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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분)
기억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연구범위: 사 9:6, 미 5:2, 마 16:13-17, 요 1:1, 14, 18, 8:58, 17:5, 20:28, 고전 1:3, 고후 13:14.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역사적 개관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성경 자체를 탐구해 보자. 수세기 동안 그렇게도 많은 관심을 끌어 왔던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중요한 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고백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16:13-17, 마 11:25-27). “혈육”(마 16:17), 즉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만세(萬歲)의 지고한 신비를 풀 수 없다.
예수님을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기원(起源)이 마리아의 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그분이 여러 면에서 우리와 같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나머지 인류와는 차이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분은 선재(先在)하신 분이시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5-16).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17절).
일요일(4월 6일)
그분의 선재성과 그 의미
1.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분의 선재성은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다음 구절들에서 그 대답에 대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히 1:1-4, 골 1:15-20).
답: (히 1:1-4)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혹은 잉태되었을 때)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달랐다. 그분은 마리아의 태에서 처음 존재하시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이미 계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분의 선재성이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2.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어떤 힌트를 줍니까?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 5:2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비교 마 2:1-6)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가 5:2에 나오는 모사아(mosa'ah)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의 다른 부분은 장차 다스릴 자의 선재성을 분명히 언급할 뿐 아니라 상고(上古)로부터 존재해온 그분의 영원한 선재성을 말해 준다(참조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8권, 757)..
이사야 9:6은 세상에 오셨던 이 특별한 분의 영원한 선재성에 대해 가르쳐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명백히 유일신을 섬기는 백성에게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 아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언급한 사실은 놀라움을 줄 뿐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친숙하게 생각해 오던 관념을 깨뜨리는 거룩한 계시였던 것이다. 이 아들이 아버지요,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말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교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월요일(4월 7일)
신약의 증언
이제 신약에서 예수님의 선재성을 나타내주는 다른 증거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음을 암시하는 말씀들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신원에 대해 자각하고 계셨다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암시를 발견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신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의 선재성에 대한 간접적 암시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한국 국회에 용무가 있어 서울에 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명백한 진술은 그분의 수난주간에 드리신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 줍니까?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8:23
요 8:58-59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17:8, 24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이 구절을 포함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가 있느니라”(I AM)는 표현은 영원성 혹은 영원한 선재성을 암시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엄청난 신성모독으로 보고 돌로 치려고 하였다(5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성을 말씀하시면서 영구한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셨다. 그분은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던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엘렌 G. 화잇, 영문시조, 1900년, 8월 29일자).
교훈: 신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직접 혹은 간접적인 여러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요일(4월 8일)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구절들을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한 예로, 성경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잘 알려진 성경절인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만약 예수께서 영원하신 분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을 독생자(獨生子)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그분도 누군가가 낳았다는 말인가?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monogenes)라는 하나의 단어인데, 신약에 아홉 번 나오며, 그 중에서 다섯 번은 예수님을 지칭한 것으로 모두 요한의 글에 나온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그런데 이 다섯 번의 언급이 그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려고 애쓴 동일한 기자(記者)인 요한의 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 분명한 핵심을 말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유대인인 그가 자신이 피조물이라고 간주하는 누군가에게 이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 다음 구절들에서 모노게네스(monogenes)가 예수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사례들을 살펴보십시오. 헬라어에 익숙지 않다하더라도 이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눅 7:11-15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_
눅 8:41-42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눅 9: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죽은 나인 성의 청년을 ‘독자’(그 어머니의 외아들)라고 묘사했다. 여기에 ‘낳았다’라는 개념은 강조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뿐인,’ ‘유일한’의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이로의 딸도 ‘외딸’ 즉 모노게네스로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자녀였다. 누가복음 9:38에서도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교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묘사한 것은 그분의 유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하려는 요한이 그분을 피조물로 간주했을 리가 없다.
수요일(4월 9일)
그리스도의 신성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칭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누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유일신을 국게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칭호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깊은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마태복음 3: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는 구약에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성호(聖號)인 ‘야훼’라는 이름을 언급하였다.
원어상으로 요한복음 1:1의 문장 구조는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이 제자는 그분께서 운명하신지 약 65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을 명백하게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다. 사실상 요한복음 1:18의 원어적 의미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20:28은 어떤가? 이 구절은 요즘 사람들이 놀람과 충격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듯이 도마도 자신의 놀라움을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을 현대인의 관습에 맞추어 읽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거룩한 칭호를 발음하지도 않았었다. 더군다나 도마가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은 “도마가 그분께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놀라움에 대한 감탄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도마의 고백을 만족히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한 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느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었다.
목요일(4월 10일)
더 많은 증거들
신약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 적용된 영원성과 창조주 되심, 그분의 죄 용서하시는 능력,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권능과 같은 몇 가지 속성을 다루었다. 추가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침례식 선언(마 28:19)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불려짐으로써 동등성을 나타낸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와 같이, 인간의 입으로 발해졌다면 분명히 신성모독에 해당되었을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하신 경우도 볼 수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과 그리스도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먼지 나는 팔레스틴의 거리를 거니실 때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선언하신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하나’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중성명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밀접한 연합을 암시한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의 신성이시며 개체와 위격은 다르시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이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를 탐구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 아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예수님으로 알고 있는 분이 하늘에 머물러 계셨다고 가정해 보라(우리는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다만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교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
금요일(4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19-26).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계보(마 1:16, 18, 눅 3:23, 비교 눅 1:26-35))를 얼마나 솜씨 있게 다루었는지를 볼 때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성경 기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해 가장 강하게 피력한 요한복음(요 1:1-3, 14)과 어떠한 상충되는 요소도 남기지 않았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전체 계획에 있어서 동정녀 탄생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그분의 선재성과 신성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사복음서에 분명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교리로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이 이론은 성경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당신의 신격(神格), 당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런 사상은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설복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 그런 오류를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사명, 그리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인용된 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관한 교리를 고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구원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초래합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흠.. 제가 만든건 아니구요;;;
재림마을에 올라와 있는거 퍼 왔습니다;;;
다음주부터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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