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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찾아가는 문화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土堂
남한산성과 수원화성
아침에 운명 같는건 없다
있는건 오직 새날 뿐.
새날, 2월에 마지막 금요일 봉일천을 지나자 이덕완 교수님은 타임 머신에 올라 탄 모두를 향해 남한산성의 흘러간 역사의 실타래응 풀어 내신다.인조 14년(1636) 중국 명나라를 쓰러트리고 몽고 마저 평정했던 금나라는 국위가 강해지니 "청"이라 국호를 바꾸고 20만 기마부대를 앞세워 조선을 처들어 오자 인조는 손을 쓸 사위도 없이 봉림대군과 빈궁을 강화도로 피난 보내고 미처 피하지 못한 소헌세자와 함께 구리재ㅡ수구문 ㅡ살곶이다리ㅡ마장리ㅡ신천ㅡ송파나루를 경유하여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때는 12월 엄동설한 준비없이 남한산성에 고림 무원된 인조는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47일만에 삼전도에서 곤룡포대신 평민의 남색 복장을 하고 청에 항복 하였다.
하지만 항복에 대가는 엄청났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3절9고드레등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고 소현세자를 볼모로 청에 보내야 했으며 또한 민간인 남녀 5만명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 후 아비없는 호로자식,환향녀(후 화냥년)란 낱말이 생겼다 하니 항복 뒤에 회한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자녀들과 여인네들이 무슨죄로 그 흉한 말을 평생 달고 살 수 밖에 없었으니...
남한산성에서 승군들이 많이 항거했지만 그들에 힘이 큰힘이 될수는 없었다. 3절 9고드레로 인조의 이마는 피딱지로 얼룩지고 청을 치자는 척화파와 청과 친하게 지내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그 누구도 이 대란을 막을수는 없었다.
척화 삼학사로 불리는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병자 삼학사로도 불리는데 청나라는 이들 삼인에게 책임을 물음과 동시 이들을 죽일것을 명했다. 이에 오달제와 윤집은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섰고, 오달제는 청에 끌려가 심양에서 온갖 회유와 협박을 당하지만 끝까지 대의를 밝혀다 선양성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정문을 세웠으며 홍익한에게는 충정(바를정),오달제는 충열, 윤집에게는 충정(곧을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두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버스는 봄 기운이 완연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남문 주차장에 닿았다. 모두는 차에서 내려 남문 쪽 성벽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남문은 남한산성 사대문 중 가장 큰문으로 인조는 이 문을 지나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였다. 총안 세개가 3안 1타로 성벽은 이어지고 암문(이 길로 수송문자 전달)을 지나는데 이 문은 말그대로 멀리서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작은 문이다. 암문에 "문"은 천조각을 조각조각 기운듯한 철조각의 문이었다.
전망대 역활를 하는 수어장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니 빼어난 경치와 더불어 성남 일대가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수어장대 왼편의 청량당은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으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해 주는곳이다. 청량당이 있는 서문 쪽의 적송길은 몇 안되는 아름다운 운치를 주는 길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새삼 하늘 높이 치솟은 송림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산을 내려오니 그 당시 산성의 종로 거리가 오늘에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남한산성의 침괘정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였으며 조선시대 무기를 시무 관장하던 곳으로, 신라 문무왕 672년에 토성축성을 시작으로 만들어 졌으며 광해군때 토성 일부를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인조가 후금국의 위험과 이괄에 난을 계기로 승군을 동원하여 1624년 축성공사를 벌인지 2년만인 1624년에 완공되었다. 산성에는 행궁를 비롯해 긍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현절사등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현절사는 척화 삼학사인 홍익한 . 윤집. 오달제를 기리기 위해 숙종 14년 이곳 유수 이시백의 주도로 세워졌는데 죽음을 당한 오달제의 나이는 29살이었다.
