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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에서 환경을 거쳐 생태로
우리는 세계 교회의 미션 역사에서 과거 서구 백인 그리스도 교회 중심으로 세계를 대상화하면서 선교를 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지구촌 전체가 서로 선교하는 오대륙 육대양의 상호 선교 지평을 자각하고 여기에 바르게 응답하고자 노력해 왔다. - 10) 세계 교회 차원에서 나타난 미션 인식과 실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특히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새로운 전망과 아시아 등지의 전통 영성과 문화 - 11) 숀 맥도나휴, 땅의 신학,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1993, 239-45 참조. 같은 책, 246-55에 소개되어 있는 세계의 여러 부족 종교 전통이 전하는 자연 친화적 사고도 보라. 에서 자연과 인간의 상호 소통과 깊은 대화의 전망을 익혀온 세계 신학과 영성 세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모색되고 또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 12) 같은 책, 38 참조. 이러한 변화는 하느님의 온 창조계를 포용하는 상호 교화와 섬김, 온 창조계의 상호 존중과 연대의 지평을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에 통합하여 온 생명계와 함께 누릴 축복을 언어화하고, 이를 자신의 복음화 미션에 통합하려는 구체적인 시도를 낳고 있다. 나는 이러한 흐름을 포착하여 최근에 “missio inter creaturas,” 곧 인간을 포함한 “온 창조물 사이의 상호 미션”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면서, 이것을 토대로 이 시대의 생태 영성과 생태 신학의 전망을 진술하기 시작하였다. - 13) 황종렬, “공명의 지평 확장-온 창조물 사이의 상호 미션,” 가톨릭신문 2006년 2월 19일자: 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0943 참조. 이 패러다임의 변화에 관해서는 2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아래에서는 자연과 환경과 생태라는 언어가 민중 가운데서 중심 화두로 수용되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이러한 전환을 이루는 계기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자연”에서 “환경”으로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가 나타나는 우주적, 지구적 조건을 일반적으로 “자연(nature)”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해 왔다. 한 사전에 따르면, 자연은 “사람의 힘을 보태지 않은 우주에 있는 천연 그대로의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 14) 새우리말 큰사전(신기철·신용철편) 하, 삼성출판사, 1983, 2792. 이를테면, 비인공의 우주 만물을 “자연”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자연을, 그리고 사람의 노고의 산물로 이해하는 이른바 사람 중심의 “문화”와 자연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15) 같은 곳 참조.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특히 동아시아의 세계관에서, 인간을 광의의 자연에 포함시켜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저자가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의 정점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창조계의 일원으로 보는 관점과 상통한다. 또한 자연과 문화의 관계 역시 대립된 방식으로가 아니라, 자연 속의 문화, 문화 속의 자연, 곧 자연을 통한, 자연과 어우러진 문화, 문화를 통한,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자연을 그려 가고 있다. 창세기 저자가 인간을 창조계의 청지기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의 상호 협력과 돌봄의 관계에 대한 한 원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16) 클라우스 베스터만, 창조,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1991, 72-84; 땅의 신학, 203-8 참조.
그런데 인류 사회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급격하게 이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인식하면서, 자연을 도구화하기도 하였다. - 17) 땅의 신학, 40-88 참조. 이런 흐름 속에서 자연 세계를 대상화하여 “환경(環境)”으로 보는 데 길들여져 왔다. 자연을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변 내지 배경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생존 수단 내지 도구로 보는 세계 인식을 사상적 원천으로 갖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인간 중심 세계관이 일정하게 작용해 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런 인간 중심적인 자연 이해를 갖고 있는 이들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땅을 복종시키고 그 위에서 사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거로 삼곤 하였다. - 18)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in eds. Mary MacKinnon and Moni McIntyre, Readings in Ecology and Feminist Theology (Kansas City: Sheed & Ward, 1995), 25-35; 그리스도교 문명권 밖에서 나타난 자연 파괴에 관해서는 땅의 신학, 229 이하 참조.
하지만 “환경”이라는 말을 꼭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를 띠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실제로 환(環)이라는 한자나 영어 environment(“둘러싸다”를 뜻하는 environ의 명사형)가 나타내듯이, 환경은 “둘레”를 뜻하는 개념이다. 이 원래 뜻에 주목할 때, 이 말은 성령이 세상을 감싸듯이, 자연 만물이 인류를 품어안고 있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듯이, 온 창조계가 인류를 품어 기르는 것을 나타낼 수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라는 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의미해 온 것을 놓고 볼 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개념은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삼아서 하느님의 창조계를 일정하게 대상화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환경을 주변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서 자연적 실체들을 총칭하여 “환경”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틀에서는 환경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서 자연적 실체들을 총칭한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조건과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우리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인간들이 사는 무대 내지 주변 세계를 통틀어 환경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역시 일반적으로 아직은 하느님의 창조계를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자연을 개발하고 정복해 갈 대상으로 보는 풍조가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여전히 지구 전체를 하느님의 거처, 하느님의 집(oikos)으로 인식하거나 이를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에 근거하여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일정하게 한계를 드러내는 면이 있다.
