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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정재익 선생은 한국 시조계의 거목인 이호우, 정완영의 맥을 잇는 영남시조계의 원로이다. 지난 1974년에 시조집 『무화과』를 펴냄으로써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정 시인은 영남시조문학회 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한국문인협회 대구지부장을 지냈다. 정운시조문학상(제8회) 대구과역시문화상 문학부분(제 11회) 한국시조시인협회상(제8회) 한국예총문화상 공로상(제12회)를 수상한 시조시단의 중요한 작가인 셈이다.
시조계에서는 올해를 현대시조 100주년이 되는 해로 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해서 이미 실행한 바도 있고 앞으로 할 계획인 행사도 있다. 시조시인들이 시조를 한국문학의 중요한 영역으로 복권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 듯하다.
계간『사람의 문학』에서는 진작에 시조를 주목해 왔다. 대구가 한국 시조단의 중심이며 중요한 작가가 대구에서 많이 배출되었다는 인식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대문학 전문잡지가 시조와 소통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우선은『사람의 문학』편집위원이 시조에 대해 무지한 이유도 있고, 현대문학을 주로 싣는 잡지가 시조와 소통한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보다 원론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현대시조 100주년을 맞아 문무학 시인의 도움을 받아 시조특집란을 꾸미게 되었다. 시조에 관련한 비평과 시조시인 선정은 문무학 시인이 맡았고 문학인물대담은 내가 맡았다. 내친 김에 원로 시조시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대담도 시조 시인에게 부탁했지만 이것은 현대시를 하는 사람이 해도 더 재미가 있을 것이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시조에 무지한 내가 나서게 되었다.
굳이 인연을 드러내자면 나도 시조와 전혀 무관한 사람은 아니다. 내가 최초로 진지하게 받은 문학수업은 바로‘시조’공부였다. 1975년 대구 능인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첫 국어수업시간에 당시 국어 교사가『종루』라는 시조집을 들고 와서 바로 여러분의 교장 선생님께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유명한 시조시인이란 말씀을 하시면서 시조집에 실린 시조를 몇 수 읽어 준 것이다.
이후 문예반이던 나는 도서관이나 과학실험실에서 그 교장선생님에게 시조창작론을 들었고 현대시보다 시조를 쓰라는 권고를 받은 바도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것은 교장선생님께서 '황-괴-벽-담' 론이라는 것을 펴셨는데 시조를 쓰면 처음에는 거칠다가(황), 조금 나아가면 나름의 독특한 스타일이 생기고(괴), 다음에는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벽), 다음에는 최고 경지로 물 흐르듯이 담담하게 흘러간다는 것(담)을 주장하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참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가끔 수업시간이 지겹고 우유와 삼립방을 세트로 주는 간식이 좋아서 교장선생님에게 일부러 라도 요청해 강의를 듣곤 했는데 시조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의 열정과 자애로운 눈매를 잊기 어렵다. 그 교장 선생님은 바로 시조시인 초운 이우출 선생이시다. 문경출신으로 현재 문경 김용사에 시조비가 서 있고, 낙강동인 회장과 한국문협 경북지부장(당시 대구시 통합)을 역임하신 영남시조단에서는 중요한 시인의 한 분이다.
그러니 일찍이 나도 시조와 인연을 맺은 바 있지만 비재하여 시조를 계속 쓰지 못하고 자유시 쪽으로 흘러 들고 말았다. 그런데 현대시조 100주년을 맞아 내가 관여하는 잡지에 시조 특집란을 꾸미게 된 것도 고교 때 맺은 인연이 작용한 것이라면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참 인연이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조와 관련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교보생명에서 펴내는 『대산문화』라는 문화교양 계간지가 있다. 2006년 가을호에 보니 중견 시조시인인 이지엽 시인이 현대시조 100년을 맞아 쓴 짧은 소회가 있는데 시조 관련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하는 의미있는 글이다. 이 시인의 주장에 다르면 현대시조는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邱女士)가 쓴「血竹歌」가 기준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단등용문, 교과서 등재, 대한민국예술원회원 선출, 대외적 소개나 참여, 각종 기금지원사업 등에서 자유시나 소설과 같은 장르에 비해 여러가지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데 일리가 있는 주장인 것 같다. 그러면서 이지엽 시인은 "현대시조는 우리 민족과 성쇠를 같이할 것"이며 "모든 것이 속도화 되어가고 정보화 되어 가는 시대상황에 그 짧은 형식적 장점으로 오히려 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원로 시조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했다. 참고로 정재익 선생은 본지 편집위원인 정대호 시인의 부친이다. 부자지간에 같은 시문학을 하는 것도 참 아름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 부친이기 때문에 예는 다하였지만 혹시 세간에서 오해할 띄워주기 식 대담이 안 되도록 나름대로 주의를 다 했다.(대담 중 호칭은 어르신으로 불렀지만 정리하면서 편의상 선생님으로 바꿨다.)
