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소식]
불기 2550(2006)년 7월 3일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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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50(2006)년 7월 3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 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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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소식]
2006년 임관군승, 총무원장 지관 스님 예방
지관 스님, “군불교 활성화 위해 더욱 정진..” 당부
3사관학교에서 9주간의 군종사관 후보생 양성교육 과정을 마치고 명예롭게 군종장교로 임관한 군승 18명이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예방하고 군불교 활성화를 다짐했다.
7월 3일부로 임관한 군승 18명은 지난 7월 3일 오후 서울 군종특별교구본사가 위치한 원광사에서 임관군승 고불식을 갖고 군승법사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예방한 육군대위 석문 주종철 군승 외 18명은 ‘7월 3일부로 군포교를 위한 전법을 명 받았음’을 총무원장 지관스님에게 신고를 하였고, 이에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군 장병들은 향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기에, 이들에 대한 포교는 매우 중요하다”라며, “군불교 활성화를 위해 더욱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한편, 지난 7월 3일 국방부 원광사에서 진행된 고불식에서 군종특별교구장 일면 스님은 법어를 통해 “이제 여러분은 포교의 황금어장인 군부대 일선으로 가게 된다”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에 따라 장병들의 사표가 돼 달라”고 당부했으며, 18명 신임 군승법사들에게 일일이 죽비를 선물했다.
06년도에 새롭게 임관한 군승은 육군 13명, 해군 1명, 공군 4명으로 총 18명이다.
[언론에 비친 종교]
해인사에서 펼쳐지는 칠월칠석 축제
해인사에서 펼쳐지는 칠월칠석 축제
<연합뉴스 2006/7/3/월>
'비로자나 데이,' 패션쇼ㆍ공연 등 문화행사 다채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음력 칠월칠석인 29일 오후 3시 국립공원 가야산 해인사 일원에서 '비로자나 데이'(VIROJANA DAY)라는 이름으로 문화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사랑·만남·생명이라는 주제로 이날 밤 늦게까지 계속되며, 경내와 암자 곳곳에서 소규모 콘서트와 각종 공연이 진행된다.
이날 오후 5시까지 젊은 국악그룹 '이스터녹스'의 역동적인 퓨전 국악공연, 4인조 그룹 '비즐리'의 월드뮤직 콘서트, 멕시코 악단 '마리아치 라틴'의 민속음악 공연, 줄꾼 권원태와 어릿광대 등의 재담과 외줄타기, 야간 탑돌이에 사용할 '종이컵 연등' 만들기, 마임과 판소리 등 각종 퍼포먼스, 진성여왕과 김위홍 그리고 칠석에 관련된 시화전, 사찰음식 맛보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된다.
이어 오후 7시부터 패션디자이너 이영희의 '사랑과 만남의 패션쇼', 가수 김종국의 '한여름밤의 꿈'과 국악인 김성녀의 '천년의 사랑' 공연, 연극 형식으로 진행되는 '사랑의 잉태와 완성', 사랑의 탑돌이 등이 밤 10시까지 계속된다.
'비로자나 데이' 행사는 지난해 해인사에서 발견된 쌍둥이 목조 비로자나불(883년)에서 착안해 준비됐다.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학계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으로 확인돼 주목을 받았으며, 이 축제는 비로자나불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비로자나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태양' '광명' 등을 의미한다.
행사 주최 측은 "기록에 따르면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여름에 제작됐고, 통일신라 진성여왕과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김위홍과의 사랑이야기가 깃들어 있어 '사랑과 만남'의 날인 칠월칠석에 축제를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행사 주최 측은 당일 귀가 예정자를 위해 대구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한다. 행사 당일에는 문화재 관람료, 국립공원입장료, 주차료 등을 면제하기로 했다. ☎ 055-934-3000.
