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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개회식>에서의 스카이다이빙!
아래 웹사이트를 클릭하면 무진장 많은 동영상이 가득합니다.
http://kr.youtube.com/watch?v=bIEpKIWaCKU
한국 스카이다이빙 역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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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1. 이 내용은 한국의 스포츠 스카이다이빙 활동을 기록한 것이며,
군의 고공 강하활동 기록과는 무관합니다.
2. 첫 부분과 중간 부분에 군의 활동 내용이 있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주변 환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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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낙하산회 (PCK : Parachute Club of Korea)
우리나라에 스카이다이빙이 도입된 것은 1950년대 후반 조종사 생환구조학교 (Survival school)인 공군 제2325부대 교관들과 육군 공수부대 창설 요원들로 10여명이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에서 HALO(High Altitude Low Opening ; 고공침투의 일종) 교육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인원 중에는 나중에 대한낙하산회 훈련부장으로 활동한 공군의 이준수 문관(PCK D-1, 예비역 대위, 한국전쟁 초기 하와이에서 공수교육 수료, 공군 조종사 생환구조학교장, 공군대학과 공군사관학교 교수 역임)과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육군 이원등 상사(66년 2월 고공강하 훈련 중 헤매는 동료의 낙하산을 펴주고 자신의 낙하산을 개방할 시간이 없어 사망 ; 제1한강교 중지도에 추모동상 세워짐)도 포함되었다.
이후에도 특수부대 교관양성을 위해 군에서는 여러 차례 오키나와의 미군 특수부대로 교육생들을 보냈으며 육군의 김원도(病死), 백춘기(울진 공비와 교전 중 총상으로 사망), 이동준(이원등 상사 이후, 79년 4월 고공강하 훈련 중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특전사의 스카이다이빙을 이끌어 온 분)도 이 교육을 수료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 활동을 하는 사람이 극소수라 항공기를 같이 배정 받고, 공군과 육군은 항상 함께 강하 훈련을 하였으며, 따라서 자연히 서로 가깝게 지냈다.
한편 1960년 초반 당시 주한미군 연락장교로 근무하던 육군 김광모 중위는, 미군부대에서 스카이다이빙 교육을 받고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자, 주한 미군에 항공기 지원 요청을 하여, 특별 지원을 받으며 강하활동을 하다가, 1964년 체코에서 개최된 세계 낙하산선수권대회에 한국선수로 출전하겠다고 하여 군의 허락을 받고 출국하였지만 미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다른 한편, 1962년부터 제3공화국 정부는 '대학생 특수체육'이라는 프로젝트로 수년에 걸쳐 자원하는 대학생들에게 하기방학 중에 공수, 활공, 스키, 스쿠버 등 특수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공수교육은 지상교육만 실시하였다.
1964년
5월 주한 미군인 Keneth. P. Thomson 주도로 함께 부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몇 명과 클럽을 만들고 일반인들과 대학생들을 모집하여 스카이다이빙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Thomson은 CIA 요원으로써 전시를 대비하여 공작원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클럽의 회원으로 가입한 한양대학교의 신해균, 오덕성, 이근부, 최경락과 하영자가 미8군 Escom Sports Parachute Club에서 지상 교육을 수료하고, 6월 화전 비행장에서 항공대학교의 김재환 교수가 조종하는 C-195에서 생명줄 강하를 실시하였다.
그 해, 7월 조선일보사 김종원 항공과장의 관심과 열정으로 방자명 사업본부장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대한낙하산회(Parachute Club of Korea)를 조직하였으며, 교통부 산하 대한항공협회(대한민국항공회의 전신)의 산하 단체로 등록하면서 6월10일자로 소급하여 등록하였다.
9월에는 공군의 이준수 문관을 대한낙하산회 교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이근부가 민간인으로는 처음 자유강하를 하였고, 2주 후에는 최경락도 자유강하를 하였다. 당시 활동은 미 8군 항공대, 오산, 포천에서 Beaver(U-6A, L-20 ; 6인승 항공기)를 이용한 개별 활동을 하거나, 화전 비행장에서 C-195를 이용하여 활동하던지, 여의도 비행장에서 공군 제2325부대 팀에 섞여 활동하였다.
한편, '대학생특수체육'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영재, 박건수 등도 대한낙하산회에 가입하여 재교육을 받고, 강하하면서 회원숫자는 늘어갔다.
1965년에 2기생(김미숙, 길영경, 이만석 등), 1966년에 3기생(이근후, 조용갑, 최순욱, 최동양 등)을 모집하고 교육시켜 활동하였다. 당시의 스카이다이빙에 매료된 회원들은 항공기를 얻어 타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노력을 쏟아왔는데, 특히 최경락(PCK D-10, USPA D-3096, 67년 ROTC 임관, 특전사에 지원하여 김원도, 손춘권, 이동준 등과 함께 특전사 초기 고공강하 팀원으로 활동, 전역 후 미국으로 이민, 1972년 제12차 세계대회에 혼자 참가, 현재 LA 거주))은 열성적으로 활동한 회원으로,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8군이 주최한 4개국 국제 대회(정밀)에 참가하여 3위에 입상하였고, 개인적으로 조종사들을 교섭하여 2인승 L-19과 김경오가 도입한 Piper colt를 얻어 타고, 제1한강교 상공에서 강하하기도 하였다.
1967년
2월 경향신문사 항공부장의 권고로 편집장이던 김진섭 상무가 대한낙하산회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김 회장은 이준수를 훈련부장으로 임명하여 운영하였다. 김진섭 회장(종군기자 출신, 일제 때 2인승 복엽기 날개에 매달려 Ripcord를 당기면 낙하산이 펴지면서 이탈한 경험자)은 대외적인 역할만 하였고, 모든 교육과 강하 활동은 이준수 훈련부장이 담당하였으며, 그와 함께 활동하던 교관은 공군 제2325부대의 강인영, 권영구, 이종열과 육군 특전사의 이동준 등이었다.
회원들은 경향신문사의 C-182 등을 이용하여 매주 말 정기강하 활동을 하였지만, 국민소득이 낮은 시절이므로 항공기를 임대하여 사용하는 것은 회원들에게 너무 힘에 벅차, 대한낙하산회 활동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1968년
중앙대학생 최영철의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사고는 첫 강하로 생명줄 강하를 하였으나, 주낙하산이 펴지지 않았고 고인은 예비산을 개방하지 않았다.
최영철의 사망 사고로 경향신문사 항공기도 사용할 수 없게되자, 김진섭 회장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회원들의 탄원서'라는 글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대통령에게 전달되도록 시도하였고, 마침내 탄원서를 전달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7월8일 육군참모총장에게 대한낙하산회에 항공기를 지원하라고 지시(청와대 작명 제391호)하였다.
이후, 대한낙하산회는 육군 항공대의 U-6A 6인승 비행기를 지원 받아, 69년~71년 성남(서울)비행장과 72~74년 화전비행장에서 매주 정기강하를 실시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12일에는 공군 제2325부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부대 교육시설을 이용하여, 1년에 1개기 이상의 교육생을 배출하였다.
지상교육 내용으로는 Mock door(모형문 ; 항공기 이탈자세), PLF(Parachute Landing Fall : 낙법), SLF(Swing Landing Fall : 흔들리는 상황에서 낙법), 비상시 조치사항(예비산 개방), 비상 착륙방법(고압선, 숲, 눈, 수상), Mock Tower(모형탑) 이탈, 낙하산 포장과 이론이었다.
그러나 매주 강하하는 것이 항상 순조롭지는 않았는데, 군 조종사나 항공 관계자들 입장에서 일요일 근무는 귀찮은 일이었으므로, 이들은 지원 지시 내용 중에 '군 임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지원하라"는 단서를 이용하여, 자주 군 작전이라는 핑계를 대고 지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강하하려고 비행장에 모인 회원들은 헛걸음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는데, 당시는 전화도 귀하던 시절이라 중식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다가 발길을 돌려야만 하였다.
또한 유조차 동원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항공기가 채워온 연료만으로 비행할 수 밖에 없어 운영위원들은 많은 회원들에게 강하의 기회를 주고자, 저고도에서 여러 번 강하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따라서 강하고도는 3,000~5,500 피트 강하가 대부분이었고, 7,200 피트 이상의 강하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스타일 강하를 연습하는 회원들은 자칫, 저고도 개방을 하는 경우가 발생되어 일과 후 결산에서 기합을 받거나, 강하 정지 등의 징계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때, 대한항공협회 사무실에 대한낙하산회장 책상이 있었지만 실제 사용하지 않고, 이준수 부장 자택 건너 방을 사무실로 하고, 화전비행장의 경향신문사 격납고 창고 한 칸을 임대하여 공공장비를 보관하였으며, 공군 제2325부대를 지상 교육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
공공장비로는 낙하산 약 30세트가 있었는데 이것은 차지철 의원(추후 대통령 경호실장)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 대한낙하산회 교관들이 선거 유세장에 시범강하를 해준 대가로 받은 기증품이었다.
개인 낙하산 세트를 소지한 회원은 절반 이상이었는데 대부분의 장비는 동대문, 남대문 시장의 군수품 상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주낙하산의 개조는 교관에게 의뢰하여야 가능하였다. 당시 사용하던 장비와 구입가격은 다음과 같다.
* 주낙하산(25,000원) ; 군 조종사용 B-4 Harness + B-12(28' Round Canopy)를 Double L,
TU-5나 TU-7 등으로 개조 후 Sleeve (Round canopy용 전개낭)를 씌운 것
* 예비산(5,000원) ; T-10R (24' Round canopy, 복부에 부착)
* 고도계(3~5,000원) ; 바늘이 두 개 달린 10만 피트까지 나타내는 커다란 항공기용 고도계,
예비산 위에 고정.
* 헬멧 ; 조종사용, 오토바이용이나 미식축구용 헬멧 사용
* 방풍경(2,000원) ; 전차부대용 방풍경
* 강하복 ; 양 발목부터 목까지 지퍼가 달린 것을 남대문 시장 등에서 팀별로 취향에 맞추어
주문하여 입었으며, 팀별로 도안한 마크를 새겨 달고 군화를 착용
* 항공기 1회 탑승료 ; 500원
* 월회비 ; 500원
(참고 ; 당시 물가 - 자장면 50원, 버스요금 20원)
회원들이 사용하는 낙하산은 전진속도가 형편없고 색상이 같은 군용 낙하산만 사용하던 시절에 이준수 부장은 Rogallo type(삼각형) 낙하산인 Para-Wing을 사용하였고, 이동준 교관은 Para-Commander를 사용하였다. 이 낙하산들은 독특한 색상과 뛰어난 전진속도로 회원들도 타보고 싶어했지만, 일반회원들에게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항공기용 고도계는 민감하여 착지 시 충격을 받으면 쉽게 망가지므로, 어려운 착지를 하는 경우에도 고도계를 팔로 감싸야 했는데, 당시 미국에서 새로 출시된 Altimaster는 회원들이 꼭 갖고 싶어하던 품목이었다.
