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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성지 스크랩 LEIPZIG(라이프치히)
갈멜산 추천 0 조회 132 09.11.22 03: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라이프치히

 

유래: 7세기와 9세기 사이에 최초로 슬라빅 마을의 정착이 엘스터와 파데 강을 따라 이뤄졌다. 1165년에 오토 대제가 도시를 지정하고 라이프지히의 상권을 승인했다.

 

라이프치히는 현재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도시 곳곳에서 전통과 진보가 공존하고 있으며 과거의 화려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뛰어난 건축물에는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출판물 인쇄와 교역을 통해 라이프치히는 중세 시대 후반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언제나 교육과 문화,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라이프치히에는 일찍이 1409년에 대학이 설립되었고 라이브니츠, 괴테, 실러 및 바흐 등은 모두 이 도시의 매력에 이끌려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라이프치히는 중산계급 도시이며 시민들은 항상 예술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1743년 라이프치히 시민들에 의해 설립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오페라 하우스와 유명한 '토마스 합창단'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많은 전쟁과 독일의 분단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문제를 타개하려는 개척 정신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은 1989년 가을에 있었던 행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0월 9일 '월요일 데모'에서 70,000명의 사람들이 라이프치히 링주위를 행진했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우리는 하나다(We Are The People)'라는 슬로건과 함께 평화적인 혁명으로 독일민주공화국의 종식을 가져왔으며 독일의 재통일을 위한 길을 열었다.

 

한편, 라이프치히는 스포츠 도시로서의 자랑스런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19세기 이후로는 '독일 체육 도시'로 명명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 시절 라이프치히는 독일 체육 대학 DHfK(Deutsche Hochschule fur Korperkultur)을 통해 절대적인 스포츠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이때 축구도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1900년 독일축구협회(DFB)가 라이프치히에 설립되었으며 1903년에는 VfB 라이프치히가 제1회 전국독일축구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대형 스포츠 경기장 젠트랄 스타디온에서는 전통적으로 주요 국제 축구 경기들이 개최되기도 했다. 지금도 라이프치히에 있는 60,000여 명의 건강한 스포츠 애호가들은 300개의 클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라이프치히를 스포츠 도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라이프치히의 올림픽 훈련 센터에서는 최고의 운동 선수들이 국제 대회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프로 스포츠뿐 아니라 일상적인 취미로 즐기는 스포츠에 대해서도 최상의 교육을 지원한다. 라이프치히는 국제마상 및 승마대회, DFB Indoor Cup 시리즈, 독일 그랑프리 레슬링 자유형 부문, 국제여자 그랑프리 테니스대회, 세계여자펜싱월드컵대회, 6일 간의 라이프치히 국제 사이클 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홍보대사 /72시간 동안 재미있게 보내는 법, 레네 뮐러가 소개하는 라이프치히

오랜 역사의 도시에 넘치는 새로운 활력

라이프치히를 방문하면 나는 항상 마음이 따뜻해진다. 라이프치히를 10년 전에 방문한 사람 조차도 이 도시가 이전 동독에 속했을 때에는 완전히 황폐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드레스덴과 베를린이 번창한 반면 라이프치히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도시 주변 지역이 점차 갈탄 채광 작업의 피해를 입으면서 언젠가 도시 전체가 갈탄 먼지로 뒤덮일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된 것이다. 라이프치히 사람들은 항상 스모그와 먼지에 시달려야 했고 비교적 깨끗한 곳은 전시관뿐이었다. 유럽 축구 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첸트랄 슈타디온을 방문한 외국인이 갈탄 먼지로 뒤덮인 도시의 다른 면을 보았을 때 이 지역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었다.

