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말, 한국 영화의 역사를 바꿔 놓은 한 편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역대 최고의 관객동원과 비평가들의 뜨거운 호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 바로〈왕의 남자〉다. 우리나라에서 영화 한편으로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블록버스터가 아닌, 멜로에 가까운 영화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의 성공은 역사적 사실에다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탄탄한 스토리나 화면 가득히 해학과 풍자가 녹아 든 광대(廣大)문화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현상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이준익 은 1993년〈키드 캅〉, 2003년〈달마야 놀자〉를 만들었던 다소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감독이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적으로나 흥행에 있어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특별히, 이 영화에 출연한 정진영, 감우성, 이준기, 강성연의 연기는 칭찬 할만하다. 영화의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개성을 조화롭게 그려내는 것이 일품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행은 이들의 연기만으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영화평론가들은 동성애 코드에 대한 한국사회의 수용폭이 확대됐다는 점을 <왕의 남자>의 성공 포인트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것은 연산과 공길의 동성간의 입맞춤 장면을 뺐다가 다시 넣은 이유가, 모니터 시사회에서 대학생들이 “동성애 요소가 약하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연산군과 녹수, 그리고 장생과 공길, 네 명의 주인공이 권력욕과 동성애라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전개된다. 공길을 사랑한 장생, 공길을 사랑한 연산군, 그리고 그 연산군의 사랑을 빼앗은 공길에 대한 녹수의 분노가 이 영화를 그려가는 핵심이다. 네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과 질투의 줄타기를 계속하고, 영화는 실제로 줄타는 광대놀이를 통해서 이러한 줄타기의 아슬아슬한 장면을 오버랩한다. 결국 장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공길을 위해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숭고함(?)으로 영화는 끝난다.
필자는〈왕의 남자〉가 지닌 영화적 매력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와 열광에 영화팬의 한사람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동성애에 관한 관객들의 호의적인 눈길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다. 매스컴들은 이 영화가 상영된 이후에 자신을 이반(동성애자를 칭하는 말)이라고 떳떳이 드러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일반인들이 동성애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영화를 통해서 드러난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본격적으로 동성애를 논하기 전에, 한 편의 영화를 더 소개해야겠다.
바로 중국 감독 리안이 만든〈브로크백 마운틴〉이다. 리안은 이미 영화〈와호장룡〉으로 2001년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비롯한 4개 부문을 수상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최근에〈헐크〉라는 블록버스터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지만,〈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다시 화려하게 재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가지는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록키산맥 대자연의 거대한 풍경을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스펙터클하게 펼쳐놓는 화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이 어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 분)이라는 두 인물의 내면 깊숙이 현미경을 들이댄 채 그들의 심리와 감정의 흐름을 한 가닥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나간 부분도 높이 살만하다. 아름다운 산 브로크백에서 여름 한 철 양을 지키는 목동으로 함께 일하게 된 두 청년 사이에 싹튼 우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둘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지만, 둘의 우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 20년 동안 어니스와 잭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사랑을 나눈다. 결국 잭은 자신의 사랑을 사회적인 편견과 신앙적인 갈등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니스를 뒤로하고 세상과 이별하고, 어니스는 잭의 피 묻은 옷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리안 감독은 이 모든 인간 감정의 미묘함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러브스토리(?)를 탄생시켰다. 물론, 그 사랑은 동성애였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미국의 박스오피스에서 1위 자리를 여러 번 탈환하고, 69개의 상영관에 불과했던 스크린을 2000개 이상으로 확대하면서 흥행에 성공한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다. 아마도 동성애를 주제로 성공한〈왕의 남자〉의 여세가 몰아칠 것을 기대했던 수입사는 어리둥절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인 차이다. 동성애와 관련해서, 두 영화의 차이점은 한 영화(왕의 남자)가 남자들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반면에, 다른 영화(브로크백 마운틴)는 동성 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화면 가득히 다소 노골적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동성 간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될 때, 동성애에 대해서 심정적인 동의를 가지고 있던 관객은 충격을 느끼기 마련이다. 바로 이 점이 한국에서 두 영화의 흥행에 있어서 큰 편차를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이러한 상이한 결과는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나라 사람의 대부분이 아직은 동성애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정말로 ‘동성애’라고 하는 것이 동성 간의 육체적인 탐닉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서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남자나 여자끼리도 사랑할 수도 있지 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미국에 있는 동안 동성애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동성애는 사랑의 취향에 대한 문제이지, 성경에서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쉽게 말해서, 사랑의 대상을 이성(異性)으로 하느냐, 동성(同性)으로 하느냐는 인간마다 가지는 성적취향에 대한 선택에 대한 문제이지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여러 가지 조치가 이미 취해졌다. 스웨덴은 1994년에 유럽 최초로 동성 부부의 법적 권리를 인정했고, 1996년에 미국 대법원은 동성애자 차별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영국에서는 2005년 12월에 동성애자 혼인인정 법안이 발효되면서 하루 평균 121쌍의 동성 부부가 탄생하고 있으며, 2010년까지 20만 쌍에서 100만 쌍까지 등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미 출판된 많은 서적을 통해서 서구의 신부와 목사들이 신학적, 성서적으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반하는 행위가 아닌 성적 취향이며, 성서 안에도 아름다운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는 본문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동성애와 이성애는 마치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문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동성애라고 말한다. 또한 기독교가 동성애를 정죄하는 이유는 이성애자들의 성서해석이 지나치게 독단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동성애자들이 인용하는 구절들을 짤막하게 살펴보자.
