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과거 자체의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성. 아마도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역사가들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역사가들이 더 이상 과거에 굴복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자신들의 문명이 과거의 문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로 시간에 따른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끊임없이 진보가 이루어졌다거나, 모든 변화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 세계를 산출하는데 기여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또 다른 사건을 이끌고, 전체 과거가 어떻게 현재의 서막이 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과거 그 자체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가능한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눈과 정신을 통하여 과거를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서양문명의 역사 제 1장- Robert Learner (Northwest 대학 역사학 교수)
하프시코드는 확실히 과거의 악기이다. 하프시코드의 대세기(Grand Siecle), 혹은 황금시대(L'age dor)는 이미 18세기 중엽에 종말을 보았다. 그리고 이후 음악 사조의 변화와 악기 자체에 대한 망각은 150년 이상 하프시코드를 음악가들의 기억 저 너머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도록 만들었다.프랑스 시민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전통 있는 프랑스 하프시코드 공방을 몰락시켰으며, 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수많은 악기들이 혁명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파괴되었다.그러나 하프시코드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셨다. 페티(F. J. Fetis), 디에메(L. Diemer), 그리고 란도프스카(W. Landowska)에 의한 하프시코드 부활이 이루어졌을때 그것은 단순한 옛 악기의 재현이 아니었다.
하프시코드가 오랫동안의 동면에서 깨어나 첫 숨을 내쉬기 시작한 이후로, 악기는 음악사 속에서 마치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은 것과 같았다. 그것들은 마치 오래 전에 귀족의 살롱에서 그 우아한 음률로 사람들의 마음을 매혹시키고, 찬탄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현대의 청중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또한 하프시코드들이 세월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거쳐 온 것과 마찬가지로, 부활이후 오늘날까지 운명적이고도 극적인 변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하프시코드는 확실히 낡은 악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낡은 고물이 아니다. 나는 가끔 오래된 것의 가치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좋아한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오래된 물건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그 시대의 사상과 기술과, 시대의 문화적 환경과, 제작자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프시코드는 단순한 악기의 차원에서 판단할 수 없는 문화 전반과 예술 양식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하프시코드의 장식과 그림들은 그 하나하나가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또한 하프시코드는 시대 양식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악기의 다리 형태만을 보고 그 악기가 루이 14세 시대 양식인지 아니면 루이 15세 시대의 갈랑트 풍의 악기 인지 구별해 낼 수 있다. 또는 어떤 악기에서 중국식의 장식과 바니쉬를 보면 그 악기가 마침 한창 붐을 일으키던 중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프시코드에 비한다면 현대의 피아노는 천편일률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개성이 없다. 하프시코드는 또한 국가 양식과 제작자의 개성이 살아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이 다르듯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하프시코드는 다른 음향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자라도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가 다르듯, 플랑드르의 루커스와 쿠세는 서로 구별되는 특성을 지닌다.
하프시코드(영)는 매우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운다. 프랑스 어로는 Clavecin, 독일어로는 Cembalo, 이탈리아 어로는 Cembalo 혹은 Clavicembalo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모두 건반-현악기를 뜻하는 라틴어 Clavicymbalum에서 유래했다. 또 다른 독일어 명칭인 Fl gel, Kielfl gel은 하프시코드의 형태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어서 이탈리아에서는 종종 gravicembalo로도 쓰였으며, 명칭에 대해 굉장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바흐의 경우에도, 예를 들면 Klavier라는 모호한 지시를 하거나, Clavicyembal(클라비어 위붕 1권), Clavicimbal(골트베르크 변주곡)과 같은 변형된 철자들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발음 위주의 철자법은 당대에 흔한 것으로 이상한 일이 결코 아니다.
