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는 조선 성종·연산군 때 활동한 사림(士林) 관료다. 빼어난 중국 기행문인 ‘표해록(漂海錄)’을 썼다. 전라도 나주 출생으로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2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신편동국통감’ ‘신찬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홍문관 교리. 예문관 응교. 사간(司諫·종3품)을 지냈다.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됐다가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여 51세로 생을 마감했다.
▼최부가 쓴 ‘표해록’은 뛰어난 기행문인데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추쇄경차관으로 제주도에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하자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다 폭풍우를 만나 명나라 땅에 도착하여 귀국하기까지의 8천 리 여정을 쓴 글이다. 최부는 명나라에서 조선 선비의 기개와 품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표해록’에는 최부의 심성과 일상의 태도. 문화·도덕적 자부심이 잘 드러나 있다. 기행문학의 백미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최부는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에 수차례 통렬한 비판을 한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훈구파인 정승들도 예외가 없었다. 의정부의 세 정승에 대하여 “재주는 있으나 근면하지 못하고 음주를 벗삼고 있다”. “바탕은 좋을지 몰라도 배움이 없어 자기 집 정원에 담벼락을 쌓는 일 이외 한 일이 없다”며 나태와 무능을 통박하였다. 육조의 판서들에게는 “조세를 감하라고 하여도 수행하지 않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일에만 힘을 쏟을 뿐이다”고 비판하였다.
▼연산군에게는 “종친과 외척과 후궁 그리고 훈구거실의 노복이 궁궐에서 활개치고 오가며. 패륜을 저지르고 공물(公物)을 훔치고 뇌물을 주고받았던 죄인들마저 마구잡이 사면하여 강상(綱常)을 허물어뜨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인재가 소중하다는 점을 모르고 가볍게 임용하고 아무렇지도 않는 듯 해임을 하여 인사가 허물어졌다. 이런 난맥상은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상소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최부의 말이 생각나는 곳이 없는가. 최옥봉 편집부 차장
Copyright ⓒ 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입력 : 2006년 11월 8일 수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