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1 기본훈련기 개발 과정'
(2001. 10. 24)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장비를 4개월 안에 국산화하라." 1971년 11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 (국과연‧ADD)에 긴급병기개발을 구두로 지시했다. 국과연이 창설(1970년 8월6일)된 지 불과 1년 3개월. 날벼락 같은 지시였지만 이 명령은 13일 '번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곧바로 실행돼야만 했다.
당시 국내에는 금속, 기계, 전기, 전자, 화공학 등 무기 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 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 칼빈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지뢰 등을 비록 모방이었지만 국산화한다는 것은 여건상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과연은 인력의 태반을 '嗤?' 수행에 투입했다. 금성사 등 시제업체와 국방부 방위산업 담당 부서도 마찬가지. 병기를 분해해 역설계하고, 알맞은 재질을 찾아 헤매는 등 당시로서는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력을 밤낮으로 쏟아 부었다.
국과연은 수차에 걸쳐 시험사격을 거친 끝에 72년 4월 3일 종합사격시험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추진한 번개사업을 통해 국과연은 이 때부터 기본병기의 국산화와 향후 고유의 무기체계 개발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후 재외 과학자 유치 및 초빙 등으로 연구인력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보다 체계적인 연구개발에 전력했다. 그 결과 78년 9월 세계에서 7번째로 지대지미사일 '백곰'을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하는 등 '자주국방'의 초석을 확실히 다져나갔다. 그러나 80년대 초 단행된 국과연의 구조조정은 그야말로 '뼈아픈' 것이었다. 85년 말까지 국과연의 연구인력은 872명으로서 다른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비해 석‧박사 학위자가 적었다. 당연히 무기 체계 개발은 침체됐다. 최초의 잠수정 '돌고래', 함대함 미사일 '해룡', 지대지 미사일 '현무'가 이 시기에 개발됐으나 80년대 중반 이후 한동안 국과연은 주목할 만한 무기체계를 내놓지 못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국과연은 장병과 국민들은 물론 외국의 무기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무기체계를 잇따라 선보였다. 공군기본훈련기 KT-1 웅비를 비롯해 155㎜ 자주곡사포 K-9, 자주대공 미사일 K-SAM 천마, 정찰용 무인항공기와 정찰용 열상센서, 날개안정분리 철갑탄, 적 어뢰로부터 함정을 보호하는 음향대항장비체계 등이 그것이다.
80년대 후반부터 탐색 개발하기 시작, 성과로 나타난 이 같은 무기체계들은 어느 것 하나 외국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국과연 연구기술력으로 각각의 무기체계를 설계하고 시제품을 제작, 이를 시험 및 평가해 양산시킨 것들이다. 기술과 성능이 동종의 세계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 자랑이다.
국과연은 창설 이후 지금까지 총기와 화포류 등 400여 종의 병기와 물자를 국산화시켰다. 어떤 무기체계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를 모두 국내 개발할 수는 없다. 또 각각의 무기체계를 100% 국산화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무기체계를 국내 개발할 것인지, 조립생산 할 것인지, 아니면 직접 외국으로부터 도입할 것인지는 국방뿐만 아니라 산업경제까지도 포함한 '투자 대 효과'면에서 추진돼야 할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 무기체계를 구성하는 '핵심기술'은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는 현재 조용수(趙鏞洙) 소장을 중심으로 21세기 첨단 국방과학기술을 선도하는 연구소로 나아가기 위해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엔 차기 보병소총을 비롯해 차기 장갑차 및 전차, 항공기 등 미래 핵심전력체계를 집중 연구개발해 국방과학 핵심기술의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면서 군사기술혁신을 선도해 나가겠다는 의욕이 담겨있다. 오늘도 연구소는 조용하다. 그들은 과거 어느 순간에도 결코 소란스럽지 않았다. 장병들 앞에, 국민들 앞에 놀랄 만한 '작품' 하나를 내놓고는 오히려 그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곤 했다. '자주 국방'의 초석으로서 아직 해야 할 그 임무가 많이 남아 있다는 국과연 특유의 겸허함이다. 조만간 그들은 '번개사업' 때부터 안으로 무장해 왔을 열정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놀랄 만한 그 '무엇'을 조용히 선보일 것이다.
1. KT-1 웅비
1991년 12월 12일 '우리의 항공기' 마침내 창공에 오르다 2001. 10. 31)
흐리고 바람 많았던 어제 하루는 참으로 지루했다. 이른 아침 하늘을 보면서 '하루순연'은 예상했던 바였다. 그 말에 발끝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던 긴장감은 일순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초조함이 곁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그렇기는 해도 어떤 징조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후 3시가 돼서야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랜시간 가슴에 담아두었던 심경을 여기저기서 토로하고는 했다. 식사시간이 그렇게 엄숙하고 숙연할 수 있을까.
마침내 '1991년 12월 12일'이 밝아왔다. 공군3훈련비행단의 가리울 곳 없는 허허벌판 비행장. 활주로를 훑고 온 찬바람이 한 차례 얼굴을 부딪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기온이 밤새 더 떨어진 것이었다. 몸이 움츠러들 만큼 매우 쌀쌀했다. 다행히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적었다. 서로가 비행에는 참으로 좋은 날씨라며 미소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오가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초도비행, 최초의 비행,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 그 첫 비행. 그렇다. 이날 12월 12일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연구개발해온 우리 항공기, 대한민국(K) 공군의 훈련(T) 시험제작기(X), KTX-01호기가 처음으로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오를, 그런 날이었다. 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당시부터 오늘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것. 그럼에도 '처음'이라는 것은 언제나처럼 이날도 팽팽한 긴장감과 두려움 속으로 이끌었다.
이수용 연구원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비행을 기다리는 KTX-01호기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오늘의 01호기가 있기까지 사업책임을 맡았던 강위훈 박사, 항공기체계실장 안동만 박사, 그리고 이재명 박사, 한영명 박사 등과 함께 갖은 정성을 기울여온 많은 사람 중 한 명. 1983년 그때 누가 항공기를 만들겠다고 꿈꾸기라도 했을까. 당시 공군으로부터 개발 요구가 없었음에도 장차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가 필요하다며 기초조사를 시작하고, 소요기술을 분석하고, 또 이 01호기를 설계한 이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는 01호기가 새각시의 자태처럼 참 곱다고 생각했다. 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 같다고도 느꼈다. 한편으로는 '푸드득'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보였다. 취재 중 "그때 01호기가 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까"라는 무식(?)하고 용감한 질문에 호탕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이수용 연구원.
비행단의 야전정비대대 앞, 200여평 부지에 마련된 국과연 임시사무실에는 역사적인 01호기의 첫 비행을 지켜보기 위해 국과연 김학옥 소장(예비역 중장)을 비롯해 공군3훈련비행단장, 그리고 국과연과 국방부, 공군, 방산업체 관계자, 기술협력차 체류 중이던 외국 전문가 등 100명 이상이 자리했다.
사업경과 보고와 시스템별 담당연구원들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주된 브리핑은 01호기와 함께 이날의 주인공이 된 이진호 소령(43․현 중령)이 맡았다. 개발중인 항공기의 시험비행은 위험도가 높고, 전문지식을 갖춘 시험비행조종사를 필요로 하는 특수분야. 공군에서 선발된 그는 영국 유학을 통해 시험비행조종 자격을 획득했다.
01호기의 조립을 마친 후 실시한 지상주행테스트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는 브리핑을 마치면서 인사말을 통해 오히려 국과연 연구진을 위로했다.
"(국과연 연구원)여러분들께서는 그동안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제 그 배턴을 제게 넘기시고 뒤에서 그간의 노고를 스스로 음미하면서 (오늘의 비행을)즐기십시오.
제가 그 노고를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KTX-1 파이팅."
'비상'의 감격 뒤로하고 연구진 "이제부터 시작"(2001. 11. 7)
이진호 소령은 KTX-01호기 전방조종석에 앉았다. 이미 눈감고도 조종석의 모든 장치를 작동할 만큼 익숙한 자리.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늘 자신을 주목하는 이들은 단지 관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현역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조종사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항공기를 타고 첫비행을 하는 '행운'의 조종간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이 조종석에 앉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1년여의 힘든 유학생활도 그러했지만 당시 KT-1 개발사업을 위해서, 미국의 시험비행조종사 세계에서는 '살아 있는 예거'라고 칭송받는 베테랑 조종사 숀 로버트가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숀은 01호기가 최종 조립되기까지 연구개발진에게 금쪽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에게 많은 신뢰를 보였고, 그 때문인지 초도 비행일이 다가오면서 그에게 시험비행을 맡기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어림없는 소리. 연구개발진은 당연히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한영명(50․현 고정익항공기 체계부장)박사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 목소리에 여러 연구원들이 자리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되었다. 이른바 '이초추' 즉 '이진호 소령 초도비행 추진위원회'였다. '비공인'일 수밖에 없는 이초추의 위원장은 한박사. "우리가 만든 항공기, 당연히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요."
이윽고 10시 10분. 01호기는 활주로 저편에서 프로펠러로 멋진 프롭디스크를 그리며 튀어 오를듯 서 있었다. 이소령은 관제탑으로부터 교신이 떨어지자마자 활주로를 달려 나갔다. 100m, 200m, 300m…. 01호기는 마침내 대지를 박차고 푸른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함성, 환호….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모두가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공중의 비행상황에 또다시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소령 역시 왼손으로 비행상태 체크리스트를 표시해 나갔다. 01호기는 아직 자동계측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일일이 손으로 직접 체크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40여 분. 활주로 상공으로 01호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항공기는 착륙단계가 가장 위험하기 때문. 그러나 그것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01호기는 너무도 사뿐히 착륙했다. 비로소 이 역사적 순간에 모두가 환호성을 올렸다. "그때 그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감격스러워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으니까요. 지금도 이렇게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이수용 팀장)
이 기쁨 또한 오래 누릴 수 없었다. 이소령과 연구진은 브리핑실로 들어가 40여 분 동안의 모든 비행상황을 점검해야 했다. 끼니도 잊은 채 계속된 질의응답, 현장분석은 무려 4시간이 지속됐다. 모든 것이 잘 가동됐다는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 오후 3시가 돼서야 식당에 모두 자리를 함께 했다. 저마다 '해냈다'는 자부심이 한참 고조될 무렵, 한편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작동되지 않기를 아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일까. 그는 비상시 조종사의 안전탈출을 위해 장착된 '사출좌석'을 담당한 임철호 연구원이었다.
물론 극소수의 누구들처럼 01호기가 100% 완벽한 시험비행을 수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2인승인 01호기에는 이진호 소령만이 전방석에 탑승했고, 이륙 후에도 착륙 장치를 그대로 유지한 채 비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도비행이란 점을 감안, 항공기의 안정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무게중심을 전방으로 유지하고자 한 의도였으며, 착륙장치 또한 안전측면을 최대한 고려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의도가 와전되어 01호기는 후방 조종석 탑승이 불가한 항공기라든가, 착륙장치를 올릴 수 없는 항공기라는 등의 웃지 못할 이야기가 들려 왔다.