대한낙하산회는 자체적으로 매년 한국낙하산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경기종목은 정밀이었다. 특전사 전역 후 미국으로 이민간 최경락은 1972년 8월 미국 오크라호마 Tahlequah에서 개최되는 제11차 세계낙하산 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로 하고, 이준수, 이동준, 최경락, 강창록, 남명우 등과 함께 한국 팀을 구성하여 참가하려 했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군인 신분이라 국방부의 출국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964년에 김광모 중위가 국제낙하산대회에 참가한다며 망명한 선례가 문제되어 출국 승인이 나지 않아 대회 참가를 할 수 없게되었으며, 할수 없이 미국에 거주하던 최경락만 한국 대표선수로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정밀과 스타일 종목에 출전한 최경락은 각 국에서 총145명이 출전한 남자 개인부문에서 종합성적 122등으로 선전하였다. (Skydiver 72년 9월호, Parachutist 72년 11월호)
아래는 당시 국내에서 준비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대한 항공협회 회보 [1971.(10,11,12) No.4]의 기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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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낙하산회 세계 낙하산 경기대회 참전 <대회 규정 개정에도 동의통고>
본회에서는 오는 72년 8월5일부터 20일까지 15일간에 걸쳐 미국, 오크러호머주 "테라크"에서 열리는 제 11차 세계 스카이다이빙 선수권대회에 대한낙하산회에서 선출한 5명의 선수를 출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번 대회에는 50여개국 선수들이 출전하여 대회 사상 유례없는 공중곡예와 최고의 낙하기술로 선전할 것이 예상된다. 특히 주최국인 미국에서는 본래 동 대회의 경기규정 개정안을 초안. 오는 2월3일 F.A.I.에 상정하여 가결시킬 것으로 예상되며 본회에서는 이미 개정안의 동의서를 F.A.I.와 미국 낙하산회에 제출하였다. 개정안을 보면 종전의 규정보다 신생국을 위주로 한 사항이 많이 삽입되어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개정안에는 각국에서 남. 여 각 5명의 선수가 참가하게 되어 있으며, 5명 이하의 참가국에는 단체전에 참가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단체전과 개인전에는 지상목표에 정확하게 착륙하는 방법과 공중곡예 종목 외에 10여개 종목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선수들은 제반 종목에 참가할 예정이다. 우리선수들의 기록을 보면 아시아에서는 우세한 편이나, 강한 구라파의 선수들을 목표로 추위를 무릅쓰고 맹훈련을 하고 있다. 지난 1월4일에도 수색비행장에서 10여 회에 걸쳐 강한 훈련을 한바 있다.
대한낙하산회에서는 작년 5월부터 9월까지 지역 대회와 각 대학팀 대항전을 실시하였고 오는 3월에는 제11차 세계 선수권대회에 파견할 선수 최종선발대회가 있다.
육군과 공군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 대한낙하산회에서는 작년도에 연 2,000여명이 (1주 50명 월 200명) 무사고 강하훈련의 기록을 수립하였으며 동회 훈련부장은 71년 12월19일에 1,000회 강하 실적을 기록하여 전 회원들의 축하를 받았다.
동회에서는 작년도 12월28일 성춘관에서 총회를 갖는 자리에서 김진섭 회장은 훈시를 통해 선진국 선수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은 기술연마와 회원들이 평소에 연마한 기술을 세계대회에 보여줌과 동시에 국가 비상시에도 평소 지닌 그 정신을 조국수호에 돌릴 수 있는 기능을 더욱 굳건히 할 것을 당부한바 있다. 김 회장은 특히 낙하산회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간부 및 회원들에게 표창을 하였는데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 : 권혁진(일반) △ 공로상 : 강인영, 이동준(교관) △ 노력상 : 최순욱 (고려대학), 남명우 (KAL 직원) △ 감투상 : 김필원 (서울공대), 이양수 (고등학교 교사) 등이,
한편 낙하산회 훈련부장 이준수씨는 1,000회 무사고 스카이다이빙 축하기념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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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낙하산협회 지도위원 H. Castleman씨 한국선수 지도차 내한
제11차 세계낙하산경기대회를 앞두고 주최국인 미국 낙하산협회에서는 우리 선수들의 참가를 적극 도웁기 위하여 동회 간부인 Hale. Castleman 씨를 1월8일 한국에 파견시켜 제반 훈련을 도웁고 있으며 특히 9일(일요일)에는 교외 수색비행장에서 훈련중인 대한낙하산회의 일부 선발 회원들과 더불어 직접 스카이다이빙 훈련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H. Castleman씨는 오는 3월말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우리선수들과 계속 훈련을 같이하는 동시 제반 경기에 따르는 문제를 코치하고 돌아갈 예정이라 하며 국제대회를 앞둔 우리 선수들의 길잡이로 기대가 매우 큰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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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열성회원들은 대부분 대학생들이었는데, 그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한양대학팀이었다. 한양대학팀은 회원들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공개모집하고, 방과 후에 교내에서 자체 지상교육을 실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강창록은 1973년 경북대학과 영남대학의 고향 후배들을 대한낙하산회에 가입시켜 수료시켰지만, 이들이 주말에 서울까지 와서 활동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자, 대학생이던 자신이 직접 2군사령관을 찾아가 면담하고 설득시켜 U-6A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이동준 교관을 대구로 초빙하여 지역 후배회원들에게 여러 차례 강하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때 항공기는 동천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낙동강 변에서 강하하였다.
한편 같은 학교의 염종섭은 많은 외국서적을 탐독하고 Canopy의 성능을 향상시키고자, 자신이 집에서 B-12 canopy를 Para-Commander처럼 직접 개조하였고, 훈련부장으로부터는 승인받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몰래 강하하여 성능시험하는 광적인 열성을 보였다.
그 외 김필원, 김연호가 이끄는 서울공대팀, 한경석이 팀장인 서울농대팀이 있었으며 서울시립대의 김영재가 주축이 된 대학연합 팀이 있었다. 대학연합 팀은 선배가 없는 학생들이 모여 서로 협조하고 친목을 다지는 팀이었는데, 건국대의 이정묵, 채희웅과 광운대의 홍명섭 그리고 고한수가 팀장인 홍익대 팀의 김용우, 박종현, 홍성도가 같이 활동하였다. 그 외 이만석, 이양수, 권혁진과 같은 일반인들도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회원들은 정기강하 외에도 강하의 기회를 늘리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국군의 날 행사 연습 강하 같은 군 훈련강하에 참가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는 규정보다 인정이 우선하던 시절이라, 군 교관들은 군 훈련강하에 끼고자 온 민간회원들을, 항공기에 태우려고 헬멧을 미리 쓰게하여 장발을 감추도록 하고, 조종사 눈을 피해 항공기에 태우기도 하였다.
시범요원으로 발탁되는 것은 경쟁이 치열하여 힘들었지만, 혹시 시범강하 기회가 생기면 만사를 제치고 시범강하를 하러 다녔다. 지금도 매년 실시하는 부산일보 주최 어린이날 행사는 부산구덕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행사의 시범강하는 1970년 초부터 하였다. 당시 시범요원들의 강하 경력은 30회~50회 정도였고 낙하산도 원형낙하산인 B-12였지만, 경기장 밖으로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회원들은 자신의 대학 총학생회를 설득하여 신문사 Cessna 항공기를 임대하고, 서울공대(중랑구), 서울농대(수원)의 대학축제에 시범강하를 실시하였다. 한양대학 팀은 한양대학 캠퍼스에 공역허가가 나지 않자, 건국대 회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건국대학 축제의 시범강하를 추진하고 실시하여,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된 건국대 회원들과 사이가 벌어지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항공기 지원은 1년 단위로 지원 지시를 하였는데, 1973년 11월14일 육군에서는 참모총장 명의로 대한낙하산회에 접수된 공문서에는 1974년 말일까지 매월 4회씩 일요일에 추가로 항공기 지원해주겠다고 하였으나, 세계적인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1974년 3월 육군 항공대는 더 이상의 항공기 지원이 어렵다며 항공기 지원을 중단하였다.
이로써 대한낙하산회의 정기활동은 중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활동이 중단되자 회원 대부분은 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대한낙하산회의 조직적인 활동은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일부 회원들은 최수용(미군부대 문관, USPA Instructor 겸 Rigger, 1975년 2월22일 동두천 Indian head 강하장에서 미군들과 한국 최초 8-way 성공 : Parachutist 1975년 5월호) 교관이 근무하던 평택의 미군(Camp Humphrey) 스카이다이빙 클럽을 찾아가서 강하를 하고자 시도하는 등, 강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은 수소문하여 노력하였지만, 사실상 더 이상의 강하활동은 어려웠다.
1976년 스페인에서 개최된 국제군인체육대회 스카이다이빙 부문에 출전한 특전사의 이동준 교관(준위)과 이천술 상사는 국내 대회 개최를 기획하고, 1977년에 제1회 특전사령관배 고공강하 경연대회를 개최하였지만, 당시 대한낙하산회의 열성회원들은 대부분이 군복무 중인 상태라서 선수구성이 안되어 출전하지 못하였다.
1978년 4월말 대한낙하산회의 교관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이동준이 군 훈련강하(1,203회)를 하면서 공중 충돌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회원들의 사기는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0월 제2회 특전사령관배 고공강하 경연대회에 대한낙하산회원들은 A팀 (남명우, 노영일, 양상규, 염종섭)과 B팀 (고한수, 권혁진, 박종현, 이정묵)을 구성하여 2개 팀이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이 대회를 계기로 대한낙하산회를 재건하자면서 연습강하에도 열심히 참가하였지만, 10월22일 대회 개회식의 낙하산 성능비교시험 시범강하에 참가한 박종현의 주낙하산이 안 펴지고 예비산이 엉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98년 9월 회보에 기고한 고한수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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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이야기 <고한수 감사>
(다음 달이면 20년 기일이 되는, 사고로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후배들의 교육을 위하여 글을 쓴다.)
