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용 목사님
은혜로운 말씀 가져갑니다
제 홈페이지에 두고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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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방현 권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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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01 년 3 월 11 일
: 본 문 : 누가복음 15 : 11 - 32
: 제 목 : 주의 사랑으로
: 구 분 :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
: 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배타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 진정한 사탄의 속임수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기독교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에 대한 배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원리에 맞도록 이 세상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자연을 이루어 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 환경 단체가 있지만 그 환경 단체의 같은 부르짖음은 무엇이냐 하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자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어 그것을 파괴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이어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경 단체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성을 잃어 버렸을 때 이들은 비참한 모습을 경험하곤 합니다.
: 참여 연대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더 없는 역할을 하였지만 하나의 좌익단체로만 남아 있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사실은 그것을 계속해 갈 힘을 가지고 있는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성 없는 모습으로 인하여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의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입니다. 사실 이런 비유를 설교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본문에 대한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잇는 설교의 패턴과의 비교 때문에 설교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일어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기에 본문을 택합니다.
: 오늘 본문에는 2 종류의 탕자가 나옵니다.
: 하나는 집 나간 탕자와 하나는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탕자의 진정한 개념은 아버지의 의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 왜 우리가 방황합니까? 의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아들은 집을 나가서 방황했고, 한 아들은 집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더 큰 죄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정작 그 분의 뜻하고는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 때가 많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 오늘 우리는 집 나간 탕자 보다 집안에 있는 탕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출수 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지 집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께 우리의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탕자는 아닌지요?
: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집 나간 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도 형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아주 간절히 집을 나간 자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어땠습니까?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베푸니까 그 잔치를 못 마땅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대해서 불평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집을 나간 자녀가 혹은 새 신자가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혹은 그의 과거의 잘못을 들어, 심지어는 그가 교회를 욕 먹인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 큰아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주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시며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우리들의 마음은 그의 효용가치를 주판질하고 있지는 않은 지요?
: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사탄의 논리입니다.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 인정 받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눈이 하나인 채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문둥 병자나 혹은 병에 걸린 자를 부정하다하여 성밖에 내어쫓는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주님은 "회칠한 무덤 같은 자"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아야 할 r서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내가 하나님 됨과 같은 교만함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바벨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이런 풍조가 얼마나 만연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죄인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에 주님의 마음이 탄식을 합니다.
: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을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 이것이 우선입니다. 내 의도가 개입되면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길과 진리가 되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백전 백승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 이런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집안에 둔 탕자와 집 나간 탕자를 어루만지는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모르지만 아들들은 여전히 사랑의 대상이고 관심의 대상이고, 섬겨야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사랑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으려니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 우리는 흔히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대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아버지처럼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 아들들을 사랑함으로 기대로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너무 쉽게 표현하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욕심에서 기인합니다. 둘째 아들도 큰아들도 다 나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최고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사람되게 하는데는 아버지의 기다리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 살이 없었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좌절하고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이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에 이 아들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믿으십니까? 먼저 나를 사랑하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의도를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 사랑으로 병든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으로 그 감격으로 이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견디어 나가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 세상이 병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병든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새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 우리가 하는 "주의 사랑으로"가 진정한 주님의 사랑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그래서 우리의 이웃을 구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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