 

힘든 작업 끝에 도시는 점점 영광스러운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헬무트 콜 전 수상이 통일 독일에서는 동쪽 지역이 번영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대부분은 이를 믿지 않았다. 1990년 이전의 라이프치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라이프치히를 보며 콜의 낙관적인 예상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느낄 것이다. 40년간 침체되어 있던 도시의 모습이 하룻밤 만에 바뀔 수는 없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의 발전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도시의 역사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역사적인 도시이고 경제 및 산업은 물론 문화, 음악, 학문 및 교육의 중심지이다. 27세에 성 토마스 교회의 지휘자가 된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라이프치히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이다.

 

라이프치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역 센터가 있는 도시이다. 라이프치히는 중세 때 부터 무역 박람회를 개최하여 번창한 도시였으며 라이프치히 박람회장의 기원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는 무역 박람회 붐이 일어난 시기로 2차 세계 대전 전에는 매년 봄마다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라이프치히 박람회장을 방문하였다.

 

시장은 라이프치히 사람들의 생활에서 항상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현재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시청사는 2006년이면 세워진 지 450년이 된다.

 

나슈마르크트의 증권거래소 및 무역센터, 한자하우스, 스펙스 호프 전시관은 물론 많은 돈을 들여 새로 단장한 마들러 통로와 여기에 위치한 고급 식당인 아우어바흐스 켈러를 보면 도시가 새롭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멋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무역 센터는 라이프치히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무역 센터는 관광객들이 걸어 다니며 쇼핑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무역 센터 근처에는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 니콜라스 교회가 있다. 성 니콜라스 교회는1989년 평화적인 혁명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던 장소이고, 이를 통해 라이프치히는 ‘영웅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별칭은 동독의 공산체제에 대항한 사람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다. 독일 통일이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 도시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라이프치히 사람들은 대담하고 진솔하기 때문이다.

 

카페나 술집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만큼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2012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라이프치히 사람들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라이프치히와 스포츠라는 단어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말인지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20년 동안 로크 라이프치히에서 골키퍼로 활동했고, 첸트랄 슈타디온에서는 8만에서 10만에 이르는 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권위 있는 유러피언 컵에 출전하기도 했다. FIFA 월드컵을 위하여 이전 첸트랄 슈타디온 자리에 새로 건축한 경기장은 아주 멋진 모습으로 모든 축구팬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을 것이다. 첸트랄 슈타디온은 독일 축구 협회가 있는 라이프치히의 경기장으로 시민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도시의 역사에 어울리는 면모를 갖추도록 노력하고 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72시간

라이프치히는 독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무역박람회와 컨퍼런스 개최지로 유명해진 이 고대 도시는 과거 황금기의 문화 유산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변화를 받아들여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생동감 넘치는 현대 도시다.

 

오전 10시  

라이프치히의 최첨단 전시관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건축물 중 하나다. 이 전시관은 강철과 유리를 혼합한 함부르크 건축가 볼크빈 마르크 교수의 대담한 설계를 바탕으로 세워진 길이 250미터, 폭 80미터, 높이 30미터의 건물이다. 전시관과 미술관은 황량함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으면서 기능성을 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고려하여 설계된 복합 단지다. 이 밖에 라이프치히에서 눈여겨 볼 만한 건축물로 하우프트반호프(중앙기차역)가 있다. 관광객에게 '철도와 연결된 쇼핑 센터'라는 비웃음 반 놀라움 반의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이 중앙기차역은 전체가 유리로 만들어져 어두운 구석까지 빛이 들어올 정도로 채광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이 기차역은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기차역을 생각할 때 떠오르지 않는 우아함이 스며나온다.

오후 2시하우프트반호프의 중앙 홀은 고대 로마의 온천탕을 연상시키고 아치형 지붕은 르네상스 시대의 성당 천정을 닮았다. 이렇게 쾌적한 공간에서 밤 늦게까지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경험이다. 게다가 일부 상점은 밤 10시까지 영업을 한다! 시내 중심가로 가다보면 '바하에 대한 경의'라는 윈드 차임 조형물이 나타난다.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이 조형물이 라이프치히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게 하는 첫 표시다. 이 조형물은 한스 미하엘 키셀이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작품을 바탕으로 당시 27년간 라이프치히에 살았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를 기념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다.

