상이다.
정상에는 노고단 7.5Km. 천왕봉 18.0Km. 연하천 3.0Km. 뱀사골 1.4Km 라 되어있다.
정상에서 연양갱 하나씩을 먹은후 화개재를 향해 15:27분 출발한다.
『토끼봉』
해발 1,538m의 토끼봉(山內面 浮雲里)은 한자 표기어로 묘봉(卯峯)으로 적기도 한다. 토끼봉이란 명칭(名稱)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모양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편 토끼봉 정상 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진달래 관목지대가 펼쳐지는 정상(頂上)에 올라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光景)이 장관(壯觀)이며, 진달래가 토끼봉 정상(頂上)을 온통 붉게 물들여 진한 꽃내음에 흠뻑 취할 수 있다.
특히 토끼봉에는 구상나무숲과 전나무숲이 울창하여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한원시림(原始林)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 15:50 :화개재 도착(1,315m)
토끼봉 정상을 출발하여 화개재 까지는 내리막의 연속이다.
무릎관절을 보호하기 위해 20여분 천천히 내려서니 이내 화개재다.
화개재 정상 안부에는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서인지 나무다리를 예쁘게 설치해 놓았고 목통골과 칠불사 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이 나무다리 측편에서 드러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박강수씨가 피로 회복제라며 비타민을 한알씩 나누어준다.
필자는 원래 약 이라면 질겁을하는 체질이라 먹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피로 회복제라니까 냉큼 받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이곳 화개재 정상의 이정표에는 뱀사골 200m. 반선 9.2Km. 천왕봉 19.2Km. 노고단6.3Km 라 되어있다. 휴식후 16:05분 삼도봉을 향해 출발한다.
- 16:22 :계단 상부 휴식
화개재를 출발하며 삼도봉을 오르는 마의 계단 오르는 것을 걱정하기에 이 계단을 오를때 계단이 몇계단인지 셈하며 오르라고 알려준뒤 계단정상에 도착하여 계단수를 확인하니 정확히 551계단이다.
계단 정상 초입에 빨간 큰글씨로 558 계단이라 써놓았는데 이것이 틀렸다고 누군가 그옆에 551계단이라 볼펜으로 다시 써놓았다.
필자 일행 4명이 각자 세며 올라왔는데 551 계단이 정확하다.
맨 뒤에서 올라오던 이준복팀장이 계단 정상에서 필자를 보며 웃더니 계단 하나에 땀방울이 정확히 하나씩 떨어져 있더라나..
잠시 휴식후 16:30분 삼도봉을향해 출발한다.
- 16:35 :삼도봉 정상(1,550m)
계단 상부를 출발하여 가파른 너덜지대와 바위 사면을 오르니 이내 삼도봉이다.
이 삼도봉 정상의 넓은 암반위는 언제 보아도 주변의 조망이 확 트인다.
그래서 예전 공비 토벌시 이곳에서 지휘부를 두었던 것이리라.
정상 바위 암벽 주변으로 단풍이 예쁘게 물들기 시작하여 삼도봉의 운치를 더해준다.
삼도봉 정상의 동으로 제작하여 세워놓은 정상석을 기념으로 한컷을 있으니 젊은 산꾼 한명이 올라와 우리 옆에서 휴식을 취한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오늘새벽 중산리에서 03:00경에 천왕봉을 오른 다음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삼도봉 정상의 이정표에는 노고단 5.5Km. 뱀사대피소 1.0Km. 천왕봉 20.0Km 이다.
충분한 휴식후 16:45분 노루목을 향해 출발한다.
『삼도봉』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라는 삼도(三道)의 큰 경계(境界)역할(役割)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경상남도의 산청군·함양군·하동군 등 3개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의 구례군 등 5개 시와 군, 그리고 15개 면의 행정단위(行政單位)로 지리산(智異山)은 그 구역(區域)을 구분(區分)짓고 있다.
그 광활(廣闊)한 지리산(智異山) 자락은 또한 이들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단위에서 계곡과 산등성이를 기점으로 해 수많은 자연마을을 형성(形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의 역할(役割)은 경계(境界)로서의 기능(技能)을최대한 발휘(發揮)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러한 지리산의 특성(特性)을 단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산 봉우리가 있다. 바로 경남과 전남·북을 구분짓는 삼도봉(三道峯)이다.
반야봉(般若峰) 바로 아래 해발 1,550m로 지리산(智異山)의 수많은 준봉(遵奉) 가운데 특이할만하게 눈에 띄는 봉우리는 아니다. 반야봉(般若峰)의 그늘에 가려 아주 이름없고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산세(山勢)지만 지리산(智異山)을 삼도(三道)로 구분(區分)하는 기점(基点)이라는데서 그 의미(意味)를 찾아볼 수 있다.
삼도봉을 중심으로 한 삼도(三道)의 경계선(境界線)은 대략 이러하다.
경남은 삼도봉-불무장대-통족봉-촛대봉-섬진강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능선을 경계(境界)로 해 전남과 구분(區分)되며 전북과는 삼도봉-토끼봉-명선봉-삼각고지-영원령-삼정산을 연결(連結)하는 능선(稜線)을 경계(境界)로 하고 있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境界)는 삼도봉-반야봉-도계삼거리-만목대-다름재 구간(區間)으로 이 경우는 능선(稜線)으로 경계선(境界線)을 만들다 계곡을 건너 다시 능선(稜線)이 경계선(境界線)이 되는 형상(形狀)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삼도(三道)를 나누는 삼도봉의 지명(地名)은 그동안 삼도봉이란 지명(地名)으로 불리지 못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國立公園管理公團)이 지리산(智異山) 일원에 이정표를 세우면서부터 삼도봉(三道峰)으로 명명됐다.