내가 스카이다이빙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현충일 전날에 우리학교에서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구국선열들의 묘비 앞에 꽃꽂이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는 여기저기 흰 꽃이 핀 것 같더니만 낙하산들이 한강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그 광경은 어린 나의 가슴속에 큰 감동을 주었고 낙하산을 타겠다는 꿈을 갖게 하였다. 대학생이 되던 72년에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대한낙하산회를 찾아내어 문을 두드리자, 면담을 하던 이준수 훈련부장이 '미친놈 하나가 더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인지도는 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인원이 모여야 교육시킬 수 있으니 친구들을 모아 함께 오면 빨리 교육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오자마자 주위의 친구들에게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함께 하겠다고 나선 친구는 중학생 때부터 동창이던 박종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산악반에서 같이 암벽등반을 하던 홍성도와 또 다른 중학동창인 김용우를 포섭하여 우리학교 팀을 만들었고, 이때쯤 다른 학교 팀들도 신입회원을 모집하였다.
처음 교육받을 때는 50여명이 시작하였으나, 수료한 교육생은 13명밖에 안되었고, 1년이 지난 뒤에 남은 동기생은 김연호, 박종현, 양상규와 나, 4명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박종현과 나는 항상 열성적이었으므로 연말 우수회원 표창은 번갈아 가며 수상을 하는가 하면 항상 둘은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화전비행장에서 6인승 군용항공기(U-6A)를 지원 받아 활동을 하였다. 73년은 전세계가 오일쇼크로 심각했다. 따라서 군용항공기를 지원 받던 우리에게도 74년 봄부터는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 후의 활동은 1년에 몇 차례 몰래 군용항공기를 얻어 타는 것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78년, 우리는 권혁진, 남명우, 노영일, 양상규, 염종섭, 이정묵, 채희웅, 홍명섭씨 등과 함께 대한낙하산회의 재기를 위하여, 당시 군 선수들은 새로운 Strato Cloud라는 요즘과 같은 공기충진형 사각낙하산으로 출전하는 제2회 특전사령관배 낙하산대회에 평균 40회의 강하 경력과 타던 원형낙하산(B-12, TU-7 modified)을 가지고 참가하였다.
대회 참가 전에 우리는 어설픈 실력으로 자체 장비점검을 하였고, 나는 예비낙하산(T-10R)에 보조낙하산(pilot chute)을 붙여야 빨리 펴진다는 생각으로, 나와 내 친구의 예비낙하산에 동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보조낙하산을 매달았다. 당시 나는 낙하산 성능 향상을 위하여 나의 장비를 과감히 개조하면서 강하를 시도하던 부류의 하나였다. 복학하여 대학 4년이던 나는 대회전의 연습강하에 빠짐없이 참가하였지만 직장인이 된 박종현은 연습강하에 자주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회 진행 측에서 개회식 내빈을 위한 원형, 삼각형(Para Wing), 사각형 낙하산의 성능비교 시범강하에 원형낙하산 강하자 2명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자원하면서 내 친구에게도 강하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마음으로 명단에 박종현의 이름도 넣었다.
78년10월22일, 대회 개회식이 오전 10시라서 개회식 전, 아침 8시부터 1회전 경기를 가졌다. 다음은 개회식을 위한 시범강하이다. 내가 1번, 박종현이 2번인데, 박종현이 춥다고 자리바꿈을 위해 순서를 바꾸자고 하여 바꾸기로 하고 안내 방송자에게도 강하순서를 바꿨다고 알려주었다. 항공기(UH-1H)는 강하시간을 맞추느라 강남상공에서 30분 이상을 돌며 대기하다가 진입하였는데, 박종현이 항공기 안에서 다시 순서를 원위치 하자고 하여 다시 바꿨다. 고우! 신호와 함께 45백 피트에서 몸을 날리고 25백 피트에서 개방하였다. 낙하산이 펴지자 목표를 향하여 방향을 돌리고 발에 매단 연막탄 안전핀을 어렵게 뽑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낙하산 6개가 보인다. 강하자가 8명이므로 1개가 더 있어야 하는데 종현이의 원형 낙하산이 안 보인다. '그는 연습강하 때도 항상 28백 피트에서 폈으므로 내 낙하산 위에 있어 안보이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목표를 향했다. 착지하고 장비를 거두는데 사람들이 내 옆으로 뛰어간다. 뛰던 무리 중에 우리회원이 나를 보고는 '안내방송에는 고한수 낙하산이 안 펴졌다고 했는데, 그럼 박종현이구나!' 하고는 뛰어 간다. 순간, 얼른 감이 안 잡혀 서성거리다 다른 회원이 오자 그에게 장비를 맡기고 나도 뛰었다. 몇 백 미터를 뛰니 구급차가 이미 도착하였고, 모여있는 사람들 발 밑에 나의 친구가 손에 주낙하산과 예비낙하산의 개방손잡이(rip cord)를 움켜쥔 채 코피를 흘리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몸을 들으니 왼쪽 팔다리가 흐느적거렸다. 헬멧은 금이 갔고 두 개의 낙하산은 엉켜있었다. 주낙하산의 산줄을 보조낙하산이 빙빙 감았고 그 엉킨 사이로 예비낙하산의 보조낙하산이 지나가면서 예비낙하산마저 엉킨 이중 말발굽형 기능고장(double horseshoes malfunction) 이었다.
그의 장비를 잘 포장하여 함께 묻으면서 오열하는 가족들과 같이 친구의 무덤에 흙을 부을 때, 나는 그때까지 참고있던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그가 스카이다이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나의 권유 때문이고, 그날 그 강하도 그가 없을 때 내가 명단에 집어넣어 하게 되었으며, 엉켜버린 예비낙하산의 보조낙하산도 내가 달아준 것이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다.' 라는 죄책감에 내 자신이 밉고 원망스러워 더욱 슬펐다. 속죄 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려고 혼자 술에 취하여 빗속에 주저앉아 울부짖기도 하고 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답답함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 해봐도 해답이 없었다.
몇 개월 뒤, 나는 혼자 친구의 무덤에 찾아가서 '내가 속죄 받을 수 있는 길은 너와 내가 좋아하던 스카이다이빙의 발전을 위하여 열심히 뛰는 것뿐이며 네 몫까지 뛰겠다' 라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대한낙하산회는 문을 닫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사고 나던 날, 나의 어머니가 처음 구경오셨다가 사고를 목격하였으므로 그 이후 집안에서는 스카이다이빙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85년, 친구의 무덤에 찾아가 비석을 바라보며 '벌써 7년의 시간이 지났구나' 하고 생각할 때 헬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헬기의 엔진소리는 나의 과거활동을 기억나게 해주었고, '나는 7년 동안 무엇을 하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당시 새로 조직하기 시작한 대한낙하산협회를 찾아가서 활동은 재개되었지만 집안의 이해를 얻어 자유롭게 활동하는데는 그 후로도 6년의 설득 기간이 소요되었다. 지금은 집안 일보다도 스카이다이빙에 우선하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가족들 덕분에 열심히 스카이다이빙을 한다. 내 친구 몫까지...
주 낙하산이 안 펴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추정된다.
상황1) 고인이 군복무 기간중 장비를 포장한 상태로 장기간 보관하여 스프링식 보조낙하산(pilot chute)이 탄성을 잃어버렸고, 자유강하 시 아취(arch)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개방하자, 보조낙하산이 등뒤에 생기는 와류권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와류권 내에 머물고 있다가, 예비낙하산(reserve parachute)을 펴려고 자세를 바꿀 때, 산낭(Sleeve; 요즘의 deployment bag 역할을 하는 것으로 긴 모양의 구조)이 바람을 받으면서 먼저 올라가고, 나중에 보조낙하산이 따라 올라가면서 산줄(suspension line)을 감았을 가능성.
상황2) 고인이 자유강하를 하다가 개방 시의 자세가 머리를 아래로 향한 자세가 되어 보조낙하산이 연막탄 고리에 걸렸다가, 산낭이 바람을 받고 올라가자 연막탄 고리에서 벗겨져 올라가면서 산줄을 감았을 가능성.
당시 원형낙하산의 응급처치의 교육은 주 낙하산의 기능고장 시 분리를 하지말고, 예비낙하산 펴기를 권장. [분리뭉치(capewell release)의 분리가 엄청 힘들며, 주낙하산이 예비낙하산 보다 크고 길기 때문에 엉킬 가능성이 적음; 미국에서는 75년부터 분리를 원칙으로 교리가 바뀌었으나 우리는 보수교육의 기회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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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사고가 나자 김진섭 회장은 경찰의 사고 수습에 많은 고생을 하였으며, 이후 대한낙하산회는 모든 활동이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평소 이동준 교관과 의형제를 맺고 회원 중에 박종현을 특별히 아껴왔던 이준수 부장은, 같은 해에 두 명 모두 스카이다이빙 사고로 사망하게되자, 대한낙하산회 활동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한낙하산회는 1974년까지 총 13개기 교육과 145명의 스카이다이버를 양성하였는데, 이준수 부장이 모든 기록을 불태워 활동했던 전원의 명단은 알 수 없으나, 아래와 같은 인원이 활동하였다.
△ 회장 : 김진섭
△ 훈련부장 : 이준수
△ 교관 : 강인영, 권영구, 이동준, 이만석(2), 이종열, 최인길
△ 총무 : 남명우
△ 회원 :
강창록(9), 고한수(11), 곽성문(12), 구경태(12), 구영숙, 권오훈, 권준형(12), 권혁진, 길영경(2), 김동식(11), 김미숙(2), 김병국, 김연호(11), 김영재, 김영회(12), 김용권, 김용우(11), 김용일(13), 김필원, 남강룡(9), 노건기, 노영일(10), 류기연(12), 박건수, 박우규(11), 박인식(12), 박종현(11), 서영종, 송광재(10), 신문호(12), 신해균(1), 안호욱(13), 양상규(11), 염종섭(10), 오덕성(1), 유지석(13), 윤성준(11), 윤순자(12), 이규인(11), 이근부(1), 이근후(3), 이양수, 이정묵(9), 장주환, 장준국(12), 조영백, 조용갑(3), 주인중(9), 차성환, 채희웅(13), 최경락(1), 최동양(3), 최수용, 최순욱(3), 하영자(1), 한경석(9), 홍명섭(10), 홍성도(11)
* 참고 : ( )는 교육 기수
1979년 김진섭 회장과 이준수 부장이 후배 스카이다이버의 육성을 포기하자, 가장 열성적이던 염종섭은 대한낙하산회의 존속을 위하여 회장 인장 등을 운영위원들로부터 인계 받았지만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
1982년 염종섭은 미국 이민을 선택하고 공항에서 고한수에게 전화로, 자신이 추진해오던 모든 업무를 대신 추진해달라는 얘기를 남기고 출국하였고, 대한낙하산회 인장은 몇 일 후 염종섭의 국내 친척에 의해 고한수에게 우송되었다. 미국으로 간 염종섭은 86년 보내온 편지에서 그곳에서도 강하활동을 한다는 연락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한편 1979년 박종현 사망사고 이후 1982년까지 대한낙하산회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였고 대한항공협회에는 명칭만 걸려 있게 되었는데, 대한낙하산회 사정과 대한항공협회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던 특전사의 이천술 준위는 1980년 12월10일 특전사 고공팀 출신들을 주축으로 고공강하회를 조직하여 결성하였고, 1983년 고공강하회 모임이 실제 활동하지 못하는, 대한낙하산회를 대신할 수 있는 단체라며 대한항공협회를 설득시켜 승인을 받아내어, 1983년 2월25일 대한낙하산협회 (Korea Parachute Association)라는 이름으로 재개하였다.
