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 온 글입니다.
장구
가죽 타악기의 하나로 양편 머리가 크고 그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要鼓)라고도 한다. 이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한자로
지팡이장(杖)과 북고(鼓)를 쓰면 장고가 맞고, 노루장(獐)과 개구(拘)를
쓰면 장구도 맞다. 풍물의 현장을 조사하는 가운데, 전북 진안 김봉열
선생님과 강원도 강릉 박기하 선생님도 옛날부터 어른들께서 장구의
가죽을 노루가죽과 개가죽으로 썼다 하여 장구가 맞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통 장구라고 많이 부른다. 여기서도 장구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였다.
왼쪽(북편, 궁편)은 말가죽이나 소가죽, 노루가죽을 대 가죽이 좀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보통 말가죽이나 개가죽을 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가죽으로는 개가죽이 소리도 크고 제일 좋다. 장구의
통은 사기, 기와, 쇠, 나무, 바가지, 양철 따위를 쓰는데, 보통
미루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쓰고, 오동나무가 가벼우며 소리도 좋다.
장구통의 궁통과 채통을 이어 주는 곳을 조롱목이라 하는데, 조롱목이
너무 넓으면 소리가 헤프고, 조롱목이 너무 좁으면 소리가 되바라진다.
장구통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통째로 깎아 만든 통장구와 나무조각을
깎아서 보통 두 쪽 내지 세 쪽으로 맞춘 쪽장구가 있다. 철테(원철)
둘레에 8개의 쇠고리(쇠갈고리, 구철)를 걸어 무명을 꼬아 만든 줄(숫바,
홍진사, 축승)로 얽어 매고, 죔줄(축수, 부전)을 좌우로 움직여 소리를
조절한다.
장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문종 30년(1076년)에
대악관현방(大樂菅絃房)을 정할 때 장고업사(杖鼓業師 : 장구 연주자라는
뜻)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구보다 작은 크기의 장구를 요고(腰鼓)라
하고 인도에서 만들어져 중국 남북조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며, 고구려 집안현 제4호 무덤벽화와 신라 상원사 동종의 아래쪽에
그려진 주악도, 그리고 감은사지 청동제 사리기 기단에 그려진
그림(통일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서 볼 수 있다.
장구가 요즘에 쓰이는 형태로 크기가 커진 것은 고려 때로 추측되며,
장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한 무제 때 만들어져 고려 예종왕 9년 송나라에서
새로운 악기가 들어올 때 장고이십면(杖鼓二十面)이 포함된 기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장구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쓰여 고려 때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악지』의 [당악기조], [향악기조]에 각각 장고가 들어 있고, 조선
세종 때 『악학궤범』 에 의하면 장구(장고라 쓰였지만 여기서는 장구로
통일함)가 당악과 향악에 어울려 쓴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구는 처음에
당악(당에서 들어온 음악), 향악(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음악)에
쓰였으며 지금은 정악, 산조, 잡가, 민요, 풍물굿, 무악 등 거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장구의 옛날 꼴로 생각되는 물장구,
모래장구도 있었다고 한다.
장구의 채로는 궁채(궁글채)와 열채(가락채)가 있는데, 궁채는 대나무
뿌리를 잘 삶아서 똑바로 편 다음, 끝부분에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
또는 뿔을 끼워서 만들고, 열채는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두 손으로
치기 때문에 가장 다양한 소리를 내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든다.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장구를 메는 방법도 지역이나
사람마다 다르고, 그 나름의 맛을 제각기 갖고 있다.
가죽 타악기의 하나로 양편 머리가 크고 그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要鼓)라고도 한다. 이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한자로
지팡이장(杖)과 북고(鼓)를 쓰면 장고가 맞고, 노루장(獐)과 개구(拘)를
쓰면 장구도 맞다. 풍물의 현장을 조사하는 가운데, 전북 진안 김봉열
선생님과 강원도 강릉 박기하 선생님도 옛날부터 어른들께서 장구의
가죽을 노루가죽과 개가죽으로 썼다 하여 장구가 맞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통 장구라고 많이 부른다. 여기서도 장구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였다.
왼쪽(북편, 궁편)은 말가죽이나 소가죽, 노루가죽을 대 가죽이 좀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보통 말가죽이나 개가죽을 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가죽으로는 개가죽이 소리도 크고 제일 좋다. 장구의
통은 사기, 기와, 쇠, 나무, 바가지, 양철 따위를 쓰는데, 보통
미루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쓰고, 오동나무가 가벼우며 소리도 좋다.
장구통의 궁통과 채통을 이어 주는 곳을 조롱목이라 하는데, 조롱목이
너무 넓으면 소리가 헤프고, 조롱목이 너무 좁으면 소리가 되바라진다.
장구통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통째로 깎아 만든 통장구와 나무조각을
깎아서 보통 두 쪽 내지 세 쪽으로 맞춘 쪽장구가 있다. 철테(원철)
둘레에 8개의 쇠고리(쇠갈고리, 구철)를 걸어 무명을 꼬아 만든 줄(숫바,
홍진사, 축승)로 얽어 매고, 죔줄(축수, 부전)을 좌우로 움직여 소리를
조절한다.
