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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KNG27 밀양 문화 기행
주최 : KNG 27 동기회 2011.05.29. (일)
2011. 5.29. 밀양문화 기행 일정표
강봉호 회장 인사말:
동기 여러분 문화기행도 3년째입니다. 날이 갈수록 그 내용도 다양해지고
유익해 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참여가 다소 저조하지만 다음 기행때는 더
많은 동기들이 참여하여 알찬 문화 기행이 되고 동기회 활동을 활성화 시키는데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동기 여러분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08:30 해운대 신도시 양운고앞
09:00 동래 전철역 --> 만덕 -> 신대구->삼량진
10:00~12:00 삼량진 양수 발전소 견학 및 점심(도시락)
12:00~12:30 예림서원으로 이동
12:30~13:10 예림서원 관람
13:10~ 13:30 민물고기 전시관으로 이동
13:30~ 14:30 민물고기 전시관 견학 및 사진촬영
14:30~ 14:50 호박소로 이동 (얼음골)
14:50~17:30 호박소 휴식 및 삼림욕 (주 휴식처)
17:30 ~ 부산으로 출발
18:30~20:00 구서동 IC 입구 배비장 보쌈집 저녁식사
20:00~ 20:40 해운대 신도시 도착 후 해산
참가자: 신도시 백민호, 이상열, 박찬용, 황호경, 허한, 윤지한부부 김석운 (13명)
이형복, 이영욱, 조용수부부 (합류 6명) 19명
동래전철역: 강봉호, 이봉춘, 대룡, 신재욱, 방문성, 김병호, 신한원부부 (14명)
이철 합류 15명
총원 34명
준비물: 생수, 캔맥주, 막걸리, 약간의 안주, 과일 (수박)
각자 모자, 선글라스, 돗자리 준비 (메트)
2011. 5. 29. (일)
삼량진 양수발전소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안태리에 있는 발전소.
지하발전소에 시설용량 30만kW급 발전기 1·2호기를 보유해 총시설용량 60만kW에 이른다.
청평양수발전소(시설용량 20만kW×2기)에 이어 2번째로 건설된 국내 최대의 순수 양수식(揚水式) 발전소로, 청평양수발전소 건설 경험을 토대로 하여 우리의 기술로 건설되었다. 발전전동기 등 주요기기는 일본 후지[富士]전기에서 공급하고, 건설공사는 현대건설과 한국중공업 등에서 담당하여 국산화율을 68.8%까지 높였다. 1976~77년에 걸친 타당성 조사를 거쳐 1979년 9월 하부 댐 기초공사가 시작되었다. 1985년 11월에 1호기, 12월에 2호기가 발전을 시작했으며, 1986년 4월에 발전소가 준공되었다.상부저수지는 댐 천단표고(天端標高) EL(elevation level) 404.6m의 중앙차수벽식 사력(rockfill) 댐인 상부 댐(높이 88m)으로 축조되었으며, 담수량 646만 4,000㎥, 수심 27.7m로 6시간을 발전할 수 있다. 하부저수지는 낙동강 지류인 천태천 계곡을 막아 만든 천단표고 EL 71.20m인 중앙차수벽식 사력 댐인 하부 댐(높이 78m)으로 축조되었다. 지하발전소는 상부저수지에서 1.3㎞, 하부저수지에서 0.8㎞ 떨어진 지하 200m 지점에 설치되었으며, 그 크기는 너비 21.5m, 길이 92m, 높이 43m에 달한다. 지하발전소에는 펌프터빈과 발전전동기를 비롯해 변압기 등의 보조기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발전소의 핵심공사는 터널 굴착공사로 수직 터널 2개를 비롯해 총길이 6,578m에 이르는 각종 터널을 굴착했으며, 수압철관의 축조공사 등 발전소의 건설공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험난한 공사였다. 야간에 잉여전력을 이용하여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저수지로 양수하여 저장했다가 전력소비가 많은 주간이나 야간의 첨두부하(尖頭負荷 peak time) 시, 수압철관을 통해 발전전동기의 중심높이인 EL 23.00m까지 이 물을 유하(流下)하여 발전한다. 각종 기기는 자동화되어 중앙제어운전조작실에서 컴퓨터로 원격제어한다. 댐 건설로 수몰된 기존의 저수지들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부저수지 바닥에 직경 2m의 배수관로를 설치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이 발전소는 탈유(脫油) 전원개발과 수력자원의 적극 개발 등 에너지원의 다원화 정책에 맞추어 건설되었으며 전력계통의 효율적인 운용, 빠른 기동과 정지 능력, 높은 효율을 자랑한다. 1985년에 이르러 삼랑진양수발전소와 충주수력발전소가 건설됨으로써, 한국의 수력발전 용량은 약 250만kVA로 해방 이전의 전국 수준을 상회하게 되었다. 발전소 내에는 전기 에너지의 중요성과 이용실태, 전기가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 등을 홍보하는 종합전시관도 설치되어 있다.