이해부족에서 온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1991년 12월 12일, KTX-01호기는 그렇게 날아올랐다. 우리 민족 5000년 역사에서 누가 이렇게 하늘을 날 수 있었으며, 누가 이렇게 날아오르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기반 시설이 전무하다시피한 상태에서 출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어쩌면 숀 로버트의 표현처럼 '미라클(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강위훈 박사(현 중국 옌볜대학교수), 체계실장 안동만 박사(53․현 3체계본부장)를 비롯한 국과연 연구진은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고 트랙의 스타트라인에 들어서고 있었다.
진짜 국산 1호는 '웅비' (2001. 11. 14)
"KT-1이 한국 최초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군의 부활호가 있지 않습니까?"
한 독자가 전화로 문의해왔다. 무엇이 최초의 국산 항공기인가에 대한 답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KTX-1 시제기가 공개되었을 때 한 항공학자가 '진짜 비행기'라며 탄성을 터뜨린 의미를 생각해볼 만하다. 'KT-1 웅비호'가 왜 최초의 국산 항공기인가에 대한 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신라시대 때 김유신 장군이 연을 날려 민심의 동요를 막은 것이 하늘을 군사적․정치적으로 이용한 '최초의 일'이라든가, 조선시대 때 '비차(飛車)'를 제작해 하늘을 난 것이 라이트형제보다 300여년 빨랐다는 사실(史實) 등은 일단 접어두자.
우리 군사사(軍事史)를 살펴보면 의외로 일찍부터 항공전력에 관심을 두고 항공기를 개발하려는 의지를 보여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군은 1951년 7월 해군기술연구소를 통해 'NK-1 통해호(統海號)'를 제작했다. 파손된 T-6기를 수상기로 개조한 것으로, 해군은 기술연구소를 해체하기까지 수상 항공기 5대를 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공군에서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2인승 다목적 경항공기 '부활호'를 제작해냈다. 1952년 11월 공군 기술학교 교관들이 교육훈련용으로 설계에 착수한 이 항공기는 85마력짜리 미국산 엔진(O-190-1)을 장착했으며 길이, 폭, 높이가 각각 6.6m, 12.7m, 2.07m였다. 1953년 시험비행에 성공, 1954년 4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활'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부활호는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 시험평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훗날 세스나 항공사에서 제작한 스카이마스터기가 부활호의 옆모습과 닮은 것으로 보아 개발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총 3대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아 있는 실물은 없다. 다만 1998년 공군81항공정비창에서 실물 크기의 모형을 제작, 공군사관학교에 전시하고 있다.
공군은 또한 1963년 2인승 글라이더를 완성한 데 이어 1968년 4월 M-73 활공기 개발에 착수, 1969년 10월부터 시험비행을 가진 바 있다. 1970년대 들어 공군81창은 국방과학연구소의 사업관리 아래 미국 Pazmany사가 설계한 PL-2기 제작에 들어가 1971년 7월29일 시제기 1대를 선보였다. '새매호'로 이름 붙여진 이 항공기는 1973년 5월까지 총 4대가 생산되어 1976년 9월까지 시험평가를 거친 뒤 공군25전대에 실전배치, 1995년 말까지 운용되었다.
공군 전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항공전력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는 본격적인 노력은 1970년대 F-5 전투기와 500MD헬리콥터를 국내에서 면허조립생산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기술이전 효과는 없었지만 정비력을 향상하고 척박한 국내 항공기 조립생산의 기반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F-5제공호의 면허생산이 완료단계에 들어가면서 생산투자시설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 검토될 무렵인 1970년대 말부터 국과연은 공군의 O-2관측기보다 성능이 한 단계 위인 OV-10기급 정찰 통제기와 육군특전사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30인승급 경수송기의 개발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소요창출이 무산됐다. 국내 항공기 산업생산 기술과 기반이 워낙 척박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솔개'라는 기만용 무인항공기다. 1977년 9월 무인항공기사업을 시작, 78년 말부터 본격화한 국과연은 영국의 기술지도를 받아 80년 말 세부설계를 완성하고, 81년에 최초 시험비행을 가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 소요가 확정되지 않아 1984년 40㎞에 달하는 기본성능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해호․부활호부터 이어진 이같은 노력은 무기 국산화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훗날 KT-1 웅비호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다시 '진짜 비행기' 이야기로 돌아가자. 여기서 진짜란 항공기 설계를 비롯해 시험평가 등 모든 개발과정이 개발 주체 스스로의 힘으로 진행됐는가 하는 점이다.
즉 외국(부)에 기술적으로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항공기가 어떤 운용상의 문제에 봉착하거나 또는 기능향상을 꾀할 때 연구개발진이 이를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 극복할 수 있느냐에서 판가름난다. 부품면에서도 100% 국산일 필요는 없지만, 어느 부품이라도 연구개발진이 의도하는 대로 적시에, 제값으로 항공기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KT-1 웅비호는 당연히 설계부터 실전배치까지 국과연을 비롯한 우리 연구기술진에 의해 수행됨으로써 '진짜'의 조건을 충족한다. 외국의 기술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과연의 개발능력 속으로 모두 소화됐기 때문에 기술적 종속이 없다. 후속사업인 저속통제기(XKO-1)사업에서 보듯 기능 향상 또는 추가에서도 전혀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오히려 역량을 향상시켜 나가고 있다. KT-1 웅비호는 기술력 점검을 위해 일단 '날려본' 수준의 항공기가 아니다. 뚜렷한 개발 목표와 의지로써 척박한 항공산업환경과 기술적 문제를 극복하고 개발, 실전배치까지 한 국내 최초의 항공기인 것이다. 조선일보는 1998년 8월 '건국 후 민간 및 군수 과학기술 업적 50가지'에 KT-1 웅비호를 올려놓았다.
최대속도 200kt가 최초 구상 (2001. 11. 21)
186명. KT-1이 사업 완료되기까지 수많은 연구․기술 인력이 개발 현장을 오고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86명이란 KT-1 개발사업에 3년 이상 노력을 기울인 연구개발진 인원이다. 하지만 이 사업은 출발부터 많은 인력이 투입돼 규모있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격동의 80년대를 맞은 국방과학연구소는 뼈아픈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많은 연구인력이 퇴직하고 기구를 개편한 가운데 기술사업단 기술 분석실 아래 공군사업담당 부서가 83년 신설됐다. 인원은 겨우 4명뿐.
90년대 초까지 KT-1 개발을 위한 사업의 책임을 맡아 지휘한 강위훈 박사와 유일하게 사업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이수용 연구원(50․현 고정익항공기체계 팀장)은 여기에서 실장과 연구원으로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강박사와 이수용 팀장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71년 당시 이수용 팀장은 서울대 항공공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강박사는 이때 서울대에 강사로 출강했고 이팀장은 졸업 때까지 3과목을 강박사에게서 수강했다. 이팀장이 73년 졸업 후 공군장교로 임관, 공군사관학교에서 항공공학을 강의하는 교관이 되자 강박사는 공사의 학과장으로 부임해 왔다.
4년여의 복무를 마친 이팀장은 78년 국과연의 연구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내 손으로 항공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당연한 포부를 가진 공학도에게 있어서 국과연은 최선의 길이었다. 당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고 해봐야 그 진로란 항공사 정비계통이나 자동차회사 설계팀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인 79년 강박사는 공사에서 국과연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서로 다른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인연의 끈은 83년이 되자 마침내 두 사람을 공동의 운명으로 묶어주었다. 국과연 구조조정으로 인해 생겨난 공군사업담당 부서에서 또다시 만나게 된 것. 공군사업담당 부서는 인원이 4명에 불과한 신설 부서. 더욱이 공군으로부터 뚜렷한 개발 요구가 없는 상황이었다. 강박사는 이수용 연구원에게 기초연구과제를 부여했다. 공군의 향후 항공기 소요에 대비해 항공기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며 국내 항공기 개발가능성 판단을 위한 조사연구를 시작하도록 한 것이다.
조사결과, 90년대 초가 되면 장기취역하고 있는 공군의 지원기급 항공기가 구조강도 저하와 부품 수급 등의 이유로 대체 항공기 소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됐다. 따라서 90년대 중반이면 개발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아래, 기술요구도가 낮으며 향후 공군 소요가 예상되는 초등훈련기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83년에는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소요기술을 분석하고 개발대상으로 정한 초등훈련기의 유사기종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항공기 형상설계는 84년부터 시작됐다. 이때 형상모델은 기체의 단순화에 역점을 둔 탓에 그 외형이 직선적이었다. 최대속도를 200kt(약 360㎞)를 목표로 420마력 짜리 엔진을 탑재하는 훈련기 형상이었다.
85년이 되자 국과연은 또 한차례 조직개편을 실시, '항공기체계실'을 구성했다. 연구인력도 보완됐으며, 항공기 개념설계를 분야별로 세분화하는 등 더 구체적인 업무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설계목표 성능에 있어서 최대속력을 250kt로, 장착엔진도 550마력으로 상향조정했다. 또한 항공기 날개는 공기역학적 특징이 우수한 테이퍼(taper)형으로, 동체는 유선형으로 각각 변경했다. 연구진은 86년까지 훈련기 외에 연락기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도록 4인승 항공기를 설계해 나갔다.
국과연이 그동안 유도무기와 무인항공기를 개발하는 가운데 항공역학에 대해 부분적으로 기술과 자료를 축적했다고는 하지만, 유인항공기 전체 시스템에 대한 설계 통합기술과 설비는 전무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연구진의 어려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항공기의 설계기준을 설정하는 자체가 가장 중요한 업무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군사규격과 연방항공법을 참고해 분야별로 적용할 항목과 내용을 설정해 나가도록 했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막연할 때가 있었다. 항공기 개발에 필수적인 풍동 실험실도 없었다. 그나마 인하대에 설비된 실습용 풍동실험실을 빌려 항공기에 미치는 공기의 영향 등을 실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시기까지를 볼 때 국과연이 항공기 개발에 본격 돌입한 것은 아니다. 개념설계 단계였다. 국과연이 최소한 시험용 항공기라도 제작해보는 '탐색개발' 단계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공군으로부터 '개발해 달라'는 소요제기와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내야'만 했다.
해외업체 유혹속 독자개발(2001. 11. 28)
87년에 들어서면서 국방과학연구소는 소요군이 될 공군과 항공기 개발과 관련된 협의를 진행했다. 국과연은 훈련기용 2인승과 훈련 및 연락기용 4인승 항공기, 두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때마침 공군참모총장이 국과연을 방문, 2인승 직렬 좌석형을 주문하는 등 공군이 제기한 개략운용요구에 따라 초등훈련 및 공중통제기 임무를 주목적으로 하는 항공기를 개발키로 결정했다.