2004년 11월 고한수 작성
2005년 1월 보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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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카이다이빙 역사 (2)
대한낙하산협회 (Korea Parachute Association)
대한낙하산협회가 출범하였지만, 이 회의 주역인 이천술은 특전사 준위로 현역군인 신분이라 대외적으로 공식 활동을 할 수 없었고, 누군가 단체를 이끌어 줄 인사가 필요하였다. 이에 1984년 대한항공협회의 윤일균 부회장은 김경오 부회장 추천으로 당시 한미야전사 부사령관으로 전역을 앞둔 특전사 창단 멤버였던 류준형 육군 소장을 대한낙하산협회 회장으로 추천하고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류준형 장군은 대한낙하산협회의 회장으로, 남명희와 이천술이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류준형 회장은 1984년 10월 체코 Pargue에서 개최한 FAI 총회에 참가하고, 1985년 3월에는 FAI의 IPC에 한국대표로 등록하며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스카이다이빙 경험이 없었으므로 이 단체가 일종의 특전동지회와 같은 역할을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협회 활동을 어떻게 전개시켜야할 지 몰랐고, 협회의 임원이나 회원 모두 강하 활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회원이 특전사 고공팀의 현역군인이나 제대한 사람들로만 구성되었으므로, 1년에 한 번 특전사령관배 고공강하 대회에 제대한 사람들을 대한낙하산협회의 선수로 참가시키고, 대회장 옆에서 친목회를 갖는, 특전사 고공팀 출신의 친목단체 역할만이 연간 사업 계획 및 실적이었다.
특전사령관배 고공강하에 참가할 때는 특전사의 낙하산 장비를 빌려 사용하다가, 1985년 말에는 회원들이 거둔 회비로 협회 공공장비 용도로 독일제 Tornado 낙하산 6세트를 수입하였다.
1985년 10월말에 고한수는 이천술 부회장을 찾아가 대한낙하산협회에 입회하고, 한국 스카이다이빙의 활성화를 위하여 흩어진 대한낙하산회원들의 규합과 민간회원 모집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12월 고한수는 대한낙하산회 회원이었던 김영재, 이정묵, 채희웅에게 연락하여 함께 잠실 교통회관에서 가진 정기총회에 참석하였고, 총회에서 고한수는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어 협회업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보관해오던 대한낙하산회장 인장을 대한낙하산협회에 전달하였다.
1986년
2월부터 고한수는 류준형 회장과의 여러 차례 면담의 기회를 갖고 대한낙하산회 시절에 민간회원들이 활동하였던 내용을 전달하면서, 류 회장에게 민간인들도 스카이다이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변화시키고자 하였으며, 협회가 활성화되려면 민간 회원들을 많이 양성하고 군 항공기 등을 지원 받아 정기강하를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한편, 2월 협회 임원회의에서 고한수는 한국스카이다이빙이 발전하려면 특전사 고공출신들의 친목회 수준을 벗어나, 대학생 위주로 민간회원을 모집하고 회원 수를 늘려 정기강하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협회 임원회의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스카이다이빙교육 모집공고를 하고, 자원하는 대학생들에게 하계방학 중에 특전사에 위탁교육을 시키자고 결의하였다.
방안은 협회가 대학생들을 모아 특전사에 위탁교육을 의뢰하면, 특전사는 고공강하 교육을 시켜 민간 스카이다이버를 공동으로 육성하자는 내용으로 협조 요청 문서와 계획서를 특전사령관에게 보내어 승인을 받았다. 그 후, 교육생 모집을 한다는 포스터를 만들어 각 대학교에 붙이고, 이천술 부회장이 교육모집 내용을 일간신문 기사로 만들어 홍보하여 23명의 대학생들을 모집하였으며, 7월8일 특전 교육단에 위탁교육을 시켰다.
교육생들은 대방동의 공군 항공의료원에 가서 항공생리학 신체검사를 거친 후, 거여동의 특전교육단에 입교하여 내무반에서 합숙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주말에만 외출이 가능했으며 교육비용은 본인의 식비만 납부하였고, 나머지는 특전사에서 모두 제공하였는데, 낙하산은 Para-Commander형 원형낙하산 MC-3에 T-10R을 사용하여 교육을 받았다.
△ 대학고공 1기 수료자 (19명) :
고세호, 김승철, 김승현, 김진우, 김홍철, 박동복, 송인수, 신경섭, 신인철, 양해동, 유광개, 유영한, 이관희, 이병철, 이용한, 이효건, 조응수, 최순상, 허남인
4월 미국 Elsinore DZ를 운영하면서 흥행 사업자이기도 한 Tony Brogdon이 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 스카이다이빙 시범을 하겠다는 제안을 서울 올림픽조직위원회에 하였고, 조직위원회에서는 획기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적극 수용하기로 하였다.
류준형 회장은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을 찾아가서 세계적인 행사인 88 서울올림픽의 스카이다이빙 시범을 일개 흥행사에 맡기는 것은 실수할 가능성도 있고, 국제낙하산기구에게 이해와 협력을 구해야 가능한 일이므로 대한낙하산협회를 창구로 하여 진행해야 한다고 설득하였고,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88 서울올림픽의 스카이다이빙 시범의 추진은 대한낙하산협회를 창구로 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다.
8월에 류준형 회장과 고한수는 88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스카이다이빙 시범을 협회가 주관한다는 계획의 실천으로 터키 앙카라에서 개최되는 제18차 세계낙하산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라, 외무부 승인을 받는 데만 3개월이나 걸려 가까스로 출국할 수 있었다.
고한수는 이 대회에서 훈련심판으로 활동하였으며, 류준형 회장은 대회참가 국가대표회의 석상에서 '88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스카이다이빙 시범을 보인다면 전 세계인들에게 이 운동을 소개하는 기회가 되고,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시키는 지름길이므로, 대한낙하산협회가 88 올림픽조직위원회를 설득하여 개회식에 스카이다이빙 시범이 채택되도록 하겠으니, 각 국가는 이에 대한 찬성과 함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해달라'고 연설하여 참가국가대표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았다. 그 후, 류준형 회장은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과 IPC 회장인 독일의 Uwe Beckmann과 연락해가며 88 서울 올림픽의 시범강하를 구체화 시켰다.
9월, 김덕환 소령이 이끄는 특전사 고공전담반은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진행된 86 서울아시안게임의 개회식에 스카이다이빙 시범을 하였는데, 비와 강풍을 동반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성공하였다.
10월, 제10회 특전사령관배 고공강하경연대회에 대한낙하산협회의 3개 팀 15명이 참가하였는데, 특전사 고공 팀 출신들로 구성된 A팀과 대학 1기생 중심으로 B, C팀으로 구성하여 참가하였다. A팀은 Tornado 낙하산을 사용하였고, B, C팀은 특전사에 요청하여 낙하산 등 일체의 장비를 빌려 강하할 수 있었다.
12월 정기총회에서 강창록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구성된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은데, 이사들은 류준형 회장 주변 인물들로 기부금을 헌납하던 분들이었다.
* 회장 ; 류준형
* 부회장 ; 강창록, 남명희, 이천술
* 이사 ; 김복만, 김서한, 김일제, 김형래, 김흥식, 이동철, 이병연, 이연재, 임용범, 한국영, 한태준
* 안전국장 : 최장훈
* 훈련국장 : 조영성
* 섭외국장 : 고한수
* 홍보국장 : 신인철
1987년
제4회 월드컵낙하산선수권대회를 개최 예정이던 호주가 준비부족으로 대회 개최가 어렵다는 정보를 입수한 류준형 회장은, 1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되는 IPC 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낙하산협회가 88 올림픽의 시범강하 예행연습도 할 겸,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하여 각 국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월드컵대회나 세계대회는 개최 4년 전에 대회 유치 신청하여 2년 전에 IPC의 승인을 받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 및 절차였는데, 당해 연도에 개최국을 변경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써, IPC 회원국들의 88 서울올림픽의 시범강하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기 때문이다.
2월 대한낙하산협회 사무실을 올림픽조직위원회 개폐회식과로 이전하였고, 류준형 회장은 사무국 직원으로 군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복만, 장규식 등 3명과 대학 1기생 출신인 류영한을 채용하였는데, 류영한 외의 나머지 인원은 스카이다이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한편, 협회는 스카이다이빙을 하겠다고 개별적으로 문의해오는 민간인들을 모아 조영성 훈련국장을 교관으로 하여 자체 지상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모형탑(Mock Tower) 훈련은 제외하기 시작하였다.
협회는 제4차 월드컵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한 한국선수들의 훈련강하용으로 육군항공대의 항공기와 특전사의 낙하산 장비를 지원 요청하여, 회원들은 6월13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미사리에서 UH-1H로 강하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 민간회원과 수료 후 1년 이상 강하를 못한 대학1기생들과 협회에서 교육받은 신입일반회원들이 강하할 수 있었고, 8월22일 강하부터는 교육을 마친 대학2기생들도 강하를 하였다.
낙하산은 원형낙하산인 MC-3와 T-10R을 사용하다가, 8월22일 강하에서 고한수, 박동복이 민간회원 중에는 처음으로 사각낙하산으로 강하하였고, 9월12일 강하부터는 일부 다른 회원들도 사각낙하산인 MT-1S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장규식은 예비역 소령으로 스카이다이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무국장의 직책 때문에 정기강하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주말에 쉬지 못하고 강하장에 나오는 것이 싫어, 군 사정으로 지원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여러차례 계속하여 강하를 취소하였다.
계속적인 강하 취소에 고한수는 참다못해 류준형 회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강하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류 회장은 얼마 후에 장규식을 해고하였다.
민간 회원들의 강하를 돕기 위하여 박종용, 윤시율, 이재우, 한영식 등 특전 교육단의 군 회원들이 교관을 담당하여 진행된 강하에 참가한 민간회원은 아래와 같다.