예림서원
현재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은 영남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주벽(主壁)에, 우졸재 박한주 선생을 동쪽, 처사 송계 신계성 선생을 서쪽에 배향하고 밀양유림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고 있습니다.
예림서원은 명종 22년(1567년)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가 밀양유림의 요청으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지금의 밀양시 활성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 하였습니다. 인조 13년(1635년)에 상남면 예림리로 옮겼으나 숙종 6년(1680년)에 모든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자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왔습니다.
고종8년(1871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澈廢令)에 따라 강제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1년(1874년)에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과 동서제(東西齊)등 부속건물을 크게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후에는 사액(射額) 현판을 다시 달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건물은 육덕사(育德詞), 정양문(正養門),강당,동재,서재,양몽재(養蒙齋),독서루(讀書褸)등이 있습니다.
김종직 1431년~1492년(조선 세조연간)
1431년(세종13)~1492년(성종23), 조선 세종때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 또는 효관. 호는 점필재. 벼슬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본관은 선산. 시호는 문간, 문충. 밀양출신. 조선 세종 13년 6월 경자일 갑자시에 밀양부의 서쪽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부북면 제대리 추원재가 선생의 생가인데 그 뒤에 재사로 개조 중건한 것이다. 사예 김숙자 선생의 43세때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실 때 마을앞 냇물이 역류하고, 물맛이 달콤하게 변하여 감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1489년(성종20) 59세 때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제학 성균관사를 공정하게 처결하니 조정이 감복하였다. 가을에 병으로 사임코자하니 지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성종의 은총이 심히 두터우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은지라 동래 온천에 목욕간다는 허락을 얻어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녹을 받으라 하였으나 재삼 사양하였다. 1520년(중종15) 원래 선생의 문집 초본이 20여군인데 연산군이 모두 불태우게 하였으나 이웃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1~2권을 끄집어 낸것을 선생의 조카 강중진이 보관하고 있다가 무오사화가 지난 22년만인 이해에 여러 읍의 수령들이 모의하여 비로소 출판하게 되었다. 선생의 저서로는 총재관으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한데 이어 많은 시집과 점필재집, 이존록, 유두유록, 청구풍하, 오경석의, 동문수, 일선지, 당후일기, 경사도지, 선산지도 등이 있다. 선생이 살던 고향과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 사당을 세우고 봄, 가을로 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예조에서 보고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사, 금산 경렴서원, 밀양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백연서원, 개령 덕림서원에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 창건된 것으로 화순 해망서원, 고창 운곡서원에서도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1866년(고종3) 가곡 도연재를 창건하였다. 선생을 위하여 향토(고령군)유림에서 계를 만들어 지은 것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훤당, 일두는 이학을 얻고, 매계, 탁영은 문장을 얻었으며, 허암 정희량은 수학을 얻고 이종준은 의서를 다하고, 박문은 시학을 얻고, 남효온, 홍유손은 처사의 흐름을 배웠으니 우리 동방에 300년간 심어 끼쳐온 공은 모두 선생으로 비롯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서원 건축 구조
1. 서원 건축
서원건축은 16세기 중기(중종 38년 1543)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숙종 년간에는 그 건립이 최고조에 달해 그 무렵에만도 전국에 300여개소의 사원건축이 이루어졌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강제로 훼철 당하고 47개소의 서원만이 남았다. 당시의 원 모습을 잘 지니고 있는 서원으로는 호남의 필암‧무성서원, 영남의 소수‧도산‧도동‧옥산‧병산서원 등으로 이 서원건축들은 짜임새와 구조면에서 대표적인 실례이다. 서원건축의 건물 구성과 그 배치 형식의 大本은 향교건축과 중국 서원건축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에서 비롯하여 조선에 계승된 지방교육기관인 향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묘가 있고, 강론을 위한 강당과 제실이 꼭 건립되었다. 서원건축도 향교와 마찬가지로 廟學同宮의 제도에 따라 묘의 구역과 학의 구역으로 분리되어 그 기능에 따른 건물들이 양 구역에 적절히 건립되었다.
