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 조선시대 문산계의 하나로서 조선시대 문반계열의 정5품의 관직이름입니다. 정 5품 상계로 통덕랑 이하는 낭품계로서 사라고도 불렀다. 통덕랑은 향리들의 한품으로서도 중요하다. 향리의 호장들이 스스로 통덕랑이라 자처하였다는 것이나, 토관계의 한품이 정5품이었던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경국대전>
문산계[文散階]고려·조선 품계 | 브리태니커
고려의 문산계
위계제(位階制) 자체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는데, 이때는 고유한 명칭을 사용했다. 고려 건국초에는 신라의 것과 대광(大匡)·대승(大丞)·원보(元甫)와 같은 태봉(泰封)의 관계를 섞어 사용했고, 958년(광종 9)부터 부분적으로 중국의 것을 사용했다. 성종 때 국가체제를 대폭 정비하는 과정에서 995년(성종 14) 중국식 문산계를 받아들여 체계화했다. 이후 문산계는 중앙관인의 유일한 공적질서체계로 자리를 굳히고, 기존의 위계는 향직(鄕職)으로 사용되었다. 무산계(武散階)도 이때 함께 정비했지만, 실제로는 향리나 여진추장(女眞酋長)·탐라왕족(耽羅王族) 등에게 주었고, 관료들에게는 문산계만 사용했다. 그러나 성종대의 문산계는 자료부족으로 정확한 모습이 복원되지는 않았다. 문종 때 이를 다시 고쳐 29등급으로 정비했다(표1 참조).
이후 고려의 문산계는 10여 차례 이상 바뀌었는데, 명칭만이 아니라 동일품계 안에서의 상계(上階)와 하계(下階)의 구성원칙도 여러 번 바뀌었다. 〈고려사〉 기록에는 누락된 것이 많아 그 변화과정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1275년(충렬왕 1) 개정 때는 원의 명칭과 같은 것은 모두 고쳤다고 한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5품 이하는 다시 상·하계로 나누는 등 문종 때의 구조로 복귀했다. 1308년(충선왕 복위) 개정에서 처음 1품에 정품(正品)을 두었고, 이전의 구분에서 1품씩 올려 4품 이상을 대부(大夫), 5품 이하를 낭(郎)으로 구분했다. 이 구분방식은 조선 후기까지도 유지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정종(正從)을 18품계로 나누고, 4품인 대부까지는 한 품계 안에서 상·하 양계의 2개를 두었는데, 이것은 조선 건국 때 문산계 제도로 연결된다(표1 참조).
조선의 문산계
조선의 문산계는 고려와 달리 부분적인 명칭만 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구조는 〈경국대전〉의 구조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또 무산계가 제대로 기능했으며 향직계는 폐기되었다. 조선건국 때의 문산계는 명칭이 바뀌었으나 1369년(공민왕 18)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서 종6품계까지를 쌍계(雙階)로 만들었다. 또 종친(宗親)과 의빈(儀賓:駙馬)의 산계를 별도로 만들었다. 1443년(세종 25) 11월에 종친계, 1444년 7월에 의빈계를 신설했다. 또 잡직계(雜職階)와 토관계(土官階)를 별도로 두어 문무관료와의 구별을 분명히 했다. 〈경국대전〉의 문산계는 아래의 표2와 같다. 조선 후기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문산계에서는 영조 때 종2품 상계의 가정대부(嘉靖大夫)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바뀌었다. 종친계에서는 정1품 상계(上階)에 국구(國舅)·종친·의빈에게 수여하는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가 신설되었다. 종1품계에서는 상계의 소덕대부가 수덕대부(綏德大夫)로, 다시 선덕대부(宣德大夫)로 바뀌었고, 종2품 하계의 정의대부(正義大夫)가 소의대부(昭義大夫)로 바뀌었다. 의친계에서는 종1품 상계의 광덕대부(光德大夫)가 정덕대부(靖德大夫)로, 하계의 숭덕대부(崇德大夫)가 명덕대부(明德大夫)로 바뀌었다. 나중에 상보국숭록대부 이외의 종친계·의빈계는 문산계에 준해 주었다.