'낫날봉' '날라리봉' '늴리리봉'등 다양하게 불리던 이 봉우리가 삼도의 경계기점이라 해 '삼도봉'으로 명명되고 정착된 것은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원래 이 봉우리는 정상 부분의 바위가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낫날봉으로 불렸다한다. 낫날이란 표현의 발음이 어려운 탓에 등산객들 사이에선 '낫날봉'이 '날라리봉' 또는 '늴리리봉' 등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조금 천박(淺薄)한 느낌의 날라리봉 등보다 삼도(三道)의 경계기점이란 뜻의 삼도봉(三道峰)이 훨씬 어울린다.
삼도봉(三道峰)은 주릉의 서쪽면에 위치해 있으나 주릉을 조망(眺望)하기에는 아주 훌륭한 망루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반야봉을 지척에서음미(吟味)할 수 있으며 멀리 천왕봉의 선경(仙境)과 천왕봉에서 연하봉, 촛대봉을 잇는 천하 제일경의 파노라마가 눈 앞에 선하고 남부능선의 아기자기함이 아스라히 다가오는 장관(壯觀)이 있다. 그리고 임걸령과 노고단이 손에 잡힐 듯하다.
종주등반을 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봉우리이기도 하다. 삼도봉(三道峰)은 화개재에서 2km의 짧은 거리다. 또한 반야봉까지도 2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노고단까지는 8.5km 남짓한 거리로 삼도봉(三道峰)은 종주능선상의 요충지(要衝地)이다.
더욱이 반야봉 등반에 앞서 삼도봉(三道峰)과 반야봉, 그리고 삼도봉(三道峰)에서 노고단쪽으로 2km 남짓한 곳에 위치한 노루목등 세지점은 삼각형의 등산로를 연결하고 있다.
종주등반때 지리산 제2봉격인 반야봉(般若峰)을 '오르느냐' 마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등장할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대부분 장거리 산행에서의 산행 부담으로 반야봉(般若峰)을 생략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등장하기 일쑤다. 이는 반야봉(般若峰)을 오를 경우 4km의 산행을 추가해야 하는 반면 오르지 않고 삼도봉(三道峰)에서 노루목으로 곧장 향하면 그만큼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르지 않으면 반야봉(般若峰)의 절경(絶景)을 맛볼 수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삼도봉(三道峰)은 주릉상의 요충지(要衝地)면서 그 산세(山勢)는 섬진강으로 뻗어내리는 불무장등 능선(稜線)의 시발점이다. 그 지명에 걸맞게 경남과 전남을 구분지으며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삼도봉(三道峰)과 불무장등 능선은 삼도봉(三道峰)에서 해발 1,446m의 불무장대, 해발 942m의 황장산을 지나 촛대봉에서 잠시 솟았다가 화개장터 부근의 산자락을 끝으로 섬진강으로 잠긴다.
19번 국도를 가다보면 화개장터에서 피아골 입구 못미쳐 있는 검문소 부근이 바로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境界地點)이다.
삼도봉(三道峰)에서 시작되는 불무장등 능선(稜線)은 경남쪽으로는 연동골과 화개골을 빚어내고 있으며 전남쪽으로는 피아골을 만들어내 모두 섬진강에서 하나가된다. 삼도봉(三道峰) 가는 길은 주릉을 따라 거치는 것외에 연동골이나 뱀사골을거쳐 화개재에서 잠시 쉬고 오르는 등산로가 있으며 반야봉(般若峰)을 오른 뒤 하산길에 들를 수 있다.
- 17:00 :노루목 삼거리 도착
삼도봉을 출발하여 조금 지나니 길가에 묘 1기가 나타나고 이곳 우측편에 등산로아님이란 금줄을 설치해 놓았다.
뒷따르던 이준복 팀장이 이 금줄을 넘어 30여분 반야봉 하단을 가로 지르면 묘향대가 나온단다.(묘향대 는 지리산 10대 임)묘 1기를 지나 반야봉 사면의 너덜지대를 이리 저리 바쁘게 지나니 이내 노루목삼거리다.
노루목 삼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삼도봉에서 만났던 젊은 산친구가 뒤따라 오더니 함께 휴식을 취한다.(17:05분 출발)
『노루목』
"노루목"이란 지명의 유래(由來)도 흥미롭다.
노루목이란 독특한 이름은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뜻도 있지만 반야봉(般若峰)의 지세(地勢)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가 이 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지켜들고 있는 형상(形狀)의 바위 모양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 17:28 :임걸령 도착(1,310m)
반야봉을 오르지 않고 노루목 삼거리를 출발하여 악마의 나무 계단을 조심해가며 내려서니 또다시 잔 너덜 지대의 내리막이다.
필자가 지리산 종주를 하며 수도없이 이길을 오르 내렸지만 오늘 같이 이 내리막길이 힘이 드는 줄 정말 몰랐다.
무릎과 발바닥이 아파서인지 내려가도 임걸령은 나타나질 않을것 같은 생각이 들정도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를 붙잡고 내려오지만 잔 너덜에 힘없는 무릎과 발이 자주 미끄러져 쉴세없이 입에서는 욕지기가 나오고 임걸령은 나타나질 않더니만 한참을 내려오니 얼굴을 내민다.
먼저온 유내석씨와 박강수씨는 임걸령 샘에서 낯까지 씻고 있는데 필자는 그만 등산로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있으니 필자를 뒷 따르던 진주의 젊은 산꾼이 앞서 가겠다며 인사를하고 출발한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노고단 3.2Km. 반야봉 2.3Km. 뱀사골 3.3Km 라 되어있다.
