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한 한국 사람들을 앉혀놓고 고구려의 중흥을 이끈 사람이 누구냐 무르면 당연히 광태토태왕과 장수태왕입니다. 물론 이 두 태왕은 고구려의 중흥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이 두사람보다 먼저 고구려를 대국으로 만든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초로 고구려식 독자적 왕의 표기인 태왕(太王)이라는 표기를 사용한 고구려의 제6대 태왕 태조왕입니다.
글의 출처는 주몽 역사토론방의 설총수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고구려의 두 명의 패왕인 태조왕과 광개토왕을 비교해보자면 광개토태왕은 전형적인 장군 타입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가 있었기 때문에 책략이나 화공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습이나 야습은 그 비슷한 것조차 해본 적 없었지요. 그저 적군을 탁 트인 벌판으로 유인하여 한판의 개활전(평원에서 진을 치고 싸우는 정면승부)으로 한방에 박살내버리는, 정정당당한 승리만이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하는, 다소 고지식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항상 이겼으니 어쩌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죠.)
그에 비해 태조왕은 전형적인 모사 타입이지요. 자신이 직접 나서기 보다는 부하들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부하장수들의 승리를 뒷받침하는 계략을 꾸며 두지요. 태조왕은 한나라의 환관세력을 이용해 한나라 왕실과 조정을 어지럽히고 유능한 장수들을 제거해 나갑니다. 게다가 한나라의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는 지방의 농민들에게 유언비어나 선동공작을 하여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해 한나라가 힘을 한데 모으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서식 표현으로 하자면 머리와 꼬리를 돌볼 틈이 없도록) 유능한 장수도 없고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왕실과 조정이 환관의 발호로 인해 엉망이 된 한나라를 고구려는 곳곳에서 손쉽게 격파해 나가지요. 솔직히 나관중은 태조왕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그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웅들이 나타나게 했던 ‘난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태조왕이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게다가 화신(火神)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화공에 능했다고 합니다. 화공에 능하다는 것은 풍향이나 천문에도 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불 지르자마자 풍향이 아군 쪽으로 바뀐다든가 불 지르자마자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든가 하는 개떡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짜둔 계책은 열이면 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딱딱 맞아 들어갔다고 하니 ‘장막 속에 앉아서 만리를 내다본다.’ 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후한서]에는 태조왕에 대해 ‘궁(태조왕의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열어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자기나라 임금도 아니고 남의나라 임금에 대한 평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태조왕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습니다.
태조왕 시절에 고구려의 영토는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영토가 한반도나 북만주 일대보다는 현재의 중국영토를 많이 차지하게되고. 서쪽으로는 요서지역을 차지해서 한나라의 현도에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산동반도와 화북평야, 북평, 업, 수춘, 건업은 물론 양자강 이남까지 차지했지요. 한나라의 지역명칭인 주로 따진다면 유주, 기주의 절반, 청주, 서주, 양주의 절반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 입니다. 이로 인해 부여와 한나라의 교통로를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동쪽으로는 우수리강까지 이르고요.
이처럼 고구려의 세력권이 어마어마하게 팽창하자 부여는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합니다. 태조왕은 얼씨구나 하고 화친을 받아들이지요. 어차피 한나라를 아주 보내버릴 참이었는데 부여와 화친을 맺게 되면 뒤통수 맞을 염려 없이 한나라를 마음 놓고 전력을 다해 공격할 수 있거든요.
이후 태조왕은 현도를 칠 준비를 하는데요. 선비와 동맹을 맺고 형식적으론 독립국이지만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예맥에게도 군사공출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마한의 잔존세력(마한은 서기 8년 온조왕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그때 잔존세력들이 고구려에 의탁하게 됩니다. 유리왕은 그들을 모두 받아주고 영토를 떼어주어 살도록 해주지요.)도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그리하여 한나라와 동북방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이 모두 고구려편이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는 서기121년에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에게 15만 병력을 주어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이를 태조왕의 아우인 수성(고구려 7대 차대왕)이 이끄는 2천 병력(기(騎)라는 표현을 안 한 것을 보니 기병은 아닌 것 같고 보병과 궁병이 적당히 섞인 혼성군인 것 같습니다.)에게 몰살당하고 맙니다.
그 과정을 [후한서]의 기록에 나온 대로 설명하자면 수성이 이끄는 병력이 적은 것을 얕잡아 본 한나라군대가 도망치는 수성을 쫓아가다가(유인작전인 줄도 모르고) 좁은 협곡에 대군이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수성은 갇혀 있는 한나라 군에게(아마 태조왕이 미리 준비한 것이겠지만) 통나무와 돌과 불화살을 퍼부어서 협곡을 가마솥으로 삼아 15만 대군을 통째로 태워버립니다. 한나라군 중에 살아 돌아간 병사가 백 명이고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쪽 전사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부상자로 분류된 병사들 중에 통나무나 돌을 나르다가 손목을 삐끗한 병사가 몇 명 있을지도 모르죠.) 대패한 한나라는 광양과 어양, 우북평, 탁군 등에서 다시 8만 대군을 결집해서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수성이 이끄는 철기 5천의 기습을 받아 또 패배하고 맙니다.
