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전에 벌어진 군위삼존석굴 '대발견' 소동"
이른바 '제2석굴암'은 성급한 언론이 만든 이름
1962년 10월초의 어느 날, 팔공산 북녘으로 이어진 깊은 산골짜기에는 느닷없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한적하기 그지없던 이 골짜기에 사람들이 떼지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문화재조사단과 잘 나가는 신문사의 기자들이 앞장섰고, 몇몇 대학교수와 지방관리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빠질 수 없었다.
이들을 전부 이곳까지 끌어들인 주범은 며칠 전에 어느 신문에서 재빨리 알린 특종보도였다.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속하는 이곳에서 굉장한 석굴이 하나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른바 '제2석굴암'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군위삼존석굴이 이토록 언론의 조명을 받은 데에는 신문사들끼리 과당경쟁을 벌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특종보도를 놓친 신문사에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재빨리 특파원을 현지로 보내 석굴의 현황이나 마을주민들에게 탐문한 내용들을 알렸고 이러한 경쟁보도가 결국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연일 대서특필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군위삼존석굴의 존재를 포착하자마자 흥분하여 들뜨기는 행정당국도 마찬가지였다. 특종보도가 나온 그 다음날로 도지사까지 곧장 현지를 탐방했고, 이내 이곳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수선하는 것은 물론 이 일대를 대규모 관광지대로 건설한다는 계획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덧붙여 심지어는 팔공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대구에서 군위석굴까지 곧장 연결한다는 얘기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언론 스스로 이러한 과열보도를 꼬집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석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 '대발견'이라고는 하였지만 실상은 수년 전부터 석굴의 국보지정건의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고, 더구나 문헌상으로 보더라도 이 석굴의 존재는 이미 일제시대 초반에 채록되어 보고된 사실이 있었다는 지적들이 이어졌다.
실제로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를 살펴보면 석굴 안에 들어있는 석불상의 생김새와 크기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석굴 앞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석불좌상 1구와 모전석탑의 배치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는 1942년에 책자로 묶어진 것이긴 하지만 원래 1916년 무렵에 총독부 식산국 산림과에서 조사해놓은 '고적대장'을 축약하여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군위삼존석굴의 존재는 적어도 '대소동'이 벌어지기 반세기 전쯤에 벌써 세상에 드러났던 '해묵은' 유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군위석굴의 존재를 두고 이토록 야단법석을 떨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은 마침 경주 토함산 석굴의 중수공사를 벌이던 때였다. 일찍이 조선총독부가 허물어져 내리던 석굴암을 고쳐 영구히 보존토록 한다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해체수리공사를 벌인 것이 1914년 이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시멘트로 덧칠한 이 때의 공사는 오히려 이슬이 맺히고 이끼가 들어차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굴의 구조까지 변경하였다는 비난이 일었고, 이에 문화재당국이 직접 나서 이중 방수막을 설치하고 전실의 굴곡부를 바로 펴는 공사를 크게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당연히 국민들의 관심은 '석굴암'이라는 존재에 한껏 쏠려 있었다. 더구나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면서 문화재 당국에서도 이와 관련된 물증이나 문헌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희한하게도 석굴암의 시원적 양식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석굴이 때맞춰 발견되었으니 그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이름을 주저 없이 '제2석굴암'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세칭 '제2석굴암'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분별한 언론이 성급하게 만들어낸 호칭에 지나지 않는다. 정식명칭으로는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7호)이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계명대신문 제943호, 2005년 3월 28일자]
(정리: 2005.3.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첫댓글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보고 왔던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