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무단 정치 밑에서 한국인은 자유를 잃고 질식상태에 빠졌으며 경제의 수탈은 가중되어 생활기반을 잃은 채 빈곤 그것이었다. 농토를 잃었고 직업마저 없는 한국민은 생계를 위하여 만주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야만 했으며 이 큰 민족의 수난 앞에 반일 감정은 불타고 있었다.
이렇게 불타 오른 반일감정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함이 없이 끈덕지게 항일 민족운동으로 발산하게 되었으며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존을 위해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길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은 가중되었고 민족의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갔다. 이러기에 민족의 양상은 무력항쟁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중을 계몽하는 소극적인 민족운동의 형태로 점점 바뀌어 갔다.
임병찬 등은 의병으로 유림계통을 중심으로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채기중 등은 광복단을, 안창호 등은 기독교 계통을 중심으로 신민운동을 전개한 것이 비밀결사의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신민회는 교육진흥과 산업부흥을 통하여 여러 방면에서 주민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국내에서 무력 항쟁이 불가능하게 되자 독립지사들은 국내와 연락을 가지면서 해외에서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미국에까지 그 종적이 뚜렷했다. 만주나 연해주에서는 이동휘가 지휘한 망명 의병으로 조직된 항일 의용군의 활약이 뛰어 났으며 군사훈련을 위해 이시형은 신흥군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미국에선 이승만(李承晩) 등을 중심으로한 국제적인 외교활동을 들 수 있다.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21개조의 요구를 강요함으로써 그 침략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만주·몽고의 이권을 독점하게 되어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져 공산정권(共産正權)이 수립되었고, 1918년 독일이 패배함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그 막을 내리게 되자 역사적 변천 속에서 대전 수습의 해결 방안의 하나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14개 조항속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원칙은 전승국에겐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전세계 약소 민족사이에 팽배하고 있었던 운동은 이 윌슨의 원칙을 크게 환영하고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 자결주의는 일제 무단정치 밑에서 곤욕과 수난을 당하던 우리에게 생명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 원칙에 의하여 독립을 할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1917년 "스톡홀롬"에서 열린 민족사회당 대회에는 중국에 망명한 민족독립 운동자들이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1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25개국 약소국 민족대회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적극화 된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였으며 '상하이'의 독립투사들은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일본엔 장덕수(張德秀), '시베리아'에 여운형(呂運亨)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봉화가 올랐다. 최팔용(崔八龍) 등 600여 명의 유학생이 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고 이것을 일본 의회에 보냈다. 한편 동지를 국내로 보내어 국내지사의 궐기를 요청하였는데 이 사건에 자극된 국내 인사들은 이에 호응하여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때마침 비극의 황제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인 3월 3일을 기하여 경향각지에서 많은 인파가 서울로 몰려들었다. 이 때를 기하여 독립시위 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3월 1일을 궐기일로 예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에 서명하고 태화관(泰和 )에 모여, 3월 1일 정오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3창한 후 일본관헌에게 이 사실을 자진 통고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립선언서 낭독을 신호로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이 시작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독립만세는 메아리쳤고, 211개 군에 200만 명이 1,500여 회의 시위운동이 이루어졌으며, 일본 관헌에 사살된 사람이 4만6천9백4십명에 이르렀는데도 독립만세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평화적 시위였지만 일본은 비인도적인 무자비한 탄압과 총검으로 짓밟았고 민족의 애절한 독립의 외침은 열강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 우리 고장 하동의 3·1운동을 약술한다.
1919년 4월 3일 박치화(朴致和), 황학성(黃學成) 등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하동읍 시장에서 박치화가 품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자 여기에 호응한 군민이 시위를 벌이자 일본경찰이 이를 체포 검거하여 진주지방법원지소에 넘겨졌다가 대구 복심 법원으로 이송,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남면에선 1919년 4월 3일 정낙영, 정재운, 정희근, 이범로 등이 남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 부락에 배부하고 독립만세에 군중 동원일을 마친 뒤, 금양면사무소(대치리)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오전 11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행진을 시작하여 진교면에 도착, 다시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던 것이다. 뒷날 이들은 금양면(金陽面), 남면(南面)의 군중을 이끌고 노량진(露梁津)을 건너 남해로 들어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계속했다. 밀어닥친 일본 경찰에 정낙영은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을 살았고, 이범호와 정재운도 체포되어 6개월 징역을 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독립만세는 뜻있는 이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독립을 외치는 함성은 민족의 가슴마다 터져 나왔다. 4월 6일 진교면 진교 장터에서 정재백, 정재기, 이홍식 등이 앞장서서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을 외치며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터졌다. 군중은 모두 거리로 뛰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을 향한 시위를 계속했으며, 죽창과 몽둥이로 일본 경찰을 붙잡아 총기를 빼앗고 구타하는 일이 일어났다. 진교 시위가 전해지자 경계에 여념이 없던 일본군 보병이 달려와 무차별 난사가 시작되자 시위하던 군중 가운데 3명이 죽고, 7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맨주먹으로 독립을 희구하는 이 착하디 착한 백성들에게 총칼을 마구 휘두르며 사격을 가하는 것에 대해 군중의 시위는 주춤거리다가 다시 성난 파도처럼 밀어 닥쳤고 사라지면 또 일어나 만세를 불렀으나 어쩔 수 없이 꺽이고 말았다. 일본 경찰들은 주동자 9명을 체포하고 오후 늦게서야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 고장의 독립기운은 가실줄 모르고 지속적으로 항일의 깃발이 올랐던 것이다. 4월 7일 양보(良甫)의 정성기는 양보 보통학교 정섬기와 고전(古田)의 이경호와 함께 하동 장날을 이용, 독립선언문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삼창한 후에 시가행진을 가졌다.