오후 3:30왼쪽으로 돌아가면 마침내 역사적인 성니콜라스 교회(니콜라이키르헤)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9년 가을 공산주의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던 곳으로, 한달에 한번 평화의 기도회가 열렸다. 그 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마침내 통일이 이루어졌다. 10여년 전 10월 '우리는 한 민족(Wir sind das Volk)'이라는 잊을 수 없는 노래가 울려 퍼지던 곳이다. 교회 내부는 밝고 편안하며 개방적인 분위기로, 푸른색의 종려잎과 장엄한 흰색, 장빗빛 치장 벽토로 장식되어 있다. 성니콜라스 교회의 주임 신부인 크리스티앙 퓌러는 교회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고 실업과 같은 최근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센터로 발전시켰다.

 

오후 5시 

그림마이셰 슈트라세를 따라 내려가면 고급 메들러파사제가 보인다. 현재 메들러파사제는 라이프치히 부동산 시장에서 활약하던 위르겐 슈나이더의 노력으로 지나간 시대의 우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 후 위르겐 슈나이더는 파산하여 실형을 선고 받았다. 슈나이더는 20개의 값진 건축물을 매입하여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슈나이더가 아니었더라면 호이저차일레의 바텔스 호프 또는 하인슈트라세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 사기꾼 투자가에게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갖고 있다. 다시 메들러파사제로 돌아가서 쇼핑 아케이드로서의 역할을 살펴보자. 라이프치히는 1497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무역박람회를 주최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우선 실제 통로를 없애고 메들러파사제와 같은 바로크 양식으로 채웠다. 메들러파사제는 상가, 아치, 주거지, 창고를 하나로 통합한 시스템으로, 당시에는 오늘날의 신축 전시관만큼이나 혁신적인 것이었다.

오전 10시둘째 날은 아우구스투스 광장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아우구스투스 광장에는 하늘 높이 치솟은 라이프치히 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대학 건물의 옥상에 오르면 이 멋진 도시의 황홀한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학 건물의 바로 맞은편에는 독일 최대 광장 중 하나인 아우구스투스 광장이 있어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오 

낮에 게반트하우스 콘서트 홀의 외부를 구경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일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밤에 콘서트 관람객들이 막간을 이용해 조명으로 장식된 벽과 천정의 프레스코를 배경으로 발코니를 거니는 모습을 본다면 그 황홀한 광경에 넋을 잃을 것이다. 1809년 창립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실력과 쿠르트 마주어가 밀어붙여 완성된 건물의 기능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 4중주단이라는 명성을 쌓은 데는 200여명에 가까운 음악가들의 노력이 컸다. 우도 짐머만 지휘자는 외부를 장엄하고 고전적으로 바꾸고 내부를 콩팥 모양으로 화려하게 개조하여 이 콘서트 홀을 독일의 정상급 음악 극장 중 하나로 바꾸어 놓았다. 우도 짐머만은 우도 숄츠라는 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우도 숄츠는 'Bach creations'로 발레에 새로운 영감을 준 재능 있는 인물이다.

오후 1:30그림마이셰 슈트라세에서 다시 성니콜라스 교회 방향으로 돌아가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오래된 출입로 아케이드인 스펙스 호프를 지난다.

오후 2:30아케이드 내부로 들어가면 글라스 페인팅, 세라믹 메달, 아르누보 테마의 미술품 및 괴체 프리즈 등을 볼 수 있다.

오후 5:30호텔로 돌아오기 전 리쿠베트하우스(1909)에 잠깐 들러보는 것도 좋다. 리쿠베트하우스는 코끼리 두상, 중국식 탑, 공작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순수 아루누보 건축물로, 세계 무역의 이상적인 상징물이다.

오전 10시셋째 날은 모두 음악이라는 테마만을 중심으로 관광 계획을 세운다. 놀랍게도 독일의 유명한 5인조 팝그룹 '디 프린첸'의 멤버 4명이 성 토마스 성가대에서 초창기에 발성 연습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금요일 오후 6시와 토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소년 성가대가 부르는 아카펠라를 들을 수 있다.

