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부 산문
최우수상
조임경(경주시 동천동)
바람
마을 어귀를 보니 버스 한 대가 뽀오얀 흙먼지를 달리며 고갯마루를 넘어서고 있었다. 승천하는 용의 휘어진 허리 마냥 굽은 길 위로 몇몇의 사람을 태운 마을 버스가 힘겹게 달려오는 동안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가 있었다. 애타게 기다라는 그 누군가가 버스 뒷문을 통해 내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청명한 가을 하늘 빛과 아이러니하게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ꡒ아이고 김서방요, 여직 기다리고 있능교. 벌써 매칠 째고? 밥은 묵고 그라고 있나. 우리 집에 가서 식은 밥이라도 한 그륵 하고 오시더. 어이?ꡓ
밭일 나가던 아랫마을 영주댁 아주머니는 정류장 옆 나무 그루터기에 몇 날 며칠 앉아 있는 김서방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꼼짝 달싹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김서방의 행동을 보고도 심각하게 만류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젊은 시절, 술과 담배로 한 세월을 보내고 가정을 애살있게 돌보지 않았던 김서방이었다. 김서방의 아버지 또한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생활을 하다 술취한 채로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져 운명을 달리하셨다. 화목하지 못했던 가정에서 결국 김서방의 아내는 보따리를 싸 밤도망을 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떤 이는 다른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뒷말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김서방의 가정사는 작은 시골 동네에서 한동안 스캔들이 되었고 뜬 소문이 아닌 모양으로 집나간 여자는 1년째 소식이 없는지 넋놓고 앉아 하염없이 버스만 바라보는 김서방의 모습이 이해가 갈만도 하다.
지난 2006년 추석이었다. 모처럼만에 한 가족이 모여 기름냄새 진동하는 행복한 연휴를 보내고 있을 무렵, 김서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근심을 산 일이 있었다. 나 또한 안쓰러운 마음에 허물어져가는 뒷집 김서방네에 가 보았더니 이게 왠일인가! 며칠째 배를 움켜잡고 방을 뒹군 흔적이 역력했다. 역한 냄새와 어지럽게 깔린 약봉지, 술별들 속에서 김서방은 시체마냥 쓰러져 있었다.
ꡒ아재요ꡓ
깜짝 놀란 마음에 옆집 아재를 애타게 불러 119에 신고를 할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야 하는 한가위날에 너무도 가엾게 안쓰럽게 119에 오르는 김서방의 모습은 참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 뭉클해졌다. 그날 이후 몇 번의 큰 수술을 마치고 생사를 오가던 김서방은 끈질긴 생명력 하나로 폐암 진단을 극복하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간병인으로 일했던 아주머니 말씀이 2번째 수술 이후에 어느 중년 여자 하나가 병원을 다녀갔다고 한다.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서 집 나갔던 김서방의 아내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들 그 여자라고 믿고 싶은 눈치들이었다. 퇴원 날, 눈부시도록 청명한 가을 하늘에 길가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리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옆집 아재의 봉고차에 함께 올라탄 아버지와 나는 유난히 창밖 코스모스를 쳐다보는 김서방의 눈물 젖은 눈자위를 외면하려 했다. 뺨을 스치는 선선한 가을바람에 맞추어 춤을 치는 색색깔 코스모스의 향내가 연신 가슴을 울리는 동안 김서방은 과연 무슨 생각에 젖어 있었을까? 가을 하늘은 참으로 드높고 푸르렀으며 가을 바람 또한 숨막히게 향기로웠다고 기억된다.
고등부 산문
최우수상
손희애(경주여자고등학교 1학년 9반)
촛불
ꡒ아, 힘들어 방학인데도 보충수업 하려니까 짜증나 죽겠다ꡓ 여기는 경주여고, 경주의 명문라고는 하지만 공부에 찌들려서 입학식 때의 그 풋풋함을 하루하루 잃어가는 모습을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눌려서 우리들은 가끔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도 잊기도 할 정도이니, 그 사태는 사실상 아주 심각했다. 하지만 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내 리듬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왔었다. 그런데 항상 기억하고 있던 그 날을 잊어버리다니, 그날에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했었던 게 틀림없다.