응혈전 만세소리와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본 수 많은 사람들은 모두 만세를 외치며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남녀노소 없이 외치는 독립의 절규는 하동벌에 울려퍼졌고 당황한 일본 경찰은 군대의 원군을 받아 이의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독립의 행진은 끊이지 않았고 일본 경찰의 총소리는 매섭게 피를 빨고 있었다.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된 이 시위는 일본 경찰의 무력 앞에 어쩔수 없이 해산되었으며 정성기, 정섬기, 이경호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그런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흩어진 군민들은 여기저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4월 8일 화개장을 이용하여 화개의 이기대, 이정수, 이정철은 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니 여기에 또 한번의 독립시위가 도도히 일어났다. 다시 고전의 정세기와 정윤기도 장날을 이용 만세를 부르니 그 독립의 의지는 활화산 처럼 솟아 올랐으며 4월 15일 북천의 이재기는 면민 600여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문공학은 북천의 일본 경찰 주재소(駐在所)에 돌입하다 체포되었다.
고전면 성천리 지소의 박영목은 도지 33인을 규합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일신단(日新團)을 조직하여 단원인 정재기를 하동읍에 파견하여 독립선언서를 구입하도록 한 후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을 세웠다. 4월 16일 당원 정재기가 독립선언서를 품에 간직하고 읍내에서 고전으로 돌아오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장날을 이용한 독립운동을 알아버린 일본경찰은 고전면 성천리와 가까운 주교시장에 감시를 엄중히 하고 경계를 삼엄하게 펼쳤다. 그러나 일신단원들은 거사를 착착 진행시켜 주교 장날에 모두 지게를 지고 장꾼으로 가장하여 주교 시장의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상오11시, 시장 중앙에서 박영목이 외치는 대한독립만세를 신호로 품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급보에 접한 일본 경찰은 현장으로 달려 왔으나 일신단원들은 달려온 일본 경찰 3명과 한인 순사 박도준을 포박하고 제복을 빼앗아 버린 후 다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위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뒷날인 4월 17일 고전면 지소부락으로 들어닥쳐 총을 난사하며 동네입구로 진격해 왔다.
일신단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뒷산인 삼봉산으로 피신시키고 부락 앞 정자나무 밑에서 일본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를 갖지 않은 이들이 일본 경찰과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그만큼 많은 피해와 이길 수 없음을 느꼈기에 떳떳하게 나서서 주장을 관철하려고 한 것이다. 총격을 가하여 동네로 들어 온 일본 경찰 앞에 박영목외 3명이 나섰다. 어제의 일은 우리가 한 것이니 우리만 체포하도록 요구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동구 밖으로 끌려갈 때 동지 최혁진이 도피하려다 일본 경찰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독립을 쟁취하려고 나선 일신단의 애국 충정을 위해 오후 2시 하동공립보통학교(河東公立普通學校) 남·여학생 160여 명은 박문회를 중심으로 하동 시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벌렸다. 수백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고 시위에 돌입하게 되자 일본인 교장 정상단평(井上團平)은 학생들을 학교에 모이게 하고 일본경찰이 학교 주위를 경계하는 가운데 집으로 돌려 보냈다.
옥종의 하일로, 최인우, 정준영은 청암(靑岩), 진주(晋州), 수곡(水谷), 산청(山淸), 단성(丹城) 부락민을 동원, 독립을 역설한 후 문암(文岩)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 일본 경찰의 주재소 앞에 태극기를 세워두고 독립을 외쳤으며, 남면(南面)의 후 홍순도 주교 시장에서 하동읍의 김기범도 청암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항일에 앞장 선 백산상회(白山商會)
부산에서 항일운동이 핵심이었던 백산 안희제(安熙濟)가 세운 백산 상회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운동의 깃점으로 상해(上海)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한 속에서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전개했으며, 그 백산 상회의 지점격이 우리 고장 하동에도 세워져 안희제와 밀약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무역상인 백산상회(白山商會)는 금남(金南)의 정재완을 비롯 북천의 문영빈, 청암의 박종원, 하동의 김홍권, 정창국, 양보의 최용환 등이 하동 백산상회에 운영인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하 공작하던 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하동 경찰서에서 수십일 간의 문초를 받았으나 증거가 잡히지 않아 형 집행이 정지되고 석방되었다.
