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7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육군본부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들. 특히 전두환 소장은 허화평 대령의 표정을 주시하며 의심을 감추지 않은 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허대령. 그게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해병대라니? 해병대가 광주 폭도들하고 연합해서 진압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단 말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
저녁이 되어 허화평 대령은 진압작전의 실패와 관련해 전두환 소장에게 해병대가 광주 폭도들과 합세한 것 같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처음에 전두환 소장은 그 이야기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화평 대령이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전두환 소장은 믿기지 않다면서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믿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사령관님. 근데 폭도들하고 연합한 해병대가, 해병대가 맞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왜?” “군복이며 총이며 해병대가 가진 무기들이 우리 군이 가진 장비들과 다릅니다.” “뭐야? 다르다니? 그럼 북괴놈들이 침투했다는 거야?” “북괴도 아닙니다.” “...”
전두환 소장은 할 말을 잃었다. 해병대도 아니고 북괴도 아닌 것들이 해병대라니? 그리고 그 해병대가 가진 장비들이 군이 보유한 장비와 다르다니? 폭도들과 연합한 해병대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들이 자신의 집권계획을 방해할지 몰랐다.
“허대령. 정보요원 보내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빼내.”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허화평 대령은 거수경례를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1980년 5월 27일 광주시 전남도청 지하실 날이 어두워졌다. 김정수 중령은 한숨을 쉬고는 해병대 지휘관들이 있는 도청 지하실로 걸어갔다. 원래 TNT와 수류탄이 있던 도청 지하실은 막대한 양의 TNT와 수류탄이 근처의 경찰서로 옮겨지면서 해병대의 사무실이 되었다. 사무실에는 해병대 선임하사와 해병대원 몇이 주재하고, 다른 해병대대원들은 근처 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문 앞의 해병대원들은 김정수 중령을 보자 “필승!”을 하며 거수경례를 하였다. 김정수 중령은 해병대원들에게 간단하게 경례하고는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의자에 앉은 선임하사 이상 지휘관들은 김정수 중령을 보자 일제히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였다. 김정수 중령은 지휘관들을 둘러보고는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지휘관들을 소집한 이유는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
오후에 시민궐기대회를 하면서 박남선은 해병대가 궐기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 발언은 신군부 세력에게 해병대가 광주시민군과 합세했다는 오해를 줄 수 있는데, 김정수 중령은 그로 인해 대대와 해병대 전체에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이미 우리의 존재가 노출된 이상, 우리가 누군지는 신구부가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신군부가 분명 대책을 세울 것이고,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지 모릅니다. 심하면 포병이나 항공기로 광주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김정수 중령의 말이 끝나기 전에 지휘관들은 소란스럽게 서로 이야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내 조용해지고. 김정수 중령은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군부가 대책을 세우면 우리 해병대 뿐 아니라 광주 시민들도 위험해 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군부 세력이 우릴 잡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키기라도 하면 우리가 죽는 건 둘째 치고, 도청 주변이 쑥대밭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레바논에서 같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채경식 상사였다. 김정수 중령의 지적에 채경식 상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대장님. 제 의견입니다만. 별동대를 조직해서 전두환을 암살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제아무리 신군부 세력이라도 우두머리가 사라지면...” “안됩니다. 상사님. 우리가 별동대를 조직해서 전두환을 암살한다 하더라도 광주시민의 희생을 멈추게 하긴 어려울 겁니다. 전두환이 암살되면 노태우나, 다른 신군부의 핵심인물이 분명히 나타나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결국에는 광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폐허가 남겠지만 말입니다.” “...”
신군부 세력은 거대하였다.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일개 대위 따위가 권력을 잡은 게 아니라 장성 계급의 보안사령관, 수도군단장, 특전사령관, 전방사단 사단장, 공수여단 여단장 같은 자들이 뭉쳐 권력을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신군부에 동조하는 자들과 하나회라는 거대한 사조직이 있었다. 정승화 대장이나 정병주 소장 같은 온건파 장성들이 작년에 쫓겨난 탓에, 전두환이 제거 되더라도 신군부 세력이 쉽게 붕괴될 세력은 아니었다.
