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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遺蹟地 踏査
▣ 軍威 麟角寺
경상북도 군위군 華山에 있는 절.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元曉가 창건.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상상의 동물 기린을 닮았으며, 절이 들어선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지점이라 하여 麟角寺라 하였다고 함. 그 뒤 고려 충렬왕 33년(1307)에 보각국존 一然이 중창하고 ≪三國遺事≫를 저술하였으며, 叢林法會를 열기도 하였음. 이어 조정의 명령으로 金龍劍이 중창하고 밭 1백여 頃을 헌납하였음.
㉠麟角寺는 화산의 동네 어귀에 있는데, 석벽이 깎아선 듯하였다. 속담에 전하기를, “옛날 기린이 이 석벽에 뿔을 걸쳤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 麟覺寺 在華山洞口 有石壁矗立 俗傳昔麒麟掛角于壁 因爲名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27, 15장 뒤쪽, 의흥]
㉡신라 선덕여왕 12년 원효조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렬왕 33년 보각국존이 중창하였다. ; 新羅善德王十二年 元曉祖師刱建 高麗忠烈王三十三年 普覺國尊重刱 [한국사찰전서 인각사]
㉢내(이색)가 낙서의 여러 절에서 놀다가 우연히 南長에 이르니, 중 창공이 한 번 보고 흔연히 그가 주지하는 麟角寺 無無堂의 記를 지어 주기를 청하며 그 내력을 말하였다. ; 余遊洛西諸山 偶至南長 僧窓公一見欣然 以所住麟角寺無無堂記爲請 具語其所以 [동문선 권제72 인각사무무당기]
▶ 軍威 麟角寺 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427호 지정일자 : 2002.08.19
麟角寺는 신라 오악에 드는 팔공산의 동북쪽에 있는 화산(해발 828m)의 서북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麟角寺重修記』에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韓國寺刹全書』에서는 전거 없이 선덕여왕 12년 원효 창건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에 體澄이 화산에서 득도하는 기록을 근거로 적어도 下代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현재 지면상에 노출된 것은 기단의 상대갑석부터이다. 전형적인 신라 탑의 양식을 이어 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다. 하대기단의 갑석까지는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표면 위에 노출되어 있는 상대기단의 갑석은 2매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툼한 弧形의 받침에 얕은 角形의 받침이 겹쳐져 있는 이중의 탑신 괴임대가 있다. 屋蓋石은 옥신의 체감 비율과 어울리게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전체가 4단으로 되어 있으나 치석의 각도가 직각은 넘어 긴장된 감이 떨어지고, 모서리의 선은 아무리 마멸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둥글어져 있다. 3층의 옥개석 위에는 露盤, 復發, 殃禍가 올려져 있다. 그 위에 寶輪이 얹혀져 있는데 앙화와 마찬가지로 문양이 많이 마멸되어 정확한 분간이 어려울 지경이다. 보륜의 위에는 水煙이 이어져 있는데 이는 원래 탑재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부재로 상륜부의 다른 부재에 비해서 석질이 다른 석재임을 알 수 있다. 석탑에 사용된 수연이라면 擦柱가 통과한 擦柱孔이 있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부재는 찰주공의 흔적이 없어서 다른 승탑이나 석등 등의 寶珠였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기단의 우주 하단에 치석된 은장 자국이나 갑석과 면석이 이완되면서 보이는 적심석을 볼 때 한번 해체되었다가 조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탑의 제1탑신석이 제2탑신석보다 높이의 비례가 크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4단인 점 등을 볼 때 고려전기의 석탑양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塔 및 碑
보물 제428호 ( 1965.09.01.지정)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사리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탑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96세에 돌아가심)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 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 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진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충렬왕 21년(1295)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자료)
▶ 軍威麟角寺彌勒堂石佛坐像
문화재자료 제426호 ( 2002.08.19. 지정)
불상은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밭에 위치한 미륵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눈을 반쯤 뜨고 명상에 잠긴 듯하며 풍만한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하다. 코는 파손되어 원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균형 있게 처리되어 있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3개의 주름인 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가 마멸되어 있긴 하지만, 세심하게 새긴 옷주름으로 보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右肩偏袒으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두 팔과 무릎이 깨어져 없어졌는데, 무릎은 불신에 비해 높은 편이나 안정된 비례감은 잃지 않았다. 손 모양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 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주름선, 양감 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인각사의 창건과 관련한 중요한 불상이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 太宗武烈王陵
☞ 三國遺事 太宗金春秋公: 61~69쪽, 長春郞罷郞: 69쪽, 元曉不羈: 195쪽
사적 제20호. 통일의 기반을 닦은 신라 29대 김춘추(재위 654~661) 태종무열왕릉이다. 경주 북서쪽의 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다고 하나, 지금은 흙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과 머릿돌에 '太宗武烈大王之碑'란 명문이 남아있어, 무열왕릉임을 알 수 있다. 국보 25호인 태종무열대왕비의 碑身은 없어지고 현재는 龜趺와 螭首만 남아 있다.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신 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예이다. 받침돌은 완전한 거북모양으로 네 발과 목을 길게 앞으로 뺀 거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그 위아래에는 寶相華 무늬를 조각하였다. 등에는 큼직한 6각의 거북 龜甲(등껍질)을 새겼으며, 테두리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머릿돌에는 좌우에 三龍式 6룡이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다. 그러나 비의 몸체가 없어져 비에 남긴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아있는 받침돌과 머릿돌만으로도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陵의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둘러싸여 있다. 왕릉 입구의 국도 4호선은 무열왕릉과 도로 건너 형산강 쪽에 있는 그의 차남 金仁問등 후손들의 무덤을 나누고 있다.