[기자수첩] 특별대접 받는 청곡사 괘불
[기자수첩] 특별대접 받는 청곡사 괘불
<연합뉴스 2006/7/3/월>
국립중앙박물관 이례적 '단일 문화재 전시도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불교의 성보(聖寶) 문화재 중 하나인 괘불(掛佛)은 글자 그대로 '걸어 매다는 불화'를 말한다. 불화라고 하면 법당과 같은 건물 내부를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괘불은 워낙 덩치가 커서 그것을 제대로 걸어 둘 만한 공간은 전국을 통틀어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과 같은 몇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하는 괘불 중 임진왜란 이전 작품은 한 점도 없다. 괘불 전공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정명희 학예연구사는 그 까닭을 두 가지 정도로 본다. 첫째, 그 정확한 등장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괘불이 조선불화에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17세기 이후다. 둘째, 설혹 임란 이전 작품이 있었다고 해도 전란 등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불교미술품에 비해 괘불은 좀처럼 실물을 맛보기 힘들다. 괘불은 1년 내내 실내에 보관돼 있다가 석가탄신일과 같은 특정한 날에만 한시적으로, 그것도 야외행사에서만 공개되기 때문이다.
같은 불교문화권이지만 당간지주처럼 이웃 중국이나 일본 불교문화에는 없는 괘불. 그렇기에 한국불교의 전매특허품이라고도 할 만한 괘불이 어떤 것인가를 보기 위한 자리가 지난해 10월 28일 용산에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돼 있다.
이곳 2층 미술관과 3층 불교회화실을 관통하는 높이 13m에 이르는 벽면에는 거대한 괘불 1점이 매달려 있다. 경남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월아산 청곡사에서 빌려와 5월2일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10월 22일까지 이곳에 있을 청곡사 괘불은 높이가 10m에 폭은 6m 37㎝에 이른다. 새용산박물관은 당초 개장 즈음에 전시실 규모로만 세계 6대 박물관에 속한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복원 전시되고 있는 전시실 중앙홀을 제외하곤 이만한 괘불을 전시할 만한 공간은 없다.
2층과 3층 전시실의 아래위로 뚫린 공간 벽면에 걸린 청곡사 괘불은 그래서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해서는 관람객이 2층과 3층을 오르내려야 한다. 즉, 2층에서는 아래쪽 절반을 구경하고, 3층으로 올라가서는 그 위쪽을 살펴야 한다.
국보 302호인 이 거대 불화 전시를 준비하면서 박물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40쪽 가량 되는 관련 도판집 겸 해설서를 발간했다. '법당 밖으로 나온 큰 불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小)도록 원고는 정명희 연구사가 집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상 특정 유물 1점만을 대상으로 한 이런 도록 발간은 극히 이례적이다. 정확한 조사는 없으나 아마도 첫 사례일 것이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금동반가사유상 2점만 해도 아직까지 박물관의 전문 도록이 없다. 이 불상과 함께 우리가 세계에 내놓아 손색이 없다는 신라금관도 6점 중 그 어느 것도 아직 전문 도록 하나 없다.
박물관 소장품도 아니요 대여품인 청곡사 괘불이 금동반가사유상이나 신라금관도 무색할 정도로 단일 전시문화재로는 박물관에서 파격 대접을 받고 있다.
전문 도록이 나온 청곡사 괘불이 박물관에서 특별대접을 받고 있을까? 혹시 금동반가사유상이나 신라금관과 같은 박물관 소장품이 제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 한그릇] ‘VIP손님’ 새 식구로 새 출발
[행복 한그릇] ‘VIP손님’ 새 식구로 새 출발
<경향신문 2006/7/4/화/사회11면>
민들레국수집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근처 민들레의 집 식구들이 어떻게들 사는지 둘러봅니다. 딸이 집에 있으면 저녁상을 차려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그런 다음 저녁 여덟시쯤 지하상가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하는 베로니카를 모시러 차를 몰고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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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역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베로니카가 가게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역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보내는 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봅니다. 밥을 먹지 못한 분이 있으면 식당에 모시고 가 설렁탕이라도 드시도록 해 드리고, 냄새가 너무 심하면 컵라면이라도 챙겨드립니다. 소주 한 병 사 달라고 하면 매정스럽게 거절하기도 합니다.