『임걸령』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般若峰)으로 이어지는 8km거리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320m의 높은 고령(高嶺)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般若峰)이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의 능선(稜線)이 동남풍을 가려주어 산속 깊이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要地)이며 샘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 맛또한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의적(義賊)이나 도적(盜賊)들의 은거지였던 곳으로 유명(有名)하며특히 조선 명종때의 의적(義賊) 임걸련(林傑撚)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임걸년(林傑撚)에 관한 자세한 내력(來歷)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등이 발견된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샘터에서 피아골족 암벽 밑에 막(幕)터가 있는데 이곳을 '황(黃)호랑이 막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약초를 캐는 황장사가 눈내리는 겨울밤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자다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 18:42 :노고단 정상도착
오후가 되자 잠시 휴식만 취해도 온몸이 오슬오슬 추워지기 시작한다.
다리는 아프고 힘은 들지만 추위와 새로운 싸움을 하느니보다 한발자국이라도 많이 가는게 났겠다 싶어 부지런히 발을 옮기다 보니 돼지평전 전단의 헬기장이다.
헬기장 측편의 돌위에 앉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왕시리봉 능선을 바라보며 물 한모금을 하였더니 다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추위가 엄습한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돼지평전의 완만한 마루금을 뛰다싶이 걷고나니 이제 추위가 물러간다.
돼지평전을 지나 노고단 산자락에 접어들자 이젠 제법 어두워져 등산로의 높낮이을 분간하기 어려울때쯤 등산로 주변에 우거져있는 산죽을 혜치며 재빠르게 지나가는 동물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야간 산행을 하다보면 흔히 있는 멧돼지나 오소리 이겠거니 하며 필자가 “우.우”하며 큰소리를 지르자 잽싸게 산죽을 헤치며 도망간다.
(당시 필자의 20여미터 앞에는 진주의 젊은 친구가 가고 있고 20여미터 뒤에는 우리 일행이 뒤따르고 있었음)
좀더 진행하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아 헤드랜턴을 꺼내어 불을 밝히며 한참을 진행해가니 노고단 정상이다.
노고단 정상에 올라서니 그동안 나무숲에 가려 보이질 않던 보름전의 밝은달이 휘영청 온누리를 빛추고 있고 정상 나무울타리 전단의 이정표에는 천왕봉 25.5Km.반야봉 5.5Km 라 되어있다.
『노고단(老苦壇)』
천왕봉과 더불어 노고단(老苦壇)은 우리민족의 영원(永遠)한 믿음의 성지(聖地)로 전해져 오고 있다.
동서(東西)로 1백리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솟아 있으면서 지리산(智異山)이란큰 궤를 같이하며 우리 (민중)民衆의 추앙(推仰)을 받아온 민족신앙(民族信仰)의영지(靈地)로 남아있는 이들 두 봉우리는 높이면에서는 해발 1,507m로 천왕봉의 그것과 비교해 다소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역사(歷史) 이래로 우리 민중(民衆)에게 부여해온 의미(意味)는 천왕봉에 비해 결코 뒤짐이 없다.
일명 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老苦壇)은 서남방향으로 17∼18도의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高原地帶)다.
이 곳은 신라시대 시조(始祖)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지리산(智異山) 산신(山神)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祭祀)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祭祀)는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사당(祠堂)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화엄사 앞으 로 옮겨져와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 제사(祭祀)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三山)과 오악(五嶽) 이하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祭祀)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 를 지내는 오악(五嶽)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부악 (부악·지금의 팔공산) 이었다고 적혀있어 지리산에서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名山)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제사(祭祀)를 올리던 곳은 노고단(老苦壇)이며, 남악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祭祀)를 올린 의미(意味)는 무엇인가.
사학자들은 당시 이같은 국가의식(國家儀式)을 민중(民衆)들이 받들던 성모신앙(聖母信仰)과는 그 의미(意味)가 다 른것으로 풀이하고 노고단(老苦壇)에 남악사를 세워 국가차원에서 의식(儀式)을 진행(進行)한 것은 한 편으로는 민중(民衆)들의 별도 성모사당(聖母祠堂)인 성모사(聖母祠)를 위압하려는 측면도 게재했을 것으 로 해석(解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라 시조(始祖)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民衆) 차원의 聖母信仰(무속신앙의 큰 흐름)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것으로 보아 진다는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제례(祭禮)는 신라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변함없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 나 한말 융희2년 (1908)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악사는 지난 69년 12월 전남도와 구례군에 의해 화엄사 앞에 복원됐다.
신라시대 이래로 우리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온 노고단(老苦壇)은 또한 화랑(花郞)의 심신(心身) 수련장(修鍊場)으로 널리 활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세석고원까지 오가며 심신(心身)을 수련(修鍊)하던 화랑(花郞)의 드높은 기상이 아직도 노고단(老苦壇) 언저리에 남아 있는듯 하다.
우리 민족(民族)의 안식처(安息處)이며, 기개(氣槪)를 단련(鍛鍊)하던 노고단(老苦壇)은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受難)의 아픔을 겪는다.