정재완은 백산상회의 주주로 500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5만냥(약 500두락의 논에 해당)의 독립자금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하동지구의 독립자금을 수집하여 임정에 보냈으며, 김태구는 부산에서 상해임시정부를 도우는 일을 하다 도경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신간회(新刊會)의 활동
1927년에 조직된 민족주의자 단체로 1922년 이후 세계풍조에 따라 사회주의 사조가 한국에도 침투하여 서울청년회, 화요회(火曜會), 북풍회(北風會), 조선노동총연맹(朝鮮勞動總聯盟), 조선청년총연맹(朝鮮靑年總聯盟),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엠엘(M.L),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등이 조직되어 민족주의자들과 대립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대비하여 민족단일 전선의 결성을 바랐고 또한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들의 애국 운동에 자극고 충격을 받은 기성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민족운동 대표기관의 조직을 바라게 되었는데 이에 결사를 하가해 줌으로써 독립운동자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체포하려는 일제의 가장된 유화정책(柔和政策)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탄생한 것이다.
1927년 신석우(申錫雨), 안재홍(安在鴻) 등 34명의 창립발기인회를 갖고 정치적, 경제적 각성의 촉진과 단결을 공고히 하고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하고 강령을 결성하고 민흥회(民興會)와 합동을 추진, 1927년 2월 15일 창립총회에서 이상재(李商在)를 회장으로 하여 전 민족이 신간회(新刊會)에 동조하였다. 전국에 200여개의 지회, 분회가 조직되고 약 3만의 회원이 있었으며, 여자는 근우회(槿友會)를 창립하여 이에 합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좌익분자들의 모략으로 2년 후에 없어졌다.
우리 고장 하동에서도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니 또한 근우회도 조직되어 많은 활동을 갖게 되는 동시에 청년동맹(靑年同盟)이 조직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내면적으로는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함양시켰으며 겉으로는 국산품애용과 생활개선 및 풍속을 바로 잡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체육경기를 개최하여 단겨력을 조장하였다.
하동청년연맹에서는 회원들과 독지가의 출연으로 회원들의 집회와 민중의 계몽, 교양장소로 사용하였다. 일제 말기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당국에서 하동읍 공회당으로 사용하겠다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회원들은 이를 거부하고 이 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임시 쌍계사에 기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공회당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광복 후 공민학교 등으로 일시 사용하였으나 건물의 훼손이 막심 하던차 마침내 재부(在釜)향우들의 성금으로 건물을 수축하고 하동청년회관 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를 관리하게 되었으니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의 기념비적 건물로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시 신간회(新刊會), 청년동맹(靑年同盟), 근우회(槿友會), 청년회관(靑年會館) 등의 창립자는 다음과 같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1936∼1945년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 사건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민족운동 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이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먼저 기독교(基督敎) 계통의 학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처음은 1932년 평양에서 소위 춘계황령제(春季皇靈祭)의 참례에 각급학교의 참석을 요구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참례는 평양시 서시산상에 있는 충혼탑 앞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해에는 특히 만주사변의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를 겸한 것으로 기독교 계통 참여를 강요해 왔다. 학교 책임자가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제례(祭禮)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부하자 당국은 제례직후에 있는 국민의례에만 참석해도 좋다는 것으로 낙찰되어 숭실전문(崇實專門)과 중학교 학생들과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학생 일동이 동의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일본 관리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할 심신을 굳혔다.
그리하여 1932년 전국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 여행을 명령하고 말았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는 이에 반대하여 거부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관리는 학교 인가를 취소하거나 폐쇄하는 조치를 거침없이 진행시켰고 여세를 몰아서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어 회유와 강압의 수단을 사용하여 1938년 9월에 장로회총회(長老會總會)를 최후로 전 교회를 신사에 굴복하게 함으로써 한국 교회를 일본은 완전히 유린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1938년 초부터 본격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교주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선교사들의 신사참배 불참운동으로 번져 합법적인 불참배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조직적인 신사불참배 운동으로 벌어졌다.
만주와 평남, 경남에 신사불참배 신도들의 교회 이탈과 그룹예배가 성행되고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기본방향과 남북의 불참배운동의 실황 전달은 평양의 이주원이 담당하였다. 이주원은 경남의 한상동목사와 나란히 불참배 운동의 핵심적 인물이었다.
1938년 10월 14일, 한상동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항거 설교를 한것에서부터 경남의 불참배 운동은 시작되었다.
주기철목사의 석방 기회를 이용하여 전국적인 불참배 조직을 완료하고 지하운동에서 표면화하기 시작하자 일본 경찰은 이 운동의 내용을 조사, 1940년 주기철 목사를 비롯 전국의 불참배 운동자를 총 검거하였다.
우기철목사는 옥종(玉宗)에서 순교하였으며, 남은 사람들은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으나 출옥하자 곧 목숨을 거둔 분들이 많다. 신사참배 불참운동으로 순교한 사람은 약 50여명에 달하고 있다.
우리 고장 하동에서도 하동읍 교회의 박성근목사와 김정룡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신사 불참운동이 맹렬하게 일어났으며 이들은 투옥되기도 했던 것이다. 경남교회가 앞장선 신사 불참 운동은 진주, 남해, 하동을 연결한 조직적인 신사불참 운동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