한나라 군을 상대로 두 차례나 대승을 거둔 태조왕은 그해 4월 선비와 연합하여 한나라의 요대현을 공격합니다. 이에 요동태수 채풍이 다시 대군을 (중국인들은 그렇게 죽여도 왜 자꾸 대군이 편성되는 것인지 에휴, 끝이 없어요.) 이끌고 고구려군에 대항합니다만 채풍은 신창에서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때 경모, 용단, 공손포 등등 한나라에서 한가락씩 하는 장수들이 죄다 전사하고요. 그들과 함께 전사한 자들 중에 장수들만 1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나라 군부의 기둥뿌리를 뽑아 버린 셈이지요. 이 여세를 몰아 고구려는 이번엔 마한과 예맥의 병사들과 함께 현도로 쳐들어갑니다. 현도가 떨어지면 병주가 고구려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건 시간문제고 병주가 떨어지면 낙양은…… 노홍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는 거야!’ 죠.
고구려의 맹공으로 인해 국운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은 한나라는 사절단을 보내(거의 목숨을 걸고 고구려영토를 가로질러 갔지요.) 부여에 통사정을 해서 원군을 요청합니다. 한나라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한 부여천제는 자기가 먼저 제안해서 맺은 고구려와의 화친을 깨고 아들 위구태에게 철기 2만을 주어 고구려의 후방 보급로를 급습하여 물자를 빼앗고 현도를 공격하는 고구려군의 후방을 공격합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눈앞에 둔 현도 탈환과 한나라 정복에 실패하고 맙니다. 부여의 배신에 얼마나 열 받았으면 태조왕은 그 일로 화병이 터져서 자리에 누워 버립니다.
태조왕이 병이 들어 눕자 한나라의 황제 유고는 눈치를 살살 보다가 태조왕의 병문안사절 겸 화친사절을 보냅니다. 사절은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하면서 이후로는 한나라가 절대로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을 테니까 고구려도 한나라를 침략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현재 고구려에 잡혀있는 한나라사람들은 성인 한 명당 비단 48필 어린아이는 한 명당 24필을 줄 테니 포로들을 놓아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여와 통교할 수 있기만 하면 황무지라도 상관없고 돌산에 늪지라도 상관없으니까 길을 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한나라는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고구려와 화친해야 했습니다.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궁궐에서는 외척과 환관이 권력다툼을 하느라 나라가 엉망이었으니까요. 태조왕에게도 화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나라 정복을 실패하게 만든 부여에게 복수하려면 일단 한나라의 화친을 받아들여 두는 게 좋기 때문이지요. 태조왕은 부여에 대해 단단히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한나라와 고구려는 화친을 맺게 됩니다.
태조왕에게는 별로 위로가 안 되는 일이지만 아무튼 한나라와의 화친으로 고구려는 떼돈을 벌었습니다.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병사와 백성, 관리를 포함하여 한나라포로를 십수 만 명을 잡아 두고 있었는데요. 성인 1명당 비단 48필이라고 했으니 1만 명이라고 해도 비단이 48만 필이거든요. 비단 48만 필을 쌓으면 어떤 산이 될지 저로서는 짐작도 못할 지경인데 포로가 십 수만 명이라고 하니까 고구려의 시장에서 비단 값이 껌 값이 되었겠군요. 어쩌면 비단으로 똥을 닦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나라 쪽에는 잡아둔 고구려 포로가 없었습니다. 있었다고 해도 공짜로 풀어 주어야 했겠죠. 누가 보아도 승전국은 고구려니까요.
이후 태조왕은 부여에 대한 복수전을 하려 하지만 아우 수성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반대이유는 그 당시까지는 부여가 한나라보다는 강한 나라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이유는 수성이 형인 태조왕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할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대권을 가진 두 권력자의 마찰은 수성의 반란으로 마무리되고요. 수성은 형인 태조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요. 이 사람이 바로 고구려 7대 왕(‘태’자도 붙여주기 싫습니다.)인 차대왕 입니다. 고구려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틈을 타서 한나라는 화친을 어기고 현도에 둔전육부를 설치하지요. 이후 한나라는 차근차근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고 고구려에서는 폭군 차대왕이 태조왕 때의 유능한 신료들을 숙청하며 실정이 거듭 이어지면서 태조왕이 확보했던 한나라영토를 대부분 잃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