민족신앙(民族信仰)의 성지(聖地)이며, 낙원(樂園)이던 이 곳이 일제시대 외국인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솟아 내를 이루며 빼어난 절경(絶景)을 간직한 이곳에는 당시 외국인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다 한다. 더욱이 구례지방에서 조선인 인부들은 벽안의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이곳 별장까지 오르내렸다 하니 당시의 서글픈 시대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노고단(老苦壇) 외국인 별장은 그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반란군들의 근거 지로 이용됐다가 국군 토벌대에 의해 점령됐으나 이후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 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워져 지금은 옛 건물의 흔적과 잔해만 남아아팠던 근대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건물이 불태워지면서 당시 노고단(老苦壇) 일원의 울창 한 수목들도 때아닌 화마(火魔)에 휩싸여 지금도 노고단(老苦壇) 일대는 큰 수목은 좀체 보이지 않고 싸리등 관목류만 남아있다.
노고단(老苦壇)은 잘 알려진 비경(秘境)의 운해(雲海) 이외에도 숱한 명승지를 같이하고 있으며, 탁트 인 시계로 멀리 무등산을 확연히 볼 수 있는가 하면 다도해(多島海)의 장관(壯觀)도 조망(眺望)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비(神秘)한 곳이다.
예부터 노고단(老苦壇) 주변에는 종석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등 명승지가산재해 있다고 전해져 오는데 주위에 크고 작은 바위군들이 찾는 이를 감탄케 한다. 지금은 노고단 턱밑까지 도로가 뚫려 연간 찾는이가 수십만을 헤아리고 있으나 모두들 이들 명승지를 미쳐 보기도 전에 다도해에서 실려온 운무가 산허리를감 싸고 흐르면서 운해만리 구름바다 를 이루다 다시 점점이 흩어지는 비경(秘境)
에 홀리 고 만다.
겨울철에는 백설이 천하를 감싸안은 풍광을 연출해내 또 다른 노고단의 모습을 선사한다.
- 18:45 :노고단 산장(1,370m) 입실
노고단 정상의 이정표를 확인하고 기록을 한다음 뒤돌아서니 우리 일행들이 모두산장을 향해 내려가고 없다.
정상에서 산장에 이르는길은 온통 너덜을 박아놓아 이 너덜을 밟으며 내려가는게 정말 장난이 아니다.
어찌나 무릎 관절과 발바닥을 자극하여 통증이 오는지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다.
조심하며 내려오니 이준복 팀장이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며 내려가고 있음이 보인다.
이내 산장의 불빛이 보이고 체온 보온을 위해 산장안으로 입실을 하니 살것같다.
자리를 배정받고 베낭을 풀어헤쳐 저녁준비를 해야하는데 모두들 침상에 드러누어 꼼짝을 않는다.
잠시 휴식후 옷을 갈아입고 쌀과 부식거리를 들고 취사장에 도착하니 취사장 여기저기에서 석식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도 한편에 자리를 잡고 저녁을 준비한다.
석식을 마친후 아침용 쌀등을 씻은다음 취사장에 놔두고 입실하여 잠자리에 들려는데 필자의 옆자리에 진주에서온 젊은 산친구가 자리를 잡고 있더니 갑자기 필자에게 “곰”보셨지요? 하고 묻는다.
무슨 곰이요 하니 아까 노고단 측편을 우회할 때 산죽밭 근처에서 안보셨느냐고 다시 묻는다.
못 보았다고 하였더니 자기는 필자가 소리를 질러 보았는 줄 알았단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 친구가 바쁘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그 친구의 바로 옆으로 커다란 곰이 떨어 지더란다.
질겁을 하며 깜짝 놀랐더니 곰이란 놈이 더욱 놀랐는지 산죽밭으로 줄행랑을 치더란 것이다.
그리고 조금있으니 필자의 호통소리가 들려 필자가 “곰”을 보고 소리치는 줄 알았단다.
필자도 곰의 그림자라도 보았으면 좋았을 뗀데 하며 잠자리에 든다.
『노고단대피소』
위치: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산110-2
사용료:1대피소:5000원. 2대피소:3000원(3인 1실기준.1인추가시 5000원)
관리:국립공원관리공단(직영)
침낭:2000원 담요:1000원
【노고단산장 ⇒ 덕두산】
- 04:20 :기상 및 조식
오늘도 서북부능선을 가야하는데 가는길이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곳이라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짐을 싸들고 나오니 종석대 남쪽 끝부분으로 보름달이 청량하게 걸려 있다.
취사장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나니 05:30분이다.
짐을 정리하고 05:35 노고단 대피소를 출발한다.
- 05:38 :코재도착(1,240m)
산장을 출발하여 조금 내려오니 성삼재에서 헤드랜턴을 켜고 올라오는 산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들을 지나 노고단 계곡을 가로질러 정비해놓은 도로를 조금 내려오니 코재다.
이곳의 이정표는 화엄사 6.0Km. 노고단 1Km. 성삼재 1.5Km 라 되어있다.
- 06:00 :성삼재 도착(1,100m)
성삼재에 도착하자 이젠 렌턴이 필요치 않을정도로 여명이 밝아온다.
성삼재의 주차장에는 밤을새운 차량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주차해 있다.
- 06:05 :도로갈림길
성삼재 주차장을 빠져나오 반선가는 도로를 조금따라 가니 이내 도로에서 벗어나 작은 고리봉을 오르는 철조망과 출입문이 나온다.
이곳 도로변의 이정표에는 만복대 6.0Km. 당동마을 3.3Km 라되어있다.
- 06:14 :당동마을 갈림길
울타리를 지나 오르막을 오른다음 조금 내려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을 지나고 둔덕을 오른다음 안부에 도착하니 이곳에 이정표가 서있고 이곳에서 당동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이정표에는 당동마을 3.0Km. 만복대 5.7Km. 성삼재 0.3Km 라 되어있다.