성벽 안 쪽 산 중턱에 자리잡은 행궁(사적 제 480호)는 전란이 발생했을 때 임시수도의 역활을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만든 20여개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 사직을 갖추고 있다. 행궁은 병자호란 이 후인 숙종. 영조. 철종이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 참배길 이곳에 들려 치욕의 역사를 회상하고 승명 배청의 결의를 다졌다. 남한산성은 삼학사들이 청화를 주장했던 대명의리의 연원지로 수어장대는 당시인 인종때는 일층이었다가 숙종 때 이층을 올렸는데 내부는 무망루(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말자)라 했고 외부는 서장대라 했다.대외 이교에 실리를 펴고자 했지만 '청나라" 라 하면 치를 떨던 인조는 둘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 인조의 미움을 받던 소현세자, 세자의 세 아이 그리고 빈 강종비는 사형을 당하고 강종비 일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왔다가 항복할 때 까지의 기록은 석지형의 "남한일기"에 청군들에 의해 산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물자부족. 엄동설한의 추운 날씨로 겪은 고통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진다. 성남 계룡대 근처 살던 아들네 가면 '엄마, 남한산성 가서 바람 쏘이고 맛있는것 잡수시고 가세요' 하여 산성이 있는 음식점에 간적 여러번 있지만 전날의 섬아닌 이곳 남한산성의 상흔을 상기해 본 적이 없었음이 새삼 부끄러웠다.
수원화성
원래 수원의 이름은 신라 때는 수성(水城), 고려 때는 수주(水州)였는데 조선왕조 때 수원이 되었다. 지금 수원이 팔달산 아래로 옮겨간 것은 정조 때 도시계획에 의한 것이며. 본래는 지금 화산 남쪽의 고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방금전 답사한 남한산성이 회한이 기득한 산성인데 반해 팔달산에 위치한 수원화성은 세종대왕 이 후 큰 족적을 남긴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성이다, 아버지 사도세자 (후 장헌세자)는 노론, 소론 당파싸움에 휘말려 뒤지에 갇혀 생을 마감했고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성장한 정조가 백성의 안위와 왕권강화, 그리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 화성을 쌓고 아버지의 능을 천장할 생각으로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이 설계하고 기증기등 신기재를 이용하여 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 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 자체가 "효"라는 동양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동양성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고 시설의 기능이 과학적, 합리적이고 실용적 구조로 되어있고 임금이 지방에 머무를 때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마련한 행궁(行宮)중 가장 큰 규모이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따라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형을 그리면서도 도시 중앙부를 감싸는 형태를 끼고 있다. 부속시설로 화성행궁, 증포사. 내포사. 사직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원'만이 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하여 각종 방어 시설을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것이 화성의 특징이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 법식 뿐만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와 용도, 예산및 임금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 일지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성곽 축성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서의 역사적 가치가 크다. 18C 완성된 짧은 역사 유적이지만 6km에 달하는 성벽으로 4개의 문이 있으며 모든 건물의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있다가 할아버지 영조 사망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창덕궁에서 즉위한 정조는 왕으로 즉위한 뒤 '나는 세자의 아들이라 했다"한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남겼는데 1735년 홍봉한의 딸로 태어나 1744년 아홉살이 되던 해 사도세자와 혼인을 치르고 세자빈에 책봉되어 1752년 열일곱이 되던 해아들 정조를 낳고 그 뒤 두명의 딸을 더 낳았다. 허나 남편 사도세자가 1762년 혜경궁 홍씨가 스물일곱 되던 해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후 "혜빈"이란 호를 받았고 1776년 마흔 한살되던 해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아들 정조가 보낸 세월은 어떤 세월이었을까요? 우리들로서는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혜경"으로 궁호가 올랐고 남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경의왕후로 추존된다. 효심이 깊던 정조는 화성이 완성되자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에 "융능"으로 옮겼다.
수원행차를 나서는 정조는 창덕궁(돈화문)ㅡ종루(종로)ㅡ광통교(대광통교, 소돵통교)ㅡ숭례문(남대문)ㅡ만천교(만초천 위)ㅡ지금의 한강다리가 있는 노량진 배다리(배를 줄이어 만든다리)를 건너 노량진 용양봉 정자에서 (현 노량진 교회)에서 점심 후 쉬고ㅡ 만안교ㅡ장승배기(정조의 현를 행차시 인적 드물고 행인도 적어 장승을 세우다)ㅡ시흥 행궁터-안양 만안교(정초의 수원 행차를 위해 만든다리)를 지나 수원 지지대 고개를 넘어 화성 행궁을 하였다.
