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신행생활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실천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법회나 강의를 통하여 불교를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것은 불자로서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의 밤길은 멀고 험하다. 라고 하셨습니다.
올바른 불자란 결국 이 세상에서 모범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로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흉내나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절에 와서 공부하는 것을 흉내 냄으로써 그것이 가정에까지
연결되어 공부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그 가정의
분위기나 자녀들에게 미치는 교육효과는 참으로 지대할 것입니다.
승가에서는 배우는 일을 가리켜 ‘옥도 다듬지 않으면 아름다운 물건이 되지 않듯이 사람도 평생을
통해서 배우지 않으면 인생의 참다운 길을 모른다’고 하여 ‘玉不啄 不成器(옥불탁불성기)
人不學不知道(인불학 부지도)’라는 비유를 자주 인용합니다.
불법(佛法)을 흔히 佛法大海라는 표현을 합니다.
바다는 不宿死屍(불숙사시)라고 해서 죽은 시체는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자체적으로 정화시키는 힘을 가졌으며 정화하지 못하는 찌꺼기는 결국 바닷가로 밀어내는
속성이 있습니다. 불법을 큰 바다에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불법(佛法)속에 들어와서 기도나 불공이나 참선공부를 하는 일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좋지
않은 모든 불행과 아픔들을 정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청정한 삶으로 완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한계에 부딪혀서 얽매이게 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희망과 포부와 기대를 갖고 발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를 나날이 점검해보는
것은 바람직한 불제자가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예불이란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써 믿음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을 담은 ‘예불문’은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릴 때나 불공을 올릴 때 사용하는 예배의식의 글입니다.
그 속에는 불법승 삼보께 예배드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몸으로는 절을 하면서 입으로는 염불을 외우고 생각은 예불문의 간절한 내용을
음미하면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身口의 삼업이 통일되어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일은 불자가 되는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며 첫 맹세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五分法身香(오분법신향)
- 부처님께서 갖추신 다섯 가지 공덕에 향을 사루어 예배 드리옵니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지계(指戒)의 향이여, 선정(선정)의 향이여, 지혜(智慧)의 향이여
해탈의 향이여, 해탈지견의 향이여, 이 거룩한 향을 사루어 올립니다.
(부처님의 지계에 향을 사루어 올리옵니다.
부처님의 선정에 향을 사루어 올리옵니다.
부처님의 반야에 향을 사루어 올리옵니다.
부처님의 해탈에 향을 사루어 올리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향을 사루어 올리옵니다. )
위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다섯 가지를 ‘오분법신향’또는 줄여서‘오분향’ 이라고도
합니다. ‘오분향’은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깨달은 분들이 갖추고 있는 광대한 무량공덕을 가리킵니다.
처음에 나오는 계향, 정향, 혜향의 세 가지는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불교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계향의 ‘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여 궁극적으로는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계향이라고 하는 것은 계율을 잘 지키면
혼탁하고 무질서한 사회가 밝고 명랑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저절로 향기가 풍겨난다
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단체에 나가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물이 흐르듯 조용히 규범을 잘 지켜 나가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옵니다.
두 번째의 정향은 계향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은 안정이라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계향이 각자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라면 정향은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안정의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신발을 벗어놓는 곳에 照顧脚下(조고각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말은 너의 발밑을 잘 살펴보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잘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혜향은 지혜의 향기를 뜻합니다.
계와 정이 마련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삼학 가운데 맨 마지막에 놓이는 덕목인 것입니다.
삼학의 가르침은 비유하자면 흙탕물이 있는데 이것을 맑게 하려면 우선 물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돌도 던지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야 물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금지 하는 것이 바로 계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에는 흙이 가라앉도록 조용히 기다리면 안정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 상태입니다.
수면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면 그 물에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비춰 볼 수 있고 맑아진 물은 마실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일이 계이며 그래서 안정이 되면 정을 얻고 그 다음에 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 계 · 정 · 혜 삼학의 순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삼학의 이런 뜻을 음미하면서
예불을 드려야 합니다. 삼학은 삼층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임금이 살았습니다.그는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근사한 삼층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수에게 가서 삼층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가 보니 겨우 일층만 지어 놓았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임금은 일층은 필요가 없으니 무조건 삼층만 자어 달라고 우겼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삼층만 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층이 있어야만 이층이 존재할 수 있고 이층을 지어야만
비로소 삼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발전과 마음의 지혜를 얻는 일이나 가정의 발전 나아가 국가의 발전도 그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네 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생사 해탈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합니다. 대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얕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승복을 입고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모 또한 마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늘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이 바로 해탈의 의미입니다.
오분향의 마지막인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견’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생제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즉, 해탈지견이란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 활동을 뜻합니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앞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향입니다.
이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됩니다.
오분향은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모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壓券(압권)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써 해탈지견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학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닙니다.
계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