이어 세부 개발계획이 작성되고, 국방부로부터도 88년부터 탐색개발을 시작하라는 사업승인이 내려졌다. 다만 국내에서 최초의 항공기 개발 이란 기술적 위험도를 감안, 시제기(KTX-1) 2대를 제작해 시험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국과연은 비로소 모든 하드웨어 개발업무를 본궤도에 올려놓고 새롭게 출발하는 첫 계기를 맞이했다. 사업책임 강위훈 박사, 체계실장 안동만 박사를 비롯한 34명의 KT-1개발사업 1차연도 추진팀은 이때 구성됐다.
국과연이 항공기(초등훈련기) 개발사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해외에 전파되자 개발목표 항공기와 성능이 유사한 항공기를 개발하는 해외업체의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의 T-34, 영국의 쇼트 투카노, 스위스의 PC-9, 핀란드의 L-80TP 등이 대표적인 유사 항공기로서 해당 개발업체에서는 기존 항공기를 우리의 요구조건에 맞게 수정, 공동개발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 제안들은 일축됐다. 국내 항공기 독자개발을 통한 개발기술 축적이라는 대명제에 부합할 수 없었다. 공동개발에 소요될 비용도 계획된 예산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국과연은 독자적 추진을 원칙으로 하고 부족한 기술분야는 기술습득을 통해 개발키로 방향을 정했다. 80년대 초 무인항공기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인연을 맺은 영국의 항공기 관련 전문대학인 크랜필드 기술연구소(CIT), 기술자문에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힌 스위스의 필라투스 항공사와 기술자문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88년부터 90년까지 연간 10일간씩 독자적으로 설계한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며 부족한 부분을 메워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필라투스의 기술자문 이면에는 목적이 따로 있었다. 필라투스는 국과연에 자사의 PC-9을 골격으로 공동개발하자는 제안을 계속 해왔다. 즉 항공기의 핵심인 주날개는 PC-9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 동체와 각종 시스템은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주날개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동체 형상과 꼬리날개 부분의 형상이 결과적으로 PC-9과 흡사할 수밖에 없다. 독자적 모델 개발이라는 의미가 상실되는 것이다. 이후 필라투스와의 협력 관계는 단절됐다.
어려움은 가중되었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설계외형에 대한 공력 특성을 파악할 아음속의 대형 아음속풍동시험 시설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때 군용기사업과 연동된 절충교역사업에 반영, 록히드 항공사의 대형 아음속풍동시설을 3차례 활용할 수 있었다. 또 훈련기에서 필수적인 스핀기동(항공기가 비행 중 횡으로 회전하는 것)에 대한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직풍동시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또한 국내에는 없는 시설로 프랑스의 국립 항공우주연구소(IMFL)의 것을 이용했다.
1차 시험 때였다. 항공기 실제 크기의 25%짜리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미국으로 운송했다. 풍동의 풍속을 높이자 모형 외부에 장착한 일부 부품들이 떨어져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의 설비에 부러움이 가득했던 얼굴은 이제 부끄러움으로 벌개졌다. 결국 현장에서 부품을 재가공해 시험을 계속 진행했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는데, 록히드사의 풍동 시험 일정이 꽉 짜여져 있던 탓에 일정을 늘릴 수도 없었다. 해법은 강행군뿐이었다. 파견된 4명의 연구원은 24시간 2교대로 돌아가며 시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느라 녹초가 되곤 했다.
톱으로 동체잘라 모형 완성(2001. 12. 5)
"비행기를 톱으로 자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세상에 그런 경우가 어디 있나?" 체계실장 안동만 박사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항공기 조립을 지휘, 감독할 신경수(申京秀․47)박사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91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업본부장 강위훈 박사는 비상체제 돌입을 선언했다. 연내에 시험비행을 가져야 했기 때문. 가장 먼저 할 일은 001호기로 명명된 모크업(Mock-up) 제작이었으며 이후 시스템별 지상시험, 최종조립, 지상시험 등의 과정을 거쳐 첫 비행을 실시해야 한다. 시간적으로도 빠듯했다.
실물 크기의 모형인 모크업은 항공기의 각 부품이 위치해야 할 곳을 최종 점검하면서 부품간 간섭(주로 부품간 마찰) 여부와 탑재 시스템의 기능 확인 등 시제기 제작시 발생할 문제점을 사전에 발견, 보완하기 위해 제작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첫 작업이 되는 모크업 제작에서 삐걱였다. 협력업체에서 제작하여 보내온 부품들의 규격이 최종 설계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세계의 유수한 항공기 제작사에서도 모크업 제작과정에서 부품의 오차가 발생하지만, KTX-1 모크업의 경우는 그 오차가 너무 컸다.
무엇보다 동체를 내부에서 지지해 주는 프레임(틀)이 설계자가 지정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프레임은 동체의 외형을 유지해 주는 역할 외에 부품을 장착하는 역할도 하는데, 설계상의 위치와 맞지 않으면 조립시 부품을 허공에 위치시킨다는 것, 즉 조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사전에 모두 확인 가능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묘책이라기보다는 억지에 가까웠는데, 톱으로 동체 중간을 한 도막 잘라낸 뒤, 이를 다시 붙여 프레임의 위치를 설계도면에 맞추는 길 외에 방안이 없었습니다."(신경수 박사)
1월의 추위는 대단해 공작실을 한기로 가득 채웠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 시작한 조립은 4월이 되어서야 동체 등 구조물을 비롯해 추진계통․비행조종계통․착륙 장치․전기계통을 위주로 완료했다. 예상보다 많은 부품간 간섭이 발생했다. 부품의 정밀도 또한 떨어지는 편이었다. 조종간을 작동해본 결과 조종실에서 조종면까지 연결부위의 공차(부품 크기의 허용치)가 누적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크업을 제작하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사전에 문제를 파악, 보완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캐노피 조류충돌시험을 비롯해, 비행조종계통의 작동기능․유격, 마찰력․강성 등을 확인하는 아이언 버드시험, 엔진의 요구출력․제어시스템 기능을 점검하는 추진계통시험 등 항공기에 탑재될 시스템에 대한 지상 성능시험에 날로 박차를 가해 나가는 동안 협력업체에서 부품도 납품되기 시작했다. 본래 계획은 총조립 3개월, 조립 후 지상시험 3개월로 잡혀 있었으나 4개월 이내로 완료할 것이 지시됐다.
시험제작 01호기에 대한 총조립은 대우중공업에서 실시됐다. 가장 먼저 납품돼야 할 부분은 중후방 동체. 대한항공은 촉박한 납품기일(6월30일)을 맞추느라 1일 3교대 근무를 한 끝에 이 동체를 7월1일 새벽에 조립장에 인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품들이 필요한 시기에 원활히 공급된 것은 아니었다.
신박사는 조립에 필요한 치구, 조립순서 및 공정, 인원 등을 사전에 면밀히 준비해 놓았다. 하지만 부품 납품이 늦어지는 데다 조립시 부품 상호간 간섭 때문에 일정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이미 장착된 부품들을 떼어낸 후 다시 장착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철야작업도 연일 계속됐다.
부품을 장착할 때는 계통별 담당 연구진이 반드시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한다.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장비가 없는 형편에서 조립시 발생하는 부품간 간섭의 문제 등은 설계자의 능력에 의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부품을 장착할 때 신박사의 연락을 받으면 해당 설계자 등은 즉시 대전에서 현장으로 내려가야 했다. 단 한번에 작업을 마친 팀은 없었다. 신박사의 빈번한 호출, 그것은 연구진에게 곧 "으악~ 또야"하는 비명이었다.
특히 조종계통, 조향장치, 착륙장치 등과 같이 비행 중 구동되는 구성품들의 정확한 위치를 잡는 것도 어려웠지만, 장착 후 기능확인시 유격이 심해 수정하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다 처음이다 보니 오류 아닌 오류가 적지 않았어요. 가장 아쉬웠던 점은 동체를 총조립업체인 대우에서 맡아 제작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구성품 장착이 동체에 집중돼 있고 수정사항도 가장 많이 발생했던 까닭입니다. 좀더 능률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일단 01호기의 조립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시험은 더욱 본격화됐고 보완사항은 쏟아져 나왔다.
반복되는 오류속 기술력 축적(2001. 12. 12)
주날개를 설계한 고준수 박사는 지금 미끈한 자태로 창공을 누비는 KT-1 웅비를 보면 스스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99년 7월 KT-1의 양산이 승인되기까지 거친 수많은 시험 속에 시제기들은 보완에 보완을 거듭하면서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고박사가 전 제작과정을 통해 얻은 교훈은 "누더기로 보일지언정 뜯어고치기를 두려워 말자"는 것이었다.
KTX-1의 시제 01호기의 조립을 완료한 개발진은 지상시험에 돌입했다. 헬기 이착륙장에서 01호기를 밧줄로 고정한 상태로 시동을 거는 엔진시험이 스타트를 끊었다. 비행시험 계측용 센서와의 간섭에 의해 계기지시가 불안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추력이 증가하면서 프로펠러에서 발생하는 후류 영향으로 날개 한 쪽의 바퀴다리 길이가 증가되어 항공기 자세가 불안정한 현상, 제동장치의 제동 장치가 계속 남는 현상, 비행조종장치의 유격이 심해 마찰력이 과도해지는 현상 등등 보완사항이 쏟아져 나왔다.
시험이 계속되면서 연구진 역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집중력은 오히려 점차 높아졌다. 몸으로 직접 시험해야 하는 예도 많았다. 항공기 소음측정시험에서는 당시 온용섭 공군소령이 프로펠러에서 발생하는 후류를 견뎌내기 위해 몸에 밧줄을 매고 측정을 하기도 했다.
이준우 연구원이 지상시험 중 항공기 최소 선회반경을 측정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그는 항공기 주날개 뒤에 위치, 몸을 숙인 채 항공기 바퀴를 따라 백묵으로 선을 그어 나갔다. 백묵은 콘크리트 바닥에서 너무 쉽게 닳았다. 이 연구원은 옆에서 연신 백묵을 건네 받으며 선을 그어 나갔지만 이내 X표로 바꿔 표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는 백묵이 다 닳은지도 모르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X표를 그으며 바퀴를 따라가고 있지 않은가.