왕께서 해마다 한 번씩 원침에 행행하시오니
이 다리를 건너기를 만 번을 하시옵소서
복록과 함께 이르게 되리니 아래에는 내(川)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가를 모시고 안안하소서
은혜가 백성에 미치니 마음놓고 건넘에 환성을 돌리도다
천년 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도다.
만안교는 길이 34.8m, 폭7.8m 1795년(정조 19년)세워짐. 경기 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유수,개성유수,강화유수등이 3개월 동원되어 세워진 다리로, 정교한 무지개(홍예식)수문이다. 만안교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200m 떨어진곳인데 1980년 국토 학장시 현재의 삼성천 위로 옮겨짐. 이 다리를 놓으 5년 후 정조는 세상을 떠났다
지지대 고개는 수원에서 서울쪽으로 갈 때 수원시 파장동과 의왕시와 경계되는 작은 고개이다. 이 고개를 예전에는 "사근현"이라 불렸던 곳이다. 미륵당을 지나 "과목정 교를 건너 시작되는 고개의 정상이 그곳인데 정조는 수원에서 행차할 때 이곳을 넘어 다녔는데 고개에 오르면 멀리 화산쪽의 능소가 보이는데도 능까지 가는 시간이 왜 이리 더딘가?"
한탄하며 참배를 마치고 한양에 갈때는 이 고개 마루턱에 어가를 멈추고 뒤돌아 서서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졌다.
이러한 사연이 있어 고개 이름이 더딜지 자가 들어간 지지대가 되었다 한다. 정조가 승하한지 8년 후인 1807년 섣달에 화성 향리인 신 현이 정조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순조에게 비석 세우기를 청한다. 그래서 지지대 비가 그 고개 마루에 서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사십대의 정조가능행길에 칠십대의 체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융능"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요"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겠지요.
1789년(정조13년) 휘경동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이 현를원을 13차례 방문하였다. 화산은 화성군 대안면에 표고 1백미터 남짓의 편편한 야산이다. 화성이란 고을 이름도 이 산 이름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정조때의 좌의정 체제공이 수원성을 쌓을 자리를 돌아보고 이 성 이름을 화성이라 한것은 화(華)는 화(花)에 뜻이 통하기에 화산성(花山城0을 뜻한다고 하였다.
1795년(정조19년) 을묘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은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회갑연이기도 해 묘소참배를 겸해 8일 동안의 화성 행차를 '을묘원행'이라고도 한다. 1795년 2월 9일 경기감사 서유방과 영의정 체제공은 115명의 악대와 연주에 238명의 군인들이 깃발을 휘날리고 총 6천명의 신하와 군사들이 움직이는 장엄한 행차였다.
이 고개는 정조의 거룩한 효심을 기념하여 순조 때 지지대비를 건림했는데 이비는 현재 경기도 유형 문화재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성을 쌓을때 또 하나는 만석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주었다. 화성 행궁안으로 들어간 일행 모두는 봉수대를 둘러 보았다. 정조는 어머니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어 드렸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이런 복된날이 올줄을 예감 했었을까?
조선시대 왕궁 수라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영애 주연의 드라마 "대장금"을 이곳에서 촬영 햇었음을 알리는 두 주인공 이영애와 지진희의 포스터 앞을 지나 공사가 진행중인 산길을 비껴 올라 팔달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에 올랐다. 화성 장대앞 한구루 소나무의 자태는 어찌 그리 늠늠 하던지 풍채 좋은 장수가 턱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남한산성의 서장대(수어장대_는 진주성의 남장대(촉석루) 화성의 서장대(수어장대)는 성안에서 가장 높은곳에 자리잡은 곳으로 누각으로 지어져 경관이 좋고 건축미도 뛰어나다. "화성장대'는 장수가 성 안팍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화성장대 바로 앞에 걸려진 황색기는 장수기로 지휘관이 서정대에 있다는 의미이고 힌색기는 병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병조판서가 머물고 있다는 뜻이며 용이 그려진 "용"기는 "왕"이 지휘할 때 걸었다.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수원 시내는 높은 건물이 없어 아담하고 종겨운 모습이다. 멀리 높게 세워져 있는 아파트를 좀더 낮게 지었더라면 주위경관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성벽을 따라 걸었다. 정조가 친히 친필을 남겼다는 "서노대"를 지나 화포를 감추어 공격하는 포사격 자리인 포루((휴식을 취하는 포사)와항아리를 반으로 자른듯한 모양으로 적이 문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든 옹성은 얼마나 예쁘던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곳이다.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하는 치성, 비밀통로인 암문, 신호를 보내는 다섯개의 연기 구명인 봉돈, 개천과 성벽이 만나는 곳에 수문등이 창안 되었다.
