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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어떻게 고통을 해결할 것인가?>
이제 2부로 넘어갑니다. 제 강의는 항상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가 들어가는데요. 이제 2부가 "어떻게 고통을 해결할 것인가?" 입니다. "어떻게 고통을 해결할 것인가?"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
슬프게도 고통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의 문제이지 해결하느냐? 해결하지 마느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고통은 인간 실존이고 인간 실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입니다. 그래서 2부의 강의는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제 강의입니다.
부처님께서 한번은 길을 가시는데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슬피 눈물을 흘리고 절망의 마음으로 부처님께 와서 제발 당신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 "그래, 그래, 내가 너의 아들을 살려주마 살려주마, 하지만 네가 한가지 해야될 일이 있다. 해바라기 씨앗을 하나 가져와 다오. 단 한번도 죽음이 없는 집에서 해바라기 씨앗을 가져와 다오.
아들을 살리겠다는그 열망 속에서 죽음의 집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을 그분은 헤아리지 않고, 하루 종일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지요. 그러다가 저녁나절 모든 집이 죽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처님께 돌아와서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게 불교가 전해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똑같은 경우에 다르겠지요. 나인의 과부가 눈물 흘릴 때, 다시 살려주십니다. 그 외아들은 또 다시 그 과부보다 먼저 죽었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언젠가는 또 죽는데도 우리의 눈물을 보고 못견디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무튼 고통 앞에서 부처님과 예수님의 해결방법은 좀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다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고통은 삶의 실존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때, 그 고통 한복판에서 쉬게 된다는 것이지요. 마치 그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저녁나절에 평화를 되찾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그래서 첫 번째로 고통을 가슴에 품고 감내하면서 살자는 얘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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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회피했을 때>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26)
이미 지난번 "광야에서" 강의를 하면서 제가 십자가 얘기를 좀 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안고 따라오지 않으면 안된다. 제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십자가를 안고 온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고통을 안고 간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제가 "십자가를 안고 간다." 는 말이 그리스 말로 "바스타지엔" 으로 지고 간다는 표현이 아니라 "안고 간다" 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그랬는데요, 이것에 대해서 정신 의학자 트루니가 이렇게 얘기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십자가를 단순히 지고 가라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기쁘게 안고 가라고 가르치는 종교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만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운명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이라 하더라도 더 적극적으로 가슴에 품으면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이런 얘기를 정신 의학자 트루니가 하고 있습니다.
충만된 생활은 충만된 고통이 바탕이 됩니다. 사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이게 생의 실존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 우리 생에 풍파가 밀리면서 고통이 왔을 때, 바로 그 때 부터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피하게 되면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생의 많은 의미들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생에 있어서 참으로 그 고통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와야 될 많은 좋은 것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충만된 고통을 맛보는 준비가 돼야겠습니다.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우리 앞에 닥쳐온 고통, 생의 풍파를 인내하면서 안아주기를 거부한다면 때로는 영생조차도 우리는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죽어서 하느님 품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생조차도 우리는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왜?" 좀 전에 얘기했지요,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나의 뒤를 따라오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안고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우화지만 지금 이 맥락안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들러보니까 같이 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었죠. 너무 힘들어서 그가 예수님께 가서 청했습니다. "예수님, 이 십자가가 저한테는 너무 벅차니까 조금만 잘라 주십시요." 예수님께서 기꺼운 마음으로 그 사람의 십자가를 좀 잘라주었지요. 그리고 나서 보니까 좀 한결 가벼워졌어요. 그래서 이제 또 좀 힘을 내서 가지고 가고 있는데, 또 시간이 지나니까 힘이 들어요. 버겁구요. 그래서 도저히 못 갈 것 같아요. 그래서 또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 한번만 더 잘라 주십시요."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또 잘라 주었지요. "이제야말로 내 열심히 걸어가리라."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니까 참 무거워요."삼세 번이다. 삼세 번." 우리 한국인들은 삼세 번이니까...그래서 한 번 더 갔습니다. "예수님, 삼세 번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이번에는 짧게 좀 잘라 주십시오. 그러면 이제 제가 더 이상 안 청해도 될것입니다." "그래, 잘라주마."그래서 잘라 주었는데 얼마나 짧게 잘라 주었는지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느게 아니라 이렇게 돌리면서 가면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손가락에 끼고 뱅뱅 돌리면서 옆을 보니까 미련한 놈들이 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있어요.그래서 속으로 "지들이 무슨 성인이라고, 천국가면 다 성인인데...나처럼 이렇게하지." 하면서 뺑뺑 돌리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났습니다.그 절벽에는 다리가 없어요. 모두가 다 자기 십자가를 다리 삼아서 건너가야 됩니다. 큰일 났어요. 그래도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 해보니까 "핑" 하고절벽 밑으로 떨어졌어요.큰일 났지요. 그런데 이미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은 다 건너갔어요. "예수님, 예수님, 제발 살려주십시요!" 하는데 메아리쳐오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 예수님...." 하는 자신의 절망적인 목소리 뿐이었어요.
우리가 내 삶에 온 고통을 회피하면서 피했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조차도 어쩌면 회피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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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없으면 질문해야 한다.>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27)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삶이 너무 평화로우면 질문해야 됩니다.
우리는 자학자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십자가 없는 삶은 꼭 질문을 받아야 됩니다.
