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는 1862년 7월 14일 바움가르텐( 현재 비엔나 지역의 일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보헤미아 출신인 에른스트 클림트와 그의 아내 안나 클림트의 일곱 자녀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클림트의 예술적 재능은 일찍부터 인정을 받아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의 장학생으로 발탁된다. 그의 활동초기 작품들의 주제는 여성이었다. 성적 주제와 직설적 표현을 담은 그의 독특한 작품 세계는19세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여인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있을 만큼 많은 여성들을 그렸을 뿐 아니라 결혼은 하지 않고 수 많은 여인들과 지내면서 13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의 창단일원으로 후에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에는 비엔나 미술에 있어 가장 유명한 화가로 꼽힌다.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적으로 이례 없는 높은 가격에 경배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성질을 가졌지만 아울러 사회 참여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중년의 그를 괴롭힌 것을 다름 아닌 건강과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말년 루마니아에서 돌아온 후 클림트는 옷을 갈아입던 중 뇌일혈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클림트의 아버지와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했으니 늘 뇌일혈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다. 클림트의 작품 속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깔려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18년 2 월 6일 55세의 나에로 비엔나에서 생을 마감한다. 많은 초상화, 벽화 그리고 드로잉을 남겼으며 <유디트 Judith>과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당시 빈의 시각예술은 아카데미와 빈 미술가 협회(쿤스틀러하우스 Kunstlerhaus), 두 단체가 지배하고 있었다. 빈 미술가 협회는 장식예술 분야 예술가들의 전통적인 연합체로 보수적인 색채를 띠었는데, 빈에서 활동하는 거의 모든 미술 종사자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클림트도 1893년부터 회원이었다.
35세가 되는 1897년 클림트는 19명의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미술 아카데미에서 나와 , 종전의 미술과 결별한다는 의미에서 ‘비엔나 분리파 Vienna Secession'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결성을 이미 1892년에 독일에서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의 작품 철거에 항의해 결성되 베를린 분리파 Berlin Secession의 뒤를 이은 것이다. 모더니즘 미술 수요에 중요한 미술 움직임이 된 비엔나 분리파에는 건축과 공예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오토 바그너 Otto Wagner, 요세프 호프만 Josef Joffamann, 오세프 올브리히 Josef Maria Olbrich등의 건축가들이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이들은 전통 예술 규정에 대항함으로서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이 그룹이 결성된 그 이듬해 이들은 베르 사크룸(Ver Sacrum)이라는 미술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그들만의 독립된 전시관을 마련하고 전시회를 주도하였다. 초기의 분리파 전시회는 정교한 곡선과 풍부한 장식의 아르 누보 Art Nouveau(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양식이 지배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아르 누보는 비엔나에서는 분리파 양식으로 불렸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아르 누보는 회화, 조각, 건축, 실내 장식의 통합적 성격을 가진 일종의 총체미술(토탈 아트 Gesamtkunst)을 추구하였다. 이 양식은 주로 평면적 형태와 다이나믹한 표면의 선을 통하여 감각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을 환기시키려 하였다. 아르 누보의 비엔나 분파인 분리파 양식은 비엔나의 회화나 건축이외에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련되는 공예나 디자인에도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클림트와 호프만은 비엔나 공방을 만들었고 이것은 분리파와 함께 모더니즘 미술이 온상이 되었다. 토탈아트 (산업화에 의해 분리되어 왔던)디자인과 제조업의 실질적인 재통합에서부터 전체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 Gesamtkunstwerk는 19세기의 사회, 경제적인 대격변의 시대를 반영하면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가 1850년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용어이다. 바그너는 미래의 이상적 무대예술로서 악극을 제창하고, 그것은 즉 음악, 무용, 미술, 문학이 혼연일체가 된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이라고 했다.
*베토벤 프리체 (Beethoven Frieze) 34.14m, 높이 2.15m
토탈 아트를 완벽하게 실현했던 분리파 최고의 전시회는 1902년의 <베토벤 전시회>였다. 맥스 클링거가 제작한 작곡가 베토벤의 조각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전시회는 구스타프 말러 지휘의 베토벤 심포니 9번 4악장의 연주와 함께 새로운 미술개념의 웅대한 장을 열었다.
당시 이 제 14회 분리파 전시회는 4월 15일부터 6월 27일 까지 21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이루어낸 새로운 예술개념에 대한 성공적인 결과물이며 전시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체는 ‘토탈아트’ 정신이 가장 완벽하게 반영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시를 위해서 클림트는 쉴러의 <환희에 부치는 노래>-베토벤이 이 교향곡 9번의 합창 가사에 인용한-를 시각화한 대대적인 벽화를 제작했다. 세 개의 패널 중 첫 패널에 등장하는 부유하는 여인들은 <행복의 열망>을 상징하다.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세 명의 누드 인물들은“황금 기사”로부터 구원과 보호를 구한다. 이 황금 기사는 다음 패널에 등장하는 <적의 무리들> (질병, 광기, 정욕, 문란한 성, 방종 등과 같은 부정적인 삶의 감정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오른쪽의 마지막 패널로 들어서면, 부정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는 희망과 행복의 시간들로 반전된다. <행복의 열망>은 악기를 들고 있는 인물이 읊조리는 ‘시’를 통하여 보답하고 ‘천사들의 합창’과 함께 이어서 <세상을 향한 입맞춤>에서는 벽화 내용은 클라이맥스로 치솟는다. 원래 <베토벤 프리체>는 위에 언급된 <베토벤 전시회>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어서 전시가 끝나고 바로 폐기될 운명이었다. 그때 미술품 수집가 칼 레닝하우스가 이 벽화들을 구입하였고 후에, 에곤 쉴레의 노력으로 레더러 가문이 본 벽화들을 맡아두었다. 에곤 쉴러는 <베토벤 프리체>야 말로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미술관의 관리를 받고 있다. 오늘날 벽화의 원작은 비엔나의 분리파 전당에 설치되어 있다.
2009년 한국 Klimt 전시에 선보이고 있는 <베토벤 프리체>는 벨베데레가 분리파 전당의 벽화를 대대적으로 복원하면서 1984년에 제작한 것으로 영국의 리버플 전시를 마치고 바로 한국으로 넘어온 재건축 설치다.
출처: <2009 구스타프 클림트 한국전시: 클림트 황금빛 비밀> 전시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