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공연(1) : 엄마젖 하얀 밥
4월 20(일)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엄마젖 하얀 밥>을 대학로 예술 극장 대극장에서 관람했다. 상연 시간은 약 100분 정도였다. 대학로 예술 극장은 최근 다시 개관하여 대학로 연극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극장 내부는 규모가 컸고 관람하기에 좋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 최근 인기가 있는 뮤지컬이나 코믹극이 아닌 정통 창작극이어서인지 일요일임에도 관객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의 정통 연극이 겪는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식 안내서에 나온 작품 소개는 “<엄마젖 하얀 밥>은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진 갑의 권위적 횡포, 권력의 속살을 드러낸다.”였다. 권력과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과 폭력에 대한 상징적 우화이다.
이 작품은 어느 섬을 배경으로 섬을 지배하는 원로들과 그의 하수인이 자행하는 지배와 통제를 통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원로와 일명 ‘몽둥이’라 불리는 하수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섬을 장악한다. 첫째, 인간의 극복할 수 없는 성적본능을 지배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섬은 대부분이 과부 등의 여성이며 남성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상태에서 여성의 성욕은 억압될 수밖에 없는데 마을에서는 추첨을 통해서만 여성의 잠자리를 허용한다. 추첨에서 제외된 여성들은 남성을 배정받기 위해 로비하기도 한다. 성이 강력한 지배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둘째는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엄마젖’으로 상징되는 이익을 원로들이 독점한다. 셋째는 마을에서의 성적활동은 모두 익명으로 이루어지며 상대의 신분확인을 절대로 금지시킴으로써 정보를 통제한다. 남성들 또한 성의 욕구만이 허용될 뿐이며 건강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식량도 공급되지 않는다. 마을의 중요한 식량과 약재는 모두 원로들의 차지가 된다. 대규모의 식량이 원로들의 무병장수를 위한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원로들의 횡포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결국 원로들에게 저항하고 하수인에게 린치를 가한다. 마을사람들에게 장악된 섬에서 갑자기 원로들은 사라진다. 그들은 원래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인물로 마을에 다시 등장한다. 마을은 급격한 무력감에 빠진다. ‘엄마젖’으로 상징된 인간에게 필수적인 영양은 아이들을 제거함으로써 전달되지 않고 원로들의 건강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이것은 권력이 피지배자들의 상태에는 관심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만 충실함을 보여준다. 비록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있어도 권력자들은 일시적으로 후퇴하지만 곧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지배를 반복한다는 어쩌면 암울한 우리의 현실이 재현되고 있다.
연극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세계는 극도로 추상적인 개념인 경우가 많다. 일상 속에서 잊기 쉬운 필수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우화적으로 때로는 희극적으로 감정을 자극하여 현실에서의 각성을 요구한다. 연극의 세계는 관념에 대한 집요한 사색을 통하여 현실의 감추어진 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하도록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흔들어놓는다. 연극의 메시지와 대중적인 전달방식이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비극적인 현실을 극도로 추상화된 우화 속에서 전달하는 방식은 거리감을 통한 냉정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연극을 연극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특히 정극은 연극의 의미를 강조한다. 최근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은 공연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아쉬운 일이다.(주제의 무게감은 관객의 발길을 멀게 한다. 가벼워지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풍토에서 철학적, 사회적 메시지를 가진 작품은 누가 소비하여야 할 것인가?)
작품은 주제의 무게를 적절한 수준으로 무겁지 않게 표현했다. 시간도 서사도 무난했다고 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들도 탁월한 수준은 아니지만 자신의 배역을 충실하게 표현했다. 다만 극의 주제가 ‘갑의 횡포’라고 했는데 섬에서 갈등을 겪는 존재들이 노인으로 표현된 ‘원로’들과 젊은이로 표현된 ‘마을사람’이라는 점에서 자칫 세대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극작가가 의도하였는지 모르지만) 권력의 횡포와 노인 세대의 복지요구가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어진다는 인상은 분명 불편한 감정을 동반한다. 지나치고 과도한 이해인지 모르겠지만.....
(사족)
아코르 대극장 앞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 대부분의 노래는 80년대 초, 중반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 지나가는 젊은이들과는 괴리된 노래는 가수와 관객의 거리를 멀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가수를 보니 옛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재담을 하던 배우와 비슷했다. 퇴락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를 보며 대학로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첫댓글 대학로 근처를 거닐 수 있다는 것, 연극을 본다는 것, 쓸쓸함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순간들이 언제적 이야기냐? 삶은 스스로 느끼는 만큼 풍요로워 진다! 우리 윤리 삐~의 대학로는 대체 어디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