"프로펠러 뒤로 발생하는 바람으로 인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아 있는 거예요. 굳이 뒤를 따라가며 선을 그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이런 우습고 어리숙한 일도 생겨났지만 그 속에서 또한 '노하우'도 쌓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렇듯 혼신의 힘을 다해 설계, 제작, 지상시험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설계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사항과 비행의 안전성을 재삼 확인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비행안전 검토팀에 의한 검증이 필요했다. 이는 또한 항공기 개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과정. 검토팀으로 유사급 항공기 해외 개발업체 요원, 시험비행 조종사 교육기관 요원 등을 초빙하는 방안 가운데 국과연은 미국 공군의 초도비행 안전점검 경험 요원들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이들과 미국 해외군사물자판매(FMS) 방식을 통해 계약을 맺었다.
비행역학, 구조, 추진계통, 비행계측, 보기계통 등을 담당할 10명으로 구성된 이들 검토팀은 91년 9월 내한, 2주간에 걸쳐 KTX-1 01호기의 설계내용을 집중 검토해 추가적인 시험방법을 추천했다. 또한 초도비행시 비행 시나리오에 따른 비행계획과 수행절차, 비행경로 해석, 비상 절차, 안전성 분석 등 비행관련 분야와 함께 각종 구성품 간의 간섭과 구조물 보강 등을 지적해 주었다.
기간 중 몸집이 가장 커 마치 '곰'을 연상케 했던 빌 존슨이 항공기에 직접 탑승,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내리밟아 버려 페달을 지지하던 구조물이 파손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지만 이렇게 11월 중에 수정 및 보완사항을 마무리, 초도비행 시험준비가 완결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제 01호기를 창원공장에서 시험비행 할 공군 3훈련비행단으로 옮겨야 했다. 헬기를 이용해 공중으로 이동하는 것은 안전성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12월 3일 주날개, 동체, 꼬리날개 부분을 분리해 트레일러에 실어 나르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운송시 항공기가 받을 진동의 영향과 도로 상의 터널 등 장애물에 관한 것이었다.
"과속방지턱을 비롯해 도로 사정을 아주 세세하게 파악했습니다. 무엇보다 터널 등의 도로화물 제한높이가 4.25m 라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럽고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꼬리날개 부분을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니 거의 그 높이였습니다."(신경수 박사)
특히 트레일러가 시속 40㎞를 넘게 달리지 않도록 했는데, 뒤이은 일반차량이 계속 밀리자 교통경찰이 달려와 "빨리 좀 달려 달라"고 채근할 정도였다. 일반 속도면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조심조심 운송하느라 4시간이 더 걸렸다.
3훈비에 도착하자마자 연구진은 항공기를 재조립, 11일로 예정된 초도시험 비행에 대비해 10일 고속활주시험을 2차례 실시했다. 초도비행시 항공기 이륙 속도와 이륙 자세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항공기의 모든 것은 정상. 모두의 기대 속에 11일의 날은 밝았으나 바람이 심해 하루 순연 되었다. 그 동안에 관계자 모두는 초조함과 긴장에 시달렸다. 다만 서로를 위로하면서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마침내 12월 12일 오전 10시 KTX-1 01호기는 멋지게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환호와 감격. 첫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그 역사적인 날이 바로 10년전 오늘이었다.
2호기 마침내 창공에(2001. 12. 19)
12월12일(1991년) 시제 01호기가 초도비행에 성공한지 일주일 뒤인 12월19일 연구‧기술진은 2차 시험비행을 가졌다. 이번에는 초도비행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착륙장치를 올린 상태에서 75분간 비행을 수행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혹시 망치하고 톱만 가지고 번듯한 집 한 채 지어본 분이라면 그때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당시 그들은 그 기쁨을 오래 향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크게 자랑할 만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시험과제 앞에서 그같은 생각은 사치한 것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앨범에 사진 끼워 놓듯 마음 한 편으로 밀쳐놓았다.
혹 일반 사기업에서라면 이같이 시험비행에 성공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도 마치 항공기 개발을 완료한 듯이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무기체계 개발이라는 전체 과정에서 보면, 시험비행 성공이란 '탐색개발단계', 즉 국과연이 항공기를 개발할 기술적 타당성을 검증해 보이는 단계, 그것도 겨우 한 과정을 거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진이 가야 할 길은 멀고 불확실했다. 연구개발 환경도 여전히 좋은 편은 못되었다. 국내에서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기반시설이 워낙 없었던만큼 각종 시설과 장비도 적기에 구비해야 했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속에서 연구진을 위한 등불은 오직 그들만의 개발의지뿐이었다.
당시의 현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연구진은 우선 항공기를 넣어둘 격납고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공군의 협조로 시험장이 될 3훈련비행단에 약 100평의 토지를 대여받아 시험 요원들의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01호기는 비행단의 격납고를 이용토록 배려되었고, 시험비행 자료계측과 분석을 위한 장비는 일반 버스를 개조해 탑재했다.
항공기 4대를 주기시킬 수 있고, 연구원들이 일할 수 있는 사무실을 갖춘 국과연의 건물이 완공된 것은 94년 2월인데,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과 같은 벅찬 느낌이었다"라는 한 연구원의 술회는 한번 음미해볼 만한 것이다.
비행시험에 필수적인 계측장비, 시험장비, 분석장비 등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물론 비행중인 항공기의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를 실시간으로 지상에서 수신, 측정해야 하는 계측 장비는 국내에서는 구입할 수도 없었다. 계측장비를 공급하려는 외국의 업체는 계측장비를 일괄적으로 구입하는 것이 실패를 낳지 않는 최선의 길이라고 조언해 왔지만 국과연의 예산형편은 그들의 요구액에 맞출 수 없었다.
연구진은 계측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구성하려다 실패한 사례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서 또한번 독자적 기술로 계측장비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계측장비를 운용해본 경험이 당연히 없었던 터에 운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혼선도 혼선이지만 항공기의 UHF 통신과의 전자파 간섭 때문에 자료계측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밤샘이 묘약은 아닐지라도, 관련 요원들이 하루하루 밤샘을 할 때마다 문제는 다행히 하나씩 풀려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실시간으로 실험비행 자료를 획득하는 데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계측장비 구성에 소요될 엄청난 예산의 절감을 가져왔으며 초기에 기대하지 않았던 노하우를 축적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시제 01호기의 비행시험 중 발생한 여러 가지 수정사항을 보완하고, 지원하는 일에 인력을 집중하다 보니 시제 02호기는 제작과 출고가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다. 02호기는 그 외형이 01호기와 동일하지만 01호기에서 나타난 불만족 사항을 최대한 보완했다.
전방동체 상부의 점검창을 항공기 외형과 맞추기 위해 복합재를 적용하고, 조종사 탑승이 용이하도록 탑승계단을 추가했다. 또한 정비의 편리를 위해 점검창을 추가하고, 일부 부품을 수정, 조종계통을 강화했다. 특히 스핀시험을 위한 비상슈트를 후방동체에 장착 가능하도록 했다. 02호기는 93년 2월5일에서야 초도비행을 했다.
연구진은 시험기간을 단축하고 항공기 내부배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호기별로 비행시험 과목을 달리하도록 준비했다.
즉 01호기는 비행성능, 비행 안정성 및 조종성, 플러터 시험을 주로 하며 02호기는 실속 및 스핀, 기동비행, 계기비행, 구조 하중개관, 엔진 흡입구 압력 분포 측정 시험에 주안을 두어 테스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목숨을 건 플러터-스핀시험 성공(2001. 12. 27)
비행시험은 공기역학과 관련한 비행성능과 조종안정성, 실속 및 스핀시험, 구조의 건전성을 확인하는 구조하중 개관시험, 비행속도 영역을 확장하는 플러터시험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가운데 가장 위험성이 크고 사고사례가 보고되는 분야가 플러터시험과 스핀시험이다.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순간적인 힘을 가했을 때 각각 일정하게 진동하는 고유의 진동수를 가진다. 그런데 외부에서 계속해서 고유 진동수와 같은 주기로 반복해 힘을 가하면 진동 진폭이 커져 마침내 물체가 파손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항공기에서는 이 현상을 '플러터(Flutter)'라고 부른다. 항공기가 비행 중 속도가 어느 값에 도달하면 공기의 힘에 의해 진동이 발생하고 이때 진동폭이 끝없이 커지기만 하면 항공기는 그대로 파괴되고 만다.
연구진은 01호기를 통해 플러터시험을 실시했다. 주날개 끝에 회전모터를 이용한 진동 가진기를 장착했다. 가진기 속에 공기를 두줄기로 흐르게 하면서, 이것으로 날개에 진동을 인위적으로 가하는 것이다.
이 시험은 지상에서 사전에 실험을 거치지만 한 두차례의 비행시험으로 끝낼 수 없다. 비행 중 어느 한 속도에서 안전한 것으로 판단되면 속도를 올려 다시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등 항공기가 엔진의 힘과 동체의 형상에 의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까지 속도에 따라 계속해야 하는 시험이다.
특히 진동가진기의 주파수를 변경할 때 조종사는 이 주파수와 항공기 탑재물의 고유 진동수가 일치하는 순간을 몸으로 느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겪어야 한다. 01호기를 통한 이 시험은 기예호 공군대령(당시 중령)이 수행했으며, 시험은 물론 성공적이었다.
항공기가 공중에서 비행하기 위해서는 '양력'이라는 항공기 무게보다 큰 부양 공기력을 가져야 한다. 항공기의 속도를 서서히 감소시키면 양력이 감소하면서 항공기가 중량을 이기지 못하는 속도에 이른다. 이때 항공기의 기수가 한쪽 방향으로 기울면 마치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 항공기가 나사 모양의 와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을 항공기의 스핀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스핀운동은 실속에서뿐만 아니라 비행 중에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 비행훈련과정에서는 조종사들이 스핀 특성을 사전에 이해하고 대처 가능한 능력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훈련기는 의도적으로 항공기를 스핀상태에 이를 수 있게 해야 하고 훈련조종사가 정상 비행상태로 회복시키지 못할 때에 대비, 조종사가 조종간을 놓았을 때 저절로 회복될 수 있는 매우 우수한 스핀 특성을 가져야 한다.
연구진은 스핀 특성과 관련해 이론적인 해석, 수직 풍동시험, 무인조종시험을 통해 안전한 스핀 진입과 함께 정상 비행상태로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01호기의 초도비행 성공 후 이 분야 시험을 위해 박차를 가해 나갔다.
비행 중 스핀을 위한 첫 시험은 1994년 4월이 되어서야 이뤄졌는데, 연구진은 이에 앞서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외국의 실패 사례에 비춰 스핀 진입 후 회복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해 항공기 후미에 비상회복용 스핀 슈트(낙하산)를 장착해 안전성을 높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항공기가 안정상태가 되면, 이때 항공기와 슈트의 연결 부위에 폭약을 설치해 연결부를 풀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연구진은 비행 중 스핀시험을 갖기 전 이 슈트를 안전하게 떼어내는 시험부터 실시해야 했다.