우리나라 사묘의 설치는 신라때부터 이미 널리 성행했지만 강학 기관으로서의 정사(精舍)와 제향기관으로서의 사묘(祀廟)가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창건된 백운동서원이 그 시작이다. 백운동 서원은 1550년(명종 5년) 후임 군수였던 퇴계의 건의로 국가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과 함께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받아 사액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국가 공인‧권장)
2. 서원건축의 입지 환경과 배치
(가) 입지 환경
조선시대 건축은 위치 선정에서부터 건물배치, 그리고 외부 공간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조화하려는 특성을 가졌으며, 또한 풍수지리사상과 종교사상이 그 저변에 깊이 형성되어 발전 정립되어왔다. 같은 시대의 지배적 유교 문화 공간이었던 서원과 향교도 이러한 공통적인 건축현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으나, 궁궐이나 사원건축이라는 비교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건축환경을 조성하였다.
서원은 향교와는 달리 읍으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였는데 이는 서원이 중앙조직과는 관계없는 사학이었으며 또한 유학자들이 서원자리를 정하는데 風光景勝이 뛰어난 곳이나 선현이 강도하던 인연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선현 강도의 자리는 대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조건이 겹치는 곳이 많다. (그 외 폐사지도 여럿 있다 : 소수‧옥산)이 황도 여러 곳에 서원을 건립하면서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고, 그 만큼 교육 효과가 크다”고 하였다.
조선의 이름난 서원은 대개 배산 임수의 명당에 입지하여 뛰어난 자연환경과 함께 좋은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도산‧병산‧옥산서원 등은 산수와 함께 어울려진 빼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 건물배치
서원건축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서원의 특성상 교육시설인 재실과 강당, 제향시설인 사당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역 양분은 향교 건축과 동일한 것으로서, 이는 서원과 향교가 같은 학교 건축으로서 제향과 강학의 기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했던 당시의 사회적인 필연성에 의해 건축물이 조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구성은 서원 건축이 향교 건축보다 좀 자유스럽고 규칙성도 떨어졌다. (대칭성, 축선상의 건물배치, 지형에 따른 구역설정) 이는 서원의 본래 설립 목적이 사문의 진흥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지방사림이 중심이 되어 세운 사학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시대별로 어느 정도 건축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서원건축은 입지 환경에 관계없이 모두 앞쪽에 교육시설, 뒤쪽에 제향시설이 있는 것이 원칙이다. 즉 제향구역이 맨 뒤쪽이다. 건물의 기본 배치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중심축이 있어 앞에서부터 정문(2층누각, 평대문, 솟을 삼문)누각, 강당, 내 산문, 사당 순으로 배치된다. 강당 전면 좌우 대칭으로 재실을 두어 교생들의 기숙처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제기고, 장판고, 교직사 등은 관련 주 건물 주변에 적절히 배치되었다. (소수서원은 예외)
이상과 같은 서원건축의 배치계획은 향교건축과 비교되는 차이점이 있는데, 향교건축은 평지에 들어설 때는 전묘후학의 배치를 이용하였고, 경사지에는 서원과 같은 배치를 한다. 이는 제향공간을 중시한 유학자의 사고(앞과 뒤의 위계 질서)와 한국건축에 있어 공간의 위계성이 동시에 합일된 건축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다) 시기에 따른 배치 변화
서원의 건물 구성은 서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이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서원의 기능이 달라졌음에도 기인한다. 곧 처음에는 교육 시설이 중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래로는 제향시설 중심으로 건물이 조영되고 있다. 또한 장판각이나 누각이 점차 사라졌다. 서원건축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강학을 위한 공간 형성보다는 제향위주의 건축이 이루어졌다.