▣ 興武大王 金庾信將軍
☞ 三國遺事 未鄒王,竹葉軍: 50쪽, 眞德王: 59쪽, 金庾信: 60~61쪽, 太宗春秋公: 61~69쪽, 萬波息笛: 75~76쪽, 南扶餘,前百濟,北扶餘: 97쪽, 後百濟甄萱: 101쪽, 明郞神印: 215~216쪽
位置: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산7ㅡ1 (사적 제21호)
金庾信 將軍(595-673)은 金冠伽倻國의 마지막 왕 인 仇衡王(일명 仇亥王)의 증손이다. 15세에 花郞이 되어 35세 때에는 아버지 舒玄장군과 함께 高句麗 娘臂城을 공격하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장군은 金春秋를 도와 太宗 武烈王이 되게 하고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년(660)에 羅唐聯合軍이 百濟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階伯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黃山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켰다. 文武王 8년(668)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다.
김유신은 문무왕 13년 (673) 7월1일 79세의 나이로 수를 다하자 그의 조카이기도 한 문무왕의 명령에 의해 묘역이 정성껏 만들어 졌다. 무공을 세운 장군은 문무왕으로부터 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작을 받았고 뒷날 42代 興德王은 장군을 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이곳 묘역은 423평으로 묘의 크기는 장축 18m, 높이 3m 정도의 圓形封土墳으로 둘레에는 十二 地神을 陽刻한 板石과 撐石이 있으며 그 앞에 난간석 24本으로 들려져 있다.
십이지신상을 자세히 보면 지금의 方位와 일치함을 羅經으로서 확인할 수 있으며 墓앞으로 상석과 左, 右 두기의 墓碑가 있다. 김유신 장군의 永眠의 장소가 이곳인데 비해 誕生地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임은 눈여겨 볼 사항이다. 김유신 장군 어머니인 萬明夫人의 증조부는 신라22대 智證王이며 조부가 24대 眞興王의 아버지인 立宗 葛文王이며 아버지가 肅訖宗인 왕족이다.
귀족이기는 하나 멸망한 金官伽倻國 왕족인 金舒玄에게 肅訖宗은 딸을 줄 수가 없어 金舒玄을 死地인 삼국의 세력이 교차하는 萬弩郡(지금의 진천) 太守로 보내고 딸을 감금하면서 까지 혼인을 반대 했으나 어찌 하늘의 인연을 막을 수 있으리오. 신라 26대 眞平王 17년(595년)에 남편의 임지인 진천에서 김수로왕의 12세손 김유신을 출생 한 것이다.
▣ 新羅 第27代 善德女王陵.
☞ 三國遺事 善德王,知幾三事: 58~59쪽, 太宗春秋公 62쪽,
密本摧邪: 211쪽, 皇龍寺九層塔: 137~138쪽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79-2 사적 제182호(1969. 8. 27.지정)
지정면적은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경주 狼山의 전체 면적 82만 7,848㎡에 포함되어 있다. 무덤의 지름은 23.6m, 높이는 6.8m이다.
