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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신(文臣).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동춘당 준길은 청좌공(淸坐公) 이창(爾昌)의 아들로 대덕 송촌(宋村)에 살았던 조선예학(朝鮮禮學)의 대가(大家)였다.
공은 쌍청당 송유(宋愉)의 7세손으로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동춘이 태어난 집은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옛집으로 이 집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다 탄생한 곳이니 기이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1606년(선조39년) 탄생하기 전에 이웃에 사는 벼슬아치 이덕순(李德純)이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어떤 사람이 산구(産具)를 가지고 와서 말하되 「나는 하늘사람인데, 송모(宋某)가 아들을 낳게 되어 이것을 송씨의 집에 주려 한다」고 하는 꿈을 꾸고 깨어, 사람을 보내서 물어본즉 공이 이미 탄생했다고 한다.
10세 되는 1615년(광해군7)에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제3자(子) 되는 우암(尤庵)을 보내와서 동학(同學)하게 되었다. 수옹(睡翁)은 청좌공(淸坐公)과 더불어 쌍청당(隻淸堂)을 동조(同祖)로 하고 또 두분이 정헌(正獻)[正獻은 시호; 아호는 崇德齋] 이윤경(李澗慶)의 외손(外孫)인고로 양이 형제(兄姨兄弟) 사이 이고 그 아들인 우암(尤庵)은 동춘(同春)보다 한살 아래이었다. 이때부터 동춘(同春)과 우암(尤庵)의 관계는 혈연으로서 뿐만 아니라 학연으로서 동학(同學)하는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16세에 1621년(광해군13년)에 관례(冠禮)를 행하시었다. 예(禮)는 사계(沙溪)가 와서 관(冠)을 씌우고 신독재(愼獨齋)가 찬(贊)을 하고 죽창(竹窓)이 빈(儐)을 했다.
인조원년(1623)에 사계(沙溪)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을 했다. 사계(沙溪)는 동춘의 표종숙(表從叔)이다. 먼저 계몽서(啓蒙書)를 수학하고 이로부터 왕래하면서 모든 글을 다 통하였다. 또 예서(禮書)에 정박(精博)하여 자기의 말로 외듯 하니 사계가 바야흐로 예(禮)를 사람에게 가르치는 지라 기뻐하여 말하기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되리라" 했다.
이해 가을에 생원진사초시(生員進士初試)에 합격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고관(考官)의 논박(論駁:잘못을 공격함)을 당하여 과거급제가 취소되고 말았다.
10월에 진주정씨(晉州鄭氏)에게 장가들었다. 배우자는 문장공(文莊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따님이시니 이때에 우복이 부제학(副提學)으로 휴가를 얻어 상주(尙州)로 돌아와 보니 왕이 혼수를 내리시었다. 우복이 동춘을 보고 원도지기(遠到之器 :그릇이 될 인물)로 크게 기대했다.
동춘이 혼인할 때의 일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경상도의 유명한 학자 우복(愚伏) 정 경세(鄭經世)가 사위감을 고르려고 사계 선생댁을 찾아왔다. 우복(愚伏)은 사계에게 사위감 하나를 골라 달라고 청하니 사계께서 하는 말씀이 서당에 가면 세 청년이 글을 읽고 있을 터이니 가서 골라보라고 권하였다. 우복이 서당으로 불시에 찾아가서 방문을 열으니 세 청년이 다같이 누워있었던 때였다. 불시에 손님이 문을 열자 누워있던 세 청년 가운데 한 청년은 얼른 일어나서 나와 인사를 하며 손님을 맞이하여 드리고, 한 청년은 누운 채 그대로 있었으며, 한 청년은 다만 일어나 앉아서 있을 따름이었다. 세 청년의 행동이다 각각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돌아온 우복은 사계에게 누워 있는 청년은 누구이며, 일어나 나와서 인사를 한 청년은 누구이고, 일어나 앉아 있던 청년은 누구냐고 물으니, 누워 있던 청년은 우암 송시열이고, 인사를 나온 청년은 초려 이유태이며, 앉아 있던 선비는 동춘당 송준길이라고 하니, 우복은 중도를 지켜 처세를 할 줄 아는 송준길을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정경세는 사위를 본 후 언젠가는 자기 사위인 송준길이 정승을 하리라고 믿고 요도 두겹으로 깔아주며 반찬도 정승을 대접하는 찬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자기의 벼슬은 판서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자기보다 벼슬이 높아질 사위감 송준길에 대해서 항상 자기보다 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부인과 함께 짜고 우암, 동춘, 초려 세 청년 중 누가 정승자격이 있는가 시험해 보고자 약속한 후 개울에 나가서 발가벗고 목욕을 하고 있는 세 청년의 의복을 가지고 도망해 오라고 하였다. 