나흘 전입니다. 베로니카를 기다리면서 역 주변을 살펴보는데 우리 VIP 손님이신 강신욱씨가 꾸벅 인사를 합니다. 신욱씨는 마흔 여덟입니다. 노숙을 할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점잖습니다. 옷은 허름하지만 깨끗합니다. 저의 주머니 사정만 허락하면 민들레의 집 식구로 모셔야겠다고 벼르던 분이기도 합니다.
“강신욱씨,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점심 때 자유공원에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당에 모시고 가려니 점심 먹었으니 괜찮다면서 사양합니다. 제가 저녁을 못 먹어 그러니 함께 밥 좀 먹자고 해서 겨우 식당에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육개장을 시켜드렸습니다.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요.
한참 뒤에 물어보았습니다. 노숙생활이 힘들지 않은지? 노숙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몇 달 전 막노동을 나갔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일을 못해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되었답니다. 노숙생활을 그만두고 싶지만 마음대로 될 일이냐고 합니다. 신욱씨에게 이틀간 깊이 생각해 보신 후에 오시라고 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민들레의 집 식구로 함께 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틀 후 민들레 국수집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노숙생활을 그만두고 싶다고 합니다. 사람답게 한 번 살아보고 싶다고 합니다. 만원을 손에 쥐여드렸습니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신 다음 짐을 챙겨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신욱씨가 목욕탕에 간 후에 동네 부동산에 단칸방을 하나 구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제 강신욱씨는 민들레의 집 식구입니다. 조그만 옷 보따리 두 개가 이삿짐입니다. 방이 마련될 때까지 민들레국수집 이층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서영남|민들레국수집 운영자〉
고승의 발자취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
고승의 발자취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
<주간한국 2129호>
일연을 묻는다 / 고운기 지음 / 양진 사진 / 현암사 발행 / 1만5,000원
고려 후기 고승 일연(1206~1289) 이 탄생한 지 올해로 꼭 800년을 맞는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 고명(高名)은 익히 접했지만 일연은 우리들에게 아직도 친숙한 듯 낯선 존재이다. 불후의 명저 <삼국유사>가 아니라면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별로 떠오르지 않고, 떠올릴 것도 없는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정확할까.
하기사 세수 83세를 일기로 입적한 경북 인각사에 잔뜩 부서진 채로 세워져 있는 묘비-다행히 비문 사본이 월정사에 남았다-와 현존하는 두 권의 저서 외에는 그의 생애를 전해줄 자료가 전무하다시피한 사정도 이 소원함의 연유일 게다.
<삼국유사>를 학문의 지표로 삼고 정진 중인 소장학자 고운기 씨가 내놓은 근작은 70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풍화되지 않은 고승의 고고한 삶의 편린들을 찾아내 그러모은 작업의 결실이다.
비문은 희미해진 일연의 행적을 좇는 저자에게 지도 노릇을 해준다.
탄생지인 경북 경산, 배움을 위해 적을 둔 광주 무량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 양양 진전사를 필두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불사에 전념한 강화도·개성·경주 등지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임금을 졸라 말년에 돌아온 고향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10년도 넘게 전국 각지를 편력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물론 당시와 현재의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간극은 너무 넓어 저자는 종종 실체가 덧없이 사라진 빈 절터를 밟고 서서 그저 곤혹스러워하기도 한다. 게다가 왕희지의 글자를 일일이 모아 만든 4,000자의 비문으로는 당시 최고위 승직인 국사(國師)의 반열에 올랐던 노승의 생애를 얼개만 보여주기에도 벅차다.
이런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저자는 다양한 우회로를 뚫는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종교 지도자가 겪었을 법한 시대적 상황을 적극 재구성함으로써 일연의 생애를 간접적으로 유추해보는 전략을 택한 것.
이를 위해 그는 삼국 시대와 고려조에 걸쳐 정치사·불교사·문학 등 전방위적 사료를 끌어들인다. 발품을 아끼지 않고 역사의 현장에서 취재한 지식과 이를 토대로 발휘한 상상력도 저자의 추론에 살을 덧붙인다.
