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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삼신 할머니
성계조선을 건국한 전주이씨 이성계의 조상이 어디서 왔느냐는 견해가 여럿으로 나누어 지는바, 여진족(몽골 군벌출신)설, 예맥족설, 화교출신설(중국에서 유래)등이 있다.
여기서 여진족설은 전주이씨의 시조라고 하는 이한이 신라시대에 등장하고 한반도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 즉 이한의 후손이 원나라시절, 또는 그 이전에 만주로 이동하여 원나라의 벼슬을 하는데서 나온 견해로 보이며, 예맥족설은 예맥족이 중공족속이냐, 한민족이냐 견해도 분분한 상태다.
따라서 결국 전주이씨는 화교출신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추어 질 수 밖에 없다. 아래 글은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에 대한 기록으로 전주이씨의 유래를 밝히고 있는데, 화교출신설을 고집하는 측이나, 아니라고 하는 전주이씨측의 주장 모두 그 논거의 바탕인, 이한에 대한 기록은 같다.
한편, 명사열전(明史列傳)208외국전(外國傳)에는 이성계의 중국 호남성의 전주사람이라는 것과, 고려인이 아니라는 내용(李異族), 이한에 대한 이야기, 이안사에 대한 내용, 그리고 이성계의 선조가 이동하고 원나라의 벼슬(다루가치)을 했다는 내용은 전주이씨족보와 전주이씨 종친회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같다.
우리 삼태극 까페는 '아니땐 굴둑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 는 속담과 중국출신을 주장하는 자료가 전주이씨 시조를 찬양일색으로 일관하는점, 위 명사와 아래 적시한 이성계의 조상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같다는 점, 이성계의 성계조선개국 과정에서 보이는 모든 정황 등을 종합해 볼때 이성계는 중국 화교출신이라고 본다. 더구나 성계조선 개국과정에서 한민족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리성계의 출신에 대하여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객관적자료를 통해서도 리성계는 그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고, 이게 리성계화교출신설을 더욱 신빙성있게 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리성계가 화교출신이라고 해서 성계조선이 중국의 역사라는 것은 결코 아니며, 고려멸망 및 성계조선건국과정과 리조정권 5백년의 파탄을 보다 정확하고 명확하게 파악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리성계의 출신을 따지는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다시한번 분명히 해두는 바, 일제시대라고 하여 우리의 역사가 없어진것이 아닌것처럼, 화교출신 리성계 자손이 다스린 리조시대라고 하여 우리의 역사가 없어진것이 아니다. 이들 리씨들은 이미 성계조선 이전에 한민족화하여 한민족의 일원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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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유래에 대한 여러가지 근거와 그 후손들의 행적
1.품명: 전주이씨족보
2.설명: [유래]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출처: cafe.daum.net/ungaee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출처 : http://www.hometer.com/ ( 족보나라)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우리 전주리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의 분적설(分籍說) >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 : 李 · 崔 · 鄭 · 孫 · 裵 · 薛)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역사가 제일 오래 되었다.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자못 전설적이지만 신라 육 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곳은 육촌(六村)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서기 기원전 69년(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에,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갯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 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년(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인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 蘇判公)을 중시조 1세(世)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 몇 대가 흘러간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년 전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
(1세)알평(謁平)- (2) 유 - (3) 타 - (4)중가 - (5) 석 - (6)문상- (7)방
- (8)수장 - (9) 수 - (10)기정 - (11)미선 - (12)성립 -(13)서
- (14)계환 - (15) 걸 - (16)선장 - (17)기담 - (18)인흥 - (19) 확
- (20)선정 - (21) 체 - (22)태휘 - (23)우영 - (24) 준 - (25) 소
- (26)경지 - (27) 욱 - (28)원장 - (29)한로 - (30)계탕 -(31) 도
- (32)사언 - (33) 기 - (34)희두 - (35) 계 - (36)거명 -
............................ (34)진두 - (35)백전 -(36) 공
...................................................... -(36세) 한(翰)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 전주리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곧 진두씨의 약력은 이러하다.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완산리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우리 전주리씨의 시조 사공공이 라는 것이다.
