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김향안(金鄕岸)여사가 지난 3월 29일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그녀는 뉴욕 근교에 있는 남편 김환기 묘소곁에 묻혔다"
내가 이 신문기사를 읽은지도 이러저럭 한달이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그 동안 틈틈히 그녀의 삶을 생각해 왔고, 그녀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 왔다.
이 글은 그것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김향안(1916~2004)은 변동림과 김향안이라는 두개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다갔다. 그러니까 변동림과 김향안은 한 사람이다. 변동림은 김향안의 본명이다. 그녀가 먼저 산 삶은 물론 변동림으로서의 삶이다.
변동림.....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학과를 수료했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미모로 1030년대 문화계의 스타였던 여자. 꿈많은 문학소녀였던 18세에 그녀는 배다른 오빠인 화가 구본웅(具本雄,1905~1963)의 친구이던 24살의 이상(李箱,1910~1937)을 처음 만났게 된다.
20세이던 1936년 여름, 돈암동 흥천사에서 26살의 이상과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할 무렵 이상은 폐병이 깊었는데 변동림은 "폐병이면 어때. 좋은 사람이라면” 하면서 망설임 없이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약 4개월을 같이 살았을 무렵 이상은 신혼의 아내를 둔채 훌쩍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상이 이듬해 1937년, 27세로 요절할 때 21살의 아내로 그의 임종을 지킨다.
변동림이 결혼할 무렵의 이상의 모습은 대개 이러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와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던 이상은 1931년(21세)때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한다. 그는 23세이던 1933년4월 각혈로 총독부 기사를 사직한 후 황해도 연안군 백천온천으로 휴양을 떠난다. 그곳에서 21살의 기생 금홍을 만나 7월에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다방 "제비"를 개업하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상은 애인인 금홍이 다방 "제비"의 마담으로 일하는 동안,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가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한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한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조선 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된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 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이상은 아버지의 집을 저당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하지만 곧 망해버리고 만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그녀를 짝사랑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준다.
그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한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한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이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사", 그리고 "종생기"등과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고 한다. 그는 과연 천재였다.
이상과 결혼한 변동림은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된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처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한다.
그는 그곳에서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작품을 엮어낸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상태에서 이상과 김해경(본명)이라는 두개의 이름을 쓰는 "불량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한다.
결국 이상은 그곳에서 아내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후일 첫 남편 이상에 대해 그녀는 86년 "문학사상"에 "청춘시절의 짧은 감상 4개월"이란 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재능있는 시인과 문학소녀의 만남이었다...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우리집에서 몹시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일본에 가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로 유해를 모셔와 묻어드렸어요.”
여기까지가 변동림으로서의 삶이었다.
김향안......
생애의 첫남자이자 남편이었던 이상이 죽자 변동림은 한동안 잠적한다. 그리고는 변동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필명을 김향안으로 바꾼 후 수필 등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상이 죽은 7년 뒤, 그녀 나이 28살 때 모더니즘운동을 하던 31살의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1913~1974)와 만나 44년 5월 재혼한다. 김환기 역시 42년 첫부인과 이혼을 한 후, 김향안을 만나 재혼을 한 것이다.
“그 분에게는 아이가 셋 있어서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지만, 내게는 그런 점이 상관 없었다”고 말했다.
김향안, 그녀가 삶의 대부분을 같이했던 김환기는 어떤 사람인가? 잘 알다싶히 수화 김환기는 한국 현대화단의 거목이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전남 신안군의 기좌도에서 출생했다. 부친 김상현 씨는 거의 천 석 가까운 수확을 하는 지주였다. 가야금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며 엽총 사냥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고향 국민학교를 졸업한 김환기는 곧장 서울의 중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김환기의 고향에 있는 안좌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김병무 옹은 2회 졸업생인 김환기에 대한 몇 개의 또렷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팔망미인이었지. 그림, 글씨, 음악 다 좋아했어. 한번은 방학 때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연극공연을 했던 적도 있지. 장풍(長風)이란 제목이었는데 내용은 오래 돼 까먹었어. 환기가 중심이었지."