저희들이 예수회 생활을 시작할 때, 수련장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가 없으면 질문을 해야 된다."
"네가 사탄의 왕국을 위해서 온 것인지,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서 온 것인지 기준표는
매일의 삶의 십자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얘기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일것인가?" 에서 첫 번째로 고통을 적극적으로 품으면서
감수해야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포옹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 당시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했던 얘기 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군인들은 수송물자를 나를 때, 아무나 붙들어서, 그 식민지 국가의 아무나 붙들어서 오리 동안 짐을 나르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더 이상 지고 갈 힘이 없었을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진 게 바로 이법에 걸린 겁니다.
누구든지 걸리면 무조건 짐을 날라야 됩니다. 그럴 때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이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이 듣지 못하는 자기들의 아람어로 욕을 많이 하지요. "나쁜놈의 자식들" 하면서 욕을 많이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냐 하면 저주하고 욕을 하지 말고 오히려 오리뿐만 아니라 오리를 더 가주라는 겁니다. 봅시다. 내가 오리를 갈 때는 이건 희생물이 돼서 가는 겁니다. 내안에서 화가 날 겁니다. 그런 내가 오리를 더 가주어요. 어쨌던
이 로마군인이 필요한 것이거든요. 필요한 사람을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요.
오리를 가는 게 이 사람이 가라고 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제 안가도 되는 겁니다.
이미 오리를 갔기 때문에...법적으로... 이제 상황의 주인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식입니다.
고통을 안을 때는 그 때부터는 고통이란 상황에 내가 주인이 됩니다.
외아들을 잃어 버렸던 과부가 그 외아들을 잃었던 순간에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는데요. 외아들이 살아나지 않는 한....그 상황이 삶의 실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는 다시 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양식에서 상황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분은 이제 염불을 외우면서 죽은 아들이 극락왕생하게 기도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고통을 가슴에 품었을 때 상황을 바꿔 놓는 현상입니다.
상황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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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시간표 안에서>
그 다음 두 번째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 삶에 고통이 덮쳐왔을 때,
하느님의 시간표 안에서 고통을 좀 견디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시간표라고 제가 표현했습니다.
통상 우리가 고통스러운 삶에 처하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더" 이 질문을 합니다.
얼마나 더 이 병을 견디면 됩니까? 얼마나 더 경제적인 압박을 받아야 합니까? 얼마나 더
이런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해야됩니까?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 여러분들이 정말로 이런 질문에
대답을 원하시면 대답을 할 겁니다. "그래, 2년만 더 아프렴, 10년만 더 재정적인 압박을 받으렴, 평생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하렴, 그분이 여러분들이 원하면 그렇게 해줍니다.
전지전능 하시기 때문에...
그런데 다행히도 하느님은 그런식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얼마나 더 이 고통을 겪어야 되는가?" 얘기할 때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하루는 그림자와 같다. 인간의 날들은 품꾼의 날들과 같지 않은가?
인간의 생은 한낱 숨결일 뿐이다. 인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 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버려 있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존재다."
하느님께서 이런 식으로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나날이 베틀의 북보다도 더 빨리 덧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들의 고통도 짧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이 짧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생이 귀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아 준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고통 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하는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항상 고통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믿으면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애가서에 보면 나옵니다.
"야훼께서 건져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눈물의 애가서 3장 26절의 말씀입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하느님께서 건져 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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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할 6푼 7리의 타율>
많은 분들이 삶의 풍파 속에서 완전히 조각이 나 버립니다. 삶의 풍파 안에서 오는 근심 걱정이 재미로서 오지 않습니다. 동감할 수 없어요.
그렇지요?
제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하는 일 마다 되는게 제대로 없어요. 그래서 실의에 잠겼던 어느 사람이 고매한 스승님을 찾아가서 얘기했습니다.
"매사 하는 일에 저는 절반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그러자 그 고매한 스승께서 엉뚱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자네 뉴욕 타임스 1970년도 판 930면을 찾아 보도록 하게. 거기에 답이 나오네."그래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가지고는 도서실에 가서 뉴욕 타임스 1970년도 판 930면을 찾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 관심 있으시면 서강대 도서실에 가서 1970년도 판 930면을 찾아 보시면 됩니다. 거기 찾아 보시면 뭐가 나오는가? 그 전년도 최고 유명한 야구선수의 타율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타율하고 삶의 지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대답이 왔습니까? 이 사람은 도저히 대답이 안 왔어요. 그래서 다시 고매한 스승에게 갔습니다. "스승님께서 얘기하신대로 찾아 보았는데, 나온 것은 타율밖에 없었는데요." "그래, 최고로 제일 안타를 많이 친 사람의 타율이 얼마였는가?" "3할 6푼 7리였습니다." "그게 뭐지?" "그러니까 10번 쳤을 때, 3개도 맞추고 4개도 맞춘다는 겁니다." "그래, 자네는 하는 일이 반 밖에 안 된다며...우와! 자네 대단하구먼. 정말 작년도에 최고로 잘 치는 사람이 열개를 쳐서 3개나 4개밖에 못 맞추었는데 자네는 무슨 일을 하면 반은 된다며? 그 정신으로 다시 가서 하게."
그러면서 이렇게 애기 했습니다. 그 고매한 스승이, 이거 제가 직접 인용합니다.
"모자람이 있어야, 모자람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의욕도 생기고, 재미도 있는 법이라네."
