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스리랑카의 종교 A. 스리랑카의 종교 1. 불교 a. 스리랑카 초기의 불교 석가모니가 3회에 걸쳐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설법을 전하고 "스리랑카는 이후 5천년간 불교 국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게 되었는데 이튿날 싱할리의 자손 비자야가 700명의 군사와 함께 스리랑카로 내려와 원주민들과 동화되면서 싱할리 왕족을 열었다고 한다. 그 후 BC. 247년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왕자가 디바남피아 티사의 통치 기간에 불교를 전해 와서 아누라다푸라를 비롯하여 시기리야, 포론나루워 등지에서 찬란한 불교의 꽃을 피웠다. 이때 스리랑카에는 에니미즘이 넓게 퍼져 있다. 한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마힌다 왕자도 에니미즘을 믿는 사람들을 감화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에니미즘을 숭배하던 당시의 사람들이 불교로 개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신을 불교에 흡수시키는 것이 쉬웠다. 그 후 타밀인들이 들어오면서 힌두교 역시 대중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스리랑카의 불교문화는 순수한 불교문화라기보다는 다른 종교와 혼합된 불교문화이다. 한편 상좌부 불교라 불리는 소승불교(Theravada Buddhism)는 한국과 중국 등지에 퍼져 있는 대승 불교(Mahayana)와는 달리 석가모니 입적 후 제2회 불교 경전 결집 때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는 소승불교와 대중포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대중부와 나뉜 데서 두 파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b. 소승불교의 발전 소승불교의 소승이라는 말은 작은 배와 같이 사람을 적게 태울 수 있는 수레와 관계되어 진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소승파에서는 사람이 해탈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소수의 국한된 사람만 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소승파는 가장 보수적인 불교의 한 종파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소승불교에서는 개인이 우주와 기타의 존재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존재로 인정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타력에 의한 구원관을 강조하는 반면 이 소승파에서는 인간 개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자기 노력으로 가능해 진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익원 <그리스도인이 본 불교> (서울:성광문화사,1989), p. 257.
이 두 종파 중에서 가장 활발했던 종파는 대승 불교였다. 그것은 아소카왕(B.C 273-232)이 대승 불교로 귀의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김익원교수는 대승불교의 교세가 강했던 또 하나의 원인을 대승불교가 가진 `선교열'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마하야나의 이상형인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사랑과 신뢰와 친밀감으로 가득찬 자비심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 동양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앞장섰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먼저 중국으로 가서 각 층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침투해 들어갔다. 이러한 선교 정신으로 대승불교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으로 넓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 소승불교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 가까운 지역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김익원. pp259-260.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소승과 대승의 각 종단이 아누라다푸라를 중심으로 서로 부흥을 꾀하였으나 5세기부터는 그들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8세기경 왕조가 개입하여 불교계를 소승불교로 통일 시켰다. 이때부터 소승불교의 종주국으로 자리하고 엄격한 불교 계율을 엄수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가 생기게 된 것은 인도에서의 일이다. 즉 브라만 제사장들의 끊임없는 예식 가운데 희망을 갖지 못하자 힌두교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항의로써 시작된 것이다. 궁극적인 실재는 브라만이 아니라 열반인데 그것은 무가 아니고 "어떤 것에 대한 의미 있는 부재로써 완전하고 최종적인 축복의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육체적 세계는 본질적으로 미혹으로 간주한다. 고로 궁극적 실재는 육체적 존재인 미혹의 것에 완전히 상반된 것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될 때 육체적 존재의 정반대의 것은 열반되어야 하고 열반에로의 탈출이 곧 구원이다.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수도를 통하여 이르는 어떤 종류의 각성을 체험해야 한다. E.A.나이다. <문화속의 선교>, 채은수 역(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86) pp.57-58.