출처: cafe.daum.net/kungjulee
시조 : 이한(李翰)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리씨의 시조이신 신라 司空公 이한(李翰)의 묘소.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에 있다.
태조고황제께서 守護軍(수호군)을 두어 건지산 묘역을 守直(수직)케 했으며 역대 제왕도 묘역일대를 보호 하였다. 특히 고황제께서는 광무3년(1899)에 단(壇)을 모으고 매년 1회 제사를 봉했으며 450정보의 단역壇域)을 마련하게 하였다.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대문을 남향의 문에서 20m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이라고 쓰여진 전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변이 7.2m의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호남지』 전주 단묘에 의하면, 조경단 재건지산 세전 사공공기재차무징 고종기해설 건각입비 수봉관일이라 하였는데, 고종기해는 광무3년이므로, 이때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기념물 제3호(1973. 6. 23 지정)
▶위치 :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 28
▶면적 : 30,248㎡
▶소유자/관리자 : 국유/전주시
▶이용안내 : (0652)281-2553, 281-2554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 : 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춘(椿 :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 태조 |
목조(穆祖 ? - 1274 : 원종 15)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본관은 전주. 이름은 안사(安社). 장군 양무(陽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상장군 강제(康齊)의 딸이다. 1394년(태조 3)에 태조가 4대조를 추존할 때, 덕(德)을 베풀고 의(義)로써 행하였다 하여 목조로 추존하였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경부터이다. 이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인(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인 것같이 보이므로 전주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에 이의방이 피살되자 인은 낙향하였는데, 그의 손자 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 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으므로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당시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의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이로써 안사가 머물고 있던 의주는 쌍성총관부에 예속되었고 안사와 그가 거느린 유이민 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하여 원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고, 앞서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그는 20여 년 동안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그 세력 기반을 아들 행리(行里)에게 넘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조사:이호종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 嫡)과 왕자군(王子君 :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 : 18世)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 ·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에 건립되었다. 조경묘는 경기전 담 밖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모셨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전과 조경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하였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의지와 봉건적 규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유형문화재 2호, 16호)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 ·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 : 외척(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즉, 상신(相臣:三議政) 22명, 문형(文衡: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등, 중략..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 초 , 선조의 생부(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5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출처:http://krt.hs.kr/%7Edhauddhr/%B3%AA%C0%C7%C1%B6%BB%F3.%BB%E7%C1%F8.htm
全州李氏族譜(奎1028), 李容肅(朝鮮)編.
8卷 8冊 木活字本 34.9×22.9cm.
四周單邊 半郭:27.2×17.8cm.
12行 24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序:李容肅.
1858년(哲宗 9)에 李容肅이 편찬·간행한 全州李氏族譜로 度祖의 長子인 李子興(桓
祖 子春의 兄)을 中祖(1世)로 하고 있다. 이전에 두번에 걸친 족보편찬이 있었고 이어
容肅의 父가 修譜作業을 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容肅이 完成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首:序(李容肅,1818년), 凡例, 姓貫沿革, 國朝年代圖(穆祖∼哲宗의 재위
기간 및 즉위년), 世系圖(系譜만 기록, 上에 李子興(1世)∼16世, 下에 16∼21世 수록)
, 編次(各卷別 千字文排字 목록), {권1∼8}:世系圖, {권1}이 1∼11世, {권2,3}이 7世
仲枝(2子)의 후손을 중심으로 {권2}에 11∼16世, {권3}에 16世이하를 수록하고 있다.
....이하 생략.....
출처: http://kyujanggak.snu.ac.kr/BA/SGP-038-004120.htm
전주이씨유래의 전주이씨측 공식입장
전주이씨의 유래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현재 24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우리 全州李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여기에는 현재까지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두 가지 설 모두 그 근거가 모호하여
우리 全州李씨의 정확한 생성유래로서 여러 종현 종친들의 단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 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곧 사공 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全州李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의 분적설(分籍說)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 : 李 · 崔 · 鄭 · 孫 · 裵 · 薛)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다.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자못 전설적이지만 신라 六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곳은 육촌(六村)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서기 기원전 69년(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에, 이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개 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의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년(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가 되는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 蘇判公)을 중시조 1세(世)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는 몇 대가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년 전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고 한다.