선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德曼이다. 제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摩耶夫人이며, 진평왕이 아들 없이 승하하자 추대로 왕이 되었다. 632년 왕이 되어 647년에 승하할 때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연호를 仁平으로 고치고, 芬皇寺를 창건하고, 특히 瞻星臺ㆍ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으며, 김유신ㆍ김춘추 등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죽은 뒤 狼山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比定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죽거든 忉利天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須彌山 정상에 있기 때문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은 도리천은 낭산의 산정이라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낭산의 神遊林 정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神遊林에 四天王寺를 건립하고 護國神인 사천왕을 모셨다. 이후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천왕이 있는 곳을 四王天이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도리천이라 한다. 이로써 낭산 정상이 도리천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길이 30∼60㎝ 크기의 자연석을 사용해 2, 3단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石列을 마련하였다. (출처: 백과사전)
▣ 芬皇寺
☞ 三國遺事 阿道基羅122쪽, 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 158~159쪽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華嚴經疏」 ,「金光明經疏」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塑像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塑像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千手大悲 그림은 영험하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希明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觀音菩薩像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 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和諍國師碑편, 三龍變魚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 출처: 분황사 홈페이지)
▶ 元曉大師 ☞ 三國遺事 元曉不覊: 194~196쪽
속성 薛氏 법명 원효. 아명 誓幢 · 新幢. 押梁(慶山市)출생. 薛聰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 2) 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唐項城(南陽)에 이르러 한 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淨도 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通佛敎(元曉宗 · 芬皇宗 · 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 模塼石塔 (☞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13m, 높이 약l.06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암사자,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숫사자가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 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이 인왕상은 모두 半裸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삼국시대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和諍國師碑
고려 숙종 때 원효 스님께 和諍國師를, 의상 스님께는 圓敎國師의 시호를 내렸다. 아울러 관련된 절에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길이 보존케 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그 후 고려 명종 때 원효 스님이 출가한 절인 경주 芬皇寺에 〈高麗芬皇寺和諍國師碑〉를 세웠으나, 지금은 비석은 없어지고 귀부만 분황사 모퉁이에 서 있다. 이 추사의 글씨는 이 귀부에 새긴 글씨며, 글의 끝 월자는 趺 부자의 이체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추사가 1817년 그의 나이 32세 때 무장사 비편을 찾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의 靜 정자는 諍 쟁자를 잘못 알고 새긴 것 같다.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 三國遺事 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 158쪽
景德王 때에 漢岐里에 사는 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芬皇寺 左殿 북쪽 벽에 그린 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讚해 말한다.
竹馬 · 葱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 三龍變魚井 ☞ 三國遺事 元聖大王: 82~84쪽
지금도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분황사의 우물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다.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형은 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서 빼앗아왔다고 한다. 그 뒤 三龍變魚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부터 천 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화쟁국사비편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비대좌는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 비이다. 숙종6년(1101) 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 비신을 받쳤던 비대가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 皇龍寺址
☞ 三國遺事 皇龍寺丈六:136~137쪽 皇龍寺九層塔: 137~140쪽
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迦葉佛의 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황룡사지는 현재 발굴이 중단된 상태인데, 앞으로의 발굴시기는 상황에 따라 발굴 계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한다. 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中門 · 탑 · 金堂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 · 탑 · 금당 ·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 공히 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新羅三寶 중에서 二寶인 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畵聖 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慈藏이 《菩薩戒本》을 강설한 곳이고, 元曉가 《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菩薩戒本》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또,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講하는 百高座講會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이 절의 중심은 구층 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太和池 옆을 지날 때 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護國龍은 나의 장자로 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공 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金春秋의 아버지인 金龍春이 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는데,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眞身舍利 100粒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한,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日本 · 中華 · 吳越 · 托羅 · 鷹遊 · 靺鞨 · 丹國 · 女狄 · 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고군의 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현재 목탑의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心礎石이 있다. 그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갔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神將像이 있었다. 이는 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황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分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分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分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 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鐘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金堂址 ☞ 三國遺事 皇龍寺丈六:136쪽
사찰의 중심건물이며, 本尊佛을 모시는 곳이 금당인데, 삼국유사에는 皇龍寺金堂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대에 西竺阿育王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인연 있는 나라에서 丈六尊像완성을 기원하는 내용과 一佛, 二菩薩像의 모형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관리가 이를 발견하고 왕에게 전하니, 왕은 東竺寺를 세워 이들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이후 황금과 철을 옮겨와 丈六尊像(높이 약 4.8m)과 두 菩薩像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신 후 10년 뒤 금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황룡사가 초창되었을 때 금당이 있었으나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을 모시면서 새로 금당을 지었고, 東. 西 金堂에는 삼존불과 幀畫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의 기단은 성토 층을 되파기한 후 21단으로 版築다짐하였다. 규모는 동서 51.7m, 남북 26.7m이며 총면적은 1,384㎡(419평)이다. 階段은 남면에서 3개소, 북면에서 1개소가 확인되었다. 金堂址안에는 총 44개의 초석이 外陣 9間*4間, 내진 7間*2間을 구성하며, 중앙후면에는 丈六像과 두 개의 脇侍佛 臺座石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들 삼존불 臺座石 동. 서쪽에는 14개의 佛臺座石이 남아있다. (황용사지 금당지 안내 현판에서 )
▶木塔址 ☞ 三國遺事 皇龍寺九層塔 137~140쪽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木塔은 慈藏의 건의로 百濟匠人 阿非知 新羅匠人들이 國泰民安의 念願을 담아 선덕여왕 12년(643)부터 3년간 조성 기간을 거쳐 높이 약 80m인 九層塔으로 완성된다. 여러 차례 重修와 修理를 거치다가 高麗 高宗 25년 (1238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소실되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목탑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약 22m인 정방형의 형태로 총면적은 약 490㎡ (150평)이다. 계단은 남면에서 3개소, 북. 동. 서에서 각1개소가 확인되었으며, 基壇에는 1개의 心礎石과 64개의 초석이 정면 7칸, 측면 7칸을 구성하고 있다.