때는 8월 11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며 아침을 맞이했다. 피곤에 찌들려 있는 탓에 모든 게 다 짜증났고, 결국 그 날도 역시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등교를 했다. 하지만 그 날만은 달랐어야 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난 깨닫지 못했었다. 그날이 무슨 날인지를… 난 그렇게 등교를 했고 평소와 똑같이 반쯤 감은 눈으로 보충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쉬는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모의고사 날짜가 정해졌다면서 들어오셨다. 모두들 스케줄 수첩을 꺼내 들고는 필기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나는 모의고사 날짜를 표시하다 말고 연필을 툭 떨어뜨리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8월 11일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는 엄마의 생일. 어쩐지 아침부터 뭔가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찜찜하기는 했다.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고 피곤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딸이 엄마 생일을 잊을 수가 있는지…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생일날 아침부터 엄마에게 짜증낸 거 하며… 선물을 사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지금 케이크를 사러 간다고 해도 케이크를 사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 지갑에는 5,000원 짜리 지폐가 한 장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동전을 모아보니 7,000원이나 되었다. 그 순간 떠오른 건 6,900원 짜리 미니케이크! 하는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저녁시간 종이 치자마자 빵집으로 뛰어갔다. 6,900원 짜리 미니케이크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그걸 주기엔 너무 미안했지만 그 순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촛불 몇 개 필요한는 종업원의 물음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ꡐ엄마가 몇 살이지?ꡑ 이럴수가 엄마 나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다니 난 정말 불효녀인가 보다 그렇게 한참을 머리를 굴려보다보니 62년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ꡒ큰 거 4개랑 작은 거 6개요ꡓ 46살. 케이크를 들고 학교로 돌아오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난 이만큼 엄마에게 관심이 없었나…. 엄마의 생일도… 나이도… 학교로 돌아온 나는 편지를 쓰고, 내 자신에 대해서 반성도 좀 하면서 자습시간을 보냈다. 2시간 정도가 흐르고 하교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10개의 초도 벅찬 조그마한 케이크를 바라보며 엄마를 기다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웃는 얼굴로 엄마를 맞아야겠다면서 내 스스로를 위로했다. 얼마 후, 엄마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엄마가 문을 열고 나와 내 동생은 어두운 방에서 10개의 촛불로 방안을 밝히면서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불을 켰다. 방안이 환해 졌을 때, 엄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엄마는 이런 조그만 거 하나에도 감동을 받은 것이다. ꡒ희애야. 동주야 고맙다. 공부 하느라 힘들텐데도 챙겨줘서 고마워. 사랑해ꡓ 말을 끝내며 나와 내 동생을 끌어 안았다. 엄마의 품속에 안겨서 생각했다. ꡐ엄마는 힘들었구나. 아빠가 안 계신 자리를 혼자 메꾸느라 많이 힘들었구나… 엄마는 우리의 조그마한 위로가 필요했던 거구나.ꡑ 그날 저녁 우리 세 명은 오랜만에 따뜻한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아침, 어제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지만 등교할 때의 내 마음만은 달랐다. ꡐ엄마, 나 열심히 할게. 성공해서 엄마 호강 시켜줄게. 그때는 2단 케이크에 커다랗고 멋진 촛불 꽂아서 방안을 환하게 비춰줄게. 그 때는 울지 말고 환하게 웃어줘요. 엄마 사랑해요ꡑ 그리고 그날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엄마의 우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꾸기 위해 내 꿈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고 있다.
중등부
최우수상
최복규(경주중 3학년 3반)
편지
편지, 편지라 하면 난 그때의 그 편지가 생각이 난다.
내가 5학년이던 시절 부모님께 드렸던 그 편지 말이다.