(1세)알평(謁平)- (2) 유 - (3) 타 - (4)중가 - (5) 석 - (6)문상- (7)방 - (8)수장 - (9) 수 - (10)기정 - (11)미선 - (12)성립
-(13)서 - (14)계환 - (15) 걸 - (16)선장 - (17)기담 - (18)인흥 - (19) 확 - (20)선정 - (21) 체 - (22)태휘 - (23)우영 - (24) 준
- (25) 소 - (26)경지 - (27) 욱 - (28)원장 - (29)한로 - (30)계탕 -(31) 도 - (32)사언 - (33) 기 → (34)희두 - (35) 계 - (36)거명
↘ (34)진두 - (35)백전 →(36) 공
↘(36세) 한(翰)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이다.여기서 우리 全州李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서 34세 진두씨의 약력에 나와있는 기록을 보면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 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이 기록에 의하여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바로 우리 全州李씨의 시조 사공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세)진두(辰斗)-(35)백전(白全)-(36) 공(恭)-(37) 한(翰)으로 세계(世系)를 꾸며 놓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 은상서 어사중승 상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全州李씨의 시조다" 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한(翰)이 全州李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형제가 아닌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이상한 점이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등이 있다. 이 성들은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全州李씨가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또 그 기록이 한(翰)씨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더욱 이상하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 全州李씨가 중국에서 왔다,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애매 모호하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세직(世稷 :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이와같은 주장은 이성계가 성계조선의 개국의 국시로 삼은 사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것으로 오히려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것이다.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명나라를 어버이로 섬기는 사대주의[위화도 반역을 하는 명분으로 4불가론을 제시 그 중, 이소역대->작은나라가 큰나라를 거역하는것->이것은 안된다]를 표방한 정권이 이씨조선정권이기 때문이다 까페 삼태극 주)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전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우리의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전주리씨에서 갈라져 나간 대흥이씨(大興李氏) 영해이씨(寧海李氏) 등도 있음을 첨언한다.
출처: 전주이씨 누리집->http://www.jeonjuleessi.com/index.php?pgurl=etc/jeonjuleessi_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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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史列傳(명사열전)208外國傳(외국전)
正德二年 十年月 成桂之自立也, 與宰相李仁人本李異族. 永樂間, 降祭海岳祝文, 稱成桂爲仁人子, 而<祖訓> 亦載仁人子成桂更名旦. 後成桂子芳遠秦辨, 太宗許令. 至是修<大明會典>
정덕2년12월에 성계가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 재상이인인은 본래 다른 민족이다. 영락제 때, 산과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축문에 이르길, 성계는 인인의 자로 불리는바, <조훈>에 인인의 아들 성계의 이름을 단으로 바꾸었다. <이하는 이성계의 출신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번역생략>
嘉靖 八年八月, 陪臣柳복上言, 國祖李旦系本國全州人. 二十八世祖瀚任新羅爲司空. 新羅亡, 六世孫競休入高麗. 十三世孫安社任元爲南京千戶所達魯花赤(다루가치). 元李兵興, 安曾孫子春與男成桂避地東遷.
가정 8월8일 신하 유~상이 올려 말하기를, 국조이단의 계보는 본국(명나라)의 전주사람이다. 28세조상 한(이한)은 신라의 사공에 임명되었다. 신라가 망하자 6세손경휴는 고려에 입조하였다. 13세손안사는 원나라의 남경천호의 다루가치(달로화적)의 소임을 맡았다. 원나라 이의 군대가 일어서자, 안사의 증손자 자춘은 아들성계와 함께 동쪽지역으로 피신하여 옮겨갔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참고: 위 명사에 대하여 도불원인님이 원문초벌번역한 것을 토대로 삼태극님이 까페 삼태극에 맞게 다시 번역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래지도는 송나라때 만든 여지도로써,붉은 화살표가 전주이다. 대륙의 호남성 형문의 광서성 인접지역으로 나온다. 자료제공:도불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