오전 11시1539년 마르틴 루터가 한때 설교를 했던 성 토마스 교회 정면에는 라이프치히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기념 동상이 서 있다. 다른 유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바하도 당대에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신부들이 새로운 지휘자를 뽑을 때가 되면 바하는 늘 텔만이나 지금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인 다른 음악가들에게 밀렸다.

 

오후 1:30 

토마스가세를 따라 중심가로 내려가면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구시청사가 보이는데, 이곳에 라이프치히 역사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건축가와 시장, 건축가 히로니무스 로터의 감독 하에 라이프치히의 장인이 1년도 채 안 되서 완공했다. 이 건물의 뒤쪽에는 바하 초상화 원본이 걸려 있다. 이 초상화는 바하가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던 당대에 그려진 것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당시 한창 뜨거웠던 음악가의 자질과 재정 수준에 관한 논란이 대가의 얼굴에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오후 2시라이프치히의 유명 쇼핑가 중 하나인 페터스슈트라세를 따라 내려가면 과거에 산업 지구였다가 EXPO 2000 이후 재건된 플라그비츠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는 볼거리가 가득하다. 먼저 건물 입구를 통과하면 거리에서는 볼 수 없던 으리으리한 공장 건물과 맞닥뜨리게 된다! 1920-30년대에는 방적 공장, 착색 방사 공장, 비누 공장의 설계 방식에 영향을 미친 신즉물주의가 등장했다. 당시 칼 하이네라는 사업가의 비젼은 수로와 철로가 교차하는 이 작고 놀라운 보석의 탄생을 가져왔다. 지금까지도 라이프치히의 이 산업 지구는 하이네의 선구적인 기업 정신으로 탄생한 넓은 자전거 도로와 보도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오후 3시많은 자전거 도로 중 하나인 칼-하이네-슈트라세를 따라 걷다보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체 극장 및 영화관 프로젝트(Schaub?hne Lindenfels)를 만나볼 수 있다. 기분 좋은 조그만 바에서는 라이프치히의 명물 고제를 맛볼 수 있다. 약간 신맛이 나는 발효 맥주인 고제는 최음 효과가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후 4시바에서 잠시 쉰 후 라이프치히 북부에 위치한 골리라는 녹지를 찾아가 본다. 이곳에 가면 오네 베덴켄오네 베덴켄(멘케슈트라세 5가, 영업 시간은 월요일-금요일 오후 5시-새벽 1시, 토요일 낮 12시-새벽 1시, 일요일 낮 12시-밤 12시)이나 프리드리히 쉴러가 식사를 했던 바로크식 골리 성에서 멋진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오후 5시루뭄바슈트라세에 늘어선 고급 저택을 보며 번창한 골리 지방의 분위기를 한번 더 만끽해 본다.

 

유용한 정보

책과 문학의 도시* 

종교 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는 16세기에 쓴 논문 덕분에 라이프치히에 처음으로 책 출판 및 판매 붐을 일으켰다. 최초의 일간 신문이 1650년과 1825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인쇄되었고 독일 서적상 시장 그룹이 플라이세 강둑에서 창립되었다. 그 때쯤에는 이미 라이프치히 도서 전시회가 프랑크푸르트와의 경쟁을 물리친지 오래였다. 배데커, 리클람 운트 브로크하우스, 인셀, 시만 등 유력 출판사들은 도심부 동쪽의 예술가 구역에 사무실이 있었다. 오늘날 지명만이 이러한 과거의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다. 1943년 이후에 이 지역은 폭격을 받아 하룻밤 만에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형 출판사는 대부분 라이프치히에 여전히 지사를 두고 있다. 이곳의 미래를 밝혀 주는 곳도 있으니 옛 서적상이 있던 자리(프라거 슈트라세와 게리츠베그 모퉁이)에서는 갓 등단한 작가와 문학 거물들이 번갈아가며 솜씨를 뽐내는 '책들의 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월요일 시위*1989년, 월요일 시위가 대중들의 의식의 일부가 되었을 즈음에는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평화를 위한 주간 기도는 전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모두에게 개방됨'이라는 유명한 표지는 아직도 입구 위에 걸려 있다. 시위 행렬은 먼저 도심부 원형 도로를 지나 '우리는 국민이다'를 외친다. 이 외침은 몇 달 후 독일 통일이 다가 오자 '우리는 한 국민이다'로 바뀌었다. 평화 혁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약 10만명의 국민이 시위에 참가했다. 라이프치히 작가 에릭 로에스트는 이 시기를 '니콜라이키르헤(성 니콜라스 교회)'라는 인상적인 소설에 담아 냈고 이 소설은 TV용으로 각색, 제작되었다.