어쩌면 똑같은 애기를 합니까? "타타타" 에서는 "우리네 인생살이 걱정 없이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 고 하고, 이것은 제가 미국에서 읽은 것인데, "모자람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의욕도 생기고, 재미도 있는 법이라네." 똑같이 "재미" 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근심 걱정이 삶의 덤이고 모자람이 바로 삶의 재미랍니다.
웃고 계신 예수님 상본을 제가 오늘 좀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근데 없어요. 저는 또 갖고 와도 좀 큰것을 가져와야 되는데, 여러분들 혹시 웃고 계신 예수님 상본 집에 갖고 계신 분이 있을 겁니다. 그 상본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빛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껄껄껄" 웃고 계십니다.
숨도 쉬기 어려울만큼 크게 웃고 계셔요. 그 사진을 한참 쳐다보게 되면 우리가 많은 걸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고통받는 사람들 옆에 있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하루에 상처받은 분, 세 분 만나면 끝입니다.
그 이상 제가 못 만납니다. 제가 지쳐서...
그런데 예수님은 하루 종일 상처 받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 그것도 3년 내내 있으면서도 한번도 하느님에 대한 찬미나 생에 대한 경이를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도 아무리 많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항시 따뜻하게 안아 주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사신 분이십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물이 나올 만큼 "껄껄껄" 웃고 있는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상처 속에 살면서도 결코 상처 속에서 짓눌리지 않았던 분입니다. 웃는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 역시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는 생기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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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경에 있든 존엄성과 자유를>
이 점은 제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존경하는 분 그리고 여러분들도 다 존경하는 분일 겁니다. "빅터 프랭클" 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삶이 힘들 때, 생각하는 인물이 두 분 있습니다. 한 분은 "도온" 스님이라고 조동중의 스님이시구요. 한 분은 "빅터 프랭클" 입니다.
도온 스님은 제가 구도 생활을 하는데 끊임 없는 구도론을 저한테 심어주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과 저의 생이 참 비슷합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가족들을 죽음으로 잃으면서...
그런데 특히 삶이 고통스러울 때, 제가 생각하는 분이 빅터 프랭클입니다. 그저께 저녁 때도 성찰 때, 이 분을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한참 머물러 있었고 제 마음 안에 많은 느낌들이 있었습니다. "빅터 프랭클" 아마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이분이 나찌 집단 수용소에서 3년동안 시인생활을 하다가 까스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살아난 정신과 의사입니다. 이분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 있던 자신의 존엄성과 자신의 자유, 자신의 의지를 자기가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증명한 분입니다. 제가 그분의 말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언제나 선택의 자리는 있다. 매 하루, 매 시간 선택의 자리는 남아 있다. 당신에게서 당신의 내적 자유를 빼앗아 가려 하는 어떤 위협스러운 환경에서도 굴복 당할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집단 수용소의 조건이 열악한 조건이고 잠도 부족하고 음식도 불충분하고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심적 부담감도 크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수인들은 선택할 수가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선택할 수가 있다.
"'내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내가 내 고통에 맞갖지 못하게 행위할까이다.' 나는 도스또예쁘스키가 한 이 말을 나에게 계속 들려주며 집단 수용소의 삶을 견디었다.
'내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나에게 닥쳐온 고통에 내가 맞같지 못하게 응답할까이다.' 이 말을 끊임 없이 기억하면서 나는 고통과 죽음이 눈앞에 펼쳐진 집단 수용소에서도 마지막까지 나의 내적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활기찬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봄날, 순풍에 돛단배 가듯이 모든 것이 다 잘 될 때, 사업도 잘되고,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집안의 모든 것들이 좋고, 이럴 때,우리들은 즐거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는 그 반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러운 삶도 우리에게 의미를 줍니다. 의미가 있고 없고는 나에게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생에 있어서 고통과 죽음이 우리 생을 완성하는데 한 부분이기 때문에
역시 그 부분에서 우린 선택하면서 의미를 찾아야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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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아야>
아까도 제가 요셉이야기를 좀 했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로서 자기가 이집트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형님들이 나를 질투해서 이렇게 이집트에서 종살이 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요셉이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고통 안에서도 그 고통을 핥으면서 나를 그런 처지에 밀어버린 형제들을 끊임없이 원망하면서 요셉이 보냈다면 요셉은 결코 재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15년간 핥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갖고 이집트의 재상이 됐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항시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서 삶의 의미를 하느님 안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세 번째로 나누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 자신이 요즈음 참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꼭 개인적이라기 보다도, 제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럴 때, 제가 빅터 프랭클을 왜 기억하는가? 저는 얼마 전에 그 분이 쓴 책을 읽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다 우리나라에 번역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몇 번을 읽었는데 또 읽은 이유는 다시 한 번 삶의 의미를 이 어려운 상황속에서 제가 찾기 위해서 읽은 겁니다.
이런 분도 있는데.... 박신연같은 사람도 있는데, 같은 맥락이지요...그 콘크리트 바닥 속에서 대천 밭을 기억하면서 살아 나는 박신연 양도 있는데...깨스실에 들어갈뻔한 그 집단 수용소 삶에서 살아난 빅터 프랭클도 있는데 나는 더 노력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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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에 의한 고통>
이제 또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실제적인 고통을 가슴에 안고 가시고 제발 상상에 의한 고통은 좀 버리셔야 합니다.