연구진은 70년대말 무인기 시험 중 회수용 낙하산을 제작했던 경험을 되살리고, F-5전투기 착륙시 쓰이는 패러슈트의 분리 메커니즘을 참고해 낙하산 기구물을 설계, 제작했다. 1차로 자동차에 낙하산을 장착, 슈트가 분리되는가를 확인하고 이어 실제 항공기에 장착해 분리하는 시험을 고속도로 비상 이․착륙장에서 수차례 가짐으로써 지상에서의 작동 신뢰성을 높였다.
이때 공중에서의 최종시험을 앞두고 공중에서 행여 분리가 안 돼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의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실제 스핀시험을 수행할 시험비행조종사 조기만 소령(작고)이 "해보자"는 의견을 내놓음에 따라 시험케 됐다. 4월의 남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쾌청해 시계가 매우 좋았다. 슈트 분리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연구진은 초도비행 때 못지않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조소령이 몸을 실은 02호기는 육안으로 안 보이는 고도까지 올라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상통제실은 슈트 전개를 지시했고, 이어 조소령으로부터 슈트가 펼쳐진다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항공기의 속도가 급강하하자 슈트 분리 지시가 내려졌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초나 지났을까. 슈트가 안전하게 분리되고 항공기 자세가 원상태로 돌아왔다는 조소령의 육성이 다시 들려오자 통제실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지극히 짧은 시간, 그러나 숨이 멎을 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후 스핀시험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05호기에 이르기까지 150회 가량 스핀시험이 실시됐다. 그 결과 KT-1은 스핀에 들어가 한바퀴 반을 회전한 후 원상태를 다시 찾는 우수한 성능을 갖게 됐다. 특히 세계 동급의 훈련기 가운데 배면스핀, 즉 항공기가 뒤집어진 상태로 비행 중 스핀에 들어간 후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종으로서 세계 항공기 관계자들로부터 격찬을 받고 있다.
3호기 '여명'으로 명명(2003. 1. 3)
"드래건 플라이(Dragonfly)? 좋은데!"
국방과학연구소는 무기체계 개발 때마다 연구원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의 참여의식과 자부심을 제고하기 위해 모델명 외에 무기체계에 붙는 이름을 공모해 명명하곤 한다.
최근의 자주대공미사일 '천마', 자주대공포 '비호', 그리고 곧 양산단계에 들어갈 무인정찰기 '비조(飛鳥)' 등이 모두 직원들이 지은 이름이다.
KTX-1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92년 전 직원의 관심 속에 항공기체계실 주관으로 공모가 이루어졌다. 응모를 마친 뒤 서로가 제시한 이름이 점심식사 중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드래건플라이가 나왔다. 괜찮은 이름이라며 "가능성 있네"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그건 안되지"란 말에 시선이 집중됐다.
"드래건플라이는 우리 귀에 듣기에 괜찮지. 그거 잠자리 아냐, 잠자리!"
드래건플라이는 당연히 심사에서 낙선됐는데, 미 공군이 베트남전 당시 T-37기를 정찰과 공격지원기로 개조, 운용한 OA-37기의 이름이 다름아닌 '드래건플라이'였다. 참고로 T-37기의 또 다른 이름은 '새의 지저귐(Tweet)'인데 이름과는 달리 실제 지상에서 활주할 때 나는 소음은 무척 심하고 거칠다.
심사 결과 심재권씨가 제안한 '여명'(黎明)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태양이 밤새 지배했던 어둠을 살라먹고 신새벽을 밝히는 빛이 여명으로 그것은 곧 희망의 빛, 우리 공군력, 나아가 항공력의 미래를 여는 빛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두가 공감하는 가운데 공교롭게도 국과연보다 조금 늦게 공군이 전 장병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모에서도 '여명'이 당선됐다. 그러나 여명은 그리 오래 쓰이지 못했다. 3년 뒤 김영삼 전대통령이 '기운차게 날아 오르라'는 뜻의 `웅비'라는 이름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KTX-1사업은 1992년 12월 국과연의 기술역량을 확인하는 탐색개발 단계를 마무리짓고, 소요군이 요구하는 성능에 맞춰 개발하는 선행개발 단계에 접어들었다.
공군은 수평 최대속도를 230노트에서 250노트 이상으로, 항공기 상승률을 분당 2000피트에서 3000피트로 상향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01호기와 02호기에 탑재된 550마력 엔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더 높은 출력의 엔진이 필요했다.
연구진은 기존 550마력짜리 엔진을 생산하는 회사의 750마력급 엔진을 쓰기로 공군과 협의했다. 750마력이면 훈련기용 엔진으로 충분할 뿐 아니라 엔진 크기가 같기 때문에 시제기의 형상을 변형하지 않고도 선행개발 시험을 수행할 03호기를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즈음 공군은 수명이 다해가는 훈련지원기를 대체할 항공기 20대를 도입해줄 것을 긴급히 요청했다. 훈련지원기는 KTX-1사업과 연계된 것으로 KTX-1의 개발 성공이 아직 보장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전력을 유지해야 할 공군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
여기서 03호기에 탑재할 엔진을 몇 마력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야기됐다.
공군이 도입해주길 원하는 항공기 운용 요구조건에 부합하는 항공기는 스위스 필라투스사의 'PC-9'와 영국 쇼트사의 '쇼트 투카노'. 모두 1000마력급이었다.
이 때문에 차후 군수지원 차원에서의 호환성을 위해 KTX-1 03호기에 탑재할 엔진도 1000마력급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1000마력급, 이는 750마력급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만한 것이었다.
'1000마력급' 외국 항공사의 판촉 활동은 치열했다. 그들은 KTX-1사업이 실패할 경우를 노리고 있었다. 03호기의 엔진이 1000마력급으로 결정될 경우 KTX-1사업의 위험도는 그만큼 높아진다. 때문에 이 문제는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자연히 03호기 개발일정도 지연됐다.
훈련지원기 획득사업도 순조(?)롭지 않았다. 공군과 국방부, 국과연 관계자들로 구성된 훈련지원기 평가팀은 필라투스 등 두 회사를 방문해 평가했지만 기관간의 평가결과가 일치되지 않았다. 여기에 KTX-1 개발사업이 진행 중이고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결국 훈련지원기 획득사업은 유보됐다.
그러나 엔진만큼은 1000마력급으로 해야 한다는 국방부의 최종 결론이 1993년 11월에 내려졌고 연구진은 550마력 엔진을 생산하는 회사의 950마력 엔진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파장이 엄청나게 컸다. 우선 엔진의 크기가 550마력급과 달라 항공기 동체를 재설계하고 내부 탑재물 배열을 전면적으로 변경해야 했다.
계획보다 늦어진 일정을 만회하기 위한 철야작업 역시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것은 '1000 마력급'이 일으킨 파장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03호기 안정성 '위기'(2002. 1. 9)
1000마력급 엔진 탑재가 결정되자 KTX-1의 세번째 시제기인 03호기의 전면적인 설계변경이 불가피해졌다. 연구진은 우선 크기가 커진 엔진과 냉방장치 추가에 따라 02호기보다 전방동체를 49㎝ 늘리고 후방동체를 10㎝ 하향 이동시키기로 했다. 항력감소를 위해 외형을 최대한 유선형화하는 등으로 재설계해 나갔다. 내부 탑재물의 배열도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1994년 5월말, 가뜩이나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에 연구진이 정말 '열 받는' 일이 생겼다. 일본의 유력한 항공전문잡지인 '항공정보'가 KTX-1 개발사업을 '비관적'이라기보다 '얕잡아 보듯' 보도(94년 6월호)한 것이었다.
이 잡지는 편집장 하나도카의 사회로 항공기 설계자 다케이와 항공평론가 후타가 참석, 좌담회 형식으로 '세계 항공기의 최신뉴스'를 전하는 가운데 우리 항공산업의 전망과 과제를 다루었다.
다케이는 먼저 대한항공이 개발해 초도비행한 바 있는 경비행기 '창공'에 대해 "누가 만들더라도 날기는 날지만…" "열심히 만든 것은 알 수 있는 정도"로 평가했다. 이어 KTX-1의 1000마력급 엔진 탑재와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000마력급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의 안정성, 조종성이 한꺼번에 양호하게 될 수 있다면 일본인 항공학자 호리코시씨가 울어버리게요? 비록 훈련기라 하더라도 장착된 장비의 중량을 보면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전투기보다 빼어납니다."(다케이)
"PC-9 등과 같은 빼어난 훈련기와 비교하면 데이터는 같게 할 수 있어도 '조종성' 등의 차이는 생길 거예요."(후지타)
"일본의 항공기 산업에서라면 '만들었어? 참 수고 많았어'라고 하겠지요. (한국공군이 채택한다 해도) 항공공업과 애국심의 양성을 위해서지요. 어떤 레벨까지 가지 않으면 연습이 되지 않아요. 조종사에 대한 기대가 빗나가고 맙니다."(다케이)
모형비행기든 종이비행기든 한번 날려보자. 힘껏 날린다고 멀리 날아가지는 않는다. 힘만 가한 비행기는 공중으로 치솟는 듯하다가 곧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이같은 현상은 항공기의 안정성(안전성이 아닌)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항공기는 성능 못지 않게 안정성과 기동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안정성과 기동성은 그 성질이 서로 상반된다. 안정성을 강조하면 기동성이 나빠지고, 기동성이 뛰어나면 안정성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항공기는 성능 못지 않게 안정된 상태에서 조종사가 의도하는 대로 쉽게 기동비행할 수 있도록 기동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다케이의 지적은 항공기를 날 수 있게 만들긴 만들되, 이렇듯 탁월한 기동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한국의 기술로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분개할 내용이지만 그렇게 밖에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 우리나라 항공과학기술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실제로 1000마력급 엔진 결정은 당시 연구진에 있어 하나의 갈림길이요, 최대 위기상황이었다. 우리 손으로 항공기를 개발하겠다는 의지는 날이 갈수록 불타올랐지만 현실은 연구진을 심각한 국면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포기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다.
비유하자면 개발사업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 'KTX-1호'는 1000마력급 엔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직면한 격이었다. 선장을 비롯한 승조원이 안정성과 기동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선박은 침몰하고 만다.
일본인들이 내다보듯 KTX-1호는 침몰할지도 모른다. 침몰하는 선박의 경우 그 안에 살던 쥐들은 재빨리 선박에서 탈출한다. 선택의 길은 두 가지. 침몰할지언정 선박이 직면한 문제를 끝까지 풀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선박을 포기하고 탈출할 것인가.
연구진은 03호기의 동체가 입고되기 시작한 1995년 3월말부터 대우중공업에서 총조립에 돌입했다. 계획보다 늦어진 일정을 만회하기 위해 100일작전을 수립, 휴일도 없이 철야작업을 계속했다. 철야 작업조에게는 '조용한 밤시간에 차분히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등 강행군을 벌였다.