옷을 가지고 내빼는 청년을 보자 화가 벌컥 난 우암 송시열은 발가벗은 채 알몸으로 동네 안에 쫓아 들어오며 내옷 내놓으라고 고함을 치니 동네 아낙네들이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랠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옷을 가지고 도망해 오던 하인은 우암의 옷만은 돌려주었는데 초려 이유태은 모래를 파고 들어가 몸을 파묻고 옷을 갖다줄 때를 기다렸으며 동춘은 의젓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본 우복정경세는 옷을 돌려주면서 정승재목은 뱃심좋은 우암 송시열이 틀림없으나 자기의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선비는 사위 송준길이라고 칭찬하였다. 과연 살아서 생전에 정승을 한 분은 우암 송시열이요, 동춘은 생존에 이조판서 밖에 못하였으며 사후에 영의정을 증직(贈職)받았으니 중도를 지킬 줄 아는 선비다운 모습을 선생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1624년(인조2년) 8월에 생원진사(生員進士) 회시(會試)에 합격하였고 다시 이듬해 여름에 별시초시(別試初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이때 우복이 시관(試官)이었는데 동춘이 합격됨을 알고 급히 시험지를 감추며 합격시키지 않았으니 사위의 등제(登第)시켰다는 혐의를 미리 피하고자 함이었다.
1628년(인조6년) 청좌공(淸坐公)이 졸(卒) 했다. 공이 16세때 1622년 (광해군14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실 때부터 이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건강을 잃는 우려가 있었는데 청좌공(淸坐公)이 졸(卒)함을 당하여 깊은 병환(病患)이 되니 뒷날 일생의 쇠약한 증세는 실로 여기에서 근거되었다.
25세되는 해인 1630년(인조8년)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 정9품 벼슬)를 제수 하였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청좌공이 돌아가신 뒤부터 드디어 과거보는 일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전후제명(前後除命)에 있어서 학문이 완숙하지 못하다고 사면(辭免)하시고 취임(就任)하지 않으신 것이다.
1631년(인조9년)에 스승이신 사계(沙溪)선생이 돌아 가셨다. 사계선생은 돌아가기 이전에 동춘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이르시길 미고(微羔)가 있다하며 동춘이 우암과 더불어 연산(連山)으로 오라고 하였다. 동춘이 우암과 함께 연산으로 황급히 가보니 사계의 병환은 이미 위급하였던 것이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가마기복(加麻期服 : 잔을 쓰고 일년동안 服을 입음)을 하시어 스승 사계에 대한 예우를 다하였다.
1632년(인조10년) 겨울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1633년(인조11년) 5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除授)하니 동춘이 누차 사양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시며 마지못하여 취임하시었다. 동몽교관은 각 군현에 설치된 것으로 이전의 동몽훈도(童蒙訓導)에서 명칭이 바뀐 것이며 아이들을 교육하고 향촌사회의 윤리교화와 지방사회 사족(士族)의 구심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리이다.
1635년(인조13년) 봄에 의사에게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장차 상행(上行)하려 할때 우암이 육효(六爻)를 뽑으니 규지진괘(暌之晉卦)가 나왔다. 이때에 동춘이 숙환(宿患)이 심극하여 의원들이 각견(脚緊)을 풀어 기혈(氣血)로 하여금 통하게 하기를 청했으나 동춘이 썩 마음내켜 풀지 않으며 말하길 "이같이 한 즉 산만(散漫)하여 어지러우니 도리어 병이 더한 것 같다고 하시었다. 우암(尤庵)이 동춘의 수속검지공(收束檢之功 :머리를 빗고 망건을 쓰고 행전을 매고 의복을 단정히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바라고 항상 감탄하였더니 이 경우에도 몸의 단정함이 흐트러지는 것이 몸의 병환을 치료하는 것보다 높이 생각했다. 동춘의 지조 높은 학자로의 자세가 여실히 드러난다.
건강과 연결되어서 그런것인지 아니며 다른 도학적 지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동춘의 건강의 위약함은 이후 동춘의 관계 진출이 간접적인 영향이 있지 않나 싶다.