3. 건축양식과 구성
서원건축 양식은 대체로 소박 간결하며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사찰이 종교성으로, 궁궐이 권위성으로 웅대하게 건축된 것과는 달리 서원은 산간이나 향촌에 은거하며 학업을 익히고자 하는 뜻으로 세웠기 때문에 건축에서도 특별한 꾸밈이 없고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 조형미가 돋보인다. 검소한 생활 환경을 중시하였던 사람들의 가치관이 잘 반영되어 있는 서원은 전형적인 유교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소수, 도산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집이 대부분이나 맞배집도 나타난다. 평면형태는 대부분 중앙부를 우물마루로 깔아 대청으로 계획하고 양측면에는 1칸씩 온돌방을 꾸몄다. 건축양식은 익공식이 많고 이 외에는 민도리집 양식이며 주심포도 나타난다. 가구는 전후방 평주위의 대량을 걸고 그 위에 종량을 얹힌 오량구조가 대부분이다. 기타 강당에는 장식적 의장요소는 없으며 창호는 띠살, 판장문이 주로 쓰이고 특히 대청의 창호는 띠살이 들어 열개문으로 되어있다.
강당 앞에 대칭으로 기숙처-동재,서재는 전면 반칸 폭에 툇 마루를 놓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지붕은 맞배지붕이 주류를 이룬다. 건축구조는 주로 민도리 양식이며 띠살 창호, 3량 가구 등 민가풍의 구조이다.
누각은 서원의 정문으로 건립되는 경우와 정문과 강학 구역 사이에 건축된 곳이 있다.
(가) 강당
학문을 토론하는 곳, 서원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넓은 대청과 온돌방이 배치. 건물 중앙 처마 밑에는 현판이 걸리는데 병산서원은 立敎堂이다.
(나) 재실
院生들이 잠자는 곳. 강당 앞으로 동‧서 대칭. 오른쪽은 동재, 왼쪽은 서재.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보다 선배이다. 동‧서재에도 서원마다 고유의 명칭이 걸려 있다.
(다) 사당
성현의 위패(영정)를 모시고 봄, 가을 제사하는 곳. 배향 인물은 보통 1인을 주향으로 시작하나 뒤에 추가 배향하기도 한다. 사당의 명칭은 尙德祠, 尊德祠와 같이 “OO祠”로 부르나 옥산서원처럼 “OO廟(禮仁廟)로도 부른다.
(라) 장판고(장판각, 경장각, 서고)
서책이나 이를 찍어낸 목판 보관.
(마) 제기고
제향 때 필요한 제수 마련하고 기물 보관. 전사청이라고도 한다. 제향에는 크게 향례와 묘사로 나뉘는데 향례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中丁日 묘사는 음력 3월 10일과 10월 2일.
(바) 누각
원생들의 후식, 여가 공간. 누각이 없는 곳도 있으며 서원의 정문 겸하는 곳도 있다. 이곳도 고유 현판이 있다.
(사) 그 외에 서원의 정문인 外三門. 제향구역의 정문인 內三門. 원지기들의 거주지인 校直舍 등이 시설되었다.
얼음골
오랜 옛날부터 시례빙곡(枾禮氷谷)으로 불렸던 얼음골은 재약산(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750m의 골짜기 약9천평 지대를 말합니다.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곳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듭니다.
이런 신비한 이유로 밀양의 4대 신비의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특히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얼음골의 신비와 함께 주변에 다양한 볼거리가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인 가마볼 협곡은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이 태고적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에 의해 두터운 암반이 깍여나가 계곡이 마치 가마솥을 걸어 놓는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름이 가마볼(암,수 가마볼)이 되었다 합니다.
수십 미터를 미꾸러지듯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수는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외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어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박소가 있습니다.