“대대장님. 31사단과 접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31사단이라고 하면 5.18 때 뭣 된 사단 아닙니까?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반대하다가 지휘계통에서 빠졌으니 그 불만을 이용해서...” “중대장님. 후방 사단으로 신군부 세력에 맞서자는 겁니까? 사단에 실 병력이라 해봐야 겨우 한 개 대대도 안 되는 병력인데 그걸로 어떻게...” “최중위. 그럼 대책 있나? 그럴 바에야 해병대나 공수부대 출신 예비군 모아서 게릴라전 벌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대장님? 상당한 양의 무기도 있겠다, 수류탄도 있겠다...” “어이 대위. 그러다가 다 뒈져버리게? 게릴라전 신나게 벌이다 서울에 못 가믄 어쩔려구? 만약에 생포당하면 자살할껴?” “차라리 포항에 가서 해병대한테 궐기하자고 합시다. 그러믄 전두환이 오줌 질질 쌀거 아닙니까?” “...”
어두운 표정의 이주영 소령은 얼굴을 쳐들고는 지휘관들을 향해 꽥 소리쳤다.
“시끄러! 지금 게임 하는지 알아? 내일 모레 누구 뒈질지 모르는데 뭔 소리들을 해대는거야!” “...”
지휘관들은 일제히 꼬리를 내렸다. 지휘관들 중 박진구 중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박중위. 의견 있나?” “의견 있습니다. 대대장님.” “그래? 그럼 발표해 보게.” “제 생각입니다만, 민중봉기를 유도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민중봉기라는 박진구 중위의 말에 김정수 중령을 위시로 지휘관들은 일제히 박진구 중위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민중봉기라니?” “지금 신군부는 계속 왜곡된 보도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국민들은 그게 진실인 냥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큰 타격을 입은 이상 어느 정도 계엄군의 포위망을 풀 수 있을 것이고, 그때 다른 지역으로 사람들을 보내 광주의 진실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하면 사람들은 분명 무슨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광주의 실상을 찍은 테이프를 각지에 보내면 뭔가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신군부가 지금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게 문제지만 말입니다.” “그럼 진실을 알리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대장님.”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별동대를 보내 전두환을 암살한다거나 31사단과 접촉해 공수부대를 몰아낸다는 것과, 광주의 상황을 알려 민중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을 비교할 때 전자에 비해 후자가 그런대로 현실성이 있는 것 같았다. 전자는 인명손실이 발생한다는 점과 성공 가능성이 낮아 실행한다 해도 해병대에게 득보다 실이 많았다. 게다가 잘못하면 해병대가 광주시민들과 함께 폭도로 몰릴지 몰랐다. 반면 후자는 그런대로 해볼 만 한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인명손실은 둘째 치고 광주시민들에 동조하는 세력을 만들어 1987년 6월 항쟁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때처럼 신군부 세력을 몰아내는 게 전자보다 쉬울지 몰랐다. 전국적인 봉기는 분명 큰 효과가 있었다. 1960년 4월에 그랬고 1987년 6월에 그랬다.
“흐음... 북괴가 걸리적거리지만 박중위의 의견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휘관들은 박진구 중위를 보다가 김정수 중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박진구 중위의 의견대로 전국적인 봉기를 한번 유도해 봅시다. 이를 위해 여기에 옮겨놓은 대민작전용 장비를 최대한 이용하도록 합시다. 복사기나 컴퓨터,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서 유인물을 제작하고, 윤상원씨 하고 이야기해서 각지에 사람을 보냅시다.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서울이 됐던 부산이 됐던 대전이 됐던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봉기를 유도해야 합니다.”