필자는 <삼국유사>가 집필된 전후맥락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명저의 미덕이 “(치밀하고 정성 어린) 현지답사와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단순한 역사서를 넘어) 광범한 의미의 문화사”로 볼 만한 선구적 작업이란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꼼꼼한 현장 취재라는 일연의 실증적 방법론을 따라가며 일연을 기술한 이 책은 고승을 향한 이중의 헌사에 다름 아니다. 풍성한 자료들이 가끔 ‘일연’이라는 초점을 잃은 채 동원돼 전반적 구성이 다소 어수선해 보이는 점은 아쉽지만 말이다.
저자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이 책의 지향을 한마디로 압축하라면 ‘일연 평전’이 될 것이다.
평전 속에 비친 일연의 모습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의 침략기를 겪으며 저물어가는 고려 시대에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애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생애를 살았던 시대의 사부이다. 또한 그는 속세에 대한 미련 아니냐는 다그침이 무색하리만치 효심이 깊었던 아들이었으며, 민중의 삶에 한없는 애정을 가졌던 지식인인 동시에 타고난 문재를 감출 수 없었던 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위인전 수준의 단면적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숙명이라 표현한 까닭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당대의 고승을 입체적으로 분석할 만한 사료가 우리 시대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이런 한계 상황이 우선적으로 고려된 이후에야 내려져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제작에는 줄곧 우리 문화 유적을 필름 속에 담아온 사진작가 양진 씨가 함께 했다. 광각렌즈를 자주 사용한, 중후한 톤의 사진들은 ‘일연을 묻는’ 일에 동참한 독자에게 시각적 미감을 덤으로 선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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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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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선물-조세현의 인물사진]김성수 주교
[세월의 선물-조세현의 인물사진]김성수 주교
<동아일보 2006/7/4/화/오피니언A29면>
굴곡 많았던 세월의 한가운데서 평생을 이웃들 곁에 있으며 그들을 돌보신 그분. 그의 얼굴 속에는 어느새 내리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다.
※1984년 주교 수품. 정신지체아동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1973년)와 정신지체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인 ‘우리 마을’(2000년)을 세우는 등 장애인 복지에 힘을 쏟고 있다. 성공회대 총장, ‘사랑의 친구들’ 회장, 푸르메재단 이사장.
편집자
무소뿔에 숨겨진 이야기
무소뿔에 숨겨진 이야기
<헤럴드생생뉴스 2006/7/3/월>
옛 벼슬아치들의 관복의 허리부분에 두르는 각대는 품계에 따라 소재와 장식에 차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무소뿔대는 정일품이상, 황금으로 만든 금대는 정이품 관원의 관복대였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데도 무소뿔이 한 몫 거들었다. 강력한 무기인 각궁은 무소의 뿔로 만들어졌다. 무소뿔은 당시에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아 활의 크기를 줄여 다루기 편리하면서도 위력은 엄청났다.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일대에 무소뿔 등을 중개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예로부터 무소뿔은 재료의 희소성과 상징적 의미로 인해 황금만큼 귀했고 행운을 뜻했다.
무소뿔은 약재로서 탁월한 효능이 있어 또 한번 진가를 발휘한다. 중풍성질환, 심장성질환, 뇌질환 등에 응급약으로 유명한 우황청심원은 우황, 사향 등 30여종의 약재로 만든다. 그 중 우황(소의 담석), 사향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무소뿔이다.
조선시대 허준의 의서인 동의보감에도 "무소뿔은 해열, 제독 및 지혈, 정신안정제, 살균제로 쓰고 두진(천연두의 발진)에도 효험이 있다"고 기록됐다.
무소뿔은 일반 뼈처럼 칼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슴뿔처럼 피로 자라난다. 무소뿔은 자석과 같아서 체내의 어혈과 독을 모으는 성질이 있다. 인간의 몸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이에 반발적으로 저항력이 왕성해지고 신진대사가 활발해 지는 등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한의학에선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무소뿔로 신체의 피부를 긁는 자극을 주어 반사적으로 혈액 순환을 향상시키고 기를 불어넣어 인체 스스로 병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일 수도 있지만, 무소뿔을 몸에 지니기만 해도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고의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소뿔이 요즘은 어떤 이유에서 각광받고 있을까.천연소재 명품빗 `미소(www.dailycom.com)`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연령대에 따라 그 이유가 다르다. 40대 이상은 건강, 20~30대는 미용을 위해 무소뿔빗을 구입한다. 10대 수험생 고객층은 무소뿔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다.