제가 "상처와 용서" 를 강의 하다가 진짜 상처와 무슨 상처라고 했지요?
어, 저도 이제 잊어버렸어요. 사소한 상처...구별했지요? 거의 비숫한 얘기지만...
여러분들,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한 번 쳐다보십시오. 고통스러운게 내가 정말 가슴에 안아야 되는 실제적인 고통인지, 상상에 의한 고통인지...짧고 귀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겪어야 될 고통은,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 될 고통은 실제 고통이지 상상에 의한 고통은 아닙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많은 분들이 상상에 의한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동료 신부이고, 저에게 심리학 세계에 많은 눈을 열게 해 준 채준호 신부님의 얘깁니다. 채준호 신부님은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은 "하루에 한 시간만 걱정하자." 는 얘깁니다. 걱정이 있으면 다 미루어 두었다가 한 시간만 몰아서 아주 작정해서 그 시간에 걱정하라는 겁니다. 채준호 신부님의 근거가 이렇습니다. "우리 하루 삶은 이 걱정, 저 걱정이든 온갖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다."
시누이 때문에 신경쓰고, 한달 후에 지불할 돈 때문에 신경쓰고...그러던 중에 자식이 중병에 걸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른 걱정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이 중병에 걸린 것은 실제적인 걱정입니다. 하지만 시누이 때문에 신경쓰는거나 한 달후에 지불할 돈 때문에 신경 쓰는 것은 상상에 의한 걱정입니다.
우리 하루 삶은 온통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로 그득 차 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지갑에 잔돈이 없어서, 지갑에 종이 돈만 있어서 걱정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엘 갔는데 갈비탕 먹을 까? 비빔밥을 먹을까? 이게 결정이 안돼서 걱정을 하고, 또 자녀들이 좀 커서 유학 가는데 국제결혼할까? 걱정하고, 많은 걱정들이 있을 거예요. 하다 못해 장농속에 감춰둔 돈, 혹시나 남편이 알아서 갖고 갈까봐 그래서 걱정하고 온갖 걱정이죠.
테멘 교부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다 하더라도 걱정거리는 끝까지 갖고 갈 것이라고..."
하루에 한 시간만 집중적으로 걱정하자는 말을 저는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 분이 있습니다. "랭크" 라는 분입니다. 이 분은 사업가인데요. 자신의 사업과 관련해서 항상 늘 초조한 마음으로 근심걱정속에 살아갔습니다.그런데 자기가 한평생 사업을 할거거든요. 그럼 맨날 이렇게 살아가야 할건데...그래 자기 자신이 참 한심한 겁니다. 하루는 "내가 이렇게 살지 않는 길은 없을까?" 그러는 중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래, 내가 수요일 날 한꺼번에 걱정하자."수요일, 그래서 그는 자기 오른편 주머니를 걱정거리 수첩을 넣는 주머니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살아가다가 무슨 근심 걱정이 오면 즉시 펜과 메모지를 꺼내서 적습니다. 날짜를 적고 근심의 내용을 적습니다. 그 다음에 오른 편 주머니에 딱 넣습니다. 그래가지고는 그 다음 주 수요일이 되면 수북하지요. 주머니의 것을 다 꺼냅니다. 그래서 수요일은 아침부터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다 펴서 이제 본격적으로 근심 걱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작 수요일 날 딱 꺼내서 읽어 보면 5분의4가 다 버려야 됩니다. 쓰레기 통에. 실제로 자기가 걱정해야 될 것은 5분의1 밖에 없다는 걸 발견합니다.
이 방법으로써 그는 마음의 평화를 가지면서 사업가로서 더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한테 권합니다.
저희 예수회 회원들은 하루에 두 번 성찰하게 되거든요. 오전 일과를 끝낼 때, 15분간 성찰하고, 저녁일과를 끝낼 때 15분간 성찰합니다. 밤에 그 때 저는 한꺼번에 걱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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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에 의한 고통은 피하리라>
실제적인 고통과 가상적인 고통들을 구분해야 되는 것은, 많은 가상적인 고통들이 우리 삶을 좀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카네기"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미국의 강철왕, 이 사람은 항시 자기 근심거리가 많은 부분들이 상상에 의해서 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다른 방법을 갖고 했습니다. 이것도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한테 직접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수요일마다 그렇게 따로 구분하지는 않구요. 그 대신에 근심이 오게 되면 즉시 멈춥니다. 그냥 그 근심 속에 사로잡히지 않고 즉시 멈춰서 연필과 종이를 준비합니다. 이 참 이상해요. 꿈을 봐도 연필과 종이가 필요한 것처럼, 이 근심거리를 볼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연필과 종이를 꺼내고 자기한테 지금 온 근심거리를 적습니다.그런데 이것이 실제 내가 지금 고민해야 될 근심인지 아니지를 질문합니다. 그 다음에 실제 근심이라면 두 번째로 넘어 갑니다. 그럼 이 문제를 위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지금 할 수 있는 뭔가를 묻습니다. 그런 다음에 세 번째로 우선 순위를 정합니다. 그런 다음에 순서대로 합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분들은 항시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빨래를 해도 그냥 "시간이 되면 하지." 하는 것과 계획하고 하는 것과 다릅니다. 참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기쁘게 지내고, 또 한 가지의 특징은 항상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해야 될 의무를 제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의무적인 것이 아니면 자기가 순서를 정해서 합니다.