좌중은 엄숙해졌다. 채경식 상사가 일어나서는 좌중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대대장님! 문어대가리 개새끼 죽여 버립시다. 까짓 거. 전국에서 시위 일어나면 제아무리 지가 뭐라고 지랄해도 결국엔 작살 날겁니다.” “그러지요. 그리고 31사단 정웅 소장하고 접촉해 보십쇼. 그 사단이 전남북계엄분소에서 공수여단들의 지휘계통에 빠져있으니 그 불만을 이용합시다.”
1980년 5월 28일 광주시 전남도청 아침 해가 밝아왔다. 지하실에 임시로 마련한 매트리스에서 잠을 잔 김정수 중령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대충 세면을 하고 식당으로 올라갔다. 식당은 아침을 먹으려는 시민군들로 북적거렸다. 걔 중에는 사막위장복 차림의 해병대원들도 있었다.
더위라는 단어에 김정수 중령은 마누라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여름만 되면 해수욕장으로 가 마누라와 물놀이 하고, 물놀이 하고 나면 모닥불 앞에 앉아 사랑을 나누고, 1년에 한두 번 정도 물놀이를 갔지만 그때의 일들은 너무 행복했다.
“대대장님. 오늘 뭐 하실 겁니까? 공수 놈들이 쳐들어 올 것 같진 않은데...” “음... 상사님. 우리 교회 한번 갈까요?” “교회라니요?” “지원동에 ㅇㅇ교회라고 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다녔던 교회거든요.” “ㅇㅇ교회요? 많이들은 교회 같은데... 알겠습니다. 대대장님. 근데 경호병력 붙여 놓을까요?” “맘대로 하세요. 단, 한 개 분대 이상이 되면 안 됩니다. 다섯 명 이하로 경호 병력하고 차량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둘은 M16 소총과 K5 권총으로 무장하고는 군용 지프에 올랐다. 지프 뒤로 M113 장갑차에 중무장한 해병대원들이 탑승하였다. 채경식 상사는 시동을 켜고는 페달을 밟았다.
“대대장님. 시내를 달리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이 이상하군요. 근데 기분 이상한 건 상사님 아닙니까?” “생각해보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동에 살았었는데...” “상사님. 학동 사셨습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 배고픈 다리 있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참 좋은 동네였지요. 망할 빛나리 덕분에 좋은 동네가 개판이 됐지만...”
지프와 장갑차는 학동을 지나 나병환자협회 근처에 이르렀다. 채경식 상사는 교회를 보고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여깁니다. 대대장님.”
김정수 중령은 지프에서 내려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나도 초라한 건물. 그 건물은 김정수가 고등학교 때 다녔던 교회의 옛 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예배당은 너무 어두웠다.
“씨... 씨방 뭐시당가요?”
교회 직원인 듯 한 자가 김정수 중령과 채경식 상사를 보고는 넋이 나가버렸다. 김정수 중령은 직원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벽 앞의 나무의자에 앉았다. 이수영 소위는 초소 밖으로 나가서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장교님 찾는다고 하셨죠?” “네... 안경 쓰고, 명찰에 김... 정수던가? 이름이 써져 있던데...” “김정수요? 저희 대대장님이에요. 대대장님 뵐려고요?” “네... 그리구 그 장교님께 전할 거 있는데... 이것 좀...”
여자는 이수영 소위에게 보따리를 안겼다. 보따리가 각이 진 정사각형 상자 형태라 이상했지만 일단 보따리를 받고는 나무 의자에 놓았다.
“이거 몸에 좋은 거니깐 장교님께 꼭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 이름이 김혜선이에요.”
김혜선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황급히 전남여고 쪽으로 사라졌다. 이수영 소위는 보따리를 들고는 초소로 돌아갔다.