- 06:43 :2번째 헬기장
당동마을 갈림길을 지나 조금 가다보니 길 가장자리에 이정표가 서있고 이를 지나15분정도 더가니 2번째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 헬기장에서 잠시 휴식하며 일출방향을 보니 반야봉 우측으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반야봉 주변이 붉게 물들어 있고 헬기장 주변에 억새꽃이 만발했다.
이곳 헬기장에서 10분 휴식후 06:55 분 출발한다.
- 07:21 :묘봉치 도착
두번째 헬기장을 출발하여 1,248m의 작은고리봉을 힘겹게 넘은후 한참을 내려오니 사방이 확트이는 묘봉치 헬기장이다.
이곳 헬기장 주변에도 억새꽃이 만발하였고 이곳에서 올려다본 만복대는 아침햇살을 받아서인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260˚방향에 산동 위안마을이 보이고 산동온천장 주변이 훤이 보인다
- 08:16 :만복대(1,433m) 도착
묘봉치를 출발하여 지겹도록 긴~ 만복대의 가파른 사면을 힘겹게 한발한발 오르다보니 만복대 정상 직전의 등산로를 정비해놓고 양측으로 GUID RAIL 을 로프로 설치해 놓았다.
지난 7월 서북능 종주시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는데 그사이에 설치하였나 보다.
정상 직전의 암릉을 오르고나니 금새 만복대다.
만복대 정상에는 행락객 차림의 사람들 6명이 먼저 올라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사방을 조망하고 있더니 필자가 다가서자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인천에서 왔는데 정령치에 차량을 놔두고 이곳 만복대를 올라왔단다.
이들이 필자 일행이 메고온 대형 베낭을보며 어떻게 이런 것을 메고 다니느냐며 벗어논 베낭을 메보고 야단이다.
이들에게 지리산 각 봉우리를 설명해주자 고맙다고 한다.
이들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정상의 돌탑을 배경으로 이번 산행중 처음으로4명이서 한컷을 한다.
만복대 정상에서 바라본 주변 조망은 100˚방향에 천왕봉이 우뚝서있고 140˚에는 반야봉이 있으며 180˚에는 노고단이 220˚에는 조계산이 보이고 240˚방향에는 광주의 무등산이 보인다.
260˚에는 곡성 동악산이 보이고 40˚상에는 서봉과 함께 나란히 있는 남덕유산이 보인다.
정상의 이정표에는 성삼재 6.5Km. 정령치 2.0Km 라 되어있다.
14분 휴식후 정령치를 향해 08:30분 출발한다.
- 09:10 :정령치 휴게소 도착(1,180m)
만복대를 출발하여 내리막길을 내려온후 완만한 암릉구간을 거쳐 바쁘게 내려오니정련히 휴게소 전단의 나무계단이다.
이 나무계단을 힘들게 오르고 나니 정령치 휴게소의 확성기에서 은은한 카페음악이 쉴세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산상에서 듣는 간드러진 목소리의 카페음악이 이렇게 듣기가 좋은줄 예전엔 미처몰랐는데 정말 피곤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어떤 마력이 있나보다.
철도 고임목을 이용하여 계단을 만들어 놓은 내리막을 조심하며 내려가니 이내정령치 휴게소다.
휴게소의 측편 식탁에앉아 동동주(1병 \5000) 두병과 도토리묵(\10,000)을시키고어묵과 알칼리 음료등을 사먹은후 잠시 휴식을 취한다음 09:40분 출발한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바래봉 9.4Km. 고리봉 0.8Km. 개령암지 0.5Km. 마애불상군 0.6Km 라 기재되어 있다.
『정령치(鄭嶺峙)』
정령치(鄭嶺峙, 山內面德洞里, 해발 1,172m)의 표기는 정령치(正嶺峙)로 표기하기도 한다. 아직도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곳에는 넓은 산상 주차장과 휴게소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만복대(1,420m)의 등반기점이기도 하다.
정령치(鄭嶺峙)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황령암기(黃嶺岩記)》에 의하면, 기원전 84년(기원전 74년에 이 곳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됨)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침략(侵略)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을 이 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지명(地名)이 유래(由來)되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황령치가 있는데, 황장군(黃將軍)으로 하여금 이 곳을 지키게 하여 황령치라 하였다.
지금은 그 위치를 확실히 알수가 없고 다만 덕동리 뒷산 '황나드리'라는 곳으로추정(推定)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노고단 입구의 성삼치(姓三峙)와 바래봉 남쪽의 팔랑치(八郞峙)도 각각 각성받이 3명의 장군과 8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수비성터라는 데서 지명(地名)이 유래(由來)되었다고도 한다.
- 10:00 :큰 고리봉정상 (1,305m)
정령치를 출발하여 활공장을 지나 완만한 구릉지대를 지나니 이제부터는 큰고리봉을 오르는 가파른 암릉지대가 기다리고 있다.
정령치 옛 성터를 지나 가느다란 동아줄을 메달아 놓은 암릉사면을 힘겹게 몇번 오르고 나니 큰 고리봉이다.
이곳 큰 고리봉에서 백두대간은 운봉의 고기리로 빠져 나가고 서북능선은 곧장 세걸산으로 이어진다.
고리봉 정상에 도착하니 앞선 박강수씨와 유내석씨가 고리봉 정상에서 쉬지도 않고 저 멀리 달아나듯 가고있다.
정령치 휴게소에서 동동주를 먹인 것이 효과가 나오나 보다.
고리봉 정상의 이정표에는 정령치 0.8Km. 바래봉 8.6Km. 고기삼거리 3.0Km 라되어 있다.
『큰고리봉』
고리봉(朱川面 龍宮里)은 큰 고리봉과 작은 고리봉으로 되어있다.