김용락: 선생님 출생부터 좀 말씀해 주시죠. 약력을 보니 1930년생이던데 정확한 것인지요?
정재익: 맞아. 1930년 12월 1일 음력으로 구월 스무하룻날이지요. 청송 지보면 부곡리에서 태어났어요. 본관은 청주인데 청주 정 시는 전국에 약 4만 명 정도가 살고 있지요. 경북 북부지역에는 안도군내에 많고 영주, 봉화에도 살아요. 청주 정 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 중랑좌인데 아마 중국에서 온 듯하고 15세기 임란 때 활약한 좌의정을 지낸 약포 정탁 대감과 한강 정구 선생이 알려진 분들이지요. 정구 선생의 서원이 성주에 있지요.
김용락: 아 구렇군요. 정구 후손이시군요. 정 한강은 성주 수륜에 회연서원이 있고 저희들이 고등학교 때 "암혈에 눈비 맞아..."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 작가로 알려진 분인데 그 분 후손이군요.
선생님의 부친도 선비 이셨는지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정재익: 부친은 진보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먹고 살 정도였고 일꾼 1명 정도 있는 평범한 살림이었지요. 증조부 때는 100석 정도했고, 한약방을 경영했습니다. 부친은 선비에는 못 들고 그저 글을 아는 정도였고, 일정 대는 농감을 하시면서 농사도 짓곤 했습니다. 어머나는 무실 류 씨였고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았습니다. 부친은 59세에 돌아가셨고 모친은 일흔 두 살 때 돌아가셨지요. 내 형제는 4남매였는데 셋째 형이 스물 두 살 때 죽었지요. 고조부 때 진보로 왔고 그 이전 조상들은 안동군 임하면에서 살았어요.
김용락: 서장기 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정재익: 나는 진보 심상소학교를 1943년에 졸업했어요. 그 전에는 종조부에게 한문을 배웠지요. 내가 살던 부곡리에서 재 하나 넘으면 밀양 박 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그 동네에서 의성 김 씨 송산(松山) 선생이란 분을 모셔와 (동네 아이들이 집단으로) 공부를 배웠는데 나도 거기 끼어서 공부를 했지요. 박 씨 문중에서는 시나 제문을 짓는 사람 못 길러냈는데 정작 끼어서 배우게 된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것이지. 문중에서 종숙 어른이 공부를 하신 분인데 종숙 이후 문중에서 공부하는 삶이 있어야한다고 해서 막내로 공부를 많이 한 셈이지요.
1951년 안동사범 강습과를 3개월 다니고 1953년 교사 자격증을 받고 경북 영덕 달산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고 제대 후 청송군에 복직해 8년간 근무 후 대구시내 신암초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대구시내에서 8년 간 교직생활을 한 후 1969년 퇴직하고 사업으로 전환을 했지요. 내 나이가 40대 초반이었고 애들 많아서 공부시킨다고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사업은 큰 형이 알아서 도움을 많이 주셨지요.
학교에 재직 때는 글짓기, 도서관업무, 연구 발표 등 많이 했습니다.
김용락: 아주 열성적이고 우수 교사였군요(웃음). 이제부터는 문학이야기 좀 하죠. 어떻게 시조를 쓰시게 된 것입니까?