정영태 미소 대표는 "무소뿔로 만든 빗은 탈모의 원인이 되는 두피의 기름을 흡수하고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두통도 완화시켜 준다. 인체의 머리카락 단백질인 케라틴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윤기 흐르는 머릿결을 만들어 준다. 무소뿔 빗으로 두피를 마사지하면 머리가 맑아지며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차분히 가라앉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험생들이 무소뿔을 찾는 현상은 스트레스 극복과 수능행운 두가지 이유에서다"라고 설명했다.
소설 영화로 인기를 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원시불교의 경전인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시구(詩句)이다. 원전을 번역하면서 코뿔소를 무소로 번역했다. 무소는 뿔이 두 개이고 코뿔소는 뿔이 하나다. 원전의 뜻은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이다.
이상택 기자(y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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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농민주일' 행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농민주일' 행사
<연합뉴스 2006/7/3/월>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천주교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는 16일 오전 8시부터 강원도 원주교구 대안리 공소에서 제11회 농민주일 행사를 개최한다.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회원들과 교우 등 참가자들은 이날 농민주일 기념미사에 이어 도·농 연대 결의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감자 캐기와 옥수수 따기 등 농촌체험, 대동놀이 등 다양한 행사도 열린다. 회비 1만원. ☎02-727-2275.
교황청 발터 카스퍼 추기경 방한
교황청 발터 카스퍼 추기경 방한
<연합뉴스 2006/7/3/월>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이하 일치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16일부터 경기도 의왕시 아론의 집에서 열리는 '교회일치를 위한 아시아 지역 주교 세미나'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독일 출신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함께 세계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그는 세미나 참석 외에 한국 그리스도교 교단장과 간담회,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 포럼 기조 강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교황청 일치평의회는 대륙별로 교회일치를 위한 지역 주교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진행했고, 올해는 아시아 지역 주교들을 위해 한국에서 세미나를 개최한다. 내년 2월에는 필리핀에서 아시아 지역 2차 세미나가 계획돼 있다.
이번 세미나에는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한국 주교단,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김희중 주교, 아시아 15개국 주교회의 교회일치 담당 주교들이 참석해 교회일치 방안을 논의한다.
성당 지고 모스크 뜨고 ‘독일 종교의 재구성’?
성당 지고 모스크 뜨고 ‘독일 종교의 재구성’?
<동아일보 2006/7/4/화/국제A14면>
시모네 수녀는 요즘 독일 만하임 시 융부쉬 구역에 있는 성당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다. 1960년대 이 성당은 일요일마다 2000명이나 되는 신자가 모여 미사를 올렸다. 오늘날 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신자는 150명에 불과하다.
시모네 수녀의 기분이 언짢은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최근 이 성당 바로 옆에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문을 연 것이다. 모스크에는 매주 3000명이나 되는 신자가 모인다.
일간지 디벨트는 2일자 일요판에서 독일 도시들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 이슬람의 강세를 소개했다. 그동안 뒷골목에서 의식을 행하던 무슬림이 21세기 들어 약속이나 한 듯 대도시에 모스크를 세우고 있으며 이는 도시의 문화와 분위기마저 바꾸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독일은 기독교민주당(CDU) 당수가 총리로 재임하고 있으며 현 교황을 배출한 나라. 인구의 3분의 2가 종교란에 ‘기독교인’이라고 쓴다. 그러나 매주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기독교인의 수는 1950년대 1200만 명에서 최근 4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2002년부터 4년 동안 함부르크와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에서만 20곳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이에 비해 독일에 거주하는 350만 명의 무슬림 대부분은 열성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한다. 대부분 터키에서 온 이주 노동자다. 독일터키이슬람종교연맹(DITIB)은 산하에 860곳의 모스크를 두고 있다. 이 단체는 터키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모스크들이 도시 한복판으로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쾰른의 경우 12만 명의 무슬림이 거주해 기독교세를 압도한다.