큰 고리봉은 산내면과 운봉면과의 경계(境界)에 있으며, 작은 고리봉은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걸쳐 있다.
고리봉은 말하면 흔히 큰고리봉을 가리키는데, 일명 환봉(環峯)이라 하며,가을철억새의 노란색과 은회색 그리고 참나무잎의 주황색 빛이 마치 스펙트럼 같이 보여장관(壯觀)을 이룬다. 고리봉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는 정령치(鄭嶺峙)와 만복대가 우뚝 솟아 있고, 북쪽으로는 세걸산이 있는 주천면과 운봉면 그리고 산동면 의지붕으로서 3개면을 굽어볼 수 있다.
- 10:15 :고리봉 후단 무명봉 휴식
고리봉 정상에서 기록을 마친후 앞선 이들을 뒤따른는데 이들이 얼마나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소리쳐 잠시 휴식하고 가자고 보챈후 작은 봉을 오르니 이곳에서 휴식을 하며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
뭘 그렇게 빨리가느냐고 물어보니 동동주 한잔을 하였더니 힘이 솟는다나.. 어쩐다나..~ 잠시 휴식후 10:20분 출발한다.
- 11:35 :세걸산정상 도착(1,220m)
무명봉에서 휴식을 취한후 세걸산까지 쉬지않고 단번에 가겠다는 박강수씨의 제안에 동의하며 세걸산을 향하는데 등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아 등산로도 협소하고 이등산로에 떨어진 낙엽이 쌓여있어 길 찾기도 쉽지않다.
자꾸 눈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싸리나무등을 헤치며 마루금의 협곡을 몇 개 오르 내리고 가다 보니 허물어진 옛 성터가 나타난다.(10:35분)
성터를 지나 가파른 마루를 다시 오르니 앞에 암봉이 나타나고 이 암봉을 어렵사리 오르고 나니 정상이다.
지난 서북능 종주시에는 이 암봉을 못 본 것 같아 암봉을 오른후 주변을 확인해보니 이 암봉을 우회하는 길이 암봉밑으로 나있다.
앞선 우리 박강수씨가 이것 저것 생각없이 이 암봉을 올랐나 보다.
기왕에 이봉을 올라왔으니 노고단 산장에서 사온 황도캔이나 먹어 베낭의 무게를 줄이자며 황도 통조림 한 개씩을 먹어 치우고도 모자라 연양갱 하나씩을 더 먹어치운후 다시 출발한다.(10:50분) 다시 협곡을 내려와 한참을 오르내리다 보니 협곡 가장자리에 처음으로 이정표가서 있다 이 이정표에는 정령치 2.8Km. 바래봉 6.8Km 라 되어 있다.
필자의 뒤에 오고있던 이준복씨가 이 이정표를 보곤 뭔가 잘못 기재된 것 같다며 투덜댄다.
그도 그럴것이 한참을 쉴틈도 없이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2.8Km 밖에 오지 못하였 다면 뭔가 잘못된 거다.
하지만 이정표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는데 어쩌겠나..
다시 오르막을 힘차게 오르 내린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우뚝솟은 봉을 오르고나니 이곳이 세걸산 정상이다.
이곳 정상에는 바래봉 5.8Km. 정령치 3.8Km 라 되어 있다.
『세걸산』
세걸산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國境地帶)였고, 운봉읍과 뱀사골 반선의 중앙에 우뚝 솟아올라 있다.
정상에서 조망(眺望)은 북으로 바리봉과 덕두산, 남으로 고리봉, 정령치, 만복대가 남북으로 한줄기를 이루며, 지리산국립공원지역(智異山國立公園地域)으로 포함되어 있다. 또 세걸산의 물이 너무 맑아서 삼한시대에 신라군이 백제군을 포로로 잡아서 가마솥을 만들도록 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공안리에 공안천(孔安川)과 수철(水鐵)마을이 있다. 공안리에는 지금도 옛토기와 기와조각이 출토(出土)되고 있으며, 운봉현의 감옥자리가 보존되어 있다.
세걸산의 동남쪽은 지리산의 명소인 심원계곡과 달궁계곡이 흐르고, 6.26때 우리나라에서 수복이 제일 늦었던 덕동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세걸산은 정령치나 덕두봉에서 바리봉을 거쳐서 운봉읍 공안리나, 반선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이 된다.
- 11:57 :세동치 도착(1,120m)
세걸산을 출발하여 한참내려오다 완만한 능선지대를 지나니 숲에서 산행객 1명이 튀어나오더니 조금만 가면 세동치라 알려준다.
바쁜 걸음으로 조금 가니 헬기장과 함께 수철리 청소년 수련원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세동치다.
지난 7월 서북능 종주시 이곳에서 정읍에서 온 학생들을 만난 지점이다.
그당시 땀을 필자와 같이 비오듯 흘리며 산을 내려가던 좀 비대한 여학생이 떠올라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솟는다.
이곳 이정표에는 바래봉 5.3Km. 정령치 4.3Km 라 되어있고 정북쪽 길로는 청소년 수련관으로 가는 길이다.
- 12:50 :부운치 도착(1,115m)
세동치를 출발하여 가파른 무명봉의 정상을 향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오르고 난뒤 이곳 무명봉에서 잠시 거치러진 숨을 고른후 다시 한참을 내려오니 부운치다.
이곳 부운치의 이정표에는 정령치 6.4Km. 바랭봉 3.2Km 라 되어있다.
