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관련 서적을 읽고 모아모아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한번 읽어보시면 전체적인 스토리에 대해 이해가 가실 듯 합니다.
<에비타 EVITA>
‘에비타’ 에바 페론(본명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1919~1952)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러 표현을 써야 한다. 그에게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이미지가 중첩된다. 작고 가난한 소녀, 빛나는 외모의 미인, 탐욕스럽고 냉정한 정치인, 대중의 사랑을 받던 유명인......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은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다. 극적인 삶만큼이나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에바 페론은 ‘거룩한 창녀 또는 비천한 성녀’ 라는 표현대로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빈민층을 위한 사회사업 등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엄청난 사치와 여배우 시절 문란한 생활로도 비난을 받았다.
에바 페론은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대지주였던 아버지와 그의 가정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에바는 15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영화에 도전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에바는 라디오 방송국 성우로 일하던 중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는다. 한창 부상하던 정치인 후안 도밍고 페론 대령을 만나게 된 것. 두 사람의 사랑은 군대와 정치인들의 방해를 받기도 하고, 페론은 구금되면서 위기를 겪기도 한다. 하지만 에바를 비롯한 추종 세력은 노동자를 동원한 석방 운동으로 페론을 구해낸다. 페론이 1945년 10월 17일 민중 혁명과 함께 풀려나면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페론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54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고 에바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대통령 부인이 된다. 에바는 ‘부의 재분배’를 목표로 삼고 사회 빈곤층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 빈민과 노동 조합 문제를 해결했다. 여성의 참정권을 관철시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어 학교와 병원, 보육원을 세웠다. 노동자와 빈민들은 그를 ‘성녀’처럼 떠받들었다. 대중 사이에서 ‘성녀 에비타’ 신화는 점점 고조된다.
한편으로는 에바에 대한 악평도 뒤따랐다.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대중주의) 때문에 나라 경제를 피페하게 만들었고, 페론 대통령의 독재 정치를 이어가기 위한 안전장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학교 수업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자신이 부통령 선거에 나갈 계획을 세우다 군부의 반대로 무산 되기도 했다.
에바는 뛰어난 미모와 화술로 1959년대 초 유럽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전 세계 여성의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에 빨간 입술, 우아한 시뇽 스타일 머리, 넓은 깃이 달린 화려한 장식의 웃옷,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치마 등 에바만의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살린 ‘에바 패션’이 유행할 정도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에바 페론을 두 차례나 표지 인물로 선정했다.
에바 페폰의 죽음조차 극적이었다. 1951년 자궁암과 척수 백혈병으로 쓰러져 이듬해 7월 26일 33세에 인생을 마감했다.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에바 페론은 사람들의 가슴에 에비타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가 죽은 후 한 달간 아르헨티나에는 국가적 에도 기간이 선포됐다.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정치인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뮤지컬<에비타>는 1973년 작사가 팀 라이스가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에바 페론의 삶을 접하면서 탄생했다. 에비타의 삶에 강렬한 영감을 받은 그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를 찾고, 두 사람이 연출가 해럴드 프린스와 손잡으면서 또 하나의 뮤지컬 신화가 만들어진다.
<에비타>는 1976년 음반을 먼저 발표한 뒤 1978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1년 뒤인 1979년 9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려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또 토니상 7개 부분을 휩쓸었으며, 뉴욕비평가상도 받았다. <에비타>의 성공은 ‘영국 메가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와 전 세계를 점령하는 시대를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해럴드 프린스는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위니 토드>를 무대에 올린다. 프린스가 연출한 두 작품은 미국이 자랑하는 뮤지컬 작사, 작곡가 손다임과 영국이 자랑하는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배결이란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스위니 토드>는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파고들어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작품으로 꼽혔지만, 흥행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반면 <에비타>는 예술성 면에서는 평범하다는 병을 받았지만 <스위니 토드>보다 3배 이상 오래 공연하면서 전 세계에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에비타>는 에바 페론의 인생과 사랑, 정치적 욕망, 죽음을 그려낸다. 에바 페론의 삶은 극을 위해 별다른 덧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극적이다.
1952년 7월 26일 아르헨티나. 체 게바라가 영화 관람석에 앉아 있다. 영화가 멈추고 에바 페론이 죽었다는 속보가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 장례식은 장엄하게 치러지고 조문 인파는 통곡한다. 체 게바라만이 장례식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극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체 게바라는 1953년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니 그의 활동 기간과 에바 페론의 활동 기간은 겹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에비타>는 체 게바라를 브레히트 연극적인 내레이터로 등장시킨다. 그는 극 내용을 설명하거나 비판하기도 한고, 에바와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ough my wild day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진실로 난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지금까지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이 미칠 것 같은 삶 속에서도
난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왔어요
그러니 나에게 멀리 떠나지 말아요
-‘Don't Cry for Me Argentina(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 중
에비타는 많은 여성들이 한 번쯤 꿈꾸는 역할이다. 마돈나가 영화 <에비타>에 출연하길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무대에서 곡절 많은 그의 인생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2시간짜리 공연에서 1시간 30분이 에바의 몫이다. 대사도 없이 노래로 대화하고 표현해내야 한다. 런던 공연에서는 일레인 페이지가, 뉴욕 공연에서는 패티 루폰이 무대에 섰다.
오랫동안 기획과 포기를 거치던 <에비타>는 1996년 앨런 파커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됐다. 후안 페론 역에 조너선 프라이스, 체 게바라 역에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출연했다. 영화 제작 때문에 다시 만난 웨버와 라이스는 새로운 곡 ‘유 머스트 러브 미(You Must Love Me)'를 작곡해 넣어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웨버의 음악은 팝, 록, 재즈, 라틴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면서 드라마와 절묘한 조합을 이뤄냈다. 라이스의 우아하면서 냉소적인 가사는 라틴 아메리카 리듬과 아르헨티나 탱고를 타고 흐른다. 특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는 공연 전 발매된 음반으로 뮤지컬보다 먼저 인기를 끌었다.
<에비타>는 한국에서 몇 차례 공연된 적이 있지만, 공식 라이선스를 통한 것은 2006년 11월 공연이 처음이다. 2006년 6월 영국에서 캐머린 매킨토시의 초연작을 리바이벌해 올린 버전이다. 에파 페론 역에는 배해선과 김선영이 더블 캐스팅됐다. 체 게바라에 남경주, 후안 페론에 송영창이 무대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