프랑크푸르트=유윤종 특파원 gustav@donga.com
[이슬람 문명과 도시] (13) 인구 250만명의 도시국가 쿠웨이트
[이슬람 문명과 도시] (13) 인구 250만명의 도시국가 쿠웨이트
<서울신문 2006/7/4/화/기획22면>
열사의 낙원 꿈꾸는 ‘아라비아의 작은 요새’ |
‘쿠웨이트’는 작은 요새라는 뜻이다. 국가 이름이면서도 수도 이름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워낙 규모가 작아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도시처럼 보는 게 더 낫다. 나라 크기는 우리나라 경상북도 정도지만, 워낙 쓸모없는 사막 땅이 많아 인구는 대구시 규모인 250만명 내외다. 이런 인구 전체가 쿠웨이트 사람들인 것도 아니다. 쿠웨이트 국적을 가진 사람은 약 45%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55%는 외국인 근로자다. 쿠웨이트가 도시 형태를 갖춘 것은 18세기 초 무렵. 아라비아 반도 내륙에서 이주해온 여러 부족들로 이뤄졌던 옛도시는 13㎢에 불과하지만, 현재는 외곽 방향으로 도시가 크게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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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웨이트 시가지 이라크 침공으로 휘청댔던 쿠웨이트는 이제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은 가지런히 정렬된 쿠웨이트 시내 모습. | |
우리에게 알려진 쿠웨이트는 대개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미지다. 전세계 석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는 부자 산유국, 그리고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개방적인 나라라는 정도다. 그래서 최근 쿠웨이트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을 때 주변의 GCC(걸프협력회의)국가들과 비교할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공항에 내렸을 때 마주치게 되는 비릿한 바다 냄새와 후끈한 열기는 역시 ‘열사의 나라’임을 실감케 해줬다. 여기서는 다른 GCC국가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면서 보니 역시 쿠웨이트 국적을 가진 이들보다 외국인 숫자가 더 많아 보인다. 시내로 향하는 길에서 특이한 점은 부자나라치곤 고층건물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즘 ‘잘 나가는’ 두바이와 비교하자니, 완전히 시골 한구석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거리 곳곳에서 건축공사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서 나름대로 개발은 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유를 물었더니, 지난 90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라크의 침공으로 나라 전체가 점령당한 악몽 때문에 그렇단다. 고층건물을 지으면 뭐하나. 미사일 한방이면 폭삭 주저앉을 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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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완이야 우리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디완이야’.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 | 그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군의 포로가 됐고, 세계최강이라는 미국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됐으니, 이제 새로운 국가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노력이 여기 저기에서 시도되고 있다. 하기야 쿠웨이트 사람처럼 국민소득이 높고 또 발전된 나라를 자주 둘러보는 사람들이 왜 자신의 국가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없겠나. 소득이 높고 휴가가 긴 그들의 여권에는 방문국들의 비자 스탬프가 빽빽하니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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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공예품 쿠웨이트 역시 아랍국가답게 화려한 금속공예 기술을 자랑한다. 시내에서 손쉽게 들러볼 수 있는 가게에 진열된 공예품들. | |
이라크 침공 전에 원래 쿠웨이트 사람들은 자기네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만 섬 ‘부비얀’을 ‘자유무역지대’로 설정해 공사를 시작하려 했다.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부비얀은 이라크와 이란이 인접해 있는 중요한 전략 거점이다. 그런데 이라크침공으로 모든 계획이 무산됐다. 이때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가 자발 알리 지역을 자유무역지대로 선포하면서 개발을 완료해버렸다. 금융·무역 인프라 구축이 완벽하게 이뤄진 두바이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허브로서의 기능을 이미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을 정도다. 쿠웨이트 사람들도 비록 늦었지만 여기에 뒤질 수는 없다. 쿠웨이트를 두바이 이상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을 배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리 기업들도 여기에 발맞춰 안테나를 잔뜩 기울이면서 활발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원래 쿠웨이트에 살던 한국사람은 90년 걸프전 이전만 하더라도 2000여명에 이르렀지만 걸프전 이후에는 400명도 채 못됐다. 