- 12:57 :무명봉 정상으 헬기장도착
부운치를 출발하여 코가 닿을듯한 가파른 오르막을 씩씩거리며 한발한발 오르는데 등산로 양옆으로 미국 쑥부쟁이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이 쑥부쟁이는 노랑색깔도 있으나 대부분 흰색으로 많이 피어있어 조금만 힘을 내라고 지나는 솜털 바람에 하늘하늘 손을 흔들어 주고있다.
이 쑥부쟁이의 격려를 받으며 어렵게 정상에 도착하여 앞을 보니 부운치에서 바래봉에 먼저가서 중식으로 라면을 끓이고 있으라 보낸 박강수씨와 유내석씨가 멀리바뿐 걸음으로 가고있다.
소리를 쳐보니 들었는지 필자를 보고 손을 흔든다.
무명봉의 헬기장 주변을 둘러보니 붉게 물든 철쭉 이파리들이 무리를 지어 널려있어 보기에 아름답게 보이고 또한 운봉면 소재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 13:05 :철쭉 군락지 도착
무명봉의 헬기장을 출발하여 가파른 사면을 내려오는데 철쭉 군락지의 완만한 구릉지대를 가로지르며 산악 자전거를 타고 오는 멋쟁이가 보인다.
필자는 다리가 아파 죽을 맛인데 자전거를 타는 저 친구가 부러울 뿐이다.
- 13:18 :팔랑치(1,010m)도착
완만하고 육산(토산)인 바래봉 철쭉군락 능선을 바뿐 걸음으로 가다보니 철쭉밭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예쁜 나무다리를 놓았고 이 나무다리를 따라 철쭉사이를 우회하자 팔랑치가 나온다.
이곳 이정표에는 바래봉 1.5Km. 운봉 6.3Km. 정령치 8.1Km. 라 되어있다.
- 13:38 :바래봉 식수대 도착(1,165m)
팔랑치를 지나 넓게 조성된 임도를 따라 계속해서 걷다보니 지리산을 조망할수 있도록 능선 안부에 나무계단과 전망대를 만들어놓고 지리산 그림을 게시한 전망대가 나온다.
이 전망대를 지나 한구릉을 돌고나자 바래봉 식수대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운봉 종축장으로 내려가는 임도와 식수대로 가는 임도,철쭉군락지로 가는 임도가 갈라지는 삼거리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정령치 9.4Km. 운봉 5.0Km. 바래봉 0.5Km 라 되있다.
이곳 갈림길에서 낙엽송과 구상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식수대까지는 거의 평길에 가까운 넓은 작업도로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책하듯이 가다 보니 바래봉 식수대가 나온다.
먼저 온 박강수씨와 유내석씨가 라면을 끓이기위 해 준비를 하고 있다.
베낭을 벗어 놓은후 신발과 양말을 벗고 꽐꽐 쏟아지는 바래봉 식수를 떠서 발을 씻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늦은 중식으로 끓인 라면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며 모두 드러 눕는다.
하늘에 떠가는 새털구름이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는 바래봉의 오후다.
잠시 휴식을 취한후 다시 베낭을 챙겨들고 바래봉을 향해 오른다.
- 14:40 :바래봉정상(1,167m)
식수터에서 바래봉을 오르는 사면은 금방 눈에 잡힐듯이 가깝게 보여도 쉽지 않은 오름이다.
사면이 된 비알이고 임의로 마든 등산로 이다보니 등산로에 푸석푸석한 들풀들이 깔려있어 태극종주의 막바지에 달한 체력으로서는 한걸음 한걸음이 그야말로 고역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130˚방향에 천왕봉이 보이고180˚에 반야봉이 그리고 220˚에
는 만복대가 보이며 330˚에는 남원의 고남산이 정상부에 중계탑을 세우고있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한컷 한 다음 덕두산을 향해 출발한다.
『바래봉』
높이는 1,167m로,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 하나이며, 세석평전과 함께 전국 제일의 철쭉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산의 모습이 바리떼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바래봉이라고 부른다.
정상 주변은 나무가 없는 초지이며, 산세가 둥그스름하고 가파르지 않다. 팔랑치,부운치, 세동치,세걸산, 정령치로 능선이 연결된다. 군데군데의 초지에 철쭉이 무리지어 있고, 이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정상에서 팔랑치까지의 1.5㎞ 구간이다.
바래봉의 철쭉은 사람의 허리나 키 정도 크기로, 4월 하순에 산 아래에서 피기 시작한다. 매년 철쭉제가 열리며, 5월 하순까지 즐길 수 있다.
- 15:15 :덕두산 도착(1,150m)
바래봉을 출발하여 갈참나무등이 우거진 험로를 따라 마루금을 오르내리기를 여러 번 하고 나니 등산로 측편에 철조망 비슷한 울타리가 처져있다.
옛날 목장으로 사용하던 울타리가아닌가 생각된다.
가시덩쿨이 우거지고 떨어진 낙엽으로 등산로가 미끄럽지만 태극종주의 마지막 봉우리라서인지 모두
들 재빠르게 달도 간다.
뒤에서 허겁지겁 따라가다 보니3박 4일동안 짓누르던 태극종주의 대장정을 마치는 마지막 봉우리인 덕두산 정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정상에 모두모여 힘찬 악수와 함께 고생들하였다고 서로 격려하며 그동안의 피곤을 이곳 덕두산에서 털어버리자며 측편에 주저 앉아 휴식을 취한후 15:25분 출발.
『덕두산』
동면 중군리에 위치하고 있는 덕두산(德頭山)은 해발 1,150m로써 인월과 중군리를 등산 기점으로 등반할 수 있다. 덕두산에서는 경상남도에 속해 있는 지리산 연봉들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는 산으로 육산에 가까운 산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지리산 태극종주나 서북능 종주시 필히 거처야 하는 산이다.