1636년(인조14년)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제수했고 바로 예산혐감(禮山縣監)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1643년(인조21년) 정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했으나 사양하였고, 7월에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1644년(인조22년) 11월에 지평(持平)을 제수했으나 역시 부임치 않았다. 이때 우암은 사헌부사간원(司憲府司諫院)니 대직(臺職)에 임명되어 나가있었다. 1645년(인조23년) 4월에 또 지평(持平)을 제수 했는데 상소하여 사양했다. 이것이 진정사직겸진소회소(陳情辭職兼陳所懷疏 : 仁廟 乙酉 五月時 昭顯世子新蒙)인데 여기에 선생이 관직을 사양하게 되는 이유를 어린시절에 과거 공부를 했으나 재주가 둔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이 들어 병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어 생긴 몰골이 파리하고 원기가 없어서라고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학문에 대한 겸손의 뜻이겠으나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의 건강에 대한 모자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1649년(효종즉위) 5월에 인조가 돌아가고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빈청(賓廳 : 대신과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임금을 만나서 모여서 회의하는 곳) 관리들이 아뢰어 신독재·동춘·우암을 독서지인(讀書之人)으로 천거하니 효종은 흔쾌히 응하였다. 6월에 부사직(副司直)을 제수받고, 6월 시강원 진선(侍講院 進善)을 제수받고, 8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제수받고 9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로 승직(陞職)되었으며 10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었다.
동춘은 효종이 즉위하면서 당시에 권세를 휘두르고 청나라에 아부하던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을 탄핵하여 그 시비를 가리어 청서파(淸西派)의 집권을 가져오게 하니 세인(世人)의 칭찬이 높았다. 그후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은총이 지극하여 북벌계획(北伐計劃)에 깊이 참여했다.
공은 농민들에게 평상시는 농기구로서 소시랑을 쓰게하고 일단 유사시는 소시랑 끝을 뻗쳐서 창으로 이용하게 하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며 국민들에게 파란 이불호청과 빨간 이불호청을 쓰게 한 다음 유사시에는 이불 호청을 뜯어서 군복을 만들어 쓸 수 있도록 유념하였다고 전한다.
일찍이 송시열은 그를 가르켜 「천품이 뛰어나고 정명온수(精明溫粹)하며 머리가 총명하고 하자가 없는 옥같은 선비이며, 색이기화(얼굴빛이 온화하고 성품이 온화함)하여 보는 사람마다 심취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사계 김장생을 잇고 있지만 예학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계 자기 자신보다 앞서 있다고 하여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1659년(현종 즉위년) 그의 나이 54세 때 다시 이조참의에 나아간 그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우암과 함께 기년제(朞年制)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남인(南人) 윤휴, 윤선도(尹善道)의 3년제(三年制)를 누르고 예송에 승리함에 따라 우참찬(奈參贊)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윤선도에 의해 재론된 예송으로 속죄(續罪)키 위하여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4월 조경(趙絅)이 다시 소를 올려 송준길을 심히 탄핵하자 그는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1665년 원자(元子)의 보양(輔養)문제를 상소하여 첫번째 보양관(輔養官)이 되고 현종에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올려 더욱 더 세인(世人)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기년제(朞年制)의 잘못으로 남인(南人)들의 규탄과 거듭되는 상소로 사퇴했다. 뒤에 벼슬은 좌참찬(左參養) 겸 좨주(祭酒),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1670년(현종 11) 세자(世子)의 관례가 있어 조정에 나아갔는데 때마침 전라감사 김징(金澄)에 대한 무고가 있어서 그는 또 한 차례의 무고를 받았다. 그러나 동춘당은 세자의 관례에 끝까지 참여한 후 곧 한강(漢江)을 건넜다. 이에 임금과 세자가 몇번이나 유지[諭旨]를 내려 조정에 머물기를 간청했으므로 마지못해 승락했다가 다시 몇번이나 낙향할 것을 간청했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하향(下鄕)하여 67세에 조용히 영면했다.
동춘당은 송시열과 같은 학통(學統)의 성리학자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랐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1756년(영조32)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공주(公州)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옥천(沃川)의 표충사(表忠祠),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등에 제향(祭享)되었다.
공은 명필이어서 이시발신도비(李時發神道碑)를 비롯하여 윤계순절비(尹啓殉節碑), 박팽년 유허비(朴彭年遺虛碑)등 우암의 비문에 동춘당의 비문글씨로 된 금석문(金石文)이 대덕구를 중심으로 많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동춘당집《同春堂集》·어록해《語錄解》등이 있다.
《자료 : 同春堂集》
《崔槿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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