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볕이 끝간데 없이 이어진 호수 위로 말갛게 떨어진다.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수면은 마치 해초류가 뒤덮고 있는 것처럼 짙푸르다. 인제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파로호의 어느 지점엘 가든 그런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이 통째로 눈부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초가을의 눈부심에 곁들여지는 이상야릇한 쓸쓸함, 그것은 아마도 파로호에서만 느껴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흐르지 않는 듯이 흐르는 거대한 몸짓의 물결, 그 주위로 호수가 생기는 바람에 수몰지구 주민이 되어 떠난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보이기 때문이다. 나무 등걸과 자잘한 삶의 도구들.
작가 오정희는 바로 그 <파로호>에 나직한 목소리를 실어 인생의 자의식을 일깨운다. 그 자의식은 독자를 훈계라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의 화자 자신의 내면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는 일이다.
혜순은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다가 외국 생활에 적응치 못한 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앞세워 귀국한다. 파로호에는 남편의 친구이면서 향토사학자인 김선생의 제의를 받고 따라 나선 길이다. 파로호에는 남편의 낚시 여행에 동행했던 적도 있으므로 그리 낯설지 않은 일. 혜순은 선사유적지를 찾아가는 김선생 뒤를 쫓으며 사람들의 자기 기만과 위선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위선적인 사람을 만들어 내는가를 치밀하게, 그러나 표 안나게 탐구한다. 파로호의 수몰지구에 살았던 노인의 입을 통해 삶의 터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으면 해직교사였던 남편이 생선가게에서 일하면서도 교민사회에서 얼마나 영웅적인 반체제 인사로 편입되어 가는가를 천천히 보여 준다. 그 속에는 교민들이 커튼을 내리고 광주 사태 비디오를 본 장면도 들어 있고, 10만 달러짜리 승용차를 굴리며 떵떵거리는 전직 고관의 아들 이야기와 낯설기 그지없는 미국문화가 들어 있다. 혜순은 그런 모습들에 자신이 겪었던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풀어가면서 파로호의 이승만 별장이 있던 곳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선사유물 발굴단의 모습을 펼쳐 준다.
그리고 마침내 혜순은 유물발굴단원이 발견한 여자 얼굴 모습의 돌멩이에서 깊은 슬픔과 지극한 그리움, 그리고 간절함을 보게 된다. 수만 년의 세월 뒤에 흙을 털고 일어난 여인의 눈을 통해 파로호와 떠도는 바람을 본 것이다.
저자가 실제로 미국에 머물다 돌아온 후에 발표함으로써 미국 생활의 일단이 반영되기도 한 것으로 짐작되는 <파로호>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호반의 도시 춘천을 벗어나 인제까지 펼쳐진 파로호의 물줄기는 검푸른 빛으로 도도히 흐르고 호수 양 옆으로는 강원도 특유의 절경이 펼쳐진다.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벼랑 아래로 구르기 십상인 S자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길가마다에는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휘청거린다. 그렇게 곡예를 하듯이 2시간 가까이 달리노라면 저 밑자락 호수 변에는 파라솔이 드문드문 펴져 있다. <파로호>의 화자인 혜순 남편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학교에서 해직당한 아픔을 낚시로 달랜 것처럼 지금도 아픔을 달래거나 취미를 즐길 요량으로 파로호를 찾는 사람들은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파로호 곁을 줄기차게 달려나오면 인제와 양구 방향으로 갈라지는 3거리 못미처에 양구 선착장이 자리잡고 있다. 소양강 선착장을 하루에 10여 차례 오가는 여객선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손님을 기다리며 졸고 있는 듯한 모습. 금강산 가는 길을 알리는 입석은 바로 그 선착장에서 5분 남짓, 양구 읍내 쪽으로 방향을 틀면 거기서부터는 <파로호>의 혜순이 향토학자와 함께 찾아나선 월명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제 선사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이 끝났는지 지금은 ‘선사유물 전시관’을 짓고 있다는 안내간판이 도로에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인들의 행렬과 함께 파로호의 끝자락과 닿는 길이 이어진다. 서서히 황금빛을 만들어 가는 들녘과 군인들의 행렬은 콘트라스트가 극명한 한 장의 사진 같다.