이제 85세 되신 "나단 스티어린" 할머니의 시를 읊고 끝내겠습니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이 번 인생보다 더 우둔하게 살리라.
가능한 한 매사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포착하여
과감히 부딪쳐 보리라.
산에 더 자주 놀러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더 많이 하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을 것이나
상상에 의한 고통은 가능한한 피하리라.
내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면,
장비를 간편하게 갖추고 여행길에 나서리라.
초봄부터 신발을 벗어 던지고, 늦가을 까지 맨발로 지내리라.
춤추는 장소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데이지 꽃도 많이 꺾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을 것이나 상상에 의한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하리라."
85세 되신 할머니께서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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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35)
<인생 전체를 비관하지 말자>
"어떻게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일 것인가?" 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말씀들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나누고 싶은 것은 한 가지 고통 때문에 인생 전체를 비관하지 말자는 그 이야기입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 때문에 나의 모든 인생이 끝장났다고 결론 내리고 절망하지 말자는 애기지요. 우리 생은 한 가지 고통으로 인해서 쉽게 부서지는 그런 생은 결코 아닙니다. 얼마나 집요한 생인데 그렇게 쉽게 부서지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IMF 시기를 맞이해서 어려움 중에 있는 여러분들의 남편에게 꼭 필요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 집을 살 때, 방 하나만을 보고서 집을 사겠습니까? 또 자동차를 사려고 할 때 바퀴 하나만을 쳐다보고 자동차를 사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도 한 가지 부분, 한 가지 실패로 인해서 나의 인생 전체가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고통 앞에서 내 인생 전체를 비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얘기를 통해서 제가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처음 듣는 듯이 듣는다면 이 귀한 시간에 저 신부님이, 저 신부가 뭐 때문에 저런 얘기를, 다 아는 얘기를 하면서 시간 보내나? 시간 때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잘 아는 내용이지만 처음 듣는 듯이 들어 봅시다.
그러면서 내가 고통 앞에서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내 인생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그릇됐는가를 깊이 반성하도록 합시다.
변방 한 작은 마을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벌써 무슨 얘긴지 아시지요? 그 노인은 무척 가난했지만 모두가 부러워하는 하얀 준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그래, 이제부터 처음 듣는 듯이 듣습니다.
(어차피 제 강의는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알고 있는 삶의 진리들을 좀 더 생활에 연결시키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2학기 때 강의도 보면, 성경 본문으로 택하는 게 여러분들이 흔히 외우거나
좋아하는 귀절이나 시편입니다. "돌아온 탕자" 라든가 그 다음에 "야훼는 나의 목자" 이런 것들입니다. 그것이 저의 관심입니다. 좀 더 쉬운 것이 우리 안에 깨달음이 돼서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이 노인은 하얀 준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말인지 임금님 조차도 탐이 나서 여러 번 팔라고 했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팔라고 할 때마다 노인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이 말은 나에게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내 인생길에 있어서 동무나 다름없는 나의 벗입니다. 어떻게 내가 나의 벗을 팔 수가 있겠습니까?" 가난했기 때문에 유혹은 컸지만 말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하얀 준마가 사라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백마가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 노인을 찾아 와서 노인을 막 꾸짖었습니다.
"바보 같은 늙은이, 우리가 얼마나 당신에게 충고 했는데 누군가가 그 훌륭한 말을 언젠가는 훔쳐갈 터인데 좋은 값에 팔라고 했을 때, 왜 팔지 않았는가? 언제까지 당신은 그 귀한 말을 높은 분들로 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이제 말이 없어졌으니 어찌할 것인가? 정말 바보같은 늙은이라구..." 그러면서 노인에게
"이제 말은 가버렸고 당신은 저주를 받아 한 평생 불행하게 살 것이요."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이런 비난 앞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노인이 그 마지막 말 "이제 말이 없어졌으니 어찌할 것인가? 정말 바보 같은 늙은이라구..." 이 마지막 말에 응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성급히 내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지 마시오. 말이 우리에서 사라졌을 뿐이라고 말하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말이 울타리에 없다는 것 뿐이지 그 이상은 모르오. 말이 없어진 것이 저주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노인이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을 사람들은 더 화가 나 "지금 이 주제에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오? 바보 같은 놈!" 하면서 "말을 잊어 버리고 나서 미쳤구먼." 그리고 나서 떠나갔습니다.
<이 시간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 한 15일이 지났을 때, 준마가 돌아왔습니다.
하얀 준마가. 그런데 혼자 돌아온 게 아니라 똑같은 종자 야생백마 12마리를 데리고 돌아온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서 축하를 하면서 "어르신네 말씀이 정말 옳았습니다. 우리가 저주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르신네 말씀대로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틀렸습니다." 노인이 지적했습니다. "언제 내가 축복이라고 그랬습니까? 말이 울타리에서 사라졌을 때, 언제 제가 축복이라고 그랬습니까? 여러분들은 너무 싑게 판단합니다. 지금은 단지 백마가 돌어왔다고 얘기해야 됩니다. 백마가 다른 12마리의 말들과 함께 돌아왔다고만 얘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십니까?"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저 노인 이제 횡재를 만나서 이제 끝장 났구먼...."너무나 부러워하면서 자기들의 집으로 떠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돼서 노인에게 비극이 찾아 왔지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야생마들을 조련시키려다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떨어지면서 두 다리가 부러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하러 왔습니다. 와서 이렇게 애기 합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12마리의 말은 사실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당신 집에 저주를 몰고 왔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불구자가 됐으니 이제 누가 당신의 말년을 돌보아 주겠습니까?"