c. 스리랑카 불교의 발전 불교도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을 영(Spirit), 귀신 그리고 도깨비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데 스리랑카의 하층민의 민간 불교에서는 범신들과 더불어 연합을 이루어 버렸다. 즉 그들의 명절이나 종교일의 축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으며, 부처는 비폭력을 가르쳤으나 스리랑카의 승려들은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폭동 등에도 가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의 정부에서는 종교를 모두 인정하지만 불교에 최고의 특권을 주며, 최고의 종교로 보고 있다. 또한 스리랑카 불교인들은 오래 전부터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이어받기 위해 석가모니가 득도한 곳에 있던 보리수(Bo Tree) 가지를 잘라다 심고 불심을 키워 나갔으며, 수많은 백성들과 왕실의 특별한 정성을 받아가며 2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석가의 향취를 뿜어 오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가 다녀갔던 주요 지역에는 불교인들의 성지로 삼아 관리하고 있다. 특히 AD. 4세기에는 부처의 치아(송곳니)를 북인도에서 가져와 국가 보물로 취급하고 있으며, 지금은 1815년 영국군에 의해 막을 내린 싱할리 왕조의 왕궁 터에 지붕을 순금으로 장식하고 불치사(Dalada Maligawa:Temple of Tooth)라 이름 지은 사원에 보관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스리랑카인들의 혼이며 소승불교의 종주 국가로서 전 세계 포교의 핵이 되는 곳이라고 스리랑카인들은 주저 없이 말한다. 특히 매년 8월에는 이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 축제 기간 중에 부처의 모조 치아를 둘러싸고 2주간에 걸쳐 요란하게 장식한 코끼리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벌이며 함께 경축한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53,000여명의 승려(Buddhist Bhikkhus)들이 6,000여 개의 사원에서 살고 있다. 외무부. p.73.
2. 힌두교 a. 힌두교의 교리와 발전 힌두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교리나 의식 등 표현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힌두교를 설명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시아 종교 가운데 힌두교는 전 세계적 종교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흡수력과 포용력 때문에 기독교를 위시한 다른 종교가 정면으로 도전을 받기보다는 흡수되거나 혹은 타종교를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힌두교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발전되었거니와 너무나 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이해하기가 어렵다. 전통을 따라서 리쉬(Rishes)라고 불리 우는 영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그 규범들이 알려 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규범들은 시간을 따라 흘러 왔고, 철학자들에 의해 수정되어 왔다. Ranjit De Silva. Discipling the cities in Sri Lanka. (Sri Lanka; Church growth research centre, 1985), p.12.
힌두교는 다른 종파와 달리 창설자가 없고, 교리도 없으며, 제도화된 기구가 없다. 또한 힌두교는 신앙 형태가 다양하여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보인다고 할 만큼 신앙의 실천과 의식이 다르다. 힌두교의 과거나 현재는 높은 자의 신앙에서 낮은 자의 것까지, 피압박자의 것에서 압박자의 것까지 많은 신앙과 윤리를 포함한다. 힌두교의 본질은 살고 살게 하라는 것이다. David A. Brown, A Guide to Religions (London: SPCK, 1980), p.63.
힌두교는 역사의식과 도성성의 결여되어 내일을 위한 창의적인 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의 카르마 교리는 힌두교인들에게 고난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의 와중에서도 놀라운 인내심을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또한 카르마로 인하여 힌두교는 운명과 복종의 종교로서 인생의 미래는 이미 이마에 쓰인다고 한다. 따라서 운명은 신이나 인간도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J.앤더슨, <비교 종교론> 박영관 역 (서울: 예수교 문서 선교회, 1978), p. 114.
일반적으로 힌두교라고 하면, 베다(Vedas)를 말하는데 그것은 모든 종교지식 즉, 티루무라이스(Thirumurais)의 근원이 된다고 한다. 베다는 사이비테스(Saivotes)의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쎄바람(Thevaram)과 씨루바카캄(Thiruvacakam)은 6-9세기의 사이비테 성도들의 찬송가 모음집이 있다. b. 스리랑카의 힌두교 스리랑카의 힌두교 교세는 타밀인 2백6십만 명중 2백 2십만 명이 힌두교도들 이다. 싱할라족을 포함한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힌두교가 스리랑카에 들어와서 토착화 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스리랑카 타밀족의 최상의 신으로서 시바(Siva)신을 따르고 경배하고 있다. 시바는 힌두교 3위의 마지막 신이다. 여기서 3위는 브라마(Brahma), 비쉬누(Vishnu), 시바(Siva)로 구성되어 있다. 브라마는 모든것의 근원이며, 창조의 신인데 스리랑카에는 브라마의 사원이 없고, 비쉬누는 보존의 신인데 몇 개의 사원이 있다. 그러나 시바신은 파괴의 신이요 중생의 신이기도 하다. 북쪽 자프나 지방에 많은 사원이 있다. 시바신의 아들인 수브라마니야(Subramaniya)는 매우 대중적이며 심지는 불교인들이 그를 카타라가마 데이요(Katharagama Deiyo)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오장 "제자훈련을 통한 스리랑카 선교전략" (석사학위 논문, 세계선교 대학원,1994), pp.33-34.