* 민간회원 : 강춘구, 고한수, 남명희, 이정묵, 이종열, 채희웅, 최병연
* 대학 1기 : 문태경, 박동복, 이관희, 허남인
* 대학 2기 : 김원석, 김형진, 민병삼, 박창주, 방극열, 윤태진, 이두한, 이윤희, 조영준, 허은행, 황현우
* 신입 일반 : 김대유, 이재희, 조영현
협회는 한국항공대학교에도 항공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고, 한국항공대학교는 매주 일요일에 항공기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규식 국장은 항공대학이 지원해주기로 한 내용을 회원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한국항공대학교에는 강하 준비가 안되어 지원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는데, 이 사실은 1988년 한국항공대학교에 항공기 지원을 요청하다가 학교측에서 얘기해주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전년의 대학고공1기생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학고공 2기생을 25명을 모집하여 7월8일 특전교육단에 위탁교육을 시켰다.
△ 대학고공2기 수료자 (23명) ;
김승섭, 김원석, 김은석, 김형진, 민병삼, 박창주, 방극열, 오일규, 유순하, 윤주섭, 윤주호, 윤태진, 이대우, 이두한, 이용진, 이윤희, 전계호, 정우준, 조영준, 한규성, 허은행(여), 황 주, 황현우
8월11일 암사동 한강 고수부지에서 제1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정밀 종목만 실시하였으며 육군 UH-1H 2대를 지원 받았다. 이 대회에 민간회원들은 실력이 안되어 출전하지 못하고 고한수는 심판위원장으로 참가하였다.
9월24일부터 28일까지 서울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는데, 31개국에서 선수와 임원 총101명과 서울올림픽 시범요원 18명이 참가하였다.
국제대회의 관례에 따라, 참가하는 각 국 대표들은 참가비를 납부하고 참가하였지만,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는 소련, 중공 및 북한도 대회에 참가시키고자, 3개국 대표들에게 참가비를 면제하여주고 왕복 항공료까지 부담하겠다고 하였으나 중공만 참가하였다.
협회는 각 국 대표들의 인원관리와 이동을 쉽게 하고자 한 호텔에 묵도록 계획하였는데, 적은 예산임에도 팔레스호텔이 기꺼이 응해주어, 대회에 참가한 외국 선수와 임원들은 모두 팔레스호텔에서 묵도록 하였다.
류준형 회장은 대회 운영위원장으로 미국의 B.J. Worth(1999~2002 IPC 회장)를 선임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이천술 부회장은 한국에도 잘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을 데려와 운영위원장을 맡긴 것은 국내 스카이다이버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빈정대기 시작하였다.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대회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회원들은 의무감을 가지고 자원봉사를 하고자 대회 운영본부에 모였는데, 이미 운영본부요원들이 스카이다이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니, 회원들이 보기에는 한심하기만 하였다.
운영본부요원의 진행 내용을 지켜보다가 잘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잡겠다고 일부 회원들이 간섭하자, 이를 옆에서 본 류준형 회장은 '이미 운영본부 요원들로 대회 진행준비가 다 되었으니, 심판위원장 보조로 내정된 고한수만 대회진행에 참가하고, 남명희, 이천술 부회장을 포함한 모든 회원들의 자원봉사는 사절한다'고 하였다.
류준형 회장 입장에서는 수개월의 대회 계획기간동안 전혀 관여하지 않던 회원들이, 필요이상으로 참견하기 시작하면, 대회 진행에 혼란을 줄 것으로 걱정한 조치였겠지만, 장군 출신 특유의 고압적으로 명령하자, 회원들은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며 그 자리를 떠났다.
9월24일 육군 항공대의 UH-1H 항공기를 지원받아 대회 연습강하가 시작되었지만, 대회는 물론, 스카이다이빙을 모르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경기가 잘 진행될 리 없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김영청 특전 교육단장은 25일 오후 류준형 회장과 같이한 자리에서 자신이 특전사 실무진들로 하여금, 이 대회의 진행을 돕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류 회장도 2일간 대회연습강하를 진행하면서 현실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기 시작하던 바라 승낙하였다.
9월26일 경찰악대, 고적대와 행사 도우미들이 동원된 가운데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 개회식을 가진 후 정식 경기가 실시되었으며, 일부 TV에서는 경기를 생중계 방송까지 하였다. 대회는 이천술을 포함한 특전사 실무진들에 의해 진행되기 시작하여 무사히 마칠 수 있었는데, 이천술은 협회 부회장으로서가 아닌, 특전사 실무요원으로서 참여하고 진행하게된 것이다.
대회가 시작되자, 국내에서 처음 갖는 대회라서 각종 매스컴의 기자들이 앞다투어 취재하였는데, 어떤 신문 기자는 운영본부에 취재 조건으로 금품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다음날 신문 기사에 대회운영을 엉망으로 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시키고 있다고 악평하기도 하였다.
이 대회는 각 국 임원들과 선수들에게는 정밀강하 경기에서의 입상이 관심사였지만, 서울 올림픽조직위원회 개.폐회식국, 서울 올림픽 시범을 주도할 미국 Sky Dance 팀과 대한낙하산협회 운영진은 다음 해에 실시될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시범강하를 위한 가능성 검토의 시간이었다.
대형만들기로 오륜을 만들고 자유강하 하는 것을 카메라맨인 Norman Kent와 Tom Sanders 등이 촬영하고, 그 영상을 경기장의 전광판과 TV에 생중계할 수 있도록 영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대지 전송을 하는 것으로 이는 세계적으로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회의 진행한 인원은 아래와 같다.
* CIP 회장 : Uwe Beckmann(서독)
* 대회 준비위원장 : 류준형
* 행정본부장 : 김복만
* 운영본부장 : BJ Worth (미국)
* Chief Judge : Dieter Struber(동독)
* Assistant Chief Judge : Roger M. Flinn(영국), 고한수
* 초청 심판 : Hua Shaolin(중공), R. Cabrera(Peru), B. Wicks(미국),
* 자원심판 : Jean Polis(벨기에), Teranon Rocksbutr(태국), Mohamed Rahman (UAE), Zlatko Belic(유고), Adolf Bauer(오스트리아)
* 훈련심판 : 박동복 외 2명
* Manifester : Larry Bagley (미국), Cindy Jones(미국)
* 기술심판 : G. Weckbecker(서독)
* 88 CRW Trainer : Patrice Girardin(프랑스)
* 88 RW member : Diana Kent, Craig Fronk, Kent Lane, Jerry Bird, Jake Lombard, Gary Sanders, BT Taylor, JD Dias, Mike Michigan Sanderg, John Robbins, Dave Wilds, Neil Houston, Mike Truffer, Guy Manos, Tom Piras, Rusty Vest, Dan O'Brien, Roger Ponce de Leon, Scott Meek, Norman Kentⓒ, Tom Sandersⓒ, Ken Crabtreeⓒ (모두 미국인이고, Neil Houston만 Canada 국적, ⓒ는 공중 촬영사)
이 대회의 입상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 개인 정밀 남자 ;
1등 Gorgec (터키),
2등 Bernachot (프랑스),
3등 Sameain (태국)
(한국) 7등 심양기, 21등 한영식, 27등 황성덕
* 개인 정밀 여자 ;
1등 Vares (미국),
2등 Carjuzaa (프랑스),
3등 Nieminen (핀란드)
(한국) 18등 황선옥, 22등 강명숙
* 단체 정밀 ;
1등 프랑스,
2등 미국,
3등 스웨덴
(한국) 18등 A팀, 22등 B팀, 23등 C팀
10월, 제4회 월드컵대회를 마친 류준형 회장이 방위산업협회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협회 사무실은 마포 성지빌딩 방위산업협회 내의 한 쪽 방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류준형 회장의 처사에 대하여 감정을 가지고 있던 회원들을 이천술 부회장이 부추기면서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남명희 부회장과 채희웅이 류 회장을 찾아가 류 회장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류 회장은 회원들이 원한다면 사임할 의사가 있다고 답변하였다.
몇 일 후, 이천술 부회장은 강동구 둔촌동 별나라 회관으로 회원들을 소집하여 모임을 갖고 류준형 회장을 성토하였는데, 류준형 회장이 제4회 월드컵대회에 회원들이 자원봉사를 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대회에 따르는 후원회사나 협찬회사의 후원금 내용을 회원들이 알 수 없도록 하여 개인적으로 후원금을 횡령하려는 의도였으며, 횡령한 금액이 많았을 것이라고 규탄하였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전 사무국장인 장규식도 몇 차례 만난 자리에서 내용을 인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류준형 회장과 이천술 부회장이 한판 승부를 준비하는 가운데, 민간회원들과 대학고공교육 출신회원들은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 가에 고민하게 되었는데, 결국 스카이다이빙 활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류 회장을 지지해야한다는 강창록 부회장의 설득으로, 민간회원들과 대학고공교육출신회원들은 류 회장을 지지하기로 합의하고, 고한수를 중심으로 정관개정과 일반규정의 작성 등의 총회 준비를 시작하였다.
총회 준비를 하면서, 일부 고참 중에는 회비는 전혀 내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회원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은 회원 자격 정지와 함께 총회에서 발언권과 표결권을 주지 않기로 하였다.
11월30일 마포의 방위산업협회 회의실에서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천술은 참석하지 않았고, 참석한 최영곤이 류준형 회장에게 제4회 월드컵 대회운영에 관하여 항의 발언을 하려하자, 총회 의장인 류 회장은 최영곤이 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발언권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영곤은 특전사 고참 회원인 자신에게 너무 한다며 울분을 터트렸고 총회에 참석한 특전사 소속 회원들은 모두 같이 분개하면서 중도에 집단으로 총회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류준형 회장은 총회에서 제4회 월드컵대회 후원금 의혹에 관하여, "제4회 월드컵대회를 치르면서 후원금을 많이 벌어 협회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였지만, 대회를 마치니 협찬사의 광고 대행사는 '주최측은 협찬사가 제공해준 모자와 운동복을 선수들이 대회 기간 중에 항상 착용하도록 한다'라는 계약서 내용과는 달리, 대부분의 선수들이 모자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으므로 계약 위반이 되어 잔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여 잔금을 받지 못해 오히려 개인적으로 많은 적자를 보았다"고 답변했다.