먼저,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이 창조사건에서 이성애적인 사랑을 추구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창조와 관련된 본문을 도덕적 명령이기보다는 사회학적 서술로 읽는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남성과 여성의 성적차이가 없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적인 취향을 바꾸라고 하는 것은 마치 피부색을 바꾸라는 차별적 성향을 가진 발언으로 여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동성애가 아무리 타고난 기질적 요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벽이나 조울증, 그리고 정신질환과 같은 기질적인 요인을 가진 질환이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현실의 사실만으로 도덕적 당위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둘째, 동성애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결코 그 지역이 멸망한 원인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이방인과 손님을 대접하지 않은 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창세기 19장 5절에서 사람들이 손님들과 상관하겠다는 본문(“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에 사용된 ‘야다(yadha)’라는 동사가 “성관계를 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친해지다”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동사가 구약에서 943번 사용되지만, “성관계를 하다”라는 의미로는 단 12번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로 국한해서 보면, ‘야다(yadha)’의 12번 사용 중에 10번이 성관계와 연결해서 사용되고 있으며, 더욱이 바로 뒤에 나오는 19장 8절에 롯이 사람들에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라는 대목에서 사용된 ‘야다(yadha)’를 “성관계”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이 주장은 억측에 가깝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 가운데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동성애의 성서해석을 보면, 성서를 자신의 논증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게 된다.
셋째, 동성애자들은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에 나오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본문을 우상숭배와 관련된 동성애적 행위와 연결시킨다. 레위기의 성결규범이 인간의 문화 속에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이방신전에서 사용되는 동성애와 구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레위기에서 동성애를 “가증한 일(that is detestable)”이라고 부른 이유는 고대근동지방이라는 문화적 한계, 문화적 상대성을 드러내는 본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성애를 문화적 상대주의, 혹은 개인의 성적취향의 문제로 보려는 시도는 정당한가? 그러나 성경은 동성애자를 문화와 관련해서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반하기 때문에 죄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을 단지 성적취향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넷째, 동성애자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이혼이나 율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동성애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를 금지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두 영화를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첫째, 영화 속에서 보여 준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배치되는 것이다. 성(性)이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창조의 경륜, 다시 말해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쾌락과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을 낳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양육시키기 위해서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쾌락은 윤작(輪作)한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우선에 두지 않고, 인간의 쾌락에 초점을 두면서 동성애를 기질적 이유 혹은 타고난 취향이라고 수용한다면, 그 한계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성을 쾌락의 만족도와 관련된 성적취향이라고 결론내리고, 인간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을 타고난 취향이라고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반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둘째, 영화 속에서 보여 준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금지 된 것에 대한 유혹이다.〈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도 두었다. 그러나 동성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게 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자신의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한다. 소위 그들은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시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한 걸음 물러 나와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사랑에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에 가슴이 아픈 것이다.
영화〈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애절한 두 곡의 노래를 보자. 하나는 밥 딜런(Bob Dylan)의 명곡 ‘He was a friend of mine’인데, 이 곡은 끝까지 동성애의 사랑을 느끼지만 받아들일 용기가 없던 어니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의 ‘The maker makes’라는 곡으로, 현실에서 동성애를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 잭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루퍼스 웨인라이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인물인데, 그 가사는 이렇다. One more chain I break To get me closer to you. One more chain does the maker make To keep me from bustin' through. One more notch I scratch To keep me thinkin' of you. One more notch does the maker make Upon my face so blue... 이하 생략 (나는 사슬을 하나 더 끊습니다. 당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요. 하느님은 사슬을 하나 더 이어주시네요. 제가 부숴버리지 못하게 말이죠. 나는 상처를 하나 더 냅니다. 당신을 잊고 싶지 않아서요. 하느님도 제게 상처를 하나 주시네요. 그게 저를 우울하게 만들고요). 영화음악은 애절하지만, 그 가사를 보면, 하나님이 금지한 것과 자신의 욕망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정신분석가 라깡은 인간의 ‘욕망’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이란 충족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꿔가면서 끈질기게 인간에게 기생한다. 인간의 A라는 욕망이 충족되면, 인간은 이내 욕망 A′로 대상을 바꾼다. 그리고 다시 A′가 충족되면, A″로 대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정확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통제되어야만 한다. 잭과 어니스의 동성애도 결국 그 한계를 인정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이제 물음에 답할 때가 되었다. “동성애, 사랑인가 욕망인가?” 필자는 동성애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성(異性)간의 사랑에도 욕망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누리는 욕망이다. 반면에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욕망이다. 동성애 속에도 애틋한 감정과 쓰라린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욕망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성경에서 동성애는 문화적 차이나 성적취향의 문제로 희석될 수 없는 심각한 죄다. 인간은 금지된 욕망을 더욱 더 갈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욕망에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욕망의 굴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자. 동성애는 죄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죄는 아니다. 교회는 동성애자들이 믿음 안에서 회복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나라에 이미 팽배해 있는 동성애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성애를 접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보호해야 할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이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에게 보다 따뜻하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적취향이라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일이 불결한 것이라고 담을 쌓기만 한다면, 우리가 예수를 온전히 따르는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창녀에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용서하셨다.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동성애를 다루는 방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용서를 알려야 한다. 그리고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제는 교회가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절한 대안과 정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