스리랑카의 힌두교인들 대부분이 사이비티(Saivites) 종파이다. 그들은 주로 시바를 숭배하고 있으며, 사이비즘의 시단타(Siddhanta) 학교에 다니고 있고, 그곳은 남인도의 영향력이 큰 곳이다. 스리랑카의 힌두교는 범신론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많은 신들을 섬기는 범신론이다. 범신론적인 문화는 미신이나 귀신의 힘이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다. "Polytheism"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Vol.14,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1982), pp. 784-785.
이러한 현상은 스리랑카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힌두교인들은 그들 자신의 귀신들을 가지고 있는데 때때로 그 악령들에 사로 잡혀 춤을 추거나 거짓 예언을 하기도 한다. 힌두교는 비록 인도, 네팔, 스리랑카, 싱가폴 등 국한된 지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힌두교의 신비종교를 기초로 한 초월명상은 미국과 서구에 크게 번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단인 뉴 에이지 운동은 힌두교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는 동양 종교의 모체가 될 정도로 비중을 차지한다. 불교와 시크교 그리고 자이나교 등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동양 종교는 대부분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것은 힌두교에 입은바 영향이 크다. 전호진, <종교 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 전략> (서울: 개혁주의 신행 협회, 1992), p. 173.
3. 회교 a. 회교의 특성 힌두교와 불교는 인도의 산을 배경으로 형성하여 정적이고 사색적이라면, 회교는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형성하여 동적이고 전투적이다. 회교는 자기 종교에 대하여 여하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지만, 회교는 아라비아에 이미 있었던 애니미즘과 유대교와 기독교와 기타 종교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종교이다. 계시록에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회교 사원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씩 스피커를 통하여 큰 소리로 코란을 읽는다. 이처럼 코란경을 중시하며, 예언자의 말과 교훈을 동시에 중시한다. b. 회교의 문제점 회교의 문제점은 그들이 전투적 종교라는데 있으며, 획일주의적 문화관으로써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경직된 문화관을 유지한다. 그리고 남녀의 불평등 즉 한 남자가 네 명의 여자를 거느리는 것을 합법화하거니와 여자의 신분과 활동을 극히 제한한다. 마지막으로 원죄를 인정치 않으므로 동양종교가 안고 있는 약점을 가짐으로 인해 회개와 개혁이 없는 종교로 전락하였다. c. 스리랑카의 회교 회교는 스리랑카에 6,7세기경에 알라의 율법을 선포하는 아랍의 선지자 무하마드(Muhammad)에 의해서 전해 졌다. 그는 아랍 형제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들을 파괴하기 위해 보내졌던 사람이었다. 회교의 가르침은 온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것이다. 코란은 거짓말하는 것과 도적질하는 것과 간음과 살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코란은 부모를 공경하고 노예들에게 친절하며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시험과 준비의 기간으로 설명하고 있다. Ranjit de Silva. p.14.
오늘날의 스리랑카 회교도들은 오직 이슬람의 교리만을 최고 우선순위로 따른다. 스리랑카인들에게 "싱할리족인가? 타밀족인가?"라고 물으면 "무슬림"이라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이어서 "스리랑카인 인가?"라고 물으면 "무슬림"이라고 대답한다. 이들에게는 오직 무슬림뿐이다. 아시아 종교 중에서 가장 선교가 왕성하며, 전 세계적인 종교로 확산하는 것이 회교이다. 회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포괄성과 호전성으로 인하여 선교는 물론 국제 정치에서도 심각한 이슈로 등장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회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하여 500% 이상 성장하여 21세기에는 기독교를 능가할 것으로 본다. 스리랑카에는 약 십만 명의 회교도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무어족과 말레이족이 이에 속한다.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8% 가량 되는데 이는 천주교를 포함한 개신교의 숫자를 앞지르고 있으며 이들은 주로 생리학적 성장으로서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국회에서도 독립 정당이 있어 2-4명의 회교인을 특별 배당해 줄 정도로 이들의 세력 확장은 기독교 선교의 장애물로 부상하고 있다.