아래는 류준형 회장이 발표한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 회계 결산 내용이다.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 회계 결산 (단위 : 원)
* 수입 ; 71,300,000원
- 광고판매금 ; 27,900,000
- 선수참가비 ; 25,000,000
- IOC 지원금 ; 640,000
- 서울올림픽위원회 지원금 ; 960,000
- 대한항공협회장 지원금 ; 7,000,000
- 입장료 수입 ; 1,640,000
- 기타 ; 2,400,000)
* 지출 ; 78,522,612원
- 호텔, 교통, 식대 및 전화 ; 39,452,553
- 기술 준비비 ; 1,792,960
- 낙하지역 준비비 ; 728,100
- 개회식 및 시상품, 기념품 ; 4,917,652
- 행정비 ; 14,498,347 (BJ Worth 여비 3,248,000 포함)
- 급료 ; 17,133,000 (월드컵대회 행사요원, BJ Worth와 Larry Bagley, 자원봉사요원)
정관에 의하면 모든 협회 운영을 이사회가 결정하기로 되어 있으나, 스카이다이빙 경험이 없는 기부금 납부자가 이사들의 대부분이라, 실제 이사회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회장 개인의 의사에 따라 협회가 운영되므로, 이사회 외에 회원그룹에서 팀장을 선출하고 그들로 임원회의를 구성하여 협회를 운영해야한다는 고한수의 주장에 따라, 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하고, 정관에 포함되지 않은 세부 규정을 담은 일반규정이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류준형 회장과 강창록 부회장이 유임되었고, 다음과 같은 팀장이 선출되어 임원회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
* 회장 : 류준형
* 부회장 : 강창록
* 일반인 팀장 : 조영성
* 일반군인팀장 : 미정
* 경희대학팀장 : 황현우
* 서강대학팀장 : 이관희
* 일반대학팀장 : 유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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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한낙하산협회 회계 결산(단위 : 원) :
* 수입 ; 5,390,000원
- 회원회비 ; 1,430,000,
- 이사회 찬조금 ; 3,750,000
- 강하비 ; 210,000
* 지출 ; 5,125,742원
- 행정비 : 813,992
- 접대비 : 2,206,200
- 격려금 : 1,319,900
- 제1회 한국 스카이다이빙대회 비용 : 670,450
- 강하비 : 115,200
* 이월 : 264,258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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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0일 항공의 날 기념식에서 고한수는 제1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와 제4회 월드컵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에 심판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공로표창을 수상하였다.
11월 특전사 고공전담반의 김덕환, 윤시율, 정재환, 한영식은 4회의 연습강하를 하고, '생방송 전국은 지금'이라는 현수막 강하를 하여, 매일 아침 KBS 2TV에서 생방송 되던 '전국은 지금'이라는 프로그램의 시작 영상을 제작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영상은 수년간 방영되면서, 국민들에게 정식으로 스카이다이빙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 김덕환 : 빨강, * 윤시율 : 노랑, * 정재환 : 파랑, * 한영식 : 촬영)
12월21일 특전사 고공전담반장인 김덕환 소령의 1천 회 강하 기록이 수립되었다.
1988년
1월15일 대한낙하산협회를 이탈한 이천술과 군 회원들은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 구성위원회 발기식을 가졌다.
1월23일부터 26일까지 스웨덴, Nikoping에서 개최된 IPC총회에 류준형 회장이 참가하고 각 국 대표들과 서울올림픽 시범행사에 관한 구체적인 협의를 하였는데, 협의하여 결정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각 국에서 시범강하를 위하여 장기간 합숙훈련에 참가하는데는 경비부담이 너무 많고, 참여한다해도 각 국에서 선발된 시범 강하자들의 개인별 실력이나 체중 차이가 많아 효과를 볼 수 없으므로,
2) 미국의 B.J. Worth를 팀장으로 하고 미국 Sky dance팀과 전 세계에서 실력 있고 참가를 희망하는 스카이다이버를 모아 34명의 대형만들기 팀을 집중 훈련을 시켜 진행하도록 한다.
3) 22개 국가에서는 국가 대표 1명씩 지원하여 한국 스카이다이버 22명과 함께 Flag jump를 한다.
4)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이에 대한 경비 보상을 위하여, 시범 팀에게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 입장권 각 200매씩과 서울 내 호텔 200실 우선 예약권을 무상 제공하면, 시범 팀은 이를 미국 내 관광회사에 매각하여 훈련경비와 항공료 등의 경비를 충당한다.
1월말 고한수는 류준형 회장에게 협회원들이 협회의 소식과 운영 방침을 정식 경로로 전달받지 못하고, 소문에 의존하고 있어 자칫 내용이 왜곡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협회지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해야한다고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따라서 3월부터 고한수가 편집한 대한낙하산협회지 Skydiver News를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3월, 국제공수재향군인협회에서는 대한낙하산협회가 초청해 주면, 150명 정도의 참전용사들이 11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공수교육을 받으면서 참전 추억을 되새기는 행사를 갖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행사 진행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군과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중도 포기하였다. 또한, 88 서울 장애자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장애자들에게 낙하산을 교육시켜 장애자 올림픽의 개회식에 시범강하를 실시하자는 계획도 추진했지만 항공기 지원도 어렵고 올림픽과 유사한 내용이라 채택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노력은, 제4회 월드컵국제낙하산대회 이후에 항공기 지원이 없어 활동이 중단된 상황에서 이런 국제행사를 추진하는 명분을 만들어 항공기를 지원 받고자 조금이라도 가능성만 있다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3월, 군 항공기의 지원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국항공대학교에도 항공기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한국항공대학교는 협회가 화전비행장의 공역허가를 선결하는 조건으로 4월3일부터 사용 가능하다는 박용환 교수의 답변을 받아 공역허가를 추진하였지만, 관할 부대에서 승인하지 않아 공역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3월 고한수를 중심으로 민간회원들에 의하여 운영되던 대한낙하산협회는 4월24일부터 정기강하를 실시한다는 자체목표를 가지고 신입일반회원 12명을 모집하여 3월13일부터 자체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육에 참가한 회원은 아래와 같다.
* 김승규, 김형구, 노경준, 박수일, 박진훈, 조용진, 최재석, 홍경기 등
또한 대한낙하산협회는 국방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협조공문을 발송하였다.
1) 협회원들이 강하할 수 있도록 매주 말에 군 항공기를 지원해주고,
2) 민간회원들도 88올림픽 시범강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며,
3) 1988년에도 대학고공 3기 교육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
공문을 발송하고 3월25일 국방부 인사국에 확인한 내용은,
1) 항공기 지원문제는 지난해 항공감과 협의 과정에서 협회는 1988년부터는 민간항공기를 사용하겠다고 하였으므로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고,
2) 국내의 올림픽 시범 강하는 특전사 고공전담반이 주축이 되어 연습강하를 실시하는데, 협회원들이 참가하려면 4월부터 올림픽 때까지 같이 연습강하를 해야 하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3) 대학고공 3기 교육도 특전사 사정상 진행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한편 정기총회에서 일반인 팀장으로 선출된 조영성은 협회를 이탈한 군 회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활동하지 못했으며, 다른 대학팀장들도 능동적으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고한수는 3월부터 실시한 신입 회원들의 교육에 낙하산 포장 연습을 시키고자, 이천술을 찾아가서 교육용 낙하산을 빌려달라고 사정하였지만, 이천술은 자신을 다시 협회 임원으로 선임되도록 추천해달라고 요청만 하고 낙하산은 빌려주지 않았다.
3월말 고한수는 협회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려면 이탈한 회원들을 다시 끌어들여 힘을 합하여야만 하며, 그들이 활동 할 수 있도록 남명희와 이천술 등에게 협회 직책을 주자고 류준형 회장에게 건의하였지만, 류 회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3월23일부터 4월5일까지 특전사는 태국 Hatyai에서 개최되는 태국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에 육군대표팀을 참가시켰는데, 아래와 같은 인원들이 참가하였다.
* 대표 ; 김영청
* 코치 ; 김덕환
* 선수 ; 성창우, 심양기, 윤시율, 이재우, 한동현
4월초 류준형 회장은 협회 조직을 다음과 같은 인원으로 재구성하였고, 사무국에는 황현우 과장이 상근하게 되었다. 류 회장은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본인들이 자원봉사할 것이라는 확인 형식을 거쳤지만, 황현우에게는 급여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 기획국장 : 고한수
* 기획국 : 신인철, 최순상, 조영준
* 사무국장 : 김대유
* 사무국 : 황현우
협회 사무실이 방위산업진흥회 내에 있으므로, 일과 중에 시간을 내지 못하는 회원들은 사무실을 이용할 수가 없어서, 민간회원들은 고한수를 중심으로 매주 1회씩 저녁에 성지빌딩 지하다방에서 회합을 갖고 향후 활동 계획을 논의하였으며, 회합에서 나온 건의 사항은 고한수가 나중에 류 회장에게 건의 및 보고하는 형식으로 하였다.
대학고공교육을 수료한 대학생들은 교육 수료 후에도 군이나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으며 강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래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민병삼과 목원대학교의 류순하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학생들을 모아 대학팀을 만들고 자체 훈련을 하는 등, 열심히 준비 활동을 하였지만 대학생 고공강하교육도 실시되지 않고, 1년이 지나도 강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모두 포기하여 흩어지거나, 활동을 중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고한수는 대학고공교육 수료생들이 가지고 있는 '스카이다이빙은 군이나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하는 운동'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열의 있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스카이다이빙을 하려면 개인장비가 있어야 강하할 수 있으니 각자 개인장비를 확보해야한다고 설득과 함께 집중적으로 정신교육을 시켰다.
공공장비인 Tornado 6세트는 군 회원들이 보관하고 있어 가용할 수 없고, 개인 장비를 소지한 회원은 고한수와 채희웅, 2명뿐이었다. 낙하산도 없고 항공기 지원도 기약 없는, 그야말로 맨손뿐인 협회의 수많은 당면 과제를, 고한수는 열정을 가지고 활동에 참여하는 회원들에게 아래와 같이 업무를 분담하여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 고한수 : 업무 총괄
* 김대유 : 공역허가 담당
* 신인철 : 항공대학 담당
* 최순상, 황현우, 조영준 : 공문서 작성 및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대회 스폰서 담당
고한수, 최순상, 조영준, 황현우는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를 스폰서의 자금지원으로 진행하려고 3월초부터 5개 회사와 1개 신문사의 관계자들을 찾아가서 대회의 후원을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다.
한편 김대유 사무국장과 채희웅은 육군항공대와 국방부를 방문하여 정기강하와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를 위하여 항공기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국방부에서는 정기강하에는 지원이 불가하지만,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는 지원해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따라서 협회는 4월16일 특전사령관에게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의 개최 및 대회지원요청'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5월4일과 5일 대한낙하산협회는 육군에서 UH-1H 2대를 지원 받아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앞 한강고수부지에서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정밀)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의 입상한 선수는 6월 일본 삿포로에서 개최되는 주노컵(추후 명칭이 Hokkaido Blue Cup으로 변경)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시킨다는 부상을 내걸고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참가한 선수는 아래와 같다.