노인이 한숨을 푹 쉬면서 "정말 지치지도 않군요... 여러분들은 그 때 그 때 판단하는데 지치지도 않군요. 내 아들이 지금 두 다리가 부러졌다고 말해야지, 왜 저주를 받았다고 말합니까? 이 사건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며칠 후에 전쟁이 일어났지요. 온 국가의 젊은이란 젊은이는 다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대 원수 국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승리할 확률은 없습니다. 이제 전쟁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거의 다 죽게 될 겁니다.마을 사람들이 울부짖으면서 노인에게 왔습니다. 와서 얘기 합니다. "어르신네가 옳았습니다. 어르신네 아들이 두 다리가 부러진 것은 정말로 축복이었습니다. 어르신네 아들은 불구자이지만, 적어도 어르신네와 함께 있지는 않습니까?"
노인은 푹 한숨을 쉬면서 "여러분들은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언제나 결론부터 내리고 판단부터 내립니다. 누가 앞날을 압니까? 여러분은 단지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우리 아들들은 전쟁터에 끌려갔고, 나의 아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았다.' 이 사건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누가 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고통이 내 삶의 전체를 결정 짓는 저주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릅니다. 한 가지 고통 때문에 내 인생 전체가 결정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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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37)
<더 많이 사랑함 >
우리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에서 보면 절망이라는 말이 "디스 어포인트먼트 (disappointmeent)" 입니다. 절망이라는 말이 "디스 어포인트먼트 (disappointmeent)" 데요, 그 맨 앞의 d를 h로 바꾸면 "히스 어포인트먼트(hisappointmeent)" 가 됩니다. 그리고 "디스 어포인트먼트 (disappointmeent)" 라는 말을 자꾸 발음하다 보면 "히스 어포인트먼트 (hisappointmeent)" 가 됩니다. "하느님의 약속" 입니다. "디스 어포인트먼트 (disappointmeent)" 는 절망이지만 "히스 어포인트먼트 (hisappointmeent)" 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철자 하나만 바꾸게 되면 절망처럼 다가 왔던 고통속에서 주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곧 하느님 결정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만사가 합하여 선으로 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곧 하느님 결정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만사가 합하여 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 8,28)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고통이 저주인지 행복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만사가 합하여 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 크리스챤들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부분들이 있다면, 또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이 전체가 여러분들의 인생 전체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고통은 참으로 절실하고 너무나 아프고 죽고 싶을 만큼 아프지만 이 아픔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위해서 봉사하는 겁니다.
내 자신을 벗어날 때, 나는 이 고통의 어려움 속에서 시선을 다른 데다 둘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방문하고 고통 받는 세상을 위해 그 무엇인가를 하는 겁니다.
그게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인내와 보살핌의 마음을 갖고 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전에 4월 초파일 직전이었습니다. 정신지체자이신 스님께서 자기처럼 정신지체아거나 불구자인 불구자들을 돌보는 그런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서 있었습니다.
정신지체자들을 위해서 수님 자신이 목을 제대로 못 돌리는데, 이러면서 목탁을 치는 겁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인지 모릅니다.
또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분, 고등학교 때부터 간질을 앓으면서 수시로 쓰러져 버립니다. 그래서 결혼을 할 수 없지요. 지금 오십대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같이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기는 간질로써 결혼 생활도 할 수 없고 사회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지만 자기보다 더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고아들을 위해서 20 년이 넘게 봉사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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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38)
<세상 종말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더 많이 사랑할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아픔을 줄일 수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염병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얼마나 모진 고통을 겪었는지요? 그분의 II고린토 11,23의 고백을 보면
"나는 수고를 많이 했고, 감옥에도 여러번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으며,
죽을 뻔한 일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40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무려 다섯 번이나 맞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해서 죽을 뻔한 것이 세 번, 한 번은 밤낮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이런 바울로가 뭐라고 얘기 하는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주님을 찬미 하십시오."
이것도 감옥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자신의 고통을 바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철저히 승화시킨 분입니다.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대속적인 고통을 만들어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그 고통을 감수할 수도 있구요. 또 고아원이나 더 힘든 사람들을 찾아보면서 그 고통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바울로 사도처럼 복음전파에 더 열정을 기울일 수도 있구요.
저희 이냐시오 성인께서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당신 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생신다면 그것은 무슨 일일까요?"
성인께서 잠시 생각한 뒤에 얘기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수도회를 만든 이 예수회가 해산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회는 해산됐습니다. 성인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200년도 안 돼서 예수회가 없어졌습니다. 아무튼 그 때는 하늘에 계셨기 때문에요...
성인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후에 잠깐 있다가 또 다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안에 15분만 머무를 수 있다면 저는 곧 내적인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회가 해산되는 것이 가장 힘겨운 고통이지만 15분간 주님 앞에 머물 수 있게 되면 즉시 내적인 평화를 되찾을 거라는 겁니다.