II. 스리랑카의 기독교 A. 기독교 역사 1. 포르투갈의 선교 스리랑카의 종교는 민족과 정치에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종교를 인정하지만 불교를 최우선한다."는 헌법이 말해 주듯이 불교는 국교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와 장려를 받게 되어 있다. 외무부. p.73. 이러한 스리랑카의 상황 속에서 불교는 소승불교의 종주국으로 자리 잡고, 전 세계로 포교하기 위한 불자들의 신앙심이 깊다. 이러한 스리랑카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의 남부에서 복음을 전하며 AD70년경에 스리랑카에 까지도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성 도마교회가 있는 등의 학설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혹은 고고학적인 확실한 자료가 없다. 550년경 페르시아 상인들이 기록한 문서 크리스천 분포도라는 글에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Persian Nestorian) 크리스천이 스리랑카에 살면서 기지를 세웠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나 스리랑카인들에게 선교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보고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스리랑카의 기독교 역사는 대체로 식민지 역사와 함께 시작이 되었다. 1505년 포루투칼이 식민지 정책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빈센트 선교사가 카톨릭을 전해 주었다. 카톨릭은 기독교인의 90%를 넘고 있으며, 주로 서쪽 해안을 따라 "카톨릭 벨트"라고 불리는 이른바 쟈프나. 멘나, 네감보 등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어부들을 중심으로 하여 뿌리를 내렸다. 특히 1543년에는 프라시스칸(Franciscan) 선교사들이 13개 교회에서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문오장, p.39.
초기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혜택도 받았으며, 직업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상류층의 여러 가족들이 개종을 했다. 대부분의 유명한 카톨릭 선교사들은 프란시스 사비에르들 이었다. 또한 이때에 식민지 통치자들은 힌두교 사원 500여 개 이상을 파괴 시켰으며, 포르투갈인들은 부처의 치아를 스리랑카에서 없애 버리려고 하기까지 했다.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어부 계급인 카라바(Karava)였으며, 여전히 그들은 오늘날 카톨릭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1557년에는 곳데(Kotte)왕조의 싱할리왕 드라마팔라(Dharamapala)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그래서 후에 왕의 자리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Klaus Baer. "Area research Sri Lanka" (Grace Theological Seminary: winon lake, 1991), pp. 14-15.
이렇듯 포르투갈인들은 스리랑카에 카톨릭을 전해와 서해안을 따라 바닷가 어부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벌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며, 스리랑카에서 카톨릭 선교의 자리를 굳혀 놓았다.
2. 네덜란드의 선교 1638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포르투갈인들을 스리랑카에서 몰아 내면서 식민 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20년 이상이나 포르투갈의 중요한 상업 부서들을 정복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1658년 자프나에서 포르투갈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군인들은 자프나 왕국의 주인이 되었고 실론섬의 주요한 군주가 되었다. Board of scholars. Ceylon-Its History, people Commerce,Industries. (New Deli: Sri satguru publishers, 1986), p.70.
스리랑카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에 네덜란드인들은 불교와 힌두교인들 뿐만 아니라 카톨릭을 믿는 이들에게까지도 개혁교회 신앙을 강요했다. 이 강요는 모든 스리랑카인들에게 행해 졌으며, 고용과 정부와 승진 등에 있어서 주요한 작용을 했고, 결국 기독교 정부가 되는 준비가 되었다. 1722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약 840,0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성직자뿐만 아니라 결신자들에게는 동인도회사에서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결신자의 수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 Klaus Baer. p.16. 네덜란드에서 온 선교사들은 기독교인 정부에 의해 결국 그들의 의도인 성서적인 방법대로 전도하지 못했다. 특히 네덜란드의 성직자인 빌립 바디야스(Phillip Baddiyas)는 타밀어와 포르투갈어를 익히고 스리랑카 전역에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정부가 그를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1740년대에 실론의 시골 지역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교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선교사역을 계속할 수 없어서 얼마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3. 