【덕두산 ⇒ 구인월】
- 16:40 :구인월 마을앞 정자 도착
덕두산을 출발하여 떨어진 낙엽이 수북히 쌓여 미끄러운 가파른 사면을 계속해서 내려오다보니 무릎의 통증이 무척이나 심하다.
평소 같으면 한달음에 갈 수있는 거리도 무척 멀게만 느껴지고 피로도가 엄습한다.
덕두산 정상에서 5분정도 내려오니 휴양림으로 갈리는 갈림길이 나타나고 우측 마루금을 따라 등산로 옆 나무를 붙들고 조심조심 내려오다 너무 힘이 들어 안부에 서잠시 휴식한다.
지난여름 서북 종주시 이길로 덕두산을 올랐을때는 힘도 들지않고 싶게 올랐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려오는 이길은 왜그리 힘이 들고 멀게만 느껴지는지 필자가 지금까지 산행해오며 이렇게 지겹고 힘이든 내리막길은 이게 처음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잠시 휴식후 다시 한참을 내려가니 나이가 지긋하신 산행객들이 마루금상에 쉬고 있다가 우릴 보더니 자기들만 이산에 있는줄 알았는데 또다른 팀도 있었다며 잠시 쉬었다 가란다.이들의 베낭을 보니 잣방울이 가득 들어있다.
좋은것 구했네요 하고 말을 붙이니 주변에 엄청 많이 있으니 좀 따 가란다.
많이 따가세요 인사를 한후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치달리니다 보니 끝이 없을 것 같은 산자락이 보인다.
이내 지난해 태풍으로 파손된 산자락의 임도를 지난 여름 서북능 산행시 수리하는 작업을 하더니만 이제는 콘크리트 포장으로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인월마을의 제각(祭閣)근처에 오니 박강수씨가 투덜거린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지난 초여름 이곳을 지나갈 때 제각옆의 나무에 리본을 걸어 놓았는데 이 나무를 제거해 버렸단다.
마을을 관통하는 마을길을 조금 내려가자 이내 인월마을앞에 있는 회관 비슷한 정자다.
필자와 박강수씨는 이 정자옆에 있는 수도가에 가서 땀에 찌든 머리와 얼굴을 씻고 모자를 벗어 씻고나니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이내 정자 앞으로 가보니 정자에는 마을의 노인분들이 집에서 담가 만든 막걸리를 곰삭은 김치에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자 큰 사발로 한잔씩 따라주며 마시라 권한다.
못마신다는 필자의 사양에도 자꾸 권하는게 아직도 이곳의 시골 인심은 사라지지 않고 잘 보존되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흡족하다.
이준복 팀장과 박강수씨는 큰사발로 두잔씩을 거푸 마시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며 좋아한다.
마을의 어르신들에게 즐거운 하루 되시라고 인사 한다음 인월로 출발한다.
인월에 도착하여 조그만 식당에 들어가 하산주와 석식을 마친후 인월 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함양,산청 경유 진주가는 버스에 오른다 (인원~산청 \3,000/인)
산청읍에서 하차후 택시를 타고 어천마을로 이동 (택시비 \9,000) 하는데 우리의 몸에서 나는 땀냄새 때문에 택시기사님께 미안하다는 말은 하였으나 몸둘바를 모르겠다.
그래도 만원을 지급하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더니 택시기사님이 좋아한다.
어천마을에 도착한 후 유내석씨의 애마(소나 타고 다니는 차)를 타고 기분좋게 광양으로 향한다.
【산행 후기】
이번 태극종주는 필자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필자가 앞으로 얼마나 산행을 할려는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이런 대장정의 산행을 할수 있을려는지 필자 스스로도 궁금한바다.
이번 산행과 같이 3박 4일동안 먹고 마실 부식과 비박 장비등을 둘러메고 가는 산행인데 우리 백두산악회의 B-TEAM원이 아니었으면 가능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이들(박강수.유내석.이준복)이 아니었으면 누가 그런 고행을 감내하며 필자 같은 연배가 많은 사람과 동행하며 산행을 하겠는가?
이번 지리산 태극종주에 있어 이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또 장문의 산행기 이지만 이들을 기쁘게 할수 있다면 필자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질 뿐이다.
이먼 지리산 태극종주기를 기록하며 산의 유래나 전해 내려오는 설(說)등은 인터넷등을 활용하여 인용한 것이니 착오 없길 바라며 이번 산행기중 문제가 있거나 잘못 기술된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멜이나 전화(016-613-7850)를 주시면 성실히 답해드리고 가르침은 필자의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2003년 10월 14일 백두산악회 고문 임천모 씀
첫댓글 백두산악회 임천모 고문님 글입니다,, 워드로 작성된 산행기의 사진 첨부 용량이 크고 들여쓰기, 내어쓰기가 많아 수정하는데 4시간이 걸리네요,,,
언제쯤 이런 산행기를 써볼수 있을런지 ...대단합니다
임천모 고문님은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어 산행을 하면서 정상에 도착하여 주변산의 풍수 해설을 들으면 푹 빠져 버리죠,,, 이번 기백-금원산에서 진양기맥 2구간때 들었던 용추사의 풍수를 또 들어 보았습니다,,, 들어도 또 다시 듣고 싶은 임 고문님의 풍수지리설, 양산, 음산,,,,
좋은 글이네요. 저도 대간 종주종이면서도 태극종주를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고 있거든요. 저도 그 길을 꼭 한번 가 보렵니다. 계획이 어느정도 서면 퍼 가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