하프시코드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의 기록은 14세기 전후의 문서들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우는 건반으로 연주하는 현악기에 대한 기록들이다.(1367년 아라곤왕 Juan "Exaquir", 1397년 파두아의 Hermann Poll "Clavicembalum") 현존하는 최초의 악기(1521, 1533년작 하프시코드, 1540년작 버지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악기로서 당대부터 이탈리아가 하프시코드의 생산지로 유명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Henri Arnaut de Zwolle의 하프시코드 설계도(1440년)는 플랑드르도 일찍부터 하프시코드 생산이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유명한 루커스 가문의, 한스 루커스의 악기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1581년에 제작된 버지널로서 플랑드르에서 하프시코드의 산업적 생산과 수출이 16, 17세기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하프시코드가 어떤 탁월한 천재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믿고 있다. 아마도 그 천재는 오르간의 건반과 류트의 픽과 리라의 현을 조합시키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소소한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하프시코드의 근본적인 발음 원리나 전체적인 형태는 최후까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각종 관악기들이나 류트족의 악기처럼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를 거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완성된 악기로 정착된 것이 아니라 바이올린 처럼 한반에 완성된 형태로 음악사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하프시코드와 비슷한 시기에 건반과 현을 결합시킨 다른 악기들도 등장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클라비코드(금속 헤머로 현을 친다)와 허디 거디(현을 마찰시켜 소리를 낸다)가 그것이다. 어떤 악기가 음악사에 먼저 등장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먼저 만들어진 악기가 다른 악기의 발명에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건반악기와 현악기를 결합시킨 다는 것... 그 얼마나 참신한 아이디어인가!
하프시코드는 어떻게 소리를 내는가? 이미 앞서의 글 가운데 하프시코드가 현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힌트를 준 것 같다. 아니면 이미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프시코드의 액션은 상당히 교묘하게 만들어져서 소리가 나는걸 실제로 보지 않으면, 글을 읽거나 그림만을 봐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하프시코드는 간단히 말해서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을 튕기는가. 지렛대의 역할을 하는 건반의 끝에는 잭(Jack)이 있다. 이 잭의 끝부분에는 실제로 현을 튕기는 플렉트럼(Plectrum, 혹은 Pick, Quill, Kiel로도 부름)이 장치되어 있다. 플렉트럼은 보통 새 깃털의 깃촉으로 만들었는데 드물게 금속 코팅과 가죽 재질을 찾아볼 수 있다. 건반을 살짝 누르면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가다가 한계를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건반이 툭 떨어진다. 이때 잭은 말 그대로 현을 향해 "발사"된다. 그와 동시에 플렉트럼은 현을 튕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정한 속도로 잭이 튕겨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므로 조율과는 별도로 연주 전에 잭들을 조절해주어야 한다. 한편 플렉트럼의 재료와 현의 재질도 음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또한 현의 어느 부분을 튕기느냐는 직접적으로 음색을 결정하는 부분이었으므로, 제작자들이 그 위치를 매우 고심하여 선정했는데 이는 곧 제작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건반을 누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곧 튕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르고 있던 건반을 놓으면 잭이 내려오면서, 스프링 장치에 의해 플렉트럼이 현을 건드리지 않게 만든다. 그와 동시에 댐퍼가 작동하여 음의 지속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잭의 윗부분에는 스톱에 의해 좌우로 움직이는 잭 슬라이드가 있다. 이 슬라이드가 움직여서 어떤 잭 배열이 특정한 현을 울리거나, 혹은 울리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즉 레지스터 스톱을 조절한다는 말은 곧 울리는 현을 바꾸어 음색을 조절한다는 말과 같다.
현은 보통 합금이 사용되었는데 이탈리아 악기와 드물게 독일 악기에서는 놋쇠(Brass)현이 사용되었다. 이탈리아 악기의 독특한 음향은 놋쇠 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끈끈하고, 밝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음색을 가진 이 작은 악기들은 프레스코발디와 그밖의 초기 이탈리아 작곡가의 즉흥적 작품에 훌륭하게 어울린다. 거트현은 류트-하프시코드라는 특수한 악기에서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소상히 다뤄보려고 한다.
-최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