그러나 이라크 재건과 쿠웨이트의 활발한 경제활동에 힘입어 이제 예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서히 숫자를 늘려가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도시 전체는 그런 대로 깨끗하고 도로망도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어서 초보자라 해도 지도를 잘 보면 쉽게 길을 찾아 다닐 수 있다. 운전도 어렵지 않다. 도시를 오가는 많은 차들은 마치 세계 차량 전시회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차들은 총출동한 듯하다. 아주 낡아빠진 구식 차량도 있고, 한국산 차량도 눈에 띄어 우리의 국력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차량을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쿠웨이트 사람이 아니라 제3국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아직 쿠웨이트 부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는 품질면에서 못미치는 듯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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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 187m로 60층 빌딩과 맞먹는 쿠웨이트타워.80년 이슬람계의 건축상 아가칸상을 수상한 명작으로 꼽힌다. 장미향수를 뿌리는 장식병 모양으로 쿠웨이트 방문객에 대한 환대를 의미한다. 이슬람문화연구소 제공 | |
쿠웨이트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문화가 하나 있다.‘디완이야’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로 치자만 일종의 ‘사랑방 문화’다. 그만큼 모든 동네마다 다 개설돼 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문을 여는데, 동네 사람 누구나 와서 주장이든 제안이든 뭐든, 제 할 말을 할 수 있다. 공동으로 만들어 둔 동네도 있고, 동네에서 제법 인정받거나 영향력있는 사람이 자기 집에다 만들어 놓기도 한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서 제기돼 논의된 의견들은 무조건 위로 전달돼 정책결정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일종의 풀뿌리 민주주의 같은 것이라 할까. 언로가 막힘 없이 툭 트여 있는 모양새가 좋았다. 이런 작은 공동체 같은 쿠웨이트에 만일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 페르시아만에서 진주조개 캐고 생선이나 잡으면서 주변의 이란이나 인도와 무역에 열중했겠지….
나름대로 답도 해보면서. 쿠웨이트는 그러나 석유로 인해 부유하다. 외국인들을 자기네 머슴처럼 부리면서 살고 있을 정도다. 거의 대부분의 쿠웨이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 가정부에서부터 운전기사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 외국인의 임금이 그리 높은 편도 아니다. 가정부의 경우 월 150달러, 운전기사는 300달러 수준이다. 가정일을 대신 해 줄 사람도 있으니 애들도 많이 낳는 편이다.
더구나 자녀 1인당 20세까지는 150달러 정도를 양육비로 지급하고, 교육비와 의료시설은 공짜에다, 졸업 후에는 일자리까지 알아봐주고, 해외 유학간다고 하면 장학금까지 내주는 판이니 어찌 아이를 안 낳겠나. 그래도 서민들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그들에게는 주택제공과 각종 지원 등 여러 가지 혜택이 제공된다 하니 그다지 별 차이가 없어뵌다. 그러니 보통 한 가정에는 4명 이상의 자녀가 있다.‘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우리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이 무색하지 않은 나라이자 꿈에나 그릴 수 있는 낙원이 바로 쿠웨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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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의갑 한국외대 교수 이슬람문화연구소 연구원 | |
그래도 이슬람 국가니까 여성들은 살기 불편하다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지금 막 예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005년 여성 참정권이 마침내 인정받았고,2006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출마한 여성후보만도 32명이란다. 물론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전체 유권자 가운데 여성비율이 57%라 하니 쿠웨이트에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날도 머지 않았다.
입국 전에 듣기로는 쿠웨이트 사람들은 부자라서 무척이나 거만하다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거만하다기 보다 보통 아랍인들처럼 정이 많거나, 서구적 개념의 합리성에 충실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약속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몸에 밴듯한 겸손함을 보였다. 쿠웨이트 사람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뉴스에는 여전히 유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다 한다. 우리 선배들이 열사의 나라에서 오일 달러를 벌어 들였던 때가 지난 70년대였다. 이제 또 다른 제2의 중동붐이 오지 않을까 기대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도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전망도 해본다.
황의갑 한국외대 교수· 이슬람문화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