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TC8기 훈련생 아웃리치 다녀와
어린이 의료 교회개척 등 여러사역 활발
2월 15일 새벽 2시 방콕국제공항 . 세계선교훈련원 PMTC 8기 평신도·전문인 과정 훈련팀원들은 캄보디아 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현지에서 선보일 드라마 연습에 피곤한 줄 몰랐다.오히려 캄보디아에서 만날 어린 친구들을 생각하며 가슴 벅차했다. 또 전문인 사역자로 캄보디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평신도 선교사들을 만날 생각에 기대감 역시 컸다.
15일 오전 9시 30분 드디어 캄보디아에 도착한 훈련팀은 이들을 마중나온 구현서 선교사를 따라 구 선교사의 사역지인 C지역으로 서둘러 향했다. 캄보디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불교사원이 사회활동의 중심장소로 사용될 만큼 강한 불교국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구 선교사는 4개 교회를 개척하며 선교사역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캄보디아는 인구 35%가 하루 0.5달러 이하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7∼14세의 어린이 중 90%가 부모를 도와 농업 및 집안 일을 돕고 있어 정규 교육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구 선교사는 이러한 환경 개선을 위해 어린이 사역을 중점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어린이 사역의 부흥으로 원주민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PMTC 8기 평신도·전문인 과정 훈련팀은 구 선교사가 세운 4개 교회를 돌며 어린이 사역과 의료 사역을 3일 동안 전개했다. PMTC훈련을 받고 캄보디아 아웃리치에 동행한 치과의사 윤도하 집사(순복음의료센터)는 “하루 평균 70여 명의 환자가 내과 및 치과 진료를 받았다. 의료센터 회원들과 의료선교를 다녀보았지만 이번 캄보디아 사역은 여느 의료 선교 사역과는 느낌이 달랐다. 전문직을 살려 사역하는 평신도 선교사들을 보면서 많은도전을 받게 되었다. 중국에서 의료 사역을 전개하고자 하는 나에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마인드를 갖게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PMTC 훈련을 받고 늦은 나이에 사역의 길로 들어선 구현서 선교사의 선교활동은 이번 아웃리치에 참석한 훈련생들에게는 좋은 귀감이 되었다. 훈련생들을 이끈 이상극 목사(현 국신원 교육연구소장)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현지인들을 감싸안은 사랑 많은 사역자다. 구 선교사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며 순복음의 영성으로 제자들을 양육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말했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구현서 선교사 외에 황 신 선교사가 파송되어 활동중이다. P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황 선교사는 우리교회에서 캄보디아로 파송한 첫 선교사로 10년 째 사역하고 있다.
캄보디아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23년이었고, 1954년 시하누크 왕은 기독교 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캄보디아에 종교적인 자유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1965년 시하누크 왕이 북베트남 곧 베트공과 연맹을 맺고 베트공이 캄보디아에 군대를 주둔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미국이 보복으로 캄보디아 영토에 폭격을 가하자 캄보디아는 기독교인을 조직적으로 핍박하게 된다.
크메르인 목사들이 감옥에 갇히고 교회가 핍박받고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 군이 캄보디아 전역을 휩쓸면서 모든 선교사들을 캄보디아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크메르 루즈 군은 크리스천 목회자에 대해 잔인하고 조직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사회의 모든 악을 정화시킨다는 명분에서였다. 이 전쟁 기간 중 캄보디아 전 목회자 중 단 세 명 만이 살아남을 정도로 학살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도시의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굶주림, 충격, 고문과 살상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난민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됐다. 고통과 아픔속에서 캄보디아의 교회는 성장하였고 많은 지도자들이 양성됐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모임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통제하던 베트남 군인들이 국제 여론에 밀려 철수하게 됐을 때 몇몇 기독교인들이 정부에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0년 4월 14일, 부활주일 프놈펜에서 개신교 가톨릭을 포함하여 1500명이 모여 에큐메니칼 예배로 첫 공식 예배를 드리게 됐다.
캄보디아는 1993년 종교의 자유가 다시 주어지면서 다시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황 신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들어간 시기도 이때 즈음이었다.
이상극 목사는 “10년 전 이 곳을 방문했을 때만해도 캄보디아는 우리나라 1950∼60년대에 해당하는 낙후된 모습이었다. 황 신 선교사의 교회는 당시 어린이와 교사 몇 명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청년과 장년을 합쳐 70여 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거듭 성장했다”며 제자 사역의 성공적 모델로 황 선교사의 사역을 꼽았다.
PMTC 8기 평신도·전문인 과정 훈련팀은 17일 오후 P지역으로 옮겨 황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문적 사역을 전개하고 있는 다양한 사역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훈련생 윤재남 성도는 “예비 선교사의 마음으로 이번 아웃리치에 임했다. 황 신 선교사님의 경우 현지에서 많은 선교사님들과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 있어 효과적으로 사역하고 계신 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치과 기공사로 일하는 윤 성도는 황 선교사 뿐 아니라 의료, 유치원, 신학교 운영, 학생 신분으로 캄보디아에 들어와 전문인 사역을 전개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전개할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게 됐다며 흐뭇해 했다.
PMTC 8기 평신도·전문인 과정 훈련팀은 이번 아웃리치에서 황 신 선교사의 사역지 중 한 빈민가를 방문하고 집을 지어주는 사역도 전개했다. 훈련생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현지 사역자와 일하면서 선교라는 공통된 끈으로 하나가 되는 귀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었다며 좋아했다.
이상극 목사는 “선교훈련을 받는 훈련생들에게 있어 이론도 중요하지만 현지 적응훈련을 통해 실제 선교사로 나갔을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리 체크하는 것도 필요하다”며 닷새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캄보디아 아웃리치가 훈련생들에게 선교지와 선교사를 이해하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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