서쪽 성벽을 따라 걷는 우리 앞에 방향을 가리키는 힌색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바람에 나븟끼고 있었고, 북쪽에는 검정색 기가 펄럭이고 있다. 동쪽은 붉은색, 중앙은 황색, 남색은 청색기로 방향표시를 했다. 공심돈(망루의 일종인 돈의 내부를 비운)은 관측소로 위 아래로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 동정을 살필수 있엇고 총포를 쏠수 있게 만들었는데 성벽 상부에 3층 구조로 만들었다. 문루는 동,서 ,남,북에 한 개씩 내었으니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이다.
북쪽에 있는 장안문은 정문으로 수원 시가지 중심부에 자리잡은 수원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대문과 비교하며 앞으로 걸어가니 화홍문(물을 성안으로 끌여들여 남쪽으로 흐르게 하는 문)이 나타난다. 화홍문은 수원팔경의 하나로 북암문 동북 각루와 방화 수류정은( 꽃을 들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지)로 화홍문과 더불어 화성의 백미이고, 동북포루는 모자 비슷하며 걷는 곳마다 보이는 각기 다른 형태의 문과 포루를 보며 휼륭한 화성을 만든 성군 정조를 낳은 혜경궁 홍씨가 부럽기 까지 했다.
세종, 세조, 정조 이후 왜 그만한 인물이 안나올까요? 하니 곁에 황포샘이 큰 인물의 출현은 오랜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하신다, 흔하 하는말로 백년에 한명이 탄생될까 말까 하다고 하신다. 한 인물의 생을 30년으로 봤을때 세명 그러니까 1세기가 지나야 한명이 탄생되는 것인가?
암살을 두려워 한 정조는 "장용외용"이란 친위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때도 신발을 벗지 않고 잤다고 하는데, 결국은 독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독살론에 휩쌓여있다. 얼마전 노론의 명수이자 정적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서찰이 공개되어 번역중인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정조는 어떤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정조 어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는 여론이 어떤가? 정조는 늘 여론 동향에 눈과 귀를 열어 놓았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책임의식이 강하다 보니 혼자 모든것을 다하려는 의욕기 컸고 의욕이 과하다 보니 거친표현을 한게 아닌가 싶다 했다. 정조는 학문이 뛰어나 신하를 가르쳤고 신하들 보다 한수 위에서 개혁을 이끌어 갔던 군주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찰첩을 통해 그 역시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는다거나 화가나서 밤을 새우고 새벽까지 편지를 썼다는 내용도 있다고 했다. 정조 스스로 자신을 '불같은 기질'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용광로 화덕하나 품고 있지 않으면 한국인이 아니지...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미완성, 미완의 삶은 정조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루어 놓은 수원화성과 정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 스며들어 대해를 이뤄 연연히 흐르고 당시 정조의 농업정책과 우시장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수원 갈비'를 뱃속 가득 채우면서도 마음 한가득한 허허로움을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화성을 내려다 보며 정조의 시 한편 를 뇌어본다.
성은 평지에 머물러 있고
먼 하늘에 기대어 높이 솟았네
만 개의 살 받아 삼조의 뜻과
기운도 호탕하다.
1795년(정조 19년)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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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니 좋은글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4월23일 수원 성곽길 걷는데 많은 도움되겠어요
다음 주 네, 잘 다녀오길~~~
네ㅡㅡ언제 한번 걷자구요ㅎ
@하늘사랑 절대 환영!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