03호기의 총조립과 지상 통합시험, 도장작업을 모두 완료하고 롤아웃(Rollout)행사를 가진 것은 계획보다 한달여 늦은 95년 7월말. 이 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서 갖는 사명감, 그리고 결코 늦출 수 없는 긴장감이 아니라면 저 만큼 물러나고 싶은 심정들이었다.
1998년 8월10일, 찜통의 여름 날씨에 03호기의 초비행이 수행됐다. 시험비행 조종사는 우리 공군의 조종사가 아닌 미국의 숀 로버트였다. 03호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그런데 연구진은 놀라움에 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03호기의 비행이 부드럽지 못했다. 비행중 튀어오르곤 하는 모습이 마치 말타기와 같았다.
탐색개발용 시제기인 01, 02호기보다 증가된 엔진 마력, 즉 1000마력급 엔진의 힘이 미치는 추력의 실제 효과가 설계 예상치보다 크게 나타난 것이다. 한마디로 항공기의 안정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숀 로버트는 보고서에 그렇게 썼다. 03호기는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세계 최대의 무기산업체인 록히드마틴에는 '스컹크 워크스'라는 태스크포스 성격의 특별팀이 있다. 새로운 항공기 개발 중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단기간 내에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가동되는 팀이다. 이들은 특수정찰기 SR-71 블랙버드와 F-117 스텔스폭격기 개발당시 투입돼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국방과학연구소 KTX-1 개발 연구진에도 스컹크 워크스와 같은 특별팀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03호기의 초비행 결과 나타난 '안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03호기가 가진 안정성의 문제, 즉 횡방향 안정성의 부족, 종방향 안정성의 여유부족, 실속 및 스핀특성의 불량 등은 03호기의 외형을 대폭적으로 수정 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1995년 8월 말 이대열 공군중령(현재 대령․고정익항공기체계팀장)을 팀장으로 한 20명의 특별대책설계팀은 짐을 싸들고 제작현장인 창원 대우중공업으로 내려갔다.
언제까지라고 못박을 수는 없었지만 '최단시간' 내에 03호기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대부분 4개월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이들의 '정규'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24시까지. 여기에 연장근무가 없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불철주야.
03호기를 정밀분석한 특별팀의 우선적 조치는 주익의 상반각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수평미익의 면적을 넓혀 종․횡 두 방향 모두의 안정성이 만족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마침 조립이 진행 중이던 04호기를 이용키로 했다.
주익의 설계를 맡았던 전승문 박사는 주익의 각도를 4도에서 6도로 증가시키기로 결정했다. KTX-1은 본래 01호기 때부터 주익이 한 개로서 동체 아래에 위치해 있다. T-37기의 경우 주익이 2개로서 동체 양 옆에 갖다붙인 형태지만 KTX-1의 경우 날개가 일체형으로서 운용 중 연결부위의 이탈 현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체피로현상도 적고 정비 또한 용이한 장점이 있다.
"모크업 제작 때는 톱으로 기체를 잘랐는데, 이제는 '배'를 갈라야 했어요." 배를 가른다? 주익이 동체 밑부분에 위치해 있으므로 당연히 동체는 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날개의 한 가운데를 자르고 이를 꺾어 올려붙였다. 정말 물고기의 배를 가르고 수술이라도 한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연구진은 이어 전방동체 길이를 줄이고, 수평미익과 수직미익의 크기와 위치를 변경시켰다. 실속 이후 급격히 양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주익의 모양도 역시 조금 바꾸었다. 시험비행은 이어졌고, 그 결과에 따라 항공기의 외형도 미세하나마 조금씩 달라져야 했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항공기가 변형될 때마다 03A호기, 03B호기, 03C호기 등으로 이름을 붙여나갔다.
2개월! 특별대책설계팀은 03호기의 문제를 웬만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연구진은 눈빛만 살고 몸은 쇠약해졌다. 특히 전승문 박사는 간을 상해 한동안 병원을 오가야 했다. 이는 당시 03호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선행개발을 완료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 '기술'보다 '시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후에도 03호기와 04호기를 통해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설계변경과 성능향상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공군이 요구하는 작전성능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단계를 통과해야만 실전 배치할 수 있는 항공기로 규격화하는 '실용개발'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996년 5월부터 9월까지 실시된 공군의 시험평가는 KTX-1 개발사업의 존속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 평가의 항목은 모두 155개로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었으며, 평가는 '엄격' 그 자체였다. 보고서는 60페이지의 분량. 각 항목에 '충족' '미충족' '조건부' 등이 뒤섞여 있었다. 속시원한 결과는 아니었다. 공군의 승인 여부에 대해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다. 불합격이라면 KTX-1개발사업은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당시 공군전투발전단장을 역임하신 현재의 참모차장님(이한호 중장)께서 많은 고민 끝에 '합격'이라는 큰 결심을 내려주셨습니다.
항공기가 갖춰야 할 주요 성능을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의 다소 불만족스러운 것은 실용개발단계에서 보완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였습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환성보다 오히려 의자에 주저앉아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너무도 고맙고, 또 그만큼 힘겨운 고비였습니다."(이대열 대령)
주요행사 때마다 '不運'(2002. 1. 23)
KTX-1사업은 2000년 11월 양산 1호기를 출고, 실전 배치하기까지 크고 작은 사고가 없을 수 없었다. 특히 01호기의 추락사고 등은 '대형'급에 속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묘한 것은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발생,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같은 유형의 사고로 먼저 93년 발생한 사례를 들 수 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그해 10월1일 건군 45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기념행사장인 계룡대에 KTX-1기를 전시하게 됐다. 9월16일 공군3훈련비행단에서 01호기를 분해, 차량에 실어 계룡대까지 안전하게 운송했다. 다음날 동체와 날개를 재조립키로 하고 옥외에 보관했으나 공교롭게도 새벽에 심한 돌풍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이 때문에 항공기 받침대가 기울면서 동체와 날개부위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관계자들은 기념일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손상된 부위가 보이지 않게 수리하고 도장작업으로 행사를 치렀다. 그 후 손상된 동체 하부는 새로 제작, 교체됐다.
03호기가 조립 완료돼 공개행사를 가질 때도 '조그마한' 일이 터졌다. 95년 7월 말 도장작업도 끝내고, 마지막 점검을 위해 항공기 캐노피를 여는 순간 무엇이 탄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운 여름날, 엔진시험을 위한 배터리가 제거되지 않은 채 도장작업을 한 결과 실내의 고온으로 전선 40여 가닥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공개행사를 불과 이틀 앞두고 있었다. 최창수 실장 등 전기담당 요원들이 하룻밤을 꼬박 새워 보수함으로써 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이 두 사례는 지상에서 발생, '당혹'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비행 중 일어난 01호기의 추락사고, 03호기 캐노피 이탈 사고 등은 인명은 물론 KTX-1개발사업에 영향을 줄만큼 큰 사고였다.
01호기의 추락사고는 KTX-1기에 대한 대통령 명명식이 열리기 3일 전인 1995년 11월22일 오후 2시께 발생했다. 행사의 일환으로 이 날 시범비행연습 중이던 01호기가 배면비행상태에서 갑자기 조그마한 물체가 분리되고 이어 급강하, 추락하고 말았다.
분리된 물체란 전‧후방 조종사 2명. 전방조종사는 전혀 의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좌석이 튕겨져 나갔고, 후방조종사는 비상상황임을 인식해 좌석의 사출장치를 조작해 탈출한 것이었다. 정밀분석 결과, 사고원인은 연구진의 설계 잘못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조종사 좌석의 사출 핸들이 규정된 힘보다 훨씬 적은 힘을 받을 때에도 분리되게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전방 조종사는 허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후유증 없이 회복됐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고는 항공기 개발사업이 갖는 위험성과 '시험비행조종사'의 역할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KTX-1 사업을 위해 시험비행조종사를 본격 양성하기 전까지, 시험비행조종사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는 그리 널리 인식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시험비행조종사라고 하면 정비창에서 '손을 본' 항공기를 첫 비행해보는 조종사를 의미하곤 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시험비행조종사는 안전도가 100% 검증되지 않은 개발 중인 항공기를 '목숨 걸고' 타는 조종사이다. 단순히 항공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비행 중 그 항공기가 공군이 요구하는 성능과 특성을 만족하는지 검증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시험중인 항공기 시스템에 대한 지식과 항공공학적 지식, 다양한 항공기 조종경험(20종 이상) 등 다양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공군은 89년부터 조종사를 선발, 영국과 미국의 전문교육기관으로 유학을 보내 시험비행조종사 자격을 취득케 하는 등 20여명을 양성했다. 이들은 대부분 시험비행 전문부대인 공군52전대에 소속돼 KTX-1기를 조종하면서 한두 번씩은 '아찔한' 순간을 넘기는 경험을 했다.
1600회에 달하는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비행 가운데 특히 1996년 10월의 '03호기 캐노피 이탈 사고'는 시험비행조종사의 위험성과 역할, 사명의식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KTX-1 사업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TX-1 사업 살린 `위대한 비행'(2002. 1. 30)
"MIC 컨트롤, 제로 스리(03)."
"Go ahead(말씀하십시오)."
"비상착륙해야겠다."
"Say again(재송하시오)."
"Emergency landing(비상착륙)."
이진호 중령은 관제소에 다급한 목소리로 비상착륙을 시도해야 한다고 알렸다. 그러나 관제소의 이흥환 소령은 심한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이중령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코, 마이크, 에코, 로미오, 골프, 에코…." 이소령은 사고를 직감하고 있었지만 영문자를 하나하나 받아 적는 동안 더욱 얼굴이 굳어져 갔다. 1996년 10월 21일, 이 날은 제1회 서울 국제 에어쇼가 개막한 날.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적인 항공축제일에 자칫 최악의 사고가 터질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퍼엉~" 폭발음과 함께 03호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지리산 인근 3000m 상공에서 속도를 10노트씩 올려가던 중 계기판이 시속 200노트(실제 비행속도는 더 빨라 240노트 정도로서 약 432㎞)를 가리킬 즈음 갑자기 발생한 상황. `사고'라는 사실을 인식할 틈도 없이 이중령은 두 눈이 감기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에게 밀어닥치는 강한 바람 때문이었다.
이중령은 어느새 두 다리 사이의, 조종석을 사출시키는 핸들을 잡으려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김인숙)의 모습이, 그리고 1년 전의 01호기 추락사고가 떠올랐다. `여기서 내가 탈출하면?' 이중령은 살아도 03호기는 추락하고, 결국 KTX-1사업은 죽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중령은 사출 핸들로 향하던 손을 거두고 모두가 `사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기지에 03호기를 안착시키는 것이다.