호박소
호박소는 영남 알프스로 일컫는 1,189m의 재약산 자락과 1,240m의 가지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가운데, 해발 885m의 백운산 자락 계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곳 호박소 계곡은 화강암으로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하며, 그 위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른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 같이 생겼다 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臼淵)이라고 합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호박소는 오랜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소(祈雨所)였다고 합니다.
사명대사 유적지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일대는 학계 등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사명대사 유적지”로 선정되어 지난 1992년 10월 지방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은 수백년
동안 풍수사(風水師)들이 찾아와 전하기를 뒷산은 천리를 달려온 목마른 말이 엎드려 물을 먹는 형상이요, 주산은 동자형이며, 그 아래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돌고, 맑은 연못이 있으며 삼국의 명장이 날 명산이라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사명대사의 어머니 달성 서씨는 어느날 흰 구름을 타고 누런 두건을 쓴 금인(金人)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 머리가 허옇게 쉔 신선을 만나 예를 올리는 모습을 꿈에 본 후 대사를 잉태하였으며,1544년 갑진(甲辰) 10월 17일에 부친 임수성 공과 달성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7세 때 할아버지 효곤에게 정훈을 배우고, 13세에 황유촌 여헌선생 문하에서 맹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로 들어가서 신묵화상의 제자가 되어 선문(禪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성지입니다.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가 있습니다.
총면적 49,146㎡로 사명대사유적지 및 생가지 복원사업을 2006. 4. 7 완료하였습니다. 사명대사유적지는 숙청사,분충서난문,육영당,사명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청동함은향완, 사명대사 가사장삼 등 복제품 65점과 평양성탈환 디오라마, 영상실,정보검색실 등이 사명대사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충의문, 원형광장, 사명대사 동상 등이 있습니다.
영남루
영남루(보물 제147호)는 조선시대때 밀양부의 객사인 밀주관에 부속되었던 건물입니다. 고려 공민왕(1365년)때 부사 김주(金湊)가 신라시대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가 되어 전래해 오던 작고 초라한 누각을 철거한 후, 진주 촉석루의 제도를 취하여 개창(改創)하였는데 이 때부터 규모가 큰 독립된 누각이 되었습니다.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때 밀양객사와 함께 불에 타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건된 것으로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2층 평면은 내외진(內外陣)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기와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래 끝에 부착된 귀면와(鬼面瓦)인데, 조선시대 귀면와 중 걸작품입니다. 건축형태는 누의 양옆에는 각각 1채씩 부속건물이 있는데 본루를 기점으로 좌측에는 능파각(凌波閣)을, 우측에는 침류당(枕流堂)을 익루로 거느리고 있습니다.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어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루로 일컬어 왔습니다.
영남루는 밀양인들의 서정에 깊이 자리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여행객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관광명소이며,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합니다.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중에 하나로 선정된 것을 미루어 볼 때 당시의 수려했던 경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어사
삼랑진읍 만어산(674m)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만어사는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만어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바위들이 일제히 머리를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는 이 바위들은 오랜 옛날(가락국 시대) 이곳에 살던 나찰녀(사람을 잡아먹는 鬼女의 이름) 다섯과 독룡이 사귀면서 횡포를 일삼다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돌로 변한 것이라 합니다.
물론 이때 큰 홍수를 따라 동해 바다에서 올라온 수많은 물고기들도 함께 돌(종석)로 변해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바위들을 두드리면 2/3 가량이 종소리와 쇳소리,옥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표충비
조선 영조 때(1742년) 사명대사 5대 법손이 당대의 명재상과 명유를 찾아다니며 비문과 글씨를 얻어 경주산의 검은 대리석에 사명대사의 한평생 행적과 임란시 구국의 충렬을 찬양한 내용,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공적과 사적을 새긴 비각이다.
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때를 전후하여 땀방울이 맺혀 구슬땀 처럼 흐르는 신비로운 현상을 보이고 있어, 사후에도 나라를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으며, 일명 「땀흘리는 비석」으로 불린다.
첫댓글 KNG27.com에는 올라가지 않는데 여기엔 바로 올라가 버리네요. 태주위원장님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