같은 학교 3회 졸업생인 김진구 옹은 김환기의 사촌 조카인데 당시 김환기와 함께 서울과 동경 유학을 했다. 명치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인텔리인 그의 김환기에 대한 기억은구체적이었으며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중학 다닐 적에 한방을 둘이 같이 썼지. 바이올린을 늘상 켰는데 키가 육척이라 운동, 특히 농구를 잘 했어. 그림은 일본 유학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도고세이지와 후지다스쿠지의 영향을 받았지. 이 사람들 그림은 내가 보아도 뭔가 조금 통하는 게 있었는데 당시 김환기의 그림은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이었지. 아이들 장난 같은 그림이었는데 이중섭이와는 좀 달랐어. 중섭의 그림은 처음 본 사람도 친근감이 있거든.
불란서 갔다 온 뒤에 전시회에 갔더니 그림이 참 좋아졌드만. 그때 하나 주라 했더니 안 주었어. 그 사람 그림 가진 사람 우리 주위에 한 사람도 없어. 주질 않았지. 돈 주고 사라고 해. 친척도 소용없었지. 그림은 그 당시도 비싸게 팔아 묵었어. 아주 독하게 비쌌지. 해방 전에 금강산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지. 미도파에서 전시회를 하고 내 방에 그 그림들을 쌓아 놓았는데 어떻게 해서 그 그림들이 다 없어지게 되었지. 지금도 숙모(김향안)가 찾으려 애를 쓴다는데 행방을 알 수 없어. 술을 잘 마셨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셔 버려. 남의 술은 절대 안 얻어 먹으려 했어. 자기가 다 내려 했지. 여자들에게는 참 인기가 좋았어. 소위 예술계 계통 여학생들은 모두 다 그를 좋아했어. 그림, 글, 인물, 음악, 다 뛰어나니 어디 좋아하지 않고 견디겠어? 예술회장 했던 조경희도 김환기를 썩 좋아했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김환기의 작품은 어느 도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이 기간 중 김환기가 이뤄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혼과 재혼이었다.
해방은 김환기에게 행운의 시점으로 다가온다. 그는 국립 서울대학의 미술학부의 강의를 맡게도 되고, 국전 심사 위원과 서울시 문화 위원 일을 보게도 된다. 이즈음 그는 유영국, 장욱진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조직, 그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김향안은 수화와의 결혼생활이 12년 지난 1956년 40살의 나이로 혼자서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곧 김환기도 국내에서 보장된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도불하게 된다. 김향안은 소르본느대학 및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그녀의 이런 공부는 나중에 김환기 그림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힌 ‘김환기 미술’의 완성자가 되는데 밑거름이 된다.
1963년 그들 부부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예술활동을 계속한다.
그의 점묘(點描)시리즈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탔다. 이 작품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그린 것으로 국내에서 호평을 받았다.
김환기는 61세이던 1974년 뇌출혈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남편과 살았던 뉴욕의 아파트에서 30년간 그대로 거주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며 살았고, 1년에 한두차례 서울을 찾았다. 그녀는 78년 뉴욕에서 "환기재단"을 설립하여 젊은 예술인들을 후원한다. 1992년 11월에는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 남편의 업적을 꾸준히 알린다.
김환기 20주기인 94년엔 김환기 전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펴내기도 한다. 95년엔 자신의 수필집 ‘카페와 참종이’를 출간한다.
김환기의 그림 ‘무제’(1972년 작)는 국내 경매에서 3억9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근현대미술작품의 국내 경매 사상 최고 액수였다. 물론 외국 경매에서는 박수근의 작품들이 3억∼4억원대에 팔리며 국내 작가 중 최고가를 형성해 왔다. 박수근의 ‘절구질’은 199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38만7500달러(약 4억3000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두번째 남편 김환기 추모사업을 하면서도 그녀는 90년 첫 남편의 모교인 보성고교 교정에 세워지는 이상문학비 건립에 참여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18살에 이상을 처음 만났고, 28살에 김환기를 만났다. 그 기간은 정확히 10년이다. 그 10년 동안 그녀는 두 천재를 만나 사랑을 했고, 그들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그녀 나이 21살이던 67년 전에 이미 죽었고,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도 이제 88세로 죽었다. 88년, 결코 짧지 않는 생애였다. 그녀는 천수를 누렸고, 누구보다도 화려한 인생을 살다 갔다.
이제 그들은"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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