영국의 선교 영국이 인도를 정복하고 있을 때 네덜란드가 스리랑카를 식민통치 하고 있으므로 쉽게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그들의 상업이 활성화되는데 전도가 방해된다고 하여 선교사업을 심하게 반대했다. Ibid.,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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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콕 박사 - 스리랑카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5년에는 2명의 선교사가 런던에서 콜롬보에 도착했다. 그리고 1812년에는 성공회를 시작하였고, 30년간 스리랑카 선교사로 활약한 침례교 선교사 제임스 차터(James Charter)가 급히 파송 했으며, 이어 침례교회는 1819년는 한웰라(Hanwella)에 1825년에는 마탈레(Matale), 1841년에는 캔디(Kandy)에 각선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감리교회도 1814년 미국의 감리교 감독을 지내고 은퇴하여 영국에 돌아와 있던 중 아시아 선교를 위하여 콕(Coke) 박사의 인솔하에 5명의 선교사가 런던을 출발하여 선교지로 오다가 긴 여행 중 콕박사는 선상에서 죽고 그의 일행 5명의 선교사들이 스리랑카의 남쪽 항구 골(Galle)과 웰리가마(Weligama)에 도착하여 전국에 많은 학교와 교회들을 세웠다. 그들은 또한 바티콜로와 마타라 지역에도 들어가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아시아 최초의 감리교회는 1814년에 설립된 페타 감리교회는 수도 콜롬보에 세워져 있다. 1820년에는 모라투와(Moratuwa)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4.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선교 1816년에는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가 사역을 하게 되었고 그제야 영국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이로 말미암아 형식적인 개혁장로교 교인이었던 사람들이 본래의 종교인 불교, 힌두교, 회교 그리고 카톨릭으로 되돌아갔다. 이때의 교인 통계는 카톨릭 교인이 72,394명, 네덜란드 개혁장로교회 교인이 95,580명, 감리교회 교인 240명, 영국 성공회 교인200, 침례교회 교인 100명 Mendis, Lalith. A Vision Amidst Tears. A Missionary Report. (Sri Lanka: Homsa, January 1989), p. 8. , 그리고 600,000명 이상이 불교, 힌두교, 회교로 되돌아갔다. Klaus Baer., p. 17.
1881년에는 성공회(Anglican Church)와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는 법적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었으며, 1883년에는 구세군(Salvation Army)이 들어와 급속하게 선교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 후 많은 자생 교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으며, 많은 선교 단체들이 들어와 불교도들과 힌두교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였다. 1888년에는 240명의 선교사들이 주로 교육 사업을 펼쳐 1120개의 학교가 세워지기까지 하는 등 1900년에는 로만 카톨릭을 포함하여 전 국민의 9.8% 이르는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는 약 300,00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Ibid. p.17.
B. 해방 후의 선교 1. 해방 후의 기독교 상황 해방 후 1949년 스웨덴 선교사에 의해 등대 선교교회(Light House Mission)가 들어오고, 1955년에는 `Back to the Bible"이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식민지가 끝나자 식민지를 따라 들어온 자국인 기독교인들과 많은 선교사들이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아울러 소위를 영어를 사용하며 상류층의 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도 해외로 떠나 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반서구,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나자 급격히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 최근에는 카톨릭 6.3%, 개신교 0.8%로서 스리랑카 자생교단을 포함하여 약 30개 교단이 있다. Lalith Mendis. A VISION AMIDST TEARS IN THE ISLAND OF SRI LANKA. (Colombo: HOMSA,1989), pp. 4-10.
그리고 불행하게도 1960년 정부에서는 그간 선교사들이 정성스럽게 세워 놓은 각종 학교들을 정부 소유화 해 버렸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쳤고 십자가를 교실에 두었으나, 학교가 정부의 소유로 넘어간 뒤에는 종교의 시간에 대부분 불교를 가르치고 있으며, 십자가가 있던 자리에는 불상을 갖다 놓았다. 1964년에는 영국감리교회 (British Methodist Church) 로부터 스리랑카 감리교회(Ceylon Methodist Church)가 자치를 시작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1965년에는 미국 빌리그레이엄 목사의 선교 단체인 십대 선교회 (Youth for Christ) 가 들어왔다. 그리고 1970년에 모든 집 선교회 (Every home Crusade) 등의 선교 단체와 교단들이 들어와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는 싱할라어로 새번역 성경이 출간되는 등 현재 스리랑카에는 전 세계에서 온 각종 선교 단체들로부터 약 90여명의 선교사들이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여 선교 활동을 펴고 있다.