정재익: 나는 16-7세 때 한시를 배웠어요. 그러다가 27세 때, 청송에서 교직에 있을 때인데 현대시를 배우려고 조지훈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3년 간 방학 대면 서울로 찾아뵙고 사사를 받았지요. 그런데 조지훈 선생이 나에게 현대시보다는 시조가 좋겠다고 권했어요. 정 형은 한시도 많이 알고 영어를 잘 해야 자유시가 되는데 영어도 그렇고 하니 시조를 쓰라고 권하면서 편지를 써서 나를 이호우 시인에게 소개를 했어요. 그게 1961년이었지요. 내 처가가 한양 조 씨라서 인연을 맺은 것인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만한 인품을 못 봤어요. 선비의 기품을 타고 난 분이고 근본이 있는 집의 후예다웠어요. 내가 작품을 써서 보내면 줄을 긋고 붉은 펜으로 주를 달아서 보내주었지요.
조지훈의 소개로 이호우 시인을 만난 것은 1961년으로 내가 신암초등에 재직 때였습니다.
첫 인상은 아주 엄격한 부닝고 인품이 있으신 분이었지요. 이호우 선생에게 3년간 시조를 배웠고 다시 이호우의 소개로 김천의 정완영 선생에게 1964년부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백수 정완영 선생은 시조를 독학하신 분인데 시재를 타고난 분이라. 가락이 백수만한 분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인데 이호우는 격이 높고 과작인 반면 백수는 다작이면서 가락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시조단의 골격을 이룬 분은 호우와 백수라 할 수 있지요.
시조인으로 노산(이은상)과 가람(이병기)이 있지만 가람은 정확은 하나 시의 품격이 호우나 백수에 못 미쳐, 노산도 그렇고.... 특히 노산은 너무 다작을 해서 못 미쳐...
김용락: 그러면 선생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정재익: 스승은 호우와 백수인 셈이지요. 지훈은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서울가서 하루를 묶으면서 만났지만 자주 만나거나 오래 만나지는 못했지요. 이호우는 처음 만났을 때가 50대인데 술은 못 마시고 여대생들과 야외나 대구 근교로 놀러 다니던 것이 기억에 나.
김용락: 언제 등단하셨습니까?
정재익: 1974년 『무화과』를 내면서 등단했지요. 당시는 신춘문예나 시집출간으로 등단을 했는데 나는 시집을 냈지요. 첫 시집은 500권 찍었고 백수 선생의 서문을 받았지요.
(서문 일부 인용)
김용락: 첫 시집 낼 때 시에 몰두할 때입니까? 어땠습니까?
정재익: 사업으로 한창 바쁠 때 였습니다. 나는 1965년 낙강(洛江)동인이 주축이 된 영남시조문학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지요. 낙강은 이우출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였어요. 이 모임의 첫 회장이 이우출 선생이었고 다음 이호우 그 다음 정완영으로 이어졌는데 나는1977년에서 1984년까지 영남시조문학회 회장을 수 차례 했어요. 당시 회장 임기가 2년이었는데 아마 너댓 번은 한 것 같아요.
김용락: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정재익: 당시 사업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많은 것은 아니고 조금 후원한 형편이었지요. 동인지 낼 때 책값 만들어 넣기도 하고.
김용락: 이우출 선생님은 제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신데 그 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정재익: 이우출 선생은 인품이 반듯한 분이었지요. 성질도 곧고요. 아마 스님의 아들이었지요.
김용락: 이호우에게 시조를 배우셨는데 이영도 시인과는 교분이 없었습니까?
정재익: 이영도에게는 시조를 배우지 않고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어요.
김용락: 선생님의 대표작은 무엇입니까?
정재익: 내 대표작은 「겨울바다」입니다. 평자들도 그렇게 꼽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지금까지 신작 시조집 4권을 냈고 마지막 시선집을 내면서 신작 20편을 붙여서 냈으니 모두 5권의 시집을 낸 셈이지요. 이 다섯 권 가운데 「아침 산행」을 낼 때가 가장 기뻤어요. 작품성이 고르고 작품의 품격도 높기 때문이야.
겨울바다는 51세 때 쓴 작품이지. 위암 오진으로 수술받고 어려울 때 쓴 작품이야. 병원에서 퇴원해서 그해 12월 20일 경에 미리 선금을 주었던 원목을 받으러 울진 가는 길에 포항 지나면서 바다를 보고 쓴 것인데, 어려움에 처한 내 삶을 보는 것 같아 그래서 착상을 얻었지요. 울진을 두 번 가면서 마무리지었는데 그 해 이근배가 하는 『한국문학』12월호에 냈는데 평을 잘 받았어. 문무학 시인도 명작이라고 좋게 평가를 했어요.