* 군인 (15명) ; 강명숙, 고석성, 구정철, 박주봉, 성창우, 심양기, 안정명, 이재우, 이종철, 전기호, 전명순, 최선화, 한동현, 한영식, 황성덕
* 민간인 (7명) : 고한수, 김영순, 남명희, 박동복, 신인철, 조영성, 황현우
5월4일에는 UH-1H 1대로 연습강하를 1회씩 하였고, 5일의 대회는 2대의 UH-1H로 오전에 4회전 강하를 하였지만 오후에는 강풍이 불어 더 이상 경기를 진행시킬 수 없어 대회는 4회전으로 마감하였다.
류준형 회장은 김영청 특전 교육단장에게 대회 운영을 맡겼고, 대회 준비는 협회원들이, 경기 진행은 특전사 관계자들이 분담하여 진행되었는데, 대회 분위기는 양측이 서로 견제하는 냉기가 흘렀다.
이 대회를 진행한 관계자 명단과 대회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운영본부장 : 김영청
* 운영부장 : 김덕환
* 항공기 통제 : 이수동
* 심판부장 : 이천술
* 준비위원장 : 김대유
* 준비위원 : 고한수, 김승규, 노경준, 신인철, 유순하, 이정묵, 조영현, 조용진, 채희웅, 최순상, 최재석, 홍경기, 황현우
◎ 입상 :
- 남자 개인정밀 : 1위 이종철, 2위 성창우, 3위 심양기
- 여자 개인정밀 : 1위 전명순, 2위 강명숙, 3위 최선화
한편, 5월이 되어, 항공대학교에서 스카이다이빙을 지원할 때 사용하려던 Pilatus 8인승 항공기는 25℃ 이상의 기온에서는 운항하는데 문제가 있는 비행기종으로 4~5월과 9월 이후만 비행이 가능하므로 공역허가를 받는다해도 9월 이후에나 지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6월1일부터 7일까지, 류준형 회장을 대표로 하고 김덕환 코치와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선수권대회에서 입상한 성창우, 이종철, 전명순, 강명숙 선수가 일본 삿포로에서 개최된 Hokkaido Blue Cup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다.
류준형 회장은 이 대회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낙하산 대회와 지역국가 연맹이 미주나 유럽 국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아시아 국가는 이런 대회에 참가하기가 어려우니 아시아에서도 아시아낙하산연맹 설립하고 아시아낙하산선수권대회를 만들자'고 제의하여 아시아 국가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아내었다.
한편 이 대회에는 미국, 호주, 태국, 중국, 홍콩, 터키, 일본, 한국 총 8개국 32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는데, 개인 정밀에서 성창우 7위, 이종철 15위, 전명순 11위, 강명숙은 12위를 기록하였고 단체 정밀에서는 6위를 하였다. 이 대회는 일본낙하산협회가 스폰서 지원을 받아 참가국 대표단의 항공료 등 경비 일체를 부담하였지만, 더 이상 대회가 개최되지 못했다.
고한수는 1987년 말부터 스카이다이빙 운영체계가 잘되어 있는 터키항공협회에 회원들을 보내어 스카이다이빙 연수를 시키고자 터키항공협회에 협조 요청을 해왔는데, 터키항공협회로부터 이를 받아들인다는 3월28일자로 발행된 정식 초청장이 5월에 협회로 접수되었다.
이 연수에는 박동복, 채희웅이 자원하여 6월13일 출국하였다. 조용진은 유럽출장 차 따로 출발하여 현지에서 합류하였다. 이들은 9월 중순까지 3개월 간 터키 에스키쉐힐 지방의 이뇌뉘 항공학교에서 스타일과 정밀강하 교육을 받았는데, 박동복은 터키 국가대표팀과 함께 강하하며 교육을 받았고, 조용진과 채희웅은 기초과정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때 한국 교육생들은 터키까지의 왕복항공료만 부담하고 숙식을 포함한 나머지 일체를 터키항공협회에서 제공하였다. 조용진은 1979년 대한낙하산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대한낙하산회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라 스카이다이빙을 하지 못하다가 이 훈련에 참가하여 첫 강하를 할 수 있었다.
군 항공기의 지원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협회는, 6월에 한국항공의 항공기 임대 가능성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하여 보안 관계 상, 7월말 이후부터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정기노선 외의 비행은 일체 금지한다고 하여, 더 이상의 추진은 포기하였고 교육생도 강하시킬 수 없었다.
9월16일 이천술을 중심으로 대한낙하산협회를 탈퇴한 특전사 출신 회원들은 김민수 특전사 예비역 중령을 회장으로 하고, 사회체육진흥회에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등록을 하였다. 연맹은 거여동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다음과 같이 조직을 구성하였다.
* 부회장 ; 남명희, 이천술
* 감사 ; 김영순, 최영곤
* 사무국장 ; 조영성
9월20일 대한낙하산협회는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스카이다이빙 시범을 주관하였지만, 스카이다이빙 시범은 미국 B.J. Worth가 팀장인 대형만들기 팀 34명이 올림픽 오륜마크를, 22개국 대표 22명과 특전사 요원 22명이 Flag jump를 실시하였으며, 이 시범강하는 전세계 방송에 생중계 되었다.
올림픽 시범강하에 참가한 특전사 요원들은 한국의 스카이다이빙 대표단체는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이라는 내용과 연락처가 새긴 기념품 등을 외국인 시범팀들에게 선물하였으며, IPC회장에게도 같은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는 등의 교란 및 홍보작전을 폈다.
10월 이천술과 특전사 부사관들은 대한낙하산협회가 제12회 특전사배 고공강하경연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특전사 내에서 많은 방해공작을 시도하였으므로, 김대유 사무국장이 특전사 김덕환 고공전담반장과 특전사 장교들에게 협조를 구하여, 낙하산 장비를 지원 받아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제12회 특전사배 대회는 19일부터 연습강하를 하였으며, 대회는 24일과 25일에 실시하였는데 대한낙하산협회에서는 2개팀 10명이 참가했으며,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에서는 1개 팀 5명이 참가하였다. 이 때부터 민간회원들은 원형낙하산을 사용하지 않고 사각낙하산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대한낙하산협회 A팀 : 채희웅, 박동복, 조용진, 조영준, 김대유
* 대한낙하산협회 B팀 : 신인철, 최순상, 유광개, 유순하, 허은행
*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 : 조영성, 남명희, 김영순 등
10월28일 제8회 항공의 날 기념식에서 김대유, 채희웅이 공로 표창을 받았다.
1989년
1월9일 88년 정기총회가 류준형 회장의 주재로 마포 성지 빌딩에 있는 방위산업진흥회 회의실에서 실시되었다.
■1988년 회계결산(단위 : 원) :
* 수입 : 2,218,258원
- 회비 : 54,000
- 이사찬조금 : 900,000
- 항공협회 지원금 1,000,000
* 지출 : 2,046,000원
- 제2회 한국스카이다이빙 선수권대회 : 852,000
- 회보발간 : 380,000
- 회보발송 우편료 : 60,000
- Hokkaido Blue cups
- 대회 격려금 : 225,000
- 감사패 제작 : 150,000
- 접대비 : 379,000
* 이월 : 172,258원
2월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IPC 총회에 김동호 예비역 공군 소장을 한국대표로 하고, 김대유, 채희웅이 참가하여 아시아낙하산연맹 설립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김동호가 IPC 총회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류준형 회장이 방위산업진흥회 업무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한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가 안되어 입국하기 어렵던 시절이라 정치인 김복동의 중국 방문에 앞서, 보좌관인 김동호가 사전 현지 답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2월초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 김민수 대표가 특전사령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대한낙하산협회는 유령집단이며, 류준형 회장은 국제적인 큰 행사를 벌여 개인 이익만 취하는 흥행꾼(promoter)이다.'라고 비방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서한을 IPC에도 발송하였다는 첩보를 받은 류준형 회장은 분개하였다.
류준형 회장은 이에 대한 응징으로 2월15일 '유사단체(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의 불법활동에 관한 첩보'라는 공문을 대한항공협회, 교통부 각 부처 및 군에 발송하였는데, 이 문서를 받은 교통부에서는 대한항공협회에 '유사단체 불법활동에 대한 지시'라는 문서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2월26일 대한항공협회는 류준형 회장에게는 통보 없이 이사회를 개최하였는데, 회의안건은 류준형 회장이 발송한 문서로 비롯된 교통부에서 받은 지시문서의 내용이었다.
이사회 참가에 앞서 김경오 부회장은 진상조사 차,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의 이천술과 몇 차례 만남을 가졌으며, 이천술은 김경오 부회장에게 류 회장이 제4회 월드컵대회를 개최하면서 많은 공금을 횡령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군인 회원들을 쫓아냈으며 대한낙하산협회의 회원들은 실제 스카이다이버들이 아닌, 이름만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얘기하였다.
이 얘기를 접수한 김경오 부회장은 대한항공협회 이사회에서 '대한항공협회는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2월28일 대한항공협회가 교통부장관에게 보낸 회신공문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본회 산하 대한낙하산협회가 본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교통부에 공문을 보낸 것은 행정상의 월권 행위이므로 언급할 가치가 없으며,
2)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은 전 회원이 대한낙하산협회에서 탈퇴하여 조직된 실력있고 매우 착실한 단체로써 체육부 산하 사회체육진흥회에 등록된 단체로써, 민간단체 자율화 원칙에 의하여 오히려 정부나 관계기관에서는 이를 장려해야 할 것이고,
3) 항공협회 회칙을 무시한(항공협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공문을 보낸) 류준형 회장은 항공협회 이사회에서 재조정할 것입니다.
대한항공협회에서는 산하단체인 대한낙하산협회가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대회와 88 서울 올림픽의 시범강하와 같은 국제행사를 진행하면서, 대한항공협회보다 올림픽조직위원회와 손잡고 모든 행사를 진행한 류준형 회장에 대하여 독주한다는 생각을 갖고있던 차에 이런 사건이 발생하자, 유사단체 발생에 따른 문제의 심각성보다 항공협회를 통하지 않고 대외기관에 직접 공문을 발송한 것은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분위기로 일관하여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은 어부지리를 얻게 되었다.
사실 대한낙하산협회는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의 시범강하를 추진하면서, 대한항공협회를 통하여 대외 공문을 발송하지 않고 대한낙하산협회가 직접 수신처로 문서 발송을 해왔으며, 수신처와 교섭한 결과 내용을 추후 대한항공협회 이사회에 보고하는 것을 관례로 여겨왔다.