대단하지요. 예수회가 200년도 안 돼서 결국 해산이 됐었는데요. 그 때 이 분 하늘나라에서 잘 견뎠을 겁니다.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하면서 찬양하라.>
힘겨운 시간 , 고통의 시간, 고통의 자리에서 그것이 주님의 현존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그 무엇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궁핍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로마 8,35 - 37)
고통중에서도 주님은 세상 종말까지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이렇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겨운 고통의 시간, 고통의 자리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서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얘기를 지금 제가 하고 있구요
이제 슬슬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고통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야곱과 요셉의 생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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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38)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 (1)
고통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야곱과 요셉의 생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여러분, 인간의 눈이 왜 흰자위와 검은자위로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물체를 분별하는 것은 흰 자위가 아니라 검은자위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을 만들었을 때, 검은자위로서 보게 했을까요?
이것은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너의 인생이 어두울 지라도
너의 현실이 눈동자 같이 컴컴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하여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야곱과 요셉의 생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여러분들이
어떤 식을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초대하려고 합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야곱과 요셉이 각각 자기 지나온 인생을 정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들이 서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차이점을 보게 되면 우리가 앞으로 고통 앞에서 어떻게 태도를 갖고 살아야 할지
분명히 정해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성조 야곱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이집트 재상으로 있던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이집트까지 왔을 때, 황제 파라오가 야곱에게 나이를 묻습니다.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 때 야곱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을 떠돈지 130년이 됩니다. 얼마되지는 않사오나 그 날이 다 궂은 일 뿐이었습니다.
살아온 나날이 다 궂은 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입니다.
야곱의 생은 정말 쉽지 않은 생이었습니다. 참으로 궂은 생이었습니다. 하나의 투쟁이 지나가면 또 다른 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집념의 생이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바로 그 사람의 운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야곱은 자신의 그 집념으로 인해서 참으로 고달프고 궂은 인생을 조각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장자권에 대한 집념에서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아내면서 그 결과로서 집을 떠나 방랑 생활을 20 년간, 타지 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살아 생전에 사랑하는 어머니 레베카를 보지 못했습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집착 속에서 그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참 인색하고 고약했던 장인 밑에서 돈 한푼도 건지지 못한 채 20년을 노력봉사 했어야 했습니다. 노동력 착취이지요.
그 다음에 돌아오는 길에 야뽁강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하느님의 천사이지요. 이 남자와 씨름을 하면서 축복을 받아내려는 집념으로 이 남자를 놓치지 않고 있다가 채여가지고 한평생 절름발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 성미가 급하고 잔인한 성격을 소유한 자녀들로 인해서 항시 마음 조아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자녀들이 세켐의 남자들을 무더기로 죽이게 되면서 언제 어디서 세켐족이 복수할지 몰라 늘 심장 조아리면서 살아야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맏아들 루우벤이 감히 아버지 야곱의 소실을 건드리면서 같이 잠자리를 하는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통은 20년 타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바로 그 길, 이제는 행복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영원한 연인 라헬이 14 년을 기다려서 결혼한 라헬이 길거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그 라헬을 오늘날의 베들레헴의 길거리에 그냥 묻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이 있고 나서 그 라헬이 낳아 준 요셉을 극진히 사랑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야생 동물에게 무참하게 찢겨서 죽었다는 소식을 다른 아들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러고 나서 21년 뒤 이제는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야곱에게 손주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 쥐고 땅에 딩구는 꼴을 또 봐야했습니다.
이 하나 하나가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리고 막내 아들 벤자민이 이집트 땅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또 잃어 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요. 그의 생은 거친 풍파속에 그야말로 내동댕이 쳐진 험난한 생입니다.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 (2)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요셉
한편 그의 아들 요셉의 생을 보겠습니다.
형의 질투를 사서 살해 당할 뻔 하다가 열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집트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노예 생활 10년 째, 상전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그런 무고한 죄를 받아 강간 미수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무기수로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돌보심속에 3년 후에 옥살이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누구의 생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언뜻 보면 야곱의 생이 더 고통스럽고 더 비참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비교해 봅시다. 야곱의 생일까요? 요셉의 생일까요? 야곱은 유랑생활을 했지만 요셉처럼 노예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14년 동안 땡전하나 건지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그래도 자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철저히 자기 자유가 없는 노예신분이었습니다. 또 야곱 옆에는 사랑하는 연인 라헬이 있었지만, 요셉옆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상전의 부인이 끊임 없이 성적 시달림을 가했습니다. 요셉은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무기수로서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의 생이 아버지 야곱보다 훨씬 힘겹고 고통스럽고 또 내일을 모르는 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야곱과 요셉의 생을 비교하면 야곱의 생은 참 힘들게 보이는데 요셉의 생은 미풍에 돛단배 가듯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아버지 생은 더 힘겹게 보고 아들의 생은 더 축복 받은 것처럼 보일까요?
그것은 야곱의 집념과 요셉의 순종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곱은 집념이 컸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한 의탁과 항복이 무척 늦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눈여겨 보시면 야곱이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참 뒤에 나옵니다.
한편 요셉은 어떤 처지에서든 항시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순리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보다는 축복이 더 부각됐던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된 삶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비극적 사건 앞에서 굴복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어떤 시련이 온다 해도 그는 늘 하느님 안에서 그 시련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선의대로 요셉의 생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점이 항시 하느님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를 다시 읽어본다면 요셉의 이야기를 읽을 때 항상 주어가 하느님입니다.