 

구 시청 (Alte Rathaus)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구 시청 건물은 90m 정면 중간에 있지 않다. 뛰어난 건축가 히로니무스 로터는 1556년 지금은 층계에 작은 탑이 있는 고딕 시청의 원 벽에 이 건물을 세웠다. 1층에는 시장 사무실, 안마당, 연회장이 들어서 있었다. 1909년 이후, 구 시청에는 역사 도시 박물관이 들어섰고 연회장은 콘서트와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있다. 구 시청은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물 중 하나이다(화~일 오전 10시~오후 6시. 가이드 투어 목 오후 4시, 시장도 여기에서 섬. 도심부행 모든 트램 노선, 트램 정류장: 고에르델레링).

아우에르바흐의 와인 저장소*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은 파우스트의 전설과 오래된 선술집 전통이 결합을 이루어 양조법을 창출해 냈다. 모든 것은 북부 팔라틴 지역의 아우어바흐 마을 출신인 하인리히 슈트로머로부터 시작되었다. 16세기 초에 지하실에서 술집을 운영했다. 100년 후, 파우스트의 이야기와 암흑의 기술을 가진 그 마술사가 라이프치히에서 통에 올라탄 이야기가 떠돌았다. 슈트로머의 증손자는 라이프치히의 미술가 안드레아스 브레츄나이더에게 통에 올라탄 파우스트의 그림을 그릴 것을 즉시 명령했고 1525년에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 괴테 역시 아우어바흐의 매력에 감명을 받았고 그 술집을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 활동 무대로 사용했다. 지하실 창고는 대대적으로 리모델링됐지만 요즘도 분위기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현재 지하실을 관장하고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스스로 인정한 허풍선이이다(예약, 전화. (+49) (0341) 21 61 00, 메들러파사제, 시내 중심부로 가는 모든 트램 노선, 트램 정류소: 아우구스투스팔츠).

 

게반트하우스/베스트멘트 하우스* 

1981년에 제막식을 가진 이 콘서트 하우스는 유리로 된 휴게실에서 나온 빛이 아우구스투스플라츠에 쏟아져 들어가는 저녁 무렵에 가장 아름답다. 700평방미터가 넘는 천정 벽화인 시에가르트 길즈의 '삶의 노래'는 딘연 시선을 사로 잡는다. 구 동독에 세워진 최초의 콘서트 하우스로서 음향 상태가 훌륭하다. 주목할 것은 92개의 스톱과 6638개의 파이프가 있는 웅장한 슈케 오르간이 설치된 대형 6각형 콘서트 홀이다. 가장 유명한 합창단 지휘자 중에는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빌헬름 후르트바글러, 1933년 나치에 의해 쫓겨난 브루노 발터, 통일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쿠르트 마수르 등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 맞은편에는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의 세 번째 영구 무대가 있다. 콘서트는 원래 모직물 상사를 개조한 홀(지금은 시내 주요 백화점이 들어서 있음)에서 열렸기 때문에 이름이 '베스트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이다. 100년 후, 음악가들은 베토벤스트라시에서 자신만의 무대를 갖게 되었다. 이 고전 스타일 건물은 제 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다(아우구스투스플라츠, 시내 중심부로 가는 모든 트램 노선, 트램 정류소: 아우구스투스플라츠).