2. 근대의 기독교 상황 현재 스리랑카의 신구교 각 교회의 교세 현황을 살펴보면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6.8%를 차지하는 로만 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의 교인수가 1,030,000 명으로 전체 기독교 인구의 87% 이상을 차지하며, 이들은 3분의 2가 서해안 바닷가에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홍차 재배지의 인도 타밀인들과 도시 빈민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카톨릭의 자료에 의하면 선교적 차원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바 세계교회 주의와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Immaculate. "Evangelization in Sri Lanka". East Pastoral review, vol. 25, 1989. p. 418.
이들의 선교 활동은 비카톨릭 신자들에게 카톨릭 신자에 비해 두 배로 역점을 두어 관심을 기울이자는 것으로서, 결신을 시키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종교가 얼마나 좋은가 스스로 평가를 내리게 하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 대화하자는 것이다. Ibid., p.419.
또한 사회 활동으로서 피난민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도시의 빈민들에게 사회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 세워 주고, 특히 콜롬보에 있는 슬럼가에 이 일을 진행하며 낙후된 복지 사업을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다. 대체로 개신교회들은 교회 숫자에 비해 목회자의 숫자가 적으며, 행동 양상이 매우 느긋하여 복음에 대한 급박성이 없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있다. 양정하 선교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스리랑카 교회의 성장은 영적인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재정적인 문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양정하. 1993년 9월. 선교 보고서.
또한 그는 기독교 연합회 소속 교회들 즉 성공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장로교회, 구세군, 남인도 교회는 전국의 주요 도시에 교회가 세워져 있으나, 거의가 죽은 교회들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Ibid.
개신교 선교의 또 하나의 장애물은 교회 밖에도 있다. 불교 사원 안에 있는 다마 학교(Dhamma School)에서 불교계의 중들은 교과서와 수업을 통해 기독교는 외국 종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1956년 스리랑카에 불어 닥친 민족주의의 역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는 이때에 기독교가 외국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도에 두터운 장벽과도 같다. 그러나 지난 5년간의 스리랑카 복음화는 과거 50년간의 결신자보다도 많은 숫자를 내었다. Klaus Baer, p. 21.
아직도 스리랑카의 교회는 여전히 어린 상태에 있지만 몇몇의 자유교단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기독교 연합회 소속의 교회들과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가르치는 신학교를 통해 서서히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III. 한국교회의 스리랑카 선교 역사 A. 한국 교회의 스리랑카 선교 초기 한국교회의 스리랑카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1970년대 중반 노봉린 박사 등의 선교 관계자들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선교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몇몇 목회자들이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에 가서 교육을 받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스리랑카 거주 한인 가운데 선교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간간이 목회자 생활비 후원과 성탄 축하 행사 보조금 등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스리랑카 선교의 시작은 1988년 이요한 박사의 스리랑카 선교여행을 시작으로 시작 됐다. 스리랑카에 도착한 이요한 박사는 Every Home Crusade, Ceylon의 총무인 쌤 데바발라싱함(Mr.Samuel Thebavalasing)씨와 선교 파트너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김홍도 목사와 이요한 박사는 쌤씨와 함께 스리랑카 선교 단체인 HOMSA와 연합으로 "Power '88"을 개최하여 스리랑카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문서선교, 교회 개척 사역 및 신학교 설립 등을 추진하여 왔다.`89년에도 김홍도 목사를 강사로 하여 목회자 훈련 프로그램인 "Power '89"을 가졌다. HOMSA의 설립자이며 스리랑카 책임자인 쌤 데바발라싱함씨와의 사역이 방대해 지자 이요한 박사는 한국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이로써 스리랑카에 정부에서 발행하는 선교사 비자를 가진 공식 첫 번째 한국 선교사는 이성상 선교사가 된다. 