“누나~ 그거 뭐에요?” “야! 누나라고 하지 말랬지! 그만 해! 어... 이거? 김혜선이라는 사람이 대대장님한테 드릴거라고 주던데?” “대대장님께 드릴 거요? 근데 이름이 김혜선이라... 구혜선이 생각나네?” “농담이야?” “아뇨, 근데 대대장님 좋겠습니다? 여자 생기고? 게다가 여자가 경계라...” “강병장. 무슨 생각해?” “아... 아니에요. 하하...”
강우혁 병장의 웃음을 뒤로하고 이수영 소위는 보따리를 들고 초소를 나와 건물로 들어갔다.
1980년 5월 28일 광주시 지원동 한바탕 총소리가 들려왔다. 외곽의 시민군과 계엄군이 총격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총성이 울리고 몇 분 정도 지나 총격이 끝났다. 김정수 중령은 바닥에서 일어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기도를 하는 동안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었다. 공부 지지리 못해 인생 포기할까 하다가 고3때 지필고사에서 갑자기 전교 1등이 되고, 수능 때는 500점 만점 맞아 아버지의 권유로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됐던 일, 해사에 들엉가 해병대 장교가 되기로 결심했던 일. 해병대소위로 임관해 1사단 IBS 대대에 배치됐던 일, 과학화훈련장에서 전갈대대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일개 대위에서 중령으로 벼락 진급한 일, 해외파병부대 지휘관이 됐던 일, 고등학교 때부터 사겼던 누나와 결혼했던 일... 가족들과 마누라,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아래 이라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던 일, 광주 상공에서 갑자기 거대한 폭풍을 만나 1980년 5월로 떨어진 일, 도청의 항쟁위원회와 접촉해 박남선과 윤상원을 봤던 일, 27일 새벽에 계엄군과 전투를 벌여 광주시민군과 해병대가 승리한 일, 상무관에서 김혜선이라는 여자와 만난 일... 인연이라는 게 뭔지, 삶이 뭔지 자문해 보고 싶었다. 이 소설 같은 일. 믿기지 않지만 그건 김정수라는 인간에게 내려진 가혹한 현실이었다. 걱정되었다. 김정수 중령을 비롯한 해병대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고 하지만 김정수 중령과 해병대에게 앞날은 창창하지 않고 불안하였다. 혼자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하는 눈 먼 장애인처럼 죽게 될지 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랬다. 5월 27일 그때는 너무 운이 좋았다. 적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부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 했다. 운에 미래를 맡길 순 없었다.
“상사님. 걱정되는군요...” “걱정이라니요?” “앞으로의 일 때문에 말입니다. 어제 새벽에 계엄군을 몰아냈다고 하지만 계엄군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팬텀기가 날아와 광주에 폭탄을 떨어트린다면 끝장일겁니다. 그리고, 민중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린다고 해도 타 지역 사람들이 믿을 런지 의문이고...” “... 대대장님. 희망을 가지십쇼. 실패라니요, 그리고 우리 대대가 약한 대댑니까? 사단 내 최강의 대댄데 벌써부터 그러시면... 희망을 가지십쇼.” “...”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랬다. 김정수라는 인간은 꼴찌에서 벗어나 1등이 되어 결국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 사랑하는 누님과 결혼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항쟁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수의 광주시민들이 죽었던가.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봉과 대검에 맞서 죽음을 무릅쓴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싸움에서 광주시민들은 대한민국 최강의 공수부대를 몰아냈다.
“상사님... 죄송합니다. 걱정된다고 하다니요... 싸우면 이길 것이죠... 아니. 반드시 이길 겁니다!” “맞습니다 대대장님. 우리는 이깁니다. 대한민국 해병대에게 불가능은 없고, 광주시민들은 불가능한 일을 이뤄냈습니다.”
김정수 중령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채경식 상사도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지프에 올라 시동을 켰다. 엔진이 덜덜덜 거리고, 지프와 장갑차는 동부경찰서로 향하였다.
“충성!”