장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문종 30년(1076년)에
대악관현방(大樂菅絃房)을 정할 때 장고업사(杖鼓業師 : 장구 연주자라는
뜻)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구보다 작은 크기의 장구를 요고(腰鼓)라
하고 인도에서 만들어져 중국 남북조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며, 고구려 집안현 제4호 무덤벽화와 신라 상원사 동종의 아래쪽에
그려진 주악도, 그리고 감은사지 청동제 사리기 기단에 그려진
그림(통일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서 볼 수 있다.
장구가 요즘에 쓰이는 형태로 크기가 커진 것은 고려 때로 추측되며,
장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한 무제 때 만들어져 고려 예종왕 9년 송나라에서
새로운 악기가 들어올 때 장고이십면(杖鼓二十面)이 포함된 기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장구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쓰여 고려 때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악지』의 [당악기조], [향악기조]에 각각 장고가 들어 있고, 조선
세종 때 『악학궤범』 에 의하면 장구(장고라 쓰였지만 여기서는 장구로
통일함)가 당악과 향악에 어울려 쓴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구는 처음에
당악(당에서 들어온 음악), 향악(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음악)에
쓰였으며 지금은 정악, 산조, 잡가, 민요, 풍물굿, 무악 등 거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장구의 옛날 꼴로 생각되는 물장구,
모래장구도 있었다고 한다.
장구의 채로는 궁채(궁글채)와 열채(가락채)가 있는데, 궁채는 대나무
뿌리를 잘 삶아서 똑바로 편 다음, 끝부분에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
또는 뿔을 끼워서 만들고, 열채는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두 손으로
치기 때문에 가장 다양한 소리를 내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든다.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장구를 메는 방법도 지역이나
사람마다 다르고, 그 나름의 맛을 제각기 갖고 있다.
가죽 타악기의 하나로 양편 머리가 크고 그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要鼓)라고도 한다. 이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한자로
지팡이장(杖)과 북고(鼓)를 쓰면 장고가 맞고, 노루장(獐)과 개구(拘)를
쓰면 장구도 맞다. 풍물의 현장을 조사하는 가운데, 전북 진안 김봉열
선생님과 강원도 강릉 박기하 선생님도 옛날부터 어른들께서 장구의
가죽을 노루가죽과 개가죽으로 썼다 하여 장구가 맞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통 장구라고 많이 부른다. 여기서도 장구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였다.
왼쪽(북편, 궁편)은 말가죽이나 소가죽, 노루가죽을 대 가죽이 좀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보통 말가죽이나 개가죽을 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가죽으로는 개가죽이 소리도 크고 제일 좋다. 장구의
통은 사기, 기와, 쇠, 나무, 바가지, 양철 따위를 쓰는데, 보통
미루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쓰고, 오동나무가 가벼우며 소리도 좋다.
장구통의 궁통과 채통을 이어 주는 곳을 조롱목이라 하는데, 조롱목이
너무 넓으면 소리가 헤프고, 조롱목이 너무 좁으면 소리가 되바라진다.
장구통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통째로 깎아 만든 통장구와 나무조각을
깎아서 보통 두 쪽 내지 세 쪽으로 맞춘 쪽장구가 있다. 철테(원철)
둘레에 8개의 쇠고리(쇠갈고리, 구철)를 걸어 무명을 꼬아 만든 줄(숫바,
홍진사, 축승)로 얽어 매고, 죔줄(축수, 부전)을 좌우로 움직여 소리를
조절한다.
장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문종 30년(1076년)에
대악관현방(大樂菅絃房)을 정할 때 장고업사(杖鼓業師 : 장구 연주자라는
뜻)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구보다 작은 크기의 장구를 요고(腰鼓)라
하고 인도에서 만들어져 중국 남북조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며, 고구려 집안현 제4호 무덤벽화와 신라 상원사 동종의 아래쪽에
그려진 주악도, 그리고 감은사지 청동제 사리기 기단에 그려진
그림(통일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서 볼 수 있다.
장구가 요즘에 쓰이는 형태로 크기가 커진 것은 고려 때로 추측되며,
장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한 무제 때 만들어져 고려 예종왕 9년 송나라에서
새로운 악기가 들어올 때 장고이십면(杖鼓二十面)이 포함된 기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장구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쓰여 고려 때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악지』의 [당악기조], [향악기조]에 각각 장고가 들어 있고, 조선
세종 때 『악학궤범』 에 의하면 장구(장고라 쓰였지만 여기서는 장구로
통일함)가 당악과 향악에 어울려 쓴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구는 처음에
당악(당에서 들어온 음악), 향악(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음악)에
쓰였으며 지금은 정악, 산조, 잡가, 민요, 풍물굿, 무악 등 거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장구의 옛날 꼴로 생각되는 물장구,
모래장구도 있었다고 한다.
장구의 채로는 궁채(궁글채)와 열채(가락채)가 있는데, 궁채는 대나무
뿌리를 잘 삶아서 똑바로 편 다음, 끝부분에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
또는 뿔을 끼워서 만들고, 열채는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두 손으로
치기 때문에 가장 다양한 소리를 내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든다.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장구를 메는 방법도 지역이나
사람마다 다르고, 그 나름의 맛을 제각기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