아니다. 울창한 삼림 속에서 들려오는 기계톱 돌아가는 소리와 길 옆에 쌓인 벌목더미는 아직도 첩첩 산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의 사진 같은 느낌을 준다. 뿐만이 아니다. 도로에서 날아오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잡초더미 속에 묻혀 있는 폐가와 폐가의 담벼락에 기대 녹슬고 있는 자전거는 황금 들녘의 모습이 농민들의 삶과 직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침내 길은 작품 속의 한 지점인 상무룡리에 닿는다. 평화의 댐과는 지척인 곳, 파로호의 끝이다. 하지만 작품 속의 자드락길과 물가의 집들은 전 같지 않다. 사람들은 땅을 일구는 것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지금은 버섯재배에 열심이고 수정같이 맑은 물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지혜도 배워서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입장료가 대수랴. 평화의 댐 밑자락에서 혜순의 남편처럼 낚싯대를 펼치고 있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평화의 댐이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이즈음이면 그리 소란스럽지 않은 가운데 인생을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노인 한 명은 파로호에 물이 빠졌다는 소리를 듣고 수몰지를 찾아와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여기가 안방이고, 여기가 부엌이고, 저기가 텃밭자리지’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풀포기를 자신의 두루마기 안에 소중하게 집어 넣는다. 그럴 때 손자는 ‘주춧돌을 가져다 집의 정원에 놓겠다’고 말하고 노인은 그런 손자를 말린다. 그나마 이 자리에 놔둬야 물 속에서라도 천년 만년 집터가 남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할아버지의 뜻에 진작부터 동의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작가는 혜순을 내세워 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귀국의 한 상징으로 증명사진을 찍고, 2천 장이나 되는 소설을 한 자 한 자 베껴쓰는 ‘문화증명’을 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말이다.
혜순이 향토학자와 함께 거니는 파로호의 걸음마다에서는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갈등이 절묘하게 대비된다. 그래서일까, <파로호>는 양구 땅만을 흐르는 물길이 아니라 작가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작가의 가슴속에서 계속 흘러내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혜순을 이끈 것은 매끈하게 정돈된 모습이 아니라 흐린 흑백 사진에 나타난 황량하고 텅 빈 호수의 모습이었다는 진술이 바로 그 단서이다.
깊이를 알 수 없게 푸르디푸르게, 그것도 멎은 듯이 계속 흘러내려가는 파로호의 심연은 바로 작가 오정희의 작품세계와 닮은꼴이다. 만져질 듯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그 깊이를 재기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 추상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곳에 갔을때
가을녘 육로를 이용해 양구 방향으로 내달리는 경험은 아주 특별하다. 파로호를 옆에 끼고 가끔씩 수면 쪽을 곁눈질하노라면 ‘저렇게 소리없이,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넓고 웅숭깊게 흐르는 인생을 살아야 하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낚시꾼들에게의 파로호는 더없는 황금어장일지 몰라도 길을 나선 객에게의 파로호는 마음을 갈고 닦기에 적당한 교과서일지도 모른다.
양구와 평화의 댐에 이르는 길목은 여전히 ‘군인들 천지’였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한 군인들의 얼굴에는 검댕이 칠해져 있고, 밭에서는 간간이 옥수수를 따내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월명리는 양구 읍내의 끄트머리쯤 되는 곳으로 지금은 공설 운동장이 들어서 있고, 한켠에는 ‘선사유물 전시관’을 짓는다는 공사 팻말이 붙어 있는데 그 공사가 얼마나 소리없이 진행되는지 검문 헌병도 ‘모르겠다’며 팔을 내둘렀다.
황량하고 드살벌한 지역. 군인이 많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대부분 그렇지만 양구도 그렇다. 특히 왁자하게 성금을 거두면서 진행된 ‘평화의 댐’이 역사의 장에서 거의 비켜선 채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그런 느낌을 더욱 짙게 한다.
개인적 인연을 말하자면, 작가 오정희 선생의 부군께서는 필자의 모교 교수이거니와 학창시절 입었던 따사로운 은혜가 있어 작품 <파로호>를 다시 읽는 내내, 또한 파로호 물줄기를 따라가는 내내 심사가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심사가 복잡해서였을까. 파로호를 찾아갈 때도 자동차는 길에 서버렸고, 고장난 곳을 수리해 무사히 다녀오고 난 직후에도 자동차는 또 고장나 애를 먹였다. 인연은 새로운 인연을 낳는다는 말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소개
작가 오정희는
4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79년 이상문학상, 82년 동인문학상, 96년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불의 딸≫ ≪바람의 넋≫ ≪술꾼의 아내≫ ≪옛우물≫ 등의 작품집을 간행했다.
자투리 여행정보
강원도 양구 가는 길은 다양하다. 춘천 소양강 댐에서 양구행 여객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고, 속칭 오음리 고갯길을 올라 파로호 줄기를 따라 내처 달리거나 화천 방향으로 진입해 평화의 댐을 거쳐 돌아오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륙의 한가운데를 장엄하게 휘감아도는 파로호 물줄기를 내내 벗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 못지않게 널찍한 호수에 낚시를 드리우는 사람들이 1년 내내 끊이질 않지만 파로호 주변에는 자신들의 집과 땅이 수몰돼 아직도 가슴앓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