제가 몇 가지 증거를 드립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파라오의 두 시종장이 꿈을 꾸고 그 꿈 앞에서 요셉에게 해몽을 청합니다. 그 때 요셉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 쉽지 않습니다. 요셉이 꿈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꿈 이야기를 하니까 "하느님만이 꿈을 해석하실 분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황제 파라오가 역시 꿈을 해석해 달라고 했을 때도 파라오 앞에서 자기가 해석하는 식으로 하면 얼마나 ... 우리들의 심리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푸는 능력이 있어서 꿈을 해석하겠습니까? 폐하께 꿈을 해석해 줄 분은 하느님 뿐이십니다." 그는 하느님 뿐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 형님들을 만났을 때도 그렇게 얘기합니다."하느님께서 우리들의 목숨을 살려주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온 땅에 통치지가 됐습니다. 파라오의 재상으로서, 요셉을 통치자로 임명한 분은 분명히 파라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집트를 다스리는 재상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는 어려운 시간이나, 영화로운 시간이나 항상 주어가 하느님입니다.
야곱이 죽기 직전에 요셉의 두 아들 축복 주려고 불렀습니다. "애들은 누구냐?" 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저를 위해서 주신 아들입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요셉의 삶은 철저히 하느님 중심입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기를 돌볼 거라는 것을 끝까지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런 고통에 밀어 넣는 형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그것을, 상처를 할퀴면서 저주하면서 그 고통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편안함이든, 고통이든 항시 하느님과 함께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는지 현존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신앙인 안에 그의 마음과 삶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있다 없다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더 위대하신 분, 우리 주님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 늘 평화를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에 요셉의 삶이 그렇게 힘겹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은 보이는 게 집념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도 힘겹게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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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41)
<풍랑속의 고요>
요셉의 삶을 더듬어 보면서 다시금 여러분 앞에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 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인물이지요. 나치에 의해서 가족도, 재산도, 집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특별히 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어떤 글을 써 오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의미 추구를 통한 치료" 인데요. 그것을 거의 완성하였기 때문에 이제 출간하기를 기다렸던 사람인데, 그것마저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읽어 보게 되면 그가 "의미 추구를 통한 치료" 그 원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애걸하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저에게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입니다. 아니 제 생명보다도 더 귀중합니다. 이것은 제 자신보다 더 중요합니다. 제발 이걸..." 그랬을 때 그 간수가 "미친 새0끼." 그러면서 따귀를 때립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것을 다 박탈당하고 이제 남은 것은 벌거벗은 몸 뿐입니다. 이러한 생애에 있어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프랭클이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절망이 아주 잠시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다 발가벗기고 나서 가스 처형실에서 죽어간 한 죄수의 누더기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누더기 옷을 입으면서 우연히 윗 주머니에 들어 있는 종이 한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종이는 히브리 기도서에서 찢어 낸, 종이 조각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가스실에서 죽어간 죄수가 늘 읽었던 종이 쪽지를 발견하면서 프랭클은 다시 절망 속에서 일어납니다. 삶의 의미를 다시 찾습니다. 이 프랭클이 남긴 위대한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만 안다면 어떻게 사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하느님 때문,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험악한 처지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님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니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너는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이 혼탁한 시기에 도대체 어디서 우리가 삶의 의미, 삶의 가치를 찾겠습니까? 남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으니 우리도 그럭저럭 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세상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와 같이 살게만 된다면, 또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같이 살고 있지 않는다면, 비록 모든 사람이 우리를 존경하고 사랑할지라도 우리 삶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주님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갈 때입니다.이것만 있다면 어떤 절망 앞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제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제가 결론적인 시를 읽겠습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 가시면서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게 됩니다. 그런데 거친 풍랑이 치면서 제자들이 배안에 들이 닥친 물을 퍼 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쿨쿨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배가 갈아 앉을까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 대해서 우리 동료 예수 회원 슈미드 콘스가 쓴 묵상입니다.
이 영성시를 들으면서 지난 4 시간 동안의 모든 강의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풍랑속의 고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의 행위를 우리의 불안한 몸짓으로 알아듣게 합니다. 많은 것들이 우리 영혼을 혼란시키고 심지어는 성난 파도처럼 초조하고 조급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엄습합니다.
우리가 혼신을 다해 노를 젓지만 이 모든 노고가 허사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 보지만 종래 우리는 지쳐버릴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처럼
다급한 기도 속에서 당신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침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같은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도전적인 언어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침몰 한 가운데서의 방임, 풍랑 속의 절대 고요. 그분은 하느님 0아버지의 손에 굳게 자신의 닻을 내리고 계신 분.그 아버지가 바로 자신의 고요이며 안전이심을 세상의 그 어떤 힘도, 고통도, 자신을 그 고요 밖으로 데려내 올 수 없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절대 고요에 이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왜 너희는 아직도 두려움을 지니고 있느냐?
너희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두려움들 하나 하나를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믿어야 합니다.
깊고 무서운 심연보다 더 깊은 것은 바로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충실함임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위험에서도 홀로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우리는 모든 풍랑과 불안 그리고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저희 모두는 당신과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몰아치고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해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만
당신을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풍랑속의 고요이십니다.
당신은 모든 심연을 넘어선
굳건한 기초이십니다.
그러니 저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당신을 믿고 당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