마냥 애 같았던 내가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시간이라 하여 난 다른 애들과다름없이 아이들과 놀면서 그냥 적어내기만 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아버지께 드리는 마지막 편지일 줄 몰랐었기에…
그 편지를 쓰고 한 달 뒤에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병원에서 차갑게 식은 채로 돌아가셨다. 난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항상 새벽에나 들어오셨고 주말엔 내가 친구들과 논다고 아버지와는 추억이 없었다. 하지만 추억이 하나 있다면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는 날 아침, 야영 가는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시고 나에게 다치지 말고 잘 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자상하신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에는 생생히 남아 있다. 야영 둘째날 난 그 비보를 들었다. 도저히 난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그 건강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봐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던 한 달 동안 우리 집은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난 할머니 집에서 살았었고, 엄마와 누나들은 병원에서 간호를 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엄마와 누나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엄마에게 투정부리고 짜증냈었던 그때의 행동들을 지금에서야 후회가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제 우리 집엔 남자가 나밖에 없었으니까 더 이상 마냥 꼬맹이기만 할 수 없었으니까. 난 끝까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다짐과는 다르게 이미 내 양 볼에는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후론, 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울게 되면 다시 옛날의 꼬맹이로 돌아갈까 봐…
혹시 風樹之歎이란 말을 아는가? 이 말의 뜻은 부모님께 효도를 하자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는 뜻이다. 이 말을 배우고 나서 난 내 얘기라고 느꼈다. 10월 8일. 얼마 전에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1년 중 딱 하루 아버지를 생각하는 날이다.
그러나 지금 또다시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 이 맑은 가을날 아버지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고 싶다.
초등 고학년(4, 5, 6학년)
최우수상
조민지(황성초등 6학년 3반)
친구
ꡒ사람을 찾습니다. 6학년 3반 박시영 학생. 키는 170cmꡓ
시영이는 우리와 다른 친구이다. 길고 네모난 얼굴, 마냥 높아보이는 키. 하지만 울고 소리지르는 시영인 어린애다. 시영이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이이다. 그래서 우리와는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제 우리는 엑스포로 소풍을 갔다. 조별 시간이 끝나 한가롭게 약속 장소로 향하는데 날아온 한 통의 문자.
ꡐ시영이가 없어졌다.ꡑ
그 순간 우리 반은 비상 사태가 되었다. ꡒ시영아, 시영아ꡓ 소리 지르며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엑스포가 왜 그리 넓어 보이는지.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얼굴은 벌게지고, 음악 선생님, 영어 선생님까지 동원되어 사방으로 시영이를 찾는다는 안내 방송은 자꾸만 귓전에서 맴돌았다. 맨날 가래 탁 뱉어 짝 바지에 묻히고, 우유를 쏟아 마음에 안드는 시영인데 왜 그리도 열심히 찾으러 다녔는지. 선생님은 얼마나 뛰어 다니셨는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때 들려온 한 마디.
ꡒ얘들아, 시영이 찾았데!ꡓ
엑스포 밖 도로가에 있었다니! 괜히 우리를 걱정시킨 시영이가 미웠다. 버스에 올라탄 우리들은 쓰러지듯 의자에 앉고, 선생님의 거친 숨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는 시영이가 다르다는 이유로 좋아하지도 잘해주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사실 마음에 목발을 짚고 있는 것은 시영이가 아니라 우리가 아닐까? ꡐ다르다ꡑ라는 틀에 갇혀 시영이를 단지 장애인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의 편견이 시영이를 더 다르게 만드는 것 같다. 같은 반이라도 2년 동안 존재감 없이 지내온 시영이지만 그래도 친구이기 때문에 우정이라는 소중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초등 저학년(1, 2, 3학년)
최우수상
김지윤(황성초등 2학년 8반)
풍선
내 머릿속엔 풍선이 바글바글 있다. 풍선 안에는 내 생각이 뿅뿅 나타난다. 오늘 한 풍선에는 컴퓨터로 꽉 차 있고, 또 한 풍선에는 줄넘기로 꽉 차있다. 내일은 무엇으로 꽉 찰까? 또 엄마 머릿속 풍선은 쉬고 싶은 생각이 꽉 차겠지? 나는 예쁜 꿈 풍선을 많이 가지고 싶다. 분홍 풍선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촌 동생 혜정이로 꽉 채우고, 파랑 풍선 안에는 세 잎 클로버로 채울 거다. 왜 세 잎 클러버를 채우냐면 세 잎 클로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아참 하얀 풍선 안에는 엄마, 아빠 바라는 걸 안에 채울 거다. 바라는 건 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겠지? 내 머릿속 풍선은 터지지 않는 풍선으로 채울 거다. 머릿속에 풍선이 너무 많아 내 몸이 하늘로 붕붕 떠다니면 어쩌지? 너무 큰 풍선은 키우지 않을 거다. 내가 지킬 수 있고 작지만 꽉 채울 수 있는 풍선만 키워 오래오래 풍선을 지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