지프는 어느새 동부경찰서 앞에 멈추었다. 강우혁 병장은 김정수 중령을 보자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였다.
“강병장. 수고 많네. 근데 이수영 소위하곤 잘 되고 있어?” “네...? 아직 진도 못나갔습니다.” “그래? 나보다 더 나은 상황인데 진도를 못나가다니...”
김정수 중령은 강우혁 병장이 남몰래 이수영 소위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파병 전부터 그 사실을 알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강우혁 병장과 이수영 소위의 사이가 발전하면 좋겠다고 내심 바랬다. 김정수 중령으로서 강우혁 병장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누나와 결혼한 유부남이지만 고등학교 때 강우혁 같이 누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 대대장님. 이수영 소위님이 찾으십니다.” “나를 찾는다고? 자네가 너무 스토킹 해서 스트레스 받은건가?” “그건 아닙니다.”
지프에서 내린 김정수 중령은 건물로 들어갔다. 김정수 중령이 대대장실에 들어서자 이수영 소위가 뭔가를 든 채 거수경례를 하였다.
“필승!” “필승!” “여기 앉게.”
둘은 소파에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무슨 일인가. 이소위?” “오늘 어떤 여자가 이걸 대대장님께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수영 소위는 보따리를 탁자에 올렸다. 김정수 중령은 정사각형 모양의 물건을 보고는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가 벗겨지고, 벌꿀 상자가 드러났다.
“잉? 뭐시여? 벌꿀...? 누가 줬냐? 혹시 그 여자 이름 알아?” “그 여자가... 구혜선... 아니. 김혜선이라고 합니다.”
김혜선이라는 말에 김정수 중령은 순간 진압봉을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김혜선이라니? 김혜선? 생각해보니 그 김혜선이라는 여자를 어제 오후에 상무관에서 만난 것 같았다. 아내하고 닮은 그 여자. 벌꿀 상자를 살펴보았다.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편지 같은게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장교님. 저를 아시나요? 김혜선이라고... 갑작스런 선물에 많이 놀라셨겠지만, 저의 장교님에 대한 마음으로 받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세시에 상무관 앞에서 장교님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 5월 28일 장교님을 몰래 사모하는 김혜선 올림]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막 세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정수 중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대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야! 나 없으면 상무관 앞에 있다고 해!”
1980년 5월 28일 광주시 상무관 김혜선은 김정수 중령이 오길 기다리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 남자가 보고 싶었다. 나이 서른에 남자 밝히는 꼴이 요망스러웠지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너무 멋졌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준 그 남자. 그 남자가 너무 좋았다.
“혜선씨! 혜선씨이-!”
누군가가 힘들게 뛰어왔다. 김정수 중령이었다.
“우- 씨발. 엄청 덥네... 헤선씨! 저 보자면서요?” “네...”
김정수 중령은 힘든 몸을 이끌고 김혜선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근데 왜...” “사랑고백 하려고요.” “...?”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김정수 중령은 김혜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까... 뭐라고 하셨죠?” “사랑고백이요...”
이 어이없는 상황. 만난 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 사랑고백이라니. 쓰레기 연애소설 아니면 이뤄지기 힘든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것에 김정수 중령은 다시 한 번 진압봉을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느꼈다.
“저... 혜선씨... 저는 마누라가 있는 몸입니다... 게다가...” “장교님! 괜찮아요.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김혜선은 김정수 중령을 와락 끌어안았다. 김정수 중령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김혜선의 품에 빨려 들어갔다.
“혜... 혜선씨! 만난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이러시면...” “괜찮아요! 전 이미 당신에게 반했어요!”
겨우 둘의 몸이 떼어지고. 김정수 중령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우... 누가 보면 혜선씨보고 미친년이라고 하겠네...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몰라도 벌써부터...” “서른살이요.” “...?”
진압봉이 머리를 강타하는 소리. 김정수 중령은 할 말을 잃었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른살이라니? 믿겨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