3월2일 대한항공협회 이사회에 참석한 류준형 회장은 김경오 대한항공협회 부회장과 한차례 격렬한 논쟁이 있었으며, 이후 김경오 부회장은 대한낙하산협회를 제거하고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을 산하단체로 영입하려는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3월14일 류준형 회장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명과 2월26일의 대한항공협회 이사회 내용과 2월28일 대한항공협회가 교통부에 보낸 문서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이해를 촉구하는 문서를 대한항공협회 이사들에게 발송하였다.
3월15일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은 "대한낙하산협회가 '유사단체(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의 불법활동에 관한 첩보'라는 제목으로 공문서를 발송하여, 불법단체나 유사단체가 아닌 자신들을 유언비어와 함께 중상모략 한다며 명예훼손으로 법정 소송을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회원일동 명의로 대한항공협회에 발송하였다.
3월30일 대한낙하산협회에서도 회원일동 명의로 대한항공협회에 진정서를 발송하였는데, 이는 대한낙하산협회는 회원도 없는 류준형 회장 혼자만의 유령단체로 비춰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박과 함께, 대한항공협회가 정통성 있는 산하단체인 대한낙하산협회의 내용을 너무 모르고 있으며, 산하단체는 보호하지 않고 다른 부처 소속 유사단체를 두둔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는 내용이었다.
4월6일 서울올림픽을 마친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성공적인 서울올림픽 시범강하의 초석이 된 제4회 월드컵 국제낙하산선수권대회에 봉사자들에게 올림픽 기장을 보내왔다.
△ 올림픽 기장 수여자 32명 명단 :
* 협회 : 류준형(회장), 강창록(부회장), 김서환(이사), 한국영(이사), 김일제(이사), 김복만(이사), 한무룡(이사), 고한수(심판), 박동복(심판), 남명희(보도), 조영성(경비), 김영재(사회), 이정묵(촬영), 김대유(지원), 김형진(지원), 민병삼(지원), 박창주(지원), 신인철(지원), 유순하(지원), 이관희(지원), 조영준(지원), 채희웅(지원), 최순상(지원), 허남인(지원), 허은행(지원), 유영한(사무국), 장규식(사무국),
* 특전사 : 김영청(경기진행), 이수동(항공통제), 김덕환(선수단장), 이천술(경기진행), 최장훈(안전),
4월초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올림픽용 자산을 매각하면서 올림픽 준비를 하면서 잘못 구입한 백색 Cruiselite main canopy 20개를 경매 입찰에 붙였는데, 대한낙하산협회와 이천술이 응찰하였다. 이 경매 입찰에서 대한낙하산협회는 230만원에 canopy 20개를 낙찰 받았으며, 이 canopy들을 8월부터 협회원들에게 원가인 11만5천원 씩에 판매하였다.
그러나 canopy만 가지고는 낙하산이 완성될 수 없으므로, 8월에 고한수, 김대유, 채희웅, 황현우는 1차로 Talon harness와 예비산 4세트를 수입하여 조립하였고, 그 후 조용진을 통하여 2차례에 걸쳐 Parachute De France의 Jaguar harness와 예비산 7세트를 수입하여 조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인장비들이 확보되기 시작하였다.
4월23일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은 사회체육회와 특전사의 후원으로 암사동 한강고수부지에서 UH-1H 2대로 '활성화 촉진대회'라는 고공강하 축제행사를 개최하였는데, 특전사에서 실시하는 시범강하와 동일한 내용과 형식으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6월4일 대한낙하산협회는 신입회원 12명을 자체모집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생들은 88년에 교육받고 강하를 못한 교육생 8명과 권부용, 권혁남, 이종훈, 최정화 였다.
6월11일 교육생 중에 이종훈이 6월중에 터키전지훈련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터키전지훈련에 자신도 보내달라고 고한수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2차 터키 연수팀이 출국하기로 한 6월15일이 4일밖에 남지 않았고, 추가 인원을 보내려면 사전에 터키에 통보해야하는데 너무 시기가 늦은 상태이며, 상면한 지 2주밖에 안된, 잘 모르는 이종훈을 무리해서 터키에 보내어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터키항공협회에 이미지를 손상시켜 어렵게 개척한 해외전지훈련과정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고한수는 거절하였다.
6월15일부터 9월15일까지 제2차 터키 스카이다이빙 연수에 조영준, 김형구가 참가하여 출국하였지만, 김형구는 현지에서 강하한 지 얼마되지 않아 착지를 잘 못하여 발목 부상을 입고 회복할 때까지 강하를 못하게 되자, 공백 기간을 메꾸기 위하여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후 혼자 교육받던 조영준은 예비산을 개방하는 사건이 생기면서 공포감 때문에 강하를 포기하고 중도 귀국하였다. 한편, 김형구는 8월에 터키로 돌아가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였지만, 대한낙하산협회는 김형구가 출국 이후부터 귀국할 때까지 보고는 물론, 아무런 연락도 없이 유럽 여행을 떠난 것에 대하여 무단 개인행동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제명시키기로 하였으며, 고한수는 터키항공협회에 미안하여 더 이상의 터키 전지훈련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6월초 류준형 회장은 회원들의 강하를 위한 항공기 지원 요청 차 특전사령관을 찾아가 대화하였으나, 대화 도중 특전사령관이 류 회장이 현역군인회원들을 쫓아낸 것같이 얘기하자, 류 회장은 항공기지원 요청도 못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왔고, 회장직을 사임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였다.
한편, 한국항공대학과 한국항공의 항공기 임대 교섭을 하기로 한 강창록 부회장의 진행에 대하여 아무 결론 없이 시간만 경과되어 결국 교육생들에게 강하를 시키지 못했다.
다른 한편 6월초,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은 특전사에 주말 항공기 지원 요청과 대학고공강하교육을 진행하겠으니 협조해달라는 문서를 발송하였지만, 특전사령관은 대한낙하산협회를 의식하여 지원을 거부하였고, 김덕환 전담반장에게 두 단체가 통합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6월21일 김덕환의 요청으로 소집된 회의에 협회의 김대유, 채희웅과 연맹의 이천술, 조영성, 최영곤이 참석하여 두 단체의 통합을 주제로 격론 끝에 가진 합의 사항은, '류준형, 김민수 회장을 모두 은퇴시키고 통합된 단체의 회장으로 새로운 인사를 영입한다' 였다.
6월23일 강창록 부회장, 채희웅이 김민수 연맹 회장을 만나서 두 단체를 통합시키기로 하는데에 합의하였는데, 김민수 회장은 자신이 차기 회장을 영입하는 역할을 하겠다면서, 안현태, 장기호, 정동호 중에 1명을 영입할 것이라고 하였다.
두 단체의 통합추진위원으로 협회에서는 채희웅과 김대유로, 연맹에서는 조영성과 최영곤으로 하였으며, 양측에서는 회원 연명부를 작성하여 김민수 회장에게 제출하면, 연명부를 차기 회장 예정자와 특전사령관에게 전달하겠다고 하였다.
8월 중순, 김덕환이 안현태 전 대통령 경호실장을 만나 본인 의사를 타진한 후 차기 회장으로 추천하였고, 양측에서는 안현태를 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에 찬성하였지만, 며칠 후,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본인은 갑자기 협회장 취임을 고사해 버렸다.
10월1일 고한수, 박동복, 조용진, 채희웅, 최순상 등의 협회원들은 용인 에버랜드에서 국내 최초로 초경량항공기에서 강하를 실시하였다.
한편, 류준형 회장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이광로 국회의원을 차기 회장 후보로 추천하였는데, 제13회 특전사령관배 고공경연대회에 참가한 두 단체 실무진들은 통합 원칙을 가지고 협의를 계속하였지만, 양측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여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한편, 특전사령관배 고공강하경연대회에 협회에서는 2개 팀 10명이 참가하였고, 연맹에서는 1개 팀 5명이 참가하였는데 연맹 선수들은 개인정밀 1, 2등과 단체정밀 2등을 하였다.
10월30일 제9회 항공의 날 기념식에서 김덕환, 류순하가 공로표창을 수여하였다.
10월31일 김민수 연맹 회장은 자진 사임하였으며, 11월25일에 가진 단체 통합 추진회의에는 협회에서 최순상과 조용진, 연맹에서는 김영순, 남명희, 노정운, 조영성이 참석하여 회의하였는데, 양측은 정동호 의원을 회장으로 하는데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통합된 새로운 단체의 명칭은 대한낙하산협회와 한국스카이다이빙연맹이 아닌, 제3의 명칭으로 변경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정동호의 영입은 조영성을 회원대표로 하여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영성 회원대표는 정동호에게 접촉을 시도하였지만 비서에게만 그 의사가 전달되었다. 정동호는 개인적으로 면식이 많은 이천술에게 연락하여 상황보고를 하라고 하여, 이천술, 최영곤은 정동호에게 한국스카이다이빙 실정과 두 단체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12월2일 특전동지회 사무실의 이전개소식에 정동호 의원과 특전사령관이 배석하였는데, 특전사령관은 연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에게 '왜 아직까지 낙하산 단체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라고 나무라는 발언을 하였고, 12월3일 특전사령관이 정동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낙하산협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자, 정동호는 이를 수락하였다.
정동호 의원이 낙하산협회장 취임을 수락했다는 얘기가 전해지자, 12월7일 고한수, 김대유, 박동복, 채희웅, 최순상은 류준형 회장을 찾아가서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 드리면서 사임서를 받았다.
12월 고한수는 자신의 새 낙하산으로 Parachute De France에서 출시한 'Blue Track'이라는 낙하산을 수입하였는데, 그때까지 7 cell canopy만 사용하던 국내에 9 cell canopy를 처음 들여온 것이었다.
한편 이종훈은 터키전지훈련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국내에서 지상교육을 받았지만 강하를 하지 못하자, 개인적으로 수소문하여 11월 미국 Perris Valley Skydiving Center로 연수 가서, 1개월만에 200회 강하와 함께 USPA의 D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그 동안 국내 스카이다이빙은 대부분 정밀강하만 실시하였고, 시범강하를 목적으로 군에서 낙하산 대형만들기를 하였으며, 터키 전지훈련을 다녀온 회원들도 정밀과 스타일을 배우고 왔으므로 국내의 스카이다이빙은 정밀 위주였는데, 이종훈이 미국 전지훈련을 통하여 대형만들기를 배우고, 2인승 강하와 속성자유강하 교육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국내에 전파하기 시작하여 한국 스카이다이빙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2004년 11월 고한수 작성
2005년 1월 보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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