중앙역*역사적인 벽(1909?13) 뒤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터미널의 플랫폼이 24개 숨겨져 있으며 현대적인 서비스 센터도 들어서 있다. '프로메나덴 하우프트한호프(중앙역 산책길)'라고 하는 쇼핑 센터가 1997년에 문을 열었다. 부티크, 카페, 약국 등이 플랫폼과 수직으로 270미터 이상 늘어서 있다. 외부 계단과 대합실, 웅장한 입구 홀은 모두 역사적인 보수 공사를 마쳤다. 이 기념비적인 건물은 파르테-니에덴룽 지역의 습한 지반에 꽂은 3,125개의 보강 콘크리트 지주 위에 세워져 있다(트램 정류소: 빌리-브랜트-플라츠).

 

메들러파사제* 

우아한 메들러파사제는 시내 다른 어떤 쇼핑 구역과는 다른 메트로폴리스 스타일의 성향을 풍긴다. 여행 가방 제작자인 안톤 마들러는 1912년 밀란의 갤러리아 비토리오 에마뉴엘을 염두에 둔 가벼운 통로를 의뢰했다. 건물의 역사는 그리마이체 슈트라세의 입구에서 볼 수 있다. 병 장식과 포도가 새겨진 사암 그림들을 통해 이 건물이 와인 저장소와 자기 상사로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역 궁전은 아우어바흐의 16세기 정원을 대체했고 아우에르바흐의 와인 저장소는 호기심 많은 여러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그리마이스헤 스트라시는 서서히 쇼핑의 천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17번 집은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보존된 왕조 전망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그리마이쉐 스트라세 3?4/뉘마르크트 14, 시내 중심부로 가는 모든 트램 노선, 트램 정류소: 아우구스투스팔츠).

 

새 무역 센터*시하우젠에 자리한 100헥타르가량의 이 지역은 3년간의 공사 끝에 1996년에 문을 열었다. 중점을 두어야 할 곳은 볼크빈 마르크의 건축가 팀이 지은 거대한 반원 유리/강철 건축물로서 길이 약 240m, 폭 80m, 높이는 거의 30m에 달한다.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의 설계자 이안 리치는 이 안의 형상 작업도 했다. 무역 궁전의 5,500개 패널 청소는 특별히 설계된 로봇이 맡고 있으며 유리 다리가 전시홀 위로 연결된다. 굴뚝 역할도 하는 좁은 탑에는 라이프치히 무역 센터의 전통 인장이 새겨져 있다. 1917년, 에리히 그루너는 'Muster-Messe(모델 무역 센터)'를 나타내는 더블 M 심볼을 만들어 냈다. 요즘 들어서는 'Messe und Mehr(무역 센터와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라이프치히 전투 기념관* 

 이 거대한 기념관은 해마다 2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유럽 동맹이 나폴레옹을 몰아낸 지 100년 후인 1913년에 제막식을 거행했다. 1913년 10월에 있었던 축하 행사는 독일 왕자와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왕가 대표를 대동하고 황제가 참석하는 등 거국적인 행사였다. 덧붙이자면 작센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 독재자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1813년 추방되었다. 이 기념관 건설 역사가 담겨져 있는 전시회가 있다. 한편, 토굴에는 밤을 새고 있는 16명의 석조 병사들을 볼 수 있다. 명예의 전당의 거대한 형상들은 용기, 신념, 희생, 국민의 힘을 상징하며 그 높이가 10미터에 달해서 둥근 천장에 있는 거의 실제 크기인 324명의 기수가 작아보일 정도다. 라이프치히 기념관 합창단이 콘서트를 할 때면 음향 상태가 얼마나 훌륭한가 느낄 수 있다. 2013년, 제막 100 주년이 될 즈음이면 300,000톤의 이 역사적인 기념관이 보수 작업을 마치게 될 것이다. 91미터 높이의 전망대에서 보는 전망은 정말 멋지며 364개의 계단이 부담스럽다면 언제든지 지하실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전망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매일 개장. 11월~3월 오전 10시~오후 4시, 4월~10월 오전 10시~오후 6시: 요금 3유로, 프라거 스트라시, 트램 노선 15, 트램 정류소: 볼커슐라츠덴크말).