이중령은 조종간의 한 버튼을 눌러 조종석 높이를 낮추고 속도도 줄였다. 비로소 눈을 떴지만 심장은 한번 더 놀라야 했다. 조종석을 덮고 있던 캐노피가 열린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뜯겨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철제 프레임이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사이 속도는 120노트로, 고도는 2100m까지 낮아진 상태였다. 불과 23초 동안의 일. 공군3훈련비행단은 이미 `비상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이중령은 3훈비 지역에서만 12년여를 근무, 인근 지리에 밝았다. 이따금씩 고개를 기체 밖으로 내밀어 위치를 살피며 방향을 잡아 나갔다. 속도는 120노트. "속도를 좀더 내보시지요"라는 관제탑의 제의에 "속도를 더 내면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이렇게 10여분. 03호기가 기지 상공에 모습을 나타내고 착륙에 돌입했다.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함께 달렸다. 2차사고 없이 03호기는 안착했다.
03호기가 정지할 무렵, 한 대의 승용차가 달려왔다. 당시 3훈련비행단장 유병구 장군(현 공본 인사참모부장)이 직접 운전하며 달려온 것이다. 유장군은 이중령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살아줘서 고맙다."
최초의 시험비행 조종사로서 KTX-1 01호기의 초도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이진호중령. 만약 그가 이날 03호기에서 탈출했더라면 03호기는 물론 KTX-1 개발사업은 종지부를 찍고, 오늘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월드 베스트' 항공기인 KT-1 웅비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항공기 개발사업은 역시 어렵다는 한계만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웰 던(Well Done) 이진호! 그러나 시험비행 조종사에게는 `웰던상(賞)'이 수여되지 않는다.
한편 사고발생 직후 연구진은 곧바로 3훈비로 달려가 60여명의 수색팀을 편성해 3일간 사고현장을 이 잡듯 뒤져 이탈한 캐노피를 찾아냈다. 정밀분석 결과 캐노피의 잠금장치가 미세하게 발생한 유격으로 인해 비행 중 풀린 것으로 판단됐다.
05호기 최종시험 평가(2002. 2. 6)
1996년 가을, 공군이 선행개발 시제기 03호기와 04호기에 대해 합격점을 부여하자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듬해 1월부터 KTX-1 사업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실용개발' 단계에 돌입했다. 예정된 기간은 2년.
국과연은 이 동안에 최종 테스트기로서 양산형의 기본 모델이 될 05호기의 설계 및 제작은 물론 공군이 제시한 모든 시험과정을 완료해야 했다. 종합군수지원요소 개발과 양산을 위한 규격화 작업도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했다.
설계팀은 선행개발시 확인된 비행특성에 변화를 주지 않도록 외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 시스템의 성능향상, 정비 운용성 및 양산 제작성 증대에 주안을 두고 1997년 1월부터 05호기 설계를 진행했다.
이어 1997년 11월초부터 조립을 시작, 이듬해 1월 완료했다. 프로펠러가 4엽이 되고, 동체 폭이 끝에서 약 8㎝ 넓혀진 것 외에는 외형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디지털 방식의 CRT화면 3개를 장착, 조종사가 편리하게 비행정보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점과 캐노피 파괴용 폭약을 추가해 비상탈출 시스템을 개선한 점이 큰 개선사항으로 꼽힌다.
05호기는 지상시험 결과, 엔진부품에 문제가 있음이 확인돼 제작사에 반송, 수정토록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98년 3월16일 초비행을 가졌다. 디지털 계기판이 일부 고장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선행개발 단계에서 지적되었던 대부분의 불만족 사항이 해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남은 것은 최종 시험평가. 공군 주관으로 5월4일부터 종합군수지원 평가가, 5월25일부터는 운용요구에 따른 비행시험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종합군수지원 요소란 항공기의 비행과 정비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말한다. 즉 비행 및 정비를 위한 교범을 비롯 운용인력에 대한 구성 및 교육체계, 정비에 필요한 보급체계, 각종 지상지원 장비와 시설 등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무기가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양산으로 이어질 수 없다.
운용평가가 본격화되면서 연구개발진은 모든 시험은 이론이 아닌 `실연'을 통해 이상유무를 확인해야 한다는 평가팀과의 입장(시각)차나 제한적인 시험평가 환경 등으로 인해 적잖은 어려움도 겪었다. 그 중 하나가 저온환경에서의 장비작동 시험이었다. 이 시험은 국내 비행기지 중 가장 온도가 낮다는 제8전투비행단 기지에서 실시됐다. 그러나 눈도 오지 않은 데다 공군에서 요구하는 정도까지 온도가 떨어지지 않자, 기상천외한 방법이 강구됐다.
노천에 항공기를 놓아둔 채 소방장비를 이용, 물을 뿌려 항공기를 얼리는 방법이었다. 영하의 새벽, 앞뒤 조종석에 두 명의 시험비행 조종사가 탑승한 채 물을 뿌렸다.
조종사는 4시간이나 캐노피 속에 갇힌 채 꼼짝도 못하고 추위에 떨었다. 항공기의 모든 장비는 정상적으로 작동했지만 조종사는 시험 후에 감기로 고생해야만 했다.
입장차가 확연히 나타난 사례는 비상안전착륙 장치에 관한 것이었다. KT-1은 착륙계통을 작동하는 주 유압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경우 비상 유압시스템을 이용해 착륙이 가능하도록 2중의 안전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비상시스템에 대한 지상시험은 수없이 수행했지만 평가팀은 공중에서도 제 기능이 발휘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개발진은 비상시스템을 사용했을 경우, 원래의 유압시스템으로 복귀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반대했지만, 결국 시스템을 임시로 바꾸어 시험을 수행한 후 원래의 형상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여름철 연료온도가 상승해 고온이 되었을 때에 엔진이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규정치까지 시험해야 한다는 평가팀의 주장에 따라 별도의 온도가열 시스템을 제작, 연료를 데워 비행시험을 수행하기도 했다. 탑재장비에 대한 정비의 용이성을 확인하는 평가에서는 KTX-1에는 없는 시스템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지상시동 중 엔진실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엔진덮개를 열지 않고 소화호스를 이용, 진화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을 보았다. 반면 연료주입 시간 단축을 위한 시스템 요구나 통신계통의 전선을 2개로 잘라 연결하자는 요청은 서로가 설전을 벌일 만큼 의견이 상충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150여 시험평가항목 중 시행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이다. 시험조건은 항공기가 젖은 활주로에서 정측면으로 20노트의 강풍을 받아도 이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자연적 환경은 기다리기도 어렵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힘든 것이다.
2000년 11월 1호기 실전배치(2002. 2. 20)
1998년 말 공군으로부터 KTX-1에 대한 최종 '사용가' 판정과 함께 규격화 제정이 완료됨으로써 국방과학연구소의 훈련기 개발은 일단 마무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X'자를 떼어낸 KT-1기를 본격 생산하는 '양산'은 또 하나의 어려운 사업에 해당된다.
양산은 1999년 7월에 승인되고 2000년부터 납품하도록 공군과 주계약업체인 한국항공우주(주)간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항공우주는 1998년부터 해외 부품 구매계약을 미리 추진하면서 생산조립 라인을 설치한 대형건물을 1999년 6월에 완공했다.
그런데 05호기에 탑재된 전자식 계기를 납품했던 해외업체가 말썽을 일으켰다. 이 업체는 계약 위반 때 불이행 위약금을 설정할 수 없다, 부품 납기도 우리측 일정에 맞추기 어렵다는 등의 주장을 강경하게 내세웠다. 우리의 기술력을 얕보고 요구하는 수작이었다.
국과연은 계기 생산업체를 교체키로 결정하고 대체업체를 선정했다. 이어 약간의 설계 변경을 한 뒤 05호기를 통해 성능과 적합성을 확인, 양산기에 적용했다. 이후 양산과정에서 항공기의 품질을 보증하기 위한 시험에 예상 밖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 납기가 다소 지연되었다.
마침내 2000년 9월 양산 1호기가 공군에 첫 인도되고 이어 11월3일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고식을 갖게 되었다. 1983년 국과연에 갓 신설된 공군사업담당 부서에서 강위훈 박사와 이수용 팀장이 우리 항공기 개발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를 시작한 이후 18여 년. 우리의 영공을 우리가 개발한 항공기로 지키겠다는 꿈이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프로펠러 항공기는 개발이 쉬운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항공기 앞부분에 장착된 프로펠러는 항공기 동체로 후류(後流)를 일으켜 공기역학적으로 비대칭 공기 흐름을 일으킨다. 일반 제트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훈련에 중요한 '실속'이나 '스핀'에 지대한 영향을 일으키기 때문에 항공기 설계에 더 큰 어려움이 있다.
영국에서도 '파이어크래커' 항공기를 개발하는 중 스핀특성 문제로 중단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틀라스 항공사는 '에이스' 항공기를 개발하다 비행사고를 겪고 포기하고 말았다. 호주 역시 훈련기를 독자 개발하다 중단하고 스위스로부터 수입했다.
'수출은 제대로 될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이미 2001년 2월 인도네시아와 첫 수출계약을 맺은 바 있고 현재 남미와 아시아의 많은 국가와 수출협상을 진행 중에 있다. KT-1기를 직접 시승했던 외국의 조종사들이 모두 '넘버 원'을 말했음은 물론이다.
후속사업은 어떤가. 국과연은 현재 공군의 저속통제기로 쓰일 XKO-1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지난해 11월1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이 사업을 통해 국과연은 연료탱크․로켓탄 등 항공기 외부에 장착물을 탑재시킬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으며 전자장비를 통합제어 관리할 수 있는 핵심기술도 개발해 냈다.
훈련기를 구매할 많은 국가가 항공기의 복합적 임무가 가능한 항공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XKO-1사업이 완료되면 해외시장에서의 판로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KT-1 개발 성공은 국내 항공기 산업능력에 대한 해외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이에 따라 항공관련 기술을 도입할 때 우리의 협상력도 한층 강화시키는 계기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항공기 생산국․수출국으로서의 국민적 자긍심을 드높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군의 고등훈련기로 쓰일 T- 50사업을 착수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과연이 이 사업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예 전투조종사 키운다(2002. 2. 27)
지난해 11월, 국방과학연구소 한영명 부장은 한 보고서를 읽고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KT-1기를 통한 비행교육훈련 성과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KT-1기는 1시간 20분 동안의 1소티 비행에서 57갤런의 연료만을 소모했다. 같은 시간 동안 175갤런을 필요로 하는 기존 훈련기 T-37기와 비교할 때 약 70%의 연료비용 절감 효과를 거둔 것이다. 조종학생장교들이 일정 비행 수준까지 이르는 교육시간 또한 T-37기에 비해 30% 가량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군3훈련비행단 217대대는 최초로 KT-1을 운용하며 정예 조종사를 양성하는 비행교육대대.
지난해 5월, 대대는 공사49기로 임관한 학생장교 6명을 대상으로 시범차반으로 운용에 들어갔다.
