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등학교 1학년때이었던 1975년 12월 21일, 대봉성당 고등부 학생회의실에선 성탄절을 맞아 학생회기금마련 행사로 찹쌀떡 판매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오던 황문지 김필옥이 성당입구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경산에서 동냥을 하러 왔는데 동생을 잃어버려서 집에 가지도 못하고 찾고 있는 중이라 했지만, 당시 앵벌이들이 성당에 들어와서 돈을 가져가는 불상사가 있었던 지라
우리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날씨가 추운데다 날도 어두워져 성당 수위실에서 잠을 재우고 나서 그 이튿날 동생을 찾아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얘가 앵벌이 아인지 진짜 길잃은 아인지 반신반의하며 일단 아이를 앞세웠다. 겨울바람이 꽤나 세차게 몰아쳤다. 해거름이 다 되도록 아이는 이리저리 헤메다가 허허벌판인 수성못까지 가게 되었으나 동생도 집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의 이름은 박영길이고 나이는 12세였다. 성탄절 행사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 아이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든 결말을 지워야만 했다.
영길이가 동생 없이는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텨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찾아가서 사실 확인을 하기로 하였다. 이성도 정영목이 선발되어 아이가 일러주는 대로 약도를 그려서 경산 영대까지 찾아갔다. 날이 어두워지도록 또 헤메였다. 마을 이장집을 찾아가서 물으니 냉소섞인 웃음으로 그런 집을 왜 찾냐고 하였다. 그들이 가리키는 곳은 마을어귀를 한참 벗어난 논두렁 한가운데였다. 비탈진 논두렁 경사를 따라 나무기둥에 가마니를 걸쳐놓은 참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집(?)이었다.
12월 한겨울속 외딴 들판의 그 조그만 거적속에는 영길이의 병든 아버지와 5살 3살난 어린동생 둘이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냥나간 영길이와 미애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간의 경위는 이러하였다. 영길이 아버지는 박춘화씨이고 큰아들 영재(당시 17세)를 낳은 첫부인은 사별하였고, 재혼한 부인으로부터 영길이(12세)와 미애(9세), 미숙(5세), 미자(3세)를 낳았으나 막내 미자 출산후 어떤 이유에선지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큰 아들은 돈 번다고 집을 나가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다니던 영남대 공사장에서 몸을 다쳐 일도 나갈 수가 없게 되자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채 죽기만을 바라며 맨날 술을 퍼마시게 되었고, 아이들이 구걸을 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던 형편에서 결국 마을에서도 버림을 받고 들판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라 하였다. 영길이가 동네에서는 더 이상 동냥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며 대구로 나가서 먹거리를 구해오겠다고 하고 동생 미애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모든게 사실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아이를 의심을 하다니...’
어제 오늘은 아예 밥도 못 먹었다는 것이었다. 뛰어가서 호빵을 몇 개 사와서 가마니 거적을 들추니 어린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에 차가운 달빛이 반짝였다. 우리는 미애를 잃어버린 사실과 영길이를 성당에서 보호하고 있음을 알려드리고 내일 영길이를 데려다 주기로 하고서 대구행 버스에 올라탔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영대종점 버스속에서 성도형과 나는 제일 뒷자리에 앉았고 서로 손을 꼭잡고서 말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새로 탄생하시는 아기예수님께서 우리 학생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라고 말이다.
한참을 달려 성당 학생회회의실로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다가가 영길이를 끌어안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모두들 눈시울을 적셨다. 즉석에서 임시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이번 성탄절날 찹쌀떡 판매수익금 일체는 모두 영길이네 돕기에 쓰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그 날밤은 수위실에서 영길이와 함께 잠을 잤다. 다음날 우리는 옷가지와 먹거리를 좀 챙겨서 영길이를 가족에게로 데려다 주었다.
당시 가톨릭시보에 게재되었던 박춘화 다두아저씨 관련기사
새로 이주한 고산골 초가집에서 계란장사 나가는 다두 아저씨를 배웅하는 딸 미숙이 사진
나중에 보고를 들은 장태식(리노) 주임신부님께서 본당 사목회의를 통하여 박다두아저씨네를 본당 차원에서 돕기로 결정을 하였고, 어른들이 나서서 기금을 마련하여 고산골 입구에 조그만 초가집을 한 채 구하여 이주를 시켜드렸다.
그리고 생계를 위하여 자전거를 마련하여 계란 장사를 하게 하였다. 우리 둥우리 남학생들은 한번씩 들러 아이들과 놀아주기도하였고, 여학생들은 조를 짜서 영길이네를 방문하여 청소와 빨래도 해주고 밥도 지어주곤 하였고, 본당 어르신들은 먹거리, 옷가지를 모아다 주곤 하였다.