 

성 니콜라스 교회*1989년 가을부터 평화의 기도를 하는 사람과 등불을 든 시위자 때문에 성 니콜라스 교회는 평화 혁명의 발상지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이 교회는 항상 시의 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성 니콜라스를 수호 성인으로 받들었던 상인들은 12세기에 이 교회 근처로 몰려들었다. 1512년, 근처에 세워진 니콜라스 학교는 시 최초의 교육 기관이 되었다(현재는 문화 카페와 박물관임). 이 교회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합창단 지휘자 자리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시험을 치른 장소이기도 하다. 나지막한 로마 웨스턴 외관은 원형 그대로이고 중앙 첨탑은 1555년에야 세워졌으며 18세기 초에 바로크 돔이 건설되어 높이가 75미터 늘어났다.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오래된 이 교회의 매력적인 부분은 내부의 조명 디자인으로 고린도 원주에서 나온 듯한 야자나무 잎 모양이다. 바로 이것을 이용해서 도시 계획 책임자 다우테가 이 고딕 홀 교회를 1784년에서 1797년 사이에 고전적인 걸작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제단은 A. F. 오에세르가 만들었다. 크리스챤 푸페르 신부는 평화를 위한 월요 기도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으며 오후 8시부터 144가지의 형형색색 불빛이 하나씩 광장을 밝힌다. 틸로 슐츠가 디자인한 조명, 다우테 기둥의 모조품, 물이 넘쳐 흐르는 화강암 분수는 모두 1989년의 평화로운 저항을 연상시킨다(니콜라이커르호프, 시내 중심부로 가는 모든 트램 노선 정류장: 아우구스투스팔츠).

 

성 토마스 교회* 

이 교회의 명성은 다른 나라까지 널리 퍼져 있으며 독어권에서 가장 훌륭한 남성 합창단인 토마너와 가장 유명한 지휘자인 요한 세바스찬 바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칼 세프너가 1908년에 남쪽 베란다 앞에 건설한 바하 기념관은 파괴된 성 요한 교회에서 1950년에 이장해 온 바하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토마너 합창단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이미 성 토마스의 부지에 교회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그라베 디에트리히가 후원한 아우구스틴 남성 합창단 재단의 시발점이었다. 이 곳 학생들은 무엇보다도 찬송가와 성가를 주로 배웠다. 순회 공연이 없거나 학교가 쉬는 날에는 약간의 기부금을 내면 토마너 합창단의 모테토와 칸타타를 들어볼 수 있다(금 오후 6시, 토 오후 3시).1539년 오순절에 마틴 루터는 이 곳에서 설교했고 그 날을 계기로 작센 지방에 종교 개혁이 전파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성가대석 옆에 있는 두 개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루터와 바하가 장식되어 있고 최근 들어 펠릭스 멘델스존과 파르톨디의 장식이 추가되었다. 교회 구조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496년, 로마식 네이브는 후기 고딕 양식 홀로 대체되었다. 이 홀의 지붕은 특이하게도 경사가 졌는데 경사 각도가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큰 63도이다. 68m 높이의 탑에는 1702년에 바로크 돔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교회 앞에 펼쳐진 잔디밭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토마스키르호프, 매일 오전 9시~오후 6시. 예배 일 오전 9시 30분, 오후 6시. 탑 가이드 투어: 토 오후 1, 오후 2시, 오후 4시 30분, 일 오후 2시 및 오후 3시, 트램 9호선, 트램 정류소: 토마스키르헤)

 

출처: 2006년 월드컵 공식 사이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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