32주의 교육기간 동안 공중조작․편대비행․계기비행․항법비행․야간비행 등을 교육했다.
교관이 조종학생 1 대 1로 비행교육하는 가운데 브리핑 및 디브리핑․과제물 부여-확인-교정-적용․조종학생 기량 평가․녹음 테이프 청취 및 분석 등을 통해 개인의 교육 성과를 확인하고 엄정히 평가한 결과, 입과한 6명 조종학생들은 탈락자 없이 전원 수료했다.
대대는 현재 02-3차반 및 03-1차반 50여 명에 대한 중등비행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2대 대대장으로 이 세 교육과정을 책임지고 있는 송일영(공사30기)중령은 "대대의 KT-1기는 2월21일 현재까지 5200여 시간을 무사고로 비행했으며, 조종학생들도 그동안 빠른 적응력을 보여주며 기량을 향상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KT-1기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전 T-37기와는 다른 탠덤형(전후방형) 조종석으로 인해 교관이 학생들을 잘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곧 편대비행 훈련때 실질적인 좌우측 편대훈련까지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변했다.
또한 KT-1기는 전방현시 장비(HUD) 장착으로 조종학생의 실질적인 계기비행 훈련이 가능하고, 뛰어난 스핀 특성 등으로 조종학생의 독립심 및 자신감을 고취한다는 등의 수많은 장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대대장과 교관들은 "이제 KT-1기를 T-37기 또는 PC-9기 등과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과거 우리 손으로 연구․개발한 항공기를 조종할 날이 올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는 선배들과 달리 오늘의 조종학생장교들은 KT-1기의 우수한 성능 때문에 교관들로부터 "항공기를 유연하게 조작하지 못한다"는 꾸중 아닌 꾸중을 듣기도 하지만 국산 항공기로 비행 기량을 익히는 최초의 조종사라는 자부심이 크다. "KT-1기를 통해 배운 기량과 지식을 더욱 발전시켜 향후 고등비행과정 이수는 물론 최고의 전투비행 조종사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포부. 공군3훈비도 217대대에 이어 237대대도 훈련기종을 KT-1로 전환하기 위해 지난 1월 부대 교관 등에 대한 기종전환 및 승격 훈련을 갖고 있다.
지난 25일 오후 12시50분, 비행훈련에 나서기에 앞서 217대대의 조종학생장교와 교관조종사는 곧 비행할 KT-1기의 프로펠러․바퀴 등 외부를 점검한다.
이윽고 정비사의 유도에 따라 선도기를 선두로 여러 대의 KT-1기가 격납고를 나와 연이어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푸른 하늘을 향한 KT-1기의 힘찬 비상. 그 모습에서 우리 힘으로 우리의 하늘을 지키고자 불철주야 애써온 수많은 이들의 피땀 어린 얼굴을 본다.
그 모습에서 조국의 영공방위를 보장하는 공군의 약속을 듣는다.
I LOVE 'KT-1'〈공군3훈련비행단 박춘식 소령〉(2002. 2. 27)
"Perfect Aircraft, Perfect Flight!"
2001년 11월15일, 최초 국산훈련기 KT-1 수출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시승비행을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는 도중 후방석의 멕시코 조종사가 자아낸 탄성이다.
그날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멕시코 조종사를 태우고 미끄러지듯 활주로를 이륙한 나는 임무지역에서 배면스핀(Inverted Spin), 실속선회(Stall Turn), 급횡전(Snap Roll) 등 KT-1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기동을 자랑하듯 선보였다. 계획된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귀환할 때의 뭉클함과 뿌듯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많은 선배 조종사들이 지금 내 뒤에 있는 조종사처럼 타국 조종사들이 조종하는 타국 항공기에 시승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 반대 위치에 있다.
그 때 뒤에서 들려온 멕시코 조종사의 "Perfect Aircraft, Perfect Flight!"라는 한 마디는 내가 들어왔던 그 어떤 말보다 가슴에 와 닿았던 칭찬이었다.
조종학생의 비행훈련을 담당하는 조종교관으로 명을 받아 공군 제3훈련비행단으로 전속오면서 내가 비행할 항공기가 아직 그 어떤 곳에서도 비행되어 본 적이 없는 KT-1이라는 점에 다소 두려움과 긴장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사실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비행하는 항공기는 모두 외국, 그 중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항공 선진국에서 개발되고 제작된 항공기다.
즉, 수많은 시험비행과 실전 경험 속에서 가장 우수하고 안정성과 기동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항공기다. 그러다보니 '과연 우리 기술로 개발된 항공기가 안전할까', '조종학생의 훈련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기동성과 안정성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KT-1을 배우고 조종하면서 이러한 나의 생각이 한낱 기우에 불과했음을 느끼고 또 느꼈다. 이제 막 비행을 시작하는 조종학생들에게는 항공기 조종이 쉽고 기동성이 우수해야 하며, 비정상 상황에 처했을 때도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KT-1은 이 두 가지, 즉 다소 상반된 측면을 가지는 특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고의 훈련기였던 것이다.
황무지 같았던 국내 항공산업 여건 속에서 '우리가 한번 해보자'라는 굳은 신념만으로 KT-1의 개발에 뛰어든 수많은 연구원과 기술진들, 미완성의 항공기로 진동(Flutter)시험, 스핀(Spin)시험 등의 위험한 비행을 사명감 하나로 수행해 왔던 시험비행조종사들.
칭찬과 격려도 있었겠지만 때론 우려와 냉소, 그리고 무관심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그 속에서 최초의 국산 항공기 개발에 참여한 그들 모두는 우리 역사 속에 수많은 선구자들과 나란히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방일보에 연재된 '국산무기 개발 비화 KT-1' 시리즈는 그들의 '격동적인' 활약상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그 속에 담겨있는 수많은 관련요원들의 분투는 타군 장병이나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겠지만, KT-1으로 직접 비행하는 조종교관들과 조종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동기감과 자긍심을 심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나 역시 기사를 읽으면서 KT-1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모두에게 밝힌다.
21세기 선진 공군의 주역이 될 사랑스러운 조종학생들.
한반도의 하늘을 주름잡을 그들이 최초의 국산훈련기 KT-1에 대한 자부와 애착을 바탕으로 훈련에 매진해 최고의 조종사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내일 그들과 함께할 비행과목을 준비해야겠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육군쌍용부대 전진영 대위〉(2002. 2. 27)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먼저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국방일보의 기획기사인 '철모에서 미사일까지' 중 KT-1의 탄생기를 읽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이 글귀였다.
한 세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기 위해선 그 만큼의 노력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산 항공기 KT-1이 하늘을 날기까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자랑스러운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모습의 자유와 힘, 그리고 조국을 향한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랍 속담에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을 이룬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종종 당하는 슬픔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축복이 되기도 하며, 우리 삶의 성공의 기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웅비가 탄생하기까지 오랜 준비기간과 반복되는 오류, KTX-01호기의 시험비행 중 추락사고 등 실패와 좌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이 있었으며, KT-1의 비행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모크업 작업시 제작한 모형이 맞지 않아 톱으로 동체를 자르고 프레임의 위치를 설계도면에 맞춰 모크업을 완성시키고 몸에 밧줄을 매고 소음측정 시험을 하는 등 열악한 조건에서도 서로의 일치된 팀워크와 열정만 가지고 도전한 이수영 연구원, 강위훈 박사 등 개발진의 노력과 이진호 중령의 목숨을 내건 사투에서의 승리는 우리에게 도전의 참맛과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
이들 중 시험비행 조종사인 이진호 중령은 91년 12월12일, KTX-1 01호기의 초도 비행을 성공시켰으며, 96년 서울 국제에어쇼가 개막하던 날 KTX-1 03호기의 시험 비행 중 캐노피가 이탈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종석을 떠나지 않고 03호기를 무사히 기지에 안착시킴으로써 KT-1 개발사업을 지속시키게 한 일등공신으로서 도전과 용기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처럼 지난해 10월부터 연재된 국방일보의 국산무기 개발비화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최초의 국산항공기인 KT-1의 존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며, 온갖 역경 속에서도 도전 정신과 애국심만으로 KT-1을 개발한 개발진과 조종사의 모습에서 애국심의 진정한 발로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듯이 이 기회를 통해 나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동시에 내게 주어진 책임과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도전한다면 미래도 우리편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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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기본훈련기인 KT-1을 모체로 성능개량한 KO-1 저속통제기. 2003년12월 양산에 착수됐으며 2005년 중반쯤 공군에 전력화될 예정이다. 양 날개 아래에 각각 2.75인치 로켓 7발, 50 갤런 용량의 외부 연료탱크 등을 장착하고 있다. 공군이 1972년 도입해 30년 이상 운용하고 있는 저속통제기 O-2A기를 대체하게 된다.
‘KT-1 저속통제기(XKO-1)사업’이라는 이름으로 99년 4월19일부터 개발에 착수, 2003년6월 공군의 운용시험을 마치고 7월 전투 사용가(可) 판정을 받았으며 11월 대통령 양산 재가를 받았다. 이어 2003년12월18일 국방부 조달본부와 생산업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주) 간에 양산 구매계약이 체결됐다. /KAI
위 사진 1953년 한국전쟁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을 때 경남 사천 비행장에서 군 관계자들이 한국의 1호 항공기 '부할'호의 동체 설계를 논의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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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1 개발 비화 발간 국내 최초 독자개발 양산 항공기인 KT-1 기본훈련기의 15년 역사가 담긴 책자를 ‘월간항공’에서 발간하였다. KT-1 기본훈련기는 1988년 최초 탐색개발을 승인받아 우리 연구소 제 3체계개발본부에서 개발하여 현재 공군의 정예 조종사를 양성하는 첨병으로 활약 중이며 지난 4월 25일에는 수출형 KT-1B로 개조되어 인도네시아에 첫 수출기가 출하된 역사적인 쾌거를 이룬 항공기이다. 금번 KT-1 기념책자는 국내 최초의 항공기 개발, 생산, 수출의 역사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어 읽는 이 모두에게 자긍심과 뿌듯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개발 의지를 실현한 우리 연구소의 헌신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기관(국방부, 공군, 조달본부, 품관소 등) 및 업체들(한국항공우주산업(주) 외 관련 협력업체)의 땀이 어우러져 있으며 항공 선진국을 향한 우리나라의 비전을 잘 묘사하고 있어 더욱 자긍심을 심어 주고 있다. 이 책자의 분량은 350여쪽으로 시중에 판매될 예정이며, 책자는 서점이나 월간항공을 통하여 구입 가능하다. 이미 초등학교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사례로 KT-1 항공기 수출이 제시된 바 있으며 성공적인 개발의 결과가 얼마나 커다란 부가가치를 이루어내는지 책을 통하여 한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starstory/zzangiwapengi
출처 국방과학연구소 어제 오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