김용락:「아침 산행」은 세 번 재 시집이고 1994년에 출간했는데 해설을 쓴 이근배 시인은 이 시집에서 "정재익 시인은 출발에서부터 자연과 현실을 넘나들며 관조의 세계를 시로 포착해내는 시를 써왔고 그 형식이나 내용도 보다 평면적이고 사유적인 기법을 고집해서 시조의 정체성을 살리는 데 힘을 쏟아 왔다. 그의 시는 현학적이거나 요설적이지 않고 명료하게 우리에게 삶의 실체를 보여준다"고 평하고 있던데 동의하시는지요?
정재익: 동의해요.
김용락: 올해가 현대시조 100년이라고 하던데 선생님은 '시조'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재익: 우리나라는 잘못돼 있는 게 시조는 국시인데 장르 순서가 시조가 첫 번째이고 시가 두 번째인데 거꾸로 돼 있어. 자유시는 서구시인데 왜 첫 번째 놓나?
김용락: 선생님은 주로 어떤 주제를 많이 다루었습니까?
정재익: 나는 한시를 짓던 게 남아서 목적시에는 내 시가 좋은시에 속해. 축하시, 정년시, 수연시 등... 한시에는 목적시가 많아서.
김용락: 한시 쓰신 게 시조 쓰는데 도움이 됐습니까?
정재익: 조금 도움이 돼. 한시는 기승전결, 댓구가 있는데 이게 시조 쓰느데 도움이 돼.
김용락: 후배 시조시인의 시를 많이 읽습니까?
정재익: 대구만 해도 잘 쓰는 사람이 많아. 지역적으로 봐서 숫자도 많고 시조 격도 위치에 오른 분이 많아요.
김용락: 한 두 명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시죠?
정재익: 그건 어려워. 너무 많아서. 선배로는 호우와 백수가 최고봉이지.
김용락: 왜 시조를 쓰게 됐습니까?
정재익: 한시보다 시조가 국시로 유망하다고 생각해서 쓰게 된 것이지요.
김용락: 마지막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정재익:「주왕산 가을이 와서」인데 앞으로는 그만 쓸거야. 힘도 부치고. 내 시조 가운데 연애시조도 한 편이 있는데 괜찮아요. 나는 시조를 정성들여 써서 외우는데 많이 욀 때는 50-60수는 외웠지.
김용락: 둘째 아들인 정대호 박사가 시인인데 아들이 시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재익: 나는 관여하지 않지만 자식들이 다 사업하는 것보다는 글 쓰는 사람 한 명이 있는 게 좋아.
김용락: 요즘 주로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정재익: 요즘은 집에서 기증본 오면 읽고 해. 눈이 잘 안 보여서 안경을 두 개 껴야 보여. 운동은 수성못 한 바뀌씩 돌아.
김용락: 얼핏 듣기로 이호우문학상 제정 대 돈을 많이 내셨다던데 사실인지요.
정재익: 이호우문학상은 1990년 10월 20일 제정했어요. 당시 나는 대구시문화상을 받았는데 수상금 300만 원 전액을 넣고 유족이 500만 원 내고 심재완 선생이 글씨와 그림 받아서 그것 팔아 보태고 해서 4000만 원 기금을 적립해서 시작했지요. 호우 선생은 낙강 회장을 지냈고 한데, 스승의 문학상은 만들어야 합니다.
김용락: 최근에 한 문학적인 일은 없습니까?
정재익: 동아일보에서 하는 인촌상에 추천위원으로 선정돼서 문학부문에 백수 선생을 추천했어요. 추천위원 되기가 쉽지 않을텐데 아마 지례 사람인 김종길 시인(전 고려대 교수)이 나를 추천 한가봐 그는 내 진보심상학교 4년 선배거든.
김용락: 호가 치운(致雲)이던데 무슨 뜻 인지요?
정재익: 구름이 올라서 비가 내린다는 뜻의 '운등치우'(雲騰致雨)에서 따 온 것이고 내가 지었어요.
김용락: 선생님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의문학> 2006. 가을호(51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