봉애, 인자, 문지, 경희, 명숙, 필옥, 미경, 정옥.......우리 친구들이 무척 애를 많이 섰다.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입시를 마친 둥우리 친구들은 처음으로 부산 태종대로 함께 나들이를 하였는데, 물론 다두 아저씨도 동행하였다. 다두 아저씨의 큰아들이 우리와 동갑이니 아버지뻘이지만, 특이한 인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이 때가 다두 아저씨나 우리들에게나 가장 재미있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장사는 시원찮았다. 상술이 없으니 맨날 공짜로 다 나눠줘 버리고 비탈길 오르다 넘어져 다 깨어버리고 하니 타산이 맞을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잃어버린 미애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고, 마음을 잡지 못한 영길이는 집을 나가서 나쁜아이들과 어울리며 자꾸 삐뚤어지기 시작하였고 가출을 일삼았다. 성당 어르신들이 논의하여 어린 딸아이들의 학업과 미래를 위하여 부유한 집에 양녀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다두아저씨는 대봉성당 수위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양녀로 가서 예쁘게 잘 자라줄 것으로만 믿었던 딸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 막내 미자는 괜찮았으나 미숙이는 7살인데도 거의 식모살이 같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본당 어르신들이 다두 아저씨와 의논하여 아이들을 동촌 SOS어린이집에 맡겨 양육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착한 다두 아저씨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꽃농원을 하는 부유한 과부 아주머니와의 재혼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성사가 되었다. 우리가 대학 2학년이던 1979년 2월 25일 본당의 전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사스러운 혼배미사가 거행되었다. 혼례의 증인과 들러리는 우리 둥우리친구들이 맡았다. 그 때 아저씨와의 유명한 대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아저씨, 안 떨립니까?” “뭐, 내가 결혼 한두번 해보나?”
그리곤 행복시작일 신혼여행을 떠나셨다.
남들 눈에는 행복시작으로 보였을 그 결혼은, 사실 본인에게는 고독시작이었다.
그 때까지 대봉본당의 어르신들께서는 다두 아저씨를 위하여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셨지만, 그 혼사는 결정적으로 큰 착각과 오류이었다.
결혼을 하고서는 아주머니께서 경영하시는 식물원으로 들어가셔서 농장일도 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떳떳한 남편노릇을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친구들이 다 알다시피 다두 아저씨는 마음씨가 착하고 여리신 분이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를 못하고 고독과 번뇌속에 자꾸 움추려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우리들에게는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다며 스스로 멀어져 갔다. 결국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또, 마음적으로도 자꾸만 소원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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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다두 아저씨와 약속을 한게 있었다. 내가 졸업을 하고 한의사가 되어 한의원을 개원하면 자기가 수위가 되어 주겠다고. 그래서 약속을 지켰다. 우리 한의원 직원으로 들어와 한동안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 친구들과의 만남도 재개되었고 함께 우정도 더욱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아주머니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면서 다시 농원으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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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타지의 병원 영안실에서 아저씨에게로 연락이 왔댄다.
아들 영길이의 사체를 수습해가라는 것이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실족하여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헛되이.....
그간 집에도 가끔씩 들리며 동생 미숙이와 미자도 한번 만나 보았다던 영길이는
채 피지도 못한 20대의 꽃다운 청춘을 그렇게 외로이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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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후, 큰 아들 영재가 결혼을 하였고 왕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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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며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지가 우연히 길가에서 한번 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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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후, 기구하게도 재혼했었던 그 아주머니마져도 병으로 또 운명하셨다고 하였다.
근 1년간 대소변을 받아내며 병수발을 하고 있을 때는 뵈지도 않던 인척들이 나타나, 아주머니의 재산을 탐하여 우여곡절끝에 우울한 장례를 치루었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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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사 자유인이 된 다두아저씨는 다시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다. 이친구 저친구 찾아가며 밥도 사고 인정도 내면서 말이다. 오래전부터 벼뤄 왔었던 한턱을 내시겠다며 한사코 우기면서까지 말이다. 그 때의 그 흐믓해하시던 아저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부턴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서 옛날 얘기도 나누며 재미있게 지내자고 하면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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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에서 나온 미숙이가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였다.
미자도 직장을 다녔다.
아저씨는 가창 용계동에서 사셨다.
큰아들네와 딸네들과도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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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후, 운명의 비보가 날아 왔다.
1999년 5월 21일날, 다두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좁은 밤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교통사고로 운명하셨다는 것이었다.
경대병원 영안실에서 이제 영영 이별을 하였다.
6.25사변 당시 공로의 국가유공자이신 故.박춘화(다두) 아저씨의 유골은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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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두 아저씨만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린다.
첫댓글 아아~다두아저씨....가끔씩 생각났었는데...그렇게 돌아가셨다니....우리들에게 정말 친절히 따뜻하게 대해주셨는데...마치 나이 많은 친구 같이..아빠 같이...그 웃음이 아직도 떠오르는데...주님의 품에서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