“환경”에서 “생태”로
그러나 그동안 서구와 아시아는 물론, 한국의 신학계에서도 “환경”이라는 말이 자연을 일정하게 대상화하면서 인간 중심의 오만과 독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 왔다. 오늘의 인류는 자연에 대한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를 넘어서고자 애쓰는 중이다. 그리하여 자연까지도 하느님의 생명 공동체로 맞아들이는 영성의 심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현대 인류 사회는 “생태(oikos-eco)”라는 개념을 재해석해 가기 시작하였다. 한문으로 “생태(生態)”란 “살아 있는”을 가리키는 “생(生)”과 “모양”을 가리키는 “태(態)”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살아 있는 모든 것,” “온 생명계,”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그것들의 관계 구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 19) 동아시아 사회에서 이 개념이 쓰인 용례에 관해서는 이도원, 한국 옛 경관 속의 생태 지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5-6 참조. 또한 “생태”로 옮겨지는 서구어 “eco”는 “거처,”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왔는데, - 20) 땅의 신학, 37. 이를테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혹자는 oikos를 장소로서 “집” 내지 “환경” 정도로 보기도 한다. - 21) 이도원, 같은 책, 7. 이 저자의 관심은 “생태”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데 비해서 “oikos=eco” 개념이 사람을 충분히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대비시키려는 데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대비에 머물 경우, oikos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역동성을 포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을 이처럼 물리적 장소나 단순히 인간 삶의 자연 배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데 그쳐서는 이 개념을 발생시킨 서구 문명의 주체들이 이 개념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영성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이 개념을 복음적으로 재해석할 그리스도인들의 과제가 드러난다. 서구 문명을 2000년 동안 각인시켜 온 그리스도교 사상에 근거할 때, 온 천하 만물의 공동 거처로서 지구와 태양계, 우주는 하느님의 창조물이자 하느님의 거처이며 하느님의 커뮤니케이션의 장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온 창조계는 하느님의 창조가 숨쉬는 곳이고, 하느님의 창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영위하면서 하느님께 부여받은 생명을 살아가는 공간이자 그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oikos를 단순히 물리적 “장소”로 인식하는 데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소리 내력”에 등장하는 안도가 말하듯이, 고향은 단순히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없는, 혹은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일 뿐인 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품이 예수께 그런 것처럼, 그것은 죽어서라도 가서 안겨야 하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것이다. - 22) 김지하, “소리 내력” 가운데 안도가 옥에서 탄식하는 대목 참조.
(전략)
어허 이것이 웬짓이냐, 헐벗고 굶주리고 죽도록 일만 하고 매맞고 억눌려도 말 한 마디 안 했는데 이것이 웬 짓들이냐, 날아가는 기러기야 너는 내 속을 다 알리라.
수수그림자 길게 끌린
해설핀 신작로가에
우리 어메 날 기다려 상기도 거기 서 계시더냐
철 지난 옷을 입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서울 쪽 바라보며 소리없이 우시더냐
아아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갈래 만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뚫어
저 담을 넘어
원귀(寃鬼) 되어 저 붉은 벽돌담을 넘어 끝끝내 뚫고 넘어
가요 어머니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또한 마테오 리치가 진술하듯이, 하늘은 하느님을 에둘러 말하는 방식이다. - 23) 천주실의, 2편, 송영배 외 5인 역,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108 참조.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집”이 물리적인 어떤 “곳”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의 가족,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깃들어 있는 자리로서, 하느님의 품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 견주어 말하자면, 부모와 자녀, 자녀와 부모가 갖는 관계가 그대로 창조자 하느님과 창조계 사이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그리고 사목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 자신이 온 창조계의 궁극적 oikos-“생태”요 하느님 자신과 온 창조물의 “공동의 집”이기도 한 것이다.
oikos를 이처럼 “삶의 근원적 토대”요, “존재의 궁극적 원천 자리”로 인식할 가능성은 사도 바오로의 신-인 관계 비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2차 선포 여행 중에 아테네에 간 적이 있는데, 그는 아레오파고스에서 그곳의 몇몇 철학자들과 시민에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사도 17,28)고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것(panta)이 하느님(theos) 안에서(en) 존재한다는 것인데(pan-en-theism), 바오로 사도의 이 관념을 저 oikos 개념과 연결지어서 말하자면, 하느님이 바로 온 생명계의 거처로서, 가장 근원적인 “생태”가 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태”를 대상화하고 파괴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께조차 폭력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태”를 하느님의 창조와 상통시킬 때, 생장과 번식 등을 기준으로 “생물”이라고 하는 것들만을 “생태”의 범주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게 된다. 이제는 이런 생물들은 물론, 이 생물들에게 삶의 자리가 되어 주는 모든 실체도 자연스럽게 “생태”로 인식하게 된다. 위에서 “생태”를 “온 생명계”라고 말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생태” 인식의 지평에서는 이 개념들 역시 “생물” 중심의 세계 인식을 넘어서서, 온 생물과 그것들을 생존하게 하는 거처는 물론, 인간을 포함하여 일체의 생물적, 물리적 이웃과 조건을 포용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이 시대에 말하는 “생태”는 과거 인간 중심의 “환경” 개념의 대안이자, 고전적인 “자연” 개념을 포용하는 개념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창조계” 개념에 상응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생태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이 인식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을 구현하고자 도모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노력들이 21세기를 생태와 영성의 시대로 일컫게 하는 것이리라고 믿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 교회가 이제, 하느님의 창조계를 인간 중심으로 보는 단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복음화 지평과 연대의 동반자를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모든 창조계로 확장할 시대적 사명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스펙트럼을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좁혀서 접근하여서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경륜에 건강하게 응답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인류를 포함하여 온 창조계가 다시 하느님의 창조로서 구원과 구원으로서 창조에 조율되어, 하느님의 우주적, 지구적 구원 경륜에 부합한 형태로 하느님의 영광을 창조 만물과 함께 노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살림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축복과 구원을 매개할 온 창조물 사이의 상호 미션(missio inter creaturas)을 일깨워 준다. 뒤에 가서 창조물 사이의 상호 미션에 관하여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인데, 아래에서는 이웃의 지평 확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문제를 좀 더 성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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