心礎石은 435cm* 300cm의 크기이며, 두께는 128cm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무게는 약 30톤에 달한다. 심초석안에 마련된 舍利孔은 외곽에 두 줄의 홈으 돌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서 金銅舍利 內. 外函이 발견되었다. (황용사지 목탑지 안내 현판에서 )
▣ 興輪寺
☞三國遺事 桃花女,鼻刑郞: 57쪽, 原宗興法, 厭髑滅身: 125~129쪽, 東京興倫寺金堂十聖: 132쪽, 興輪寺壁畫普賢: 142쪽, 密本摧邪: 211쪽, 金現感虎:224쪽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 281-1번지 사적 제15호 (1963. 1. 21.지정)
신라 최초의 伽藍이며,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으나 눌지왕 때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때의 규모는 매우 검소하여 초가를 짓고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였으나, 왕이 죽자 자연히 폐허가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異次頓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었다.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이 순교하자 나라 사람들은 이 異蹟에 놀라고 또 슬퍼하여, 그를 위하여 절을 짓고 天鏡林의 공사를 다시 진행시켜 544년(진흥왕 5) 2월에 완공하였다. 진흥왕은 이 절을 ‘大王興輪寺’라 하고, 그 해 3월 백성들이 출가하여 僧尼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한편, 궁중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진흥왕은 만년에 스스로 삭발하여 法雲이라는 法名을 받고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大法會를 주관하는 도량이 되었고,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金大城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도 흥륜사였고, 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절이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매년 4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이 절의 탑을 돌면서 염불을 하는 福會를 열기도 하였다. 이 절의 吳堂에는 미륵삼존불상이 있었는데, 이는 선덕여왕 때의 승상 金良圖가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金堂에는 新羅十聖의 塑像이 있었다. 동쪽 벽에는 阿道 · 異次頓 · 義湘 · 惠宿 · 安含이, 서쪽 벽에는 表訓 · 元曉 · 慈藏 · 惠空 · 蛇巴 등의 泥塑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現在 新羅十聖의 塑像은 없어지고 幀畵로 그려져 있음)
금당의 좌우로는 行廊이 있었고, 左經樓와 南池 및 탑이 있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吉達門이라고 불렀는데, 鬼橋를 만들었던 鼻荊의 무리 가운데 吉達이라는 귀신이 지었다고 해서 그와 같이 불렀다고 한다. 皇龍寺 · 四天王寺와 함께 거대한 규모였으나, 신라 말에 叛軍의 放火로 남문과 廊廡가 불타버렸다.
921년(경명왕 5) 靖和 · 弘繼 두 승려가 기부금을 모아 중수하려 하였을 때, 帝釋天이 절의 경루에 내려와 열흘을 머물렀으며, 절에 향기가 가득하고 오색구름이 뒤덮자 사람들이 옥과 비단 등을 시주하고, 工匠들이 스스로 와서 며칠 만에 수리를 끝마쳤다고 한다. 중수 후 제석천이 다시 하늘로 가려 할 때 그 모습을 그려 모시고자 하였으나 제석천은 자신의 願力이 普賢菩薩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보현의 상을 그리도록 하였으므로, 두 승려는 받들어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그렸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普賢菩薩의 畵像은 現存하지 않음) 조선시대에 화재로 소실된 뒤 폐사가 되었으며, 유물로는 石槽와 拜禮石이 남아 있었으나, 이것 또한 경주 부윤 李必榮에 의하여 東軒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중 석조는 신라의 유물 중 가장 큰 석조인데, 길이 2.3m, 너비 1.1m이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국내에서 유일한 人面文 瓦當은 미소 짓는 얼굴을 기와에 조각한 것으로, 일본인에 의하여 일제 때 반출되었다가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이 절에 대한 발굴작업은 1972년과 1977년 6월에 실시되어 금당지 부근 일부가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