이성상 선교사가 선교지로 들어오기 전에도 한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는 장로교 파송 선교사인 최00 목사가 1989년도에 들어와 있었고, 네비게이트 선교회에서 직업 선교사로 보낸 이00 선교사를 비롯하여 대학생 성경 읽기 선교회(UBF)등이 직업을 가지고 사역 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업 비자나 특수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B. 한국 선교사들의 초기 사역 1. 교회 개척 사역 이성상 선교사는 이요한 박사와 HOMSA 사이에서 진행되어 온 60여 개 교회의 목회자 생활비 지급과 목회자 세미나 등의 교회 관리와 무 교회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주요 사역으로 하고, 스리랑카의 고산 지대인 햇톤 지역에 세운 노튼 브리지 신학교 사역, 기타 문서 사역 등을 HOMSA 내에서 사역해 왔다. 교회 개척 사역으로는 스리랑카 전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개의 각기 다른 교파와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독립 교회들과 몇 개의 감리교회, 성공회, 구세군교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 신학교 사역 노튼 브리지 신학교는 한국선교연구소 이요한 박사의 후원으로 21 에이커의 넓은 땅 위에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1991년 9월 개교하여 신학교로 문을 열고 O. M 선교회 소속의 독일인 클라우스 베어(Mr. Klaus Bear)선교사와 스리랑카 최북단 쟈프나 지역에서 전쟁을 피해 나온 솔로몬 라지(Rev. Solomon Raji) 목사와 협력하여 신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3. 어린이 사역과 문서 사역 어린이 선교 사역자인 아브라함 폰네야(Mr. Abraham Ponniaya) 부부의 선교 사역을 활성화하도록 매월 월급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사무용품과 타자기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영화 선교회를 세워 미국 빌리그레함이 주관하는 영화 선교회로부터 16mm 필름을 후원 받아 전국에 영화를 통해 사역하기 위해 아난단 목사(Rev. Anandan) 를 후원하였으나 영사기를 구입하지 못하여 큰 성과는 없었다. 문서 선교의 일환으로 성경, 전도지 보급과 찬송가를 인쇄하여 보급하기도 했다.
4. 인도(India) 사역 스리랑카 선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HOMSA 교회가 세운 방갈로 근처의 Kola Gold Feld (K.G.F)지역의 15개와 스리랑카에서 인도로 파송되어 온 빅터 라자마니 선교사(Rev. Victor Rajamany)사 사역하는 마드라스 지역에 1개의 교회를 맡아 스리랑카 선교 사역의 방법처럼 해왔다.
C. 스리랑카 감리교회와의 협력 사역 1. 스리랑카 감리교회 전도국 사역 1992년 빌립 선교회(The Korean Methodist Church Philip Mission Association)는 스리랑카 감리교회의 신나우라니 교회 봉헌식 겸 선교지를 시찰한 후, 언어와 문화를 익히면서 사역을 해오던 이성상 선교사를 한국 선교연구소(Korea World Mission)와 협의하여 스리랑카 감리교회와 선교사역을 하도록 선교정책을 바꾸어 스리랑카 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선교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리랑카 감리교회에서는 정부로부터 허가 받은 9개의 비자 중 하나인 선교사 비자를 주었고 감리교 본부 선교국 산하에 사무실과 사택 임대료를 제공했다.
2. 신학교 사역, 교회 개척 사역, 문서 사역 스리랑카 감리교회에서는 정회원(Member of Sri Lanka Methodist Conference) 목사로, 전도국의 실행 위원과 칼엘리야 신학교(kal Eliya Training College) 그리고 칼쿠다 신학교(Kalkudha E.T.C) 이사의 직임을 맡아 사역해 왔다. 특별히 교회 개척 사역과 교회 개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신학교 사역, 그리고 기존 교회를 부흥시키며 개척교회를 돕기 위한 감리교 교회 성장 연구원(Church Growth Committee, Methodist Church)을 전도국 산하에 설립하여 목회자 훈련을 해 왔다. 신학교 사역으로는 1993년 6월에 칼 엘리야 신학교를 설립하는데 동참하여 한국의 빌립 선교회를 통하여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오면서 선교학, 전도학, 교회성장학 등 실천신학 분야를 맡아 강의해 오고 있다. 또한 타밀어를 사영하는 종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는데 동참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한극 주 후원자의 이름을 따서 은암 신학교라고 불리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감이 있어 요한 신학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지역 이름을 따서 칼쿠다 신학교라고 하고 1994년 9월에 개교하여 한국선교 연구소의 전액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역사가 오랜 된 기존 교회를 부흥시키며 개척 교회들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감리교 교회성장 연구원을 감리교 전도국내에 설립하여 목회자들을 교회 성장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며 그와 관련된 도서를 발간하고 있다. 그 외 문서사역으로는 전도국을 통해 격월로 발행되는 "교회 성장" 잡지와 단행본으로 "속회(Home Cell)"와 "교회 성장을 위한 목회 형태","청지기론"